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화약의 발명은 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과 깊은 관계가 있다. 초석(硝石, 질산칼륨), 유황, 숯으로 된 세 가지의 물질을 혼합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단약(丹藥)을 만들고자 했던 위진(魏晉)시대의 연단술사(鍊丹術士)들이 그 과정에 폭발현상(爆發現象)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세 가지의 재료로 만들어진 물질이 병을 치료하는 약물(藥物)로 여겨서 '불이 붙는 약'이라는 의미로 '화약(火藥)'이라 불렀다.
당나라 초기 의술가 손사막(孫思邈)은 ‘단경내복유황법(丹經內伏硫黃法)’이라는 책에서 초석(硝石)과 유황(硫黃) 그리고 숯을 적당히 혼합하여 점화(點火)하면 강력한 화학반응(化學反應)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약(丹藥)을 제조하려 했을 뿐 이것이 화약 제조의 배합 방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과 송의 교체기(交替期)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화약제조(火藥製造)의 배합 방법이 병기를 제조하는 장인의 손으로 넘어가 군사적으로 응용(應用)되기 시작하였고 북송(北宋) 때에는 군사 장비를 만드는 국영 수공업장에 화약을 제조하는 작업실이 생겼다. 화약이 무기로 처음 응용된 형식(形式)은 주로 화약의 연소 기능이었다. 1044년에 편찬된 증공량(曾公亮)의 군사병법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서는 화약 무기의 제조 및 배합 방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북송(北宋) 시기 화약은 초석(硝石)의 함량이 아주 낮아 주로 적진을 연소(燃燒)시키거나 연막(煙幕)을 치는데 사용한 것에서 볼 때 당시에는 전통 화공전술 가운데 방화 병기 범주(範疇)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약 병기의 출현은 군사적으로 커다란 변혁(變革)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약의 연소 기능에서 폭발(爆發) 기능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화약의 성능(性能)이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이용한 무기(武器)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병기로는 강력한 폭발성 화기인 벽력포(霹靂炮), 무쇠로 덮개를 만든 진천뢰(震天雷) 등이 있다. 아울러 손에 지니고 사용할 수 있는 화통(火筒)으로는 대나무 통에 화약을 장전(裝塡)해서 발사할 수 있었던 돌화창(突火槍)이 있다.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는 13세기 때 원나라의 서아시아 정벌(征伐)을 통해 그 기술이 아랍의 여러 나라로 전해졌고 그들에 의해 유럽(歐洲)으로 건너가게 된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 국가 간의 전쟁에서 화약과 화기(火器)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수호전(水滸傳) 양산박의 108호한 중에 굉천뢰(轟天雷) 능진(凌振)이라는 자가 있다. 원래 경성(京城)의 군관인데 나중에 양산박(梁山泊)에 투항하였다. 책에서는 '이 사람은 화포(火砲)를 잘 만들어 14,5리를 보낼 수 있으며 포탄(砲彈)이 떨어진 곳에는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졌으며 산이 무너지고 돌이 갈라졌다'고 썼다. 그리고 시를 지어 칭찬(稱讚)하기를 "강한 불이 뿜어져 나올 때 성곽이 부서지고 대포연기가 흩어질 때 귀신도 두려워한다. 금륜자모포(金輪子母砲)가 하늘을 울릴 때 포수의 명성이 사백주에 떨친다."
포는 원래 포(抛, 던진다)라는 의미이다. 기원은 주(周)나라 때이다. 일종의 지렛대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돌멩이를 던져서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는 기계를 말하였다. 800년경의 당나라 때 술사(術士)들은 연단을 하다가 화약을 발명(發明)하였다. 그러나 화약을 전쟁(戰爭)에 활용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북송(北宋)에 이르러 사람들은 돌화창(突火槍)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형의 화기(火器)였다. 안에는 "자소(子巢)"를 채워서 전투 시에 화약에 불을 붙여 불로 적을 태우는 역할(役割)을 하였고 적군을 놀래주는 작용을 하였다. 이런 화기(火器)의 출현은 근대화포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원(元)나라에 이르러 사람들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화포(火砲)를 발명하였다.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전시(展示)하고 있는 원나라 지순3년(1332년)에 제조한 청동주포는 무게가 6.94킬로그램, 길이가 35.3센티미터이며 포의 직경(直徑)은 105밀리미터이고 포신에는 '지순3년3월길일수추토구군제300호마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포의 꼬리부분에는 두개의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이는 이축(耳軸)을 설치한 곳이다.
