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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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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운성현 압사인 송강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왔는가?

图片信息 小戏骨版《水浒传》,终于来了


송강(宋江)은 양산(梁山)에 오르기 전에 송나라 운성현(鄆城縣)의 "압사(押司)"라는 직위의 일개 하급관리였다. 관직이 높지도 않은 송강(宋江)이 "산동, 하북에 이름을 날리게 되고" 또한 사람들이 그에게 만물을 구할 수 있는 "급시우(及時雨, 때맞춰 내리는 비)"라고 불렀다는 것은 바로 그가 "평생 그저 강호(江湖)의 사나이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와서 의탁하면 높고 낮고 간에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집에 머물도록 했으며 종일 같이 다니면서 귀찮아하지 않았다. 만일 어디로 떠나면 있는 힘껏 자금(資金)을 지원해주고 돈을 흙처럼 마구 뿌렸다. 사람들이 그에게 돈이나 물건을 요청(要請)하면 물리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편의를 봐주기를 좋아해서 매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 해결해주고 사람의 생명을 보전(保全)시켜 주었다. 자주 관이나 약을 나눠주고 사람의 빈고함을 구해주고 다른 사람의 급한 일을 해결해주고 다른 사람의 곤란한 일을 도와주었다."

'수호전(水滸傳)'에서 송강(宋江)에게 자금을 지원받거나 도움을 받거나 뇌물(賂物)을 받은 사람이 10인차는 넘는다. 예를 들어 염파석(閻婆惜)의 부친인 염공이 죽었을 때 송강(宋江)은 관과 10냥의 은자(銀子)를 준다. 시진(柴進)의 장에서 무송(武松)을 만난 후 송강(宋江)은 술을 사주고 돈을 들여 무송에게 의복을 사주고 헤어질 때는 다시 10냥의 은자를 준다. 조능(趙能), 조득(趙得)의 두 도두가 송강의 고향에서 송강(宋江)을 붙잡을 때 송강은 20냥의 돈을 내서 이 두 도두에게 주었다. 강주성(江州城)에서 송강이 처음으로 이규(李逵)를 만났을 때에도 역시 10냥 은자를 주었다. 심양강변(潯陽江邊)의 비파정(琵琶亭)에서 송강은 20냥의 은자를 주어 어려움에 빠져 노래를 불러 먹고사는 옥련(玉蓮)일가 세 식구를 구해준다. 게양진(揭陽鎭)에서 설빙(薛氷)이 창을 써서 약을 파는데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 것을 보고 송강(宋江)은 한 번에 설빙(薛氷)에게 다섯 냥 대은을 내렸을 뿐 아니라 "이것들 다해서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다. 얼마나 통이 큰가. 나중에 헤어질 때는 다시 설빙(薛氷)에게 1,20냥의 은자를 준다. 강주로 유배를 간 후에, 송강은 뇌성이 검은 세력이 강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강주(江州)에 도착하자마자 공인(公人)을 불러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5냥을 꺼내서 공인(公人)에게 준다. 이어서 송강(宋江)은 다시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다. 차발(差拔)에게 열 냥 이상의 은자를 주고 관영(管營)에게는 그 배의 은자를 준다. 특히 초사원(抄寫員)이 된 이후에는 송강이 더욱 흥청망청 돈을 쓴다. 수시로 차발(差拔), 관영(管營)을 청해서 술을 마시고 자주 차발(差拔), 관영(管營)에게 선물을 보낸다. 그리하여 '영내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게 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송강(宋江)은 씀씀이가 컸다. "휘금여토(揮金如土)"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책에서는 송강(宋江)이 언제 운이 좋아서 로또라도 맞았는지를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송강이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라도 주웠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송강의 돈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아래에서 하나하나 분석(分析)해보자.

