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오 주석의 큰딸로 헤어진 지 41년 만에 찾았지만 평생 부모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역사관에 화가 나다. 마오쩌둥의 맏딸이 이민이라는 인식이 많은 것은 사실 마오 때문이다.마오진화(毛金花)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딸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첫 딸로 마오쩌둥(毛澤東)과 허쯔전(賀子眞)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만 태어날 때가 홍군 형세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허쯔진(賀子眞)이 아쉽다고 말했다.마지못해 고향집에 머물며 잠시 보살피는 바람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와 마오쩌둥(毛澤東) 부부를 흩뜨린 게 불과 수십 년. 71년에야 신원이 확인됐지만 평생 주석을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
마지못해 그것을 고향 사람에게 남겨 돌보게 하다 마오쩌둥은 혁명 기간 동안 희생이 너무 많았다. 그의 자녀들은 혁명으로 인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그 원인으로 인해 흩어지거나 요절하거나 전쟁터에서 희생되고, 마오쩌둥 자신도 혁명 형세가 가장 위험했던 그 몇 년 동안 위험에 처해 있었다.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일생 중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1930년 푸젠성 룽옌의 아이화 병원에서 홍군 전사가 말을 타고 민시테 한 통을 데리고 갔다.덩쯔룽(鄧子 恢) 당서기는 친필 편지로 급히 병원을 찾아 홍군 임산부 한 명이 아이화병원을 찾을 예정이라며 출산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회근은 여러 해 동안 애화병원에서 일하면서 곧 올 임산부의 신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하지만 직업윤리가 강회근에게 신분을 많이 알아보고 상부의 지시를 잘 받아 출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곧 임산부가 병원을 찾았고, 강회근은 그의 신상에 대해 여전히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근거는 있다.상부에서 최선을 다해 출산해 건강한 여아를 낳으라고 지시했다.당시 마오쩌둥의 아내인 허쯔전(賀子珍)이 낳은 여아, 즉 마오쩌둥의 맏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당시 허쯔진은 스무 살도 안 돼 첫아이를 낳았다.딸이 없어 갓 태어난 딸에게 마오진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젊은 허쯔전(賀子珍)과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여자아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직접 키우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여자아이를 매우 귀여워하였으나, 얼마 후 적들이 반격하기 시작하였고, 홍군에 대한 처지가 되었다국경이 심각한 파장을 초래하고 홍군이 위험에 빠지면서 마오쩌둥(毛澤東)과 허쯔전(賀子眞) 등은 어쩔 수 없이 룽옌(龍巖)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음 단계의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어린 모금을 가지고 다니면 행군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이동 과정도 있었을 것이다.불우한 환경 때문에 요절했다.
궁리 끝에 마지못해 마지못해 허쯔진에게 권하는 수밖에 없었다.어린 모금화는 고향 친구 집에 남아 돌보다가 혁명 정세가 좀 나아지면 다시 모금화를 받으러 온다.허쯔진은 아쉽지만 상황의 심각성과 현실의 어려움에 못 이겨 용암지역에 모금화를 남겨뒀다.
당시 모금화의 고향 잔류를 책임진 주요 인원은 등자회와 모택민으로, 두 사람의직접 주선한 끝에 모금화는 성내의 구두수선공 옹청하의 집에 안치돼 대신 양육됐고, 용암에서 철수하기 전 허쯔진은 모금화를 한 번 보고 은화 20개를 꺼내어 자신의 아이를 잘 돌봐 달라고 옹청하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헤어진 딸을 여러 해 동안 악착같이 찾다 룽옌에서 철수한 후 허쯔진과 마오쩌둥은 룽옌에 남아 있는 마오진화(毛金花)를 줄곧 염원하며 시간을 보냈다.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의 시간이 흘렀고, 1932년에 홍군 동정이 다시 용암을 함락하고, 허쯔가 진심으로 그리워하던 모금화가 마침내 부모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허쯔진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둥민에게 자신의 딸 모금화를 데려오라고 시켰지만, 마오쩌둥민은 마오쩌둥의 딸 모금화를 데려오라고 하였다.옹청하의 집에 갔더니 모금화가 요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모택민도 사실은 믿지 못했고, 허쯔진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울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모금화는 죽지 않았다.때로는 이런 것이 신기할 때도 있고, 혈연관계가 없는 두 사람 사이에도 직관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같은 피를 흘리는 모녀들 사이에선 더욱 마음이 맞는다는 허쯔진의 예감,어느 정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허쯔진은 모금화가 아직 살아있다고 굳게 믿고 찾아가려 했지만 전란 연대기에 못 이겨허락할 수 없어 마오진화 찾기는 잠시 미뤄뒀다가 건국 이후에야 마오와 허쯔진(賀子眞)은 다시 마오진화 찾기에 나섰다.