중국의 명나라 때는 "병장(兵仗)", "군화(軍火)"의 두개 부서를 두어 화기를 제조하였고 정덕연간에서 가정연간까지(1506-1566)만 하더라도 수십 종의 화포를 제작하였다. "호준포(虎蹲砲)"는 철조(鐵爪)로 후좌(後座)를 고정시켜 사격 시 후좌는 5촌에 불과했고 작은 납탄(鉛彈) 백 개 이상을 장전(裝塡)할 수 있었다. "공융포(攻戎砲)"는 수레에 싣고 발사하는 것이어서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여 끌고 다닐 수 있었고 철묘(鐵錨)로 후좌를 고정시켰다. "무적대장군포'는 무게가 천근이고 수레에 싣는 것이었으며 철자(鐵子) 500개를 장전할 수 있었으며 20여장의 넓이를 타격할 수 있었다. "독화비포(毒火飛砲)"는 폭탄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포탄은 쇠로 주조(鑄造)하여 가운데를 비웠으며 안에는 화약이나 기타 약제를 장전하였고 약선을 죽관의 안에 도화선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발사 시에는 탄환을 포탄에 넣고 먼저 도화선(導火線)에 불을 붙이며 나중에 포관 내에서 불이 붙어 탄약이 발사(發射)되는 것이다. 탄환은 목표지점(目標地點)에 도착한 후 터진다. 당시 몽골대군이 유라시아대륙을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사용했던 화포와도 무관하지 않다.
수호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북송 선화연간(宣和年間)의 일인데 그 시대에는 화포는 발명되지 않았고 당연히 능진(凌振)과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없었다.
화약의 발명(發明)은 중국의 고대서부터 내려오는 도교의 도사들에 의한 제조법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옛 중국의 도사들은 인간으로서 불로불사의 약을 얻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였고 그러다보니 여러 광물(鑛物), 약초 할 것 없이 섞어가며 약을 제조하는 기술과 지혜가 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 된 것이겠지만 어쩌다보니 유황(硫黃), 초산칼륨 등을 끓이는 가마솥에서 화약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화약(火藥)이 중국의 역사 기록에 남겨진 것은 수나라 말, 당나라 초에 쓰여진 ‘단경내복유황법(丹經內伏硫黃法)’이라는 책에서였다. 이 ‘단경내복유황법(丹經內伏硫黃法)’을 쓴 사람은 당시 최고의 명의(名醫)이자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진 손사막(孫思邈)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물론 손사막(孫思邈) 역시 화약을 단순한 선약 중 하나로 알고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화약이 본격적으로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경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다. 화약의 가연성(可燃性)과 작열성(灼熱性)이 그 당시 군사전문가들의 눈에 띄였고 이는 곧바로 무기화(武器化)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송나라 때 쓰여진 ‘무경총요(武經總要)’에서는 가장 오래된 화약 제조법(火藥製造法)이 전한다고 하니 이미 화약제조(火藥製造)가 국가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송 초기만 해도 석화시石火矢)라 불리는 화전이 발명 되었으며 가스탄과 비슷한 화구(火具), 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와 비슷한 돌화창(突火槍)、이화창(梨花槍)、화문창(火門槍)、창포(槍砲) 등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당시 군사전문가들이 정말 대단 했던 듯싶다. 북방 이민족(移民族)의 침입이 잦았던 남송시대에는 특히 작열성(灼熱性) 화포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두 차례에 걸친 개봉(開封) 방어전(防禦戰)에서 화포가 쓰인 기록이 남아있다.