첫째, 매월녹봉 : 송강(宋江)은 현급 정부의 압사(押司)였다.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의 기록에 따르면 "압사(押司)"는 명목상은 '관(官)'이지만 실질상은 '리(吏, 아전)'이다. 진무동이 쓴 '역대관직연혁(歷代官職沿革): 송조(下)'를 보면 관직을 '관(官)'과 '리(吏)'의 두 유형으로 나눈 후 '압사(押司)'는 '리(吏)'에 속한다고 하였다. 주나 현에는 '압사(押司)'라는 직위가 없고 주로 '모집(募集)'하거나 '파견(派遣)'받는다. 송나라의 '리(吏)'는 주로 세금징수(稅金徵收)나 소송업무(訴訟業務)를 한다. 압사(押司)라는 것은 직급도 없는 '하급공무원(下級公務員)'이라고 할 것이다. 정부공무원(政府公務員)을 도와서 일상 사무를 처리하고 사건기록을 정리하거나 문서비서업무(文書秘書業務)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1개의 현에 8명의 압사(押司)가 있다. 중국의 초기 고대사회에 '리(吏)'는 녹봉(祿俸)이 없다. 1073년 송신종(宋神宗) 때 비로소 소액의 녹봉을 주었다.

이후 몇 개 황조(皇朝)의 성숙된 현급 정부편제는 현관(顯官), 사야(司夜), 통판(通判), 포쾌, 압사(押司), 옥장(獄長)으로 본다면 압사(押司)는 포쾌보다 낮은 직급이다. 송나라 때 정칠품의 현관의 1달 녹봉이 30냥 은자였다. 그렇다면, 현관보다 4등급이나 차이가 나는 압사라면 1달의 녹봉이 절대 10냥을 넘어서지 않았을 것이고, 무슨 상여금이나 보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쥐꼬리만한 녹봉으로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외에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녹봉에만 의지했다면, 송강처럼 돈을 물 쓰듯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집안재산 : 송강은 '위로는 부친이 살아있고, 모친은 일찍 돌아가셨다; 아래로 형제가 하나 있는데, 철선자 송청이라고 하는데, 부친 송태공과 마을에서 농사지을 때, 전답을 지키며 생활했었다." 단순히 농사나 짓는다면, 송태공은 그다지 수입이 많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외에 송태공의 집에 기숙하는 손님의 수량으로 분석하자면, 송태공은 기껏해야 소지주일 것이다. 절대 대지주로서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녹봉이 많지 않은 송강이 부친에게 빌붙어 살고자 하더라도, 부친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을 것이고, 겨우 용돈수준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집안에서 돈을 받아낼 수 없었거나, 받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눠줄 정도는 아니었다. 