1951년, 셰각재는 중앙 위문단을 이끌고 민시 구민들을 만나러 떠났다.마오쩌둥은 그와 한 번 만나 사각재에게 민서에 간 후 맏딸 마오진화(毛金花)에 대한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사각재는 주석의 부탁을 마음에 새겨두었지만, 이번 민서 방문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과연 모금화가 그 당시에 죽었는지, 성사되었는지.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하나 풀다.
1953년, 등자회가 친척을 방문하면서, 마오진화(毛金花)가 흩어진 것을 줄곧 마음에 두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은다시 등자회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 해의 모금화를 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원래 등자회(鄧子晦)는 모금화(毛金花)를 만들어 용암에 남겨둔 일을 도맡았던 인물로, 고향으로 돌아가 모금화(毛金花)를 대신 키워주던 구두수선공 청하(淸河)를 찾아갔다.그에게 모금화의 진실을 물었지만 돌아온 말은 모금화가 일찍 죽었다는 것이었다.
덩쯔는 웡칭허의 말과 표정에서 뭔가 다른 것을 느꼈는데, 얼마 후에야 그는 비로소 좀 달라졌다알고 보니 옹청하는 여러 해 동안 거짓말을 해왔는데, 당시 모금화는 요절하지 않고 자신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한 옹청하가 한밤중에 몰래 길가에 놓아두었다가 모금화는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구란규의 집에 가서 입양하였다.덕분에 무사히 자라 '양월화'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옹청하는 자신이 모금화를 버린 것에 대해 문책당할 것을 우려해 모금화가 이미 왔다고 거짓말을 일삼았다.요절하고 다행히 나중에 모금화를 입양한 구난규는 정직한 사람. 모금화에게 생모가 홍군이라고 말해 그해 처음에는 옹청하의 집에서 입양돼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구란규의 집을 찾았다.
양월화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단연코 자신의 신원 확인이었다.그 소식에 힘입어 차근차근 신원을 확인했고, 그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떻게 됐는지 계속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원을 확인하고도 평생 부모님을 뵙지 못했다 양월화는 구난파라치로부터 자신의 신세를 알게 된 뒤 자신을 찾고 싶어 했다.친부모는 1964년 상부에 편지를 보내 어린 시절 경험을 소상히 설명한 뒤 웨이진수이 푸젠성 성장에게로 옮겨와 양월화의 신분에 관심이 많아 양모인 추란차치와 웡칭허, 양월화를 함께 찾아갔다.실상은 모금화가 요절했다고 우기는 옹청하 때문에 이 사건은 교착상태에 빠져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신원 확인은 이제 끝날 것 같았고 양월화는 절망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것이었다.시간은 어김없이 오길 바란다.1971년 노홍군 나만창이 고향에 정착해 양월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허쯔진의 형 허민쉐(賀敏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허민쉐는 이 사실을 알고 곧바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고했다.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마오쩌둥의 며느리 저우젠샤와 뤄완창의 딸 뤄하이밍이 전담한다.조사를 가서야 양월화를 보고 놀란 저우젠샤는 몸매와 몸가짐이 너무나 허즈진(賀子眞)을 닮았고, 눈과 눈썹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비슷했다.
게다가 그녀들은 허쯔진에게 모금화의 다리에 태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양월화의 다리를 보니 하자진이 말한 태기도 있었으며, 이쯤 되면 양월화의 정체는 확고부동하다.
신원 확인 후 양월화가 마오 주석과 허쯔전(賀子眞)을 만나기를 바랐지만, 양월화는 그를 만나기를 바랐다고 한다.장칭이 중간에 끼어들어 마오 주석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데다 어머니 허쯔전(賀子珍)도 건강이 좋지 않아 허민쉐가 너무 흥분해 위험할 것을 우려해 당분간 허즈전에게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누가 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겠는가. 그 후로는 어머니 허쯔전 씨를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요.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1984년 허쯔전(賀子眞)이 사망한 뒤 친부모를 직접 만나보려던 양위화의 바람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모(毛)'씨로 바꾸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몸에 밴 이름"이라며 고치지 않았다.
맺는 말 양월화 양은 특별한 역사 때문에 친부모를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그러나 아버지 세대의 좋은 품성을 이어받아 일터에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양월화의 정신에는 지장이 없다.바로 마오 주석과 다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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