첫 번째 기록은 북송 말기인 1126년의 일이었는데 금나라 군사가 개봉성(開封城) 밑에서 진을 치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하자 장군 이강은 벽력포를 발포하였다고 전한다. 이 벽력포(霹靂砲)가 금나라 진지에 쏟아지자 처음 보는 무기에 당황하는 금나라 군사가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다고 한다. 사실 이 벽력포(霹靂砲)는 엄청난 소리에 비해 그 위력은 강하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무기에 당황한 금나라 군대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두 번째 개봉 방어전은 1232년에 있었는데 이때는 금나라 군사가 당시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맞서 싸우는 순간이었다. 치열한 개봉 방어전 중에 금나라는 '진천뢰(震天雷)'라 불리는 작열탄(灼熱彈)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몽골군이 성벽에 굴을 파고 몸을 숨긴 후 금나라의 화살과 돌을 피하자 금나라가 진천뢰를 새끼줄로 매달아 몽골군병이 숨은 굴 근처에서 작열시켜 몽골병을 폭사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진천뢰(震天雷)는 겉이 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폭발할 때 주위에 상당한 파괴력(破壞力)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천뢰(震天雷)의 발명처럼 화약의 표피가 철로 바뀐 것은 엄청난 발명 중 하나였다. 이를 통해 살상력은 물론 폭발력(爆發力)까지 막강해졌으니 화약의 위력이 한층 진일보할 수 있다. 원나라에 들어서면서 이 화약은 더욱 발전하여 이전까지만 해도 대나무로 포신을 만들어 사용한 것과는 달리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철로 만든 통을 사용하여 그 위력(威力)을 증강시켰다. 즉 현대전에서 전세를 바꾸었던 대포가 이 화포(火砲)의 전신이라 할 수 있겠다.
원나라 말기에는 이 화포가 더 이상 일급비밀(一級秘密)이 아니어서 여러 지방군과 반란세력들이 화포(火砲)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화포를 통해 원나라 군대를 격파(擊破)했다고 전해지니 자신들이 강력하게 만든 무기에 오히려 자신들이 당하는 결과를 초래 했다. 명나라 이후에도 화약의 진화는 계속 되어 화약무기들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군대인 신기영이 등장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우러온 명나라 군대도 화약무기로 도배(塗褙)한 군대였다. 수많은 화포들이 생산되었다.
남송시대에 이미 이슬람 상인들에게 화약이 전해졌을 수도 있으나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몽골의 원정에서다. 금나라에서 화약을 처음 보게 된 13세기 몽골군은 금나라를 정보화(情報化)하여 화약과 그 제조법을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그들은 더 큰 제국을 만들려 계속 서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때 화약이 서양에 자연스럽게 전해졌다고 본다. 또한 몽골제국이 서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문물교류(文物交流)가 가속화 되었고 화약기술(火藥技術)은 자연스럽게 서쪽 유럽대륙까지 전해지게 된다. 하지만 유럽으로 전해진 화약은 유럽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더불어 획기적(劃期的)인 발전을 이루어냈고 중국의 화기(火器)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우수한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오히려 유럽에서 만든 무기들이 상인들에 의해 명나라로 전해져 다양한 화포들이 명나라 시대에 전해졌고 이때부터 화약은 전 세계를 대표하는 무기(武器)가 될 수 있었다.
명나라는 자신들이 원나라처럼 되지 않기 위해 화약 제조에 대한 비밀(秘密)을 국가기밀로 유지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나라 말에 이르러 청나라가 명을 무너트리기 위해 많은 공격을 했음에도 몇 번이고 명의 화약무기(火藥武器)에 당하자 청나라는 전쟁터에서 얻은 총이나 포를 통해 오진초파를 조직하여 대적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의 무장한 군대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대로 자신의 군대로 편성 화약무기를 사용하게 했다고 하니 그 당시 화약의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원나라 이후 화룡출수(火龍出水)라는 화포가 있었는데 이 화포는 죽통(竹筒)으로 만든 용으로 용의 앞뒤에 로켓을 부착해 그 힘으로 용을 멀리 날려 보냈다. 또한 용이 날아가는 중에 2단 로켓이 점화(點火)되면 용의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적을 공격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현재의 로켓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