셋째, 소화다보(少花多報, 적게 쓰고 많이 신청함) : 송강은 압사의 일을 했으므로, 자연히 일부 공용물건을 구매하는 일도 책임졌을 것이다. 영수증을 처리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갔다면 수량이나 가격에서 약간 손을 써서, 약간의 수고비를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송강은 현관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고, 개인관계가 아주 좋아서, 어떤 때는 손님을 접대할 때 현령은 바쁜 일이 많아서, 송강이 대신 접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접대비'에서 송강이 손을 써서, 공금으로 먹고 마시고, 그 중에서 어느 정도 돈을 남기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송강이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겠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물쓰듯이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넷째, 부업 : '수호전'을 보면, 정부관리가 부업에 종사하는 사례가 많다. 맹주성의 관영인 시은이 바로 그런 사람중 하나이다. 시은은 맹주감옥에서 일하면서, 녹봉을 받고, 동시에 '쾌활림'에 술집을 차려서, 매월 '2,3백냥'의 과외수입을 얻는다. 보기에, 부업을 하는 것은 적지 않은 수입원이 되는 것같다. 다만, 책에는 송강이 시은처럼 부업으로 주점을 열거나 혹은 다른 거래를 해서 돈을 번다거나 하는 경제적인 머리를 지녔다는 것을 알려주는 여하한 단서도 없다. 그러므로, 송강이 이런 수입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회색수입 : '역대관직연혁. 송조(하)'의 기록을 보면, 송나라의 '리'는 주로 세금징수와 소송처리를 하였다. 그들은 아래위로 일을 처리하면서 "자주 돈을 뜯어냈다" 이는 통치집단의 중요한 한 단계이다. 하급관리인 송강은 아주 잘 적응해서 아래위로 일을 처리하면서 적지 않은 수고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압사는 직위가 낮아서, 얻는 돈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직위로서는 그저 자잘한 이익밖에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단으로 대부호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이상의 다섯가지 방식에 의한 수입을 하나하나 배제하고나서, 필자는 송강의 수입원에 대하여 더욱 심도있고, 더욱 나쁜 방향으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송강에게 분명히 적지 않은 "흑색수입(黑色收入)"이 있었다는 것이다. "흑색수입"이라는 것은 black money, 더러운 돈,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뇌물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받아낸 돈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돈들을 누가 송강에게 보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로 이는 바로 송강의 심복인 의형제들밖에 없다. 예를 들어, 조개(晁蓋)와 같은 흑도의 형제들이다. 송강은 형제들, 친구들에게 '의리'를 지켰다. 다만, 중국의 '의리'는 자고이래로 모호하고, 편협하며, 원칙성이 강하지 않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생이취의자야(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바 있다. "의"가 무엇인가? 그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묵자는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의(義)라는 것은 리(利)이다" 즉, "의"라는 것은 금전과 주육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이다. 조개에 소식을 전해주는데 숙련된 처리와 침착한 태도로 볼 때, 송강은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하고, 처리에 밝으며, 경험이 많고, 수단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확실히 이런 일을 평소에도 송강은 적지 않게 처리했다. 그리고 조개는 그저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일을 버린 후에 그로 인하여 생명을 보전한 사람이 나중에 일처리가 잘 된 후에 관례대로 약간의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송강에게 은자를 보내어, 구명지은에 감사하지 않았을까? 조개가 관부의 추적을 뿌리치고 산에 올라간 후 바로 송강에게 100냥의 은자를 건네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들 돈이 바로 평소 송강이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돈을 흥청망청 쓰게 하는 수입원이 아니었을까? 다만 이들 돈은 '하급공무원'인 송강에 있어서 어쌨든 '뜨거운 감자'이다. 그는 가풍이 엄격한 부친에게 가져다 드릴 수도 없고, 감히 비자금을 조성해둘 수도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감사라도 하면 '거액재산의 내력이 불분명'하다. 어떻게 번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다. 고명한 송강은 이런 멍청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아예 그렇게 번 돈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다 써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법적인 제재도 피하고, 좋은 명성도 얻었다. 일거양득의 수완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송강이 양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아주 복잡한 위험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편으로 현관아에서 일처리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범죄분자들에게 정보를 흘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들 범죄자로부터 돈을 긁어모으고, 다른 한편으로 이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 명성을 얻는다. 아주 표준적인 '법집행을 하면서 법을 어기는"자이다. 만일 조개가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라고 한다면, 송강은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의 윗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강호의 흑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리이면서, 이들 범죄분자들의 보호산역할을 하고, 또한 검은돈, 더러운 돈, 불의한 돈을 받는 사회패류인 것이다. 송강의 돈은 대부분 깨끗하지 못한 돈이다! 송강의 밑바닥을 잘 알고 있는 염파석이 죽기 전에 "공인이 돈을 보면, 파리가 피를 본 것과 같이 달려든다" "공무원을 하면, 어느 고양이가 생선을 싫어하는가?"라고 송강을 욕하낟. 이것은 바로 송강이 불의의 돈을 모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왕파는 송강이 염파석을 죽인 후에 그를 "흑삼랑(黑三郞)"이라고 욕하는데, 마치 "흑삼랑(黑三狼)"이라는 뜻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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