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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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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보원을 찔러 죽인 놈은 품에 안고 있는 아기를 길가에 내팽개쳤지만, 절명 정보 전달에 성공했다


출처 | 잠자는 척하는 사람
국가의 흥망은 필부에게 책임이 있다.

민족의 위난 상황에서 기꺼이 나서려는 사람은 혈혈호걸한 7척의 사나이들 뿐 아니라, 아직도 많다늠름한 자태의 여영웅.

조일만, 류후란, 그리고 강언니들처럼 여자다움이 무엇인지 피나는 연기를 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읽는 사람도 모르게 이미 눈물을 줄줄 흘렸다.사실 그녀들처럼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있어, 모두 가치가 있다.우리는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그중에 한 여자가 있다.전사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정보를 주다가 놈들에게 찔려 죽고 갓난아이가 길가에 버려져 정보가 성공적으로 전해진다.

(1) 정절과 열녀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1942년 9월 15일, 초가을의 하북 평산에 어둠이 내리자, 공기 중에 이미 몇 가닥의 서늘함이 보였다의향.

24살 소운은 3개월 된 딸의 옷가지를 세심하게 챙겨주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다.。

그녀의 행선지는 현도 동남쪽의 왕자촌이다.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비록 다리 힘으로는 좀 멀지만, 소운은 벌써 싫증을 내지 않고 여러 번 걸었다백 번.

출발할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도착했을 때는 자시가 다 되어 있었다.

소운은 마을이 가까워오자 갑자기 일본군 몇 명을 만났다.

당시 일본인들은 평산에 기반을 두고 있지 못하여, 지하 당 조직을 없애려고 비정기적으로 노력해 왔다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골길지나가는 행인을 검문하다.

이 일본 병사들은 본래 날뛰며 소운은 외톨이인 데다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하나를 업신여기려 하였다번.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 어설픈 중국말로 "이렇게 늦게 나왔는데도 아이를 안고 있으면 기꺼이"라고 말했다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소운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그녀는 오히려 오랫동안 전쟁터를 경험한 베테랑 정보원이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친정집에 다녀와 집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느긋하게 말했다.

선두 일본인들은 술을 마시자 소운에게 더 매달리려 했다.

그는 "당신은 지하당입니까?중요한 정보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우스갯소리로 딴 일본 군도를 꺼내어 칼끝을 소운에 겨누었다.

소운은 조건이 반사되듯 아이를 꼭 껴안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치자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그녀를 검문하려고 여기저기서 소운에게 달려들었다.

소운은 고개를 저으며 일본인들의 몸수색을 밀쳤다.

이들이 분수에 넘치는지, 아니면 소운의 정보원으로 인정받았는지 궁금하다.

비록 수색은 성과가 없었지만, 일본군은 소운에게 팔로군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

소운의 품 안에 있던 아기가 너무 놀라서 계속 울어 소운은 아이를 두들겨 패면서 할 수 없이 울었다일본인에게 설명하다.

아기의 떠드는 것이 싫었는지 일본놈들은 소운의 아이를 한 손에 빼앗아 품에 안았다.갓난아이가 길가의 들판에 내팽개치다。

소운은 상황을 보고 급히 달려가 아기를 안았지만 일본인이 한방에 목을 쏴 소운을 쓰러뜨렸다.땅. 뒤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곧처음에는 다짜고짜 소운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소운은 자신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당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반격에 나섰다.

아이를 한 번 쳐다본 그녀는 씩씩하게 일어서더니 이내 일본인을 향해 돌진했다.

이 교만한 일본 병사들은 마음속으로는 중국인을 경멸하다가, 눈으로는 소운이 감히 반격하는 것을 보고는 분분히 들고 있었다총검으로 그를 쏘다.

그 순간 소운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죽이고 말았다.

(2) 담대하고 세심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그 일본병들은 소운의 정체를 알지 못하였는데, 차라리 천 명을 잘못 죽일지언정 하나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소운을 보며 불안해하는 이들은 시신을 다시 수색했다.

그러나 소운의 몸에는 일본인이 원하는 것이 전혀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그들은 소운의 시체를 향해 있다.몸에 침을 한 모금 뱉은 후 다시 약해졌다.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소리 속에 떠나고가다

어쩌면 중국인 한 명을 죽이는 것이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간단하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어떤 죄책감도.

지하당의 동지들은 시간을 지키며 약속을 지키던 소운이 자취를 감추자, 마음속에 이미 좋지 않은 예약을 하고 있었다감격을 받다.

이튿날, 사람들이 따로따로 소운을 찾았는데 과연 왕자촌 밖에서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때의 소운은 입술이 갈라지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에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소운에게 말하고 있었다항일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몫감, 딸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동지들은 소운을 위해 간단한 안장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들도 매우 이상하였다. 소운의 정보어디 갔을까 소운의딸 또 어디 갔어?

수소문한 결과, 콩을 끄는 노인이 밤에 여자 아이를 주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둠이 너무 어두워 여자아이 옆에 누워 있는 소운의 시신, 마음씨 좋은 노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여자아이를 찾아 헤매던친부모.

지하 당원들은 노인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말을 하면서, 콩알만 한 눈물방울이 이미 노인의 쭈글쭈글한 얼굴에서 떨어져,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저주했다그 일본군들은 중국을 침략했다.

지하당이 아이를 데려와 세탁물을 갈아주다가 우연히 그녀의 몸에 붙는 옷을 발견했다꿰매진 바늘구멍이 있으면 손으로 한 번 해라.만져보면, 분명히 그 속에 뭔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뜯어보니 소운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정보였다.그녀는 자신이 찔려 죽을지언정 조직을 팔아먹기를 원하지 않는다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는 성공한다.절명의 정보가 흘러나오다.

그렇다면 이 소운은 누구일까.

본명은 이숙민(李淑敏)으로 1918년 산시(山西)성 링추(靈丘)현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집안이 척박했다.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시어머니로 보내졌다집안에 민며느리가 되다.

그녀는 매일 가장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하지만, 식량은 쥐꼬리만큼밖에 먹을 수 없고, 또 자주 당해야 한다시댁의 독설과 구타.참다못한 이숙민 뒤척이다하북 평산의 하반 마을.

1940년 8월 어느 날, 진찰기 팔분구 정보원 이옥평은 평산현 영근에 가서 정사를 배웅하였다신문, 남산을 지나다가 발견했어요.부스스한 머리와 때묻은 여인.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자 이옥평은 이숙민의 비참한 신세를 알게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당시에 임무가 있었다.서둘러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하반송으로 돌아온 이옥평은 노혁명 융관수와 함께 이숙민의 이야기를 꺼냈다.。

융관슈는 '자제병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마음씨가 착하고 곳곳에서 혁명전사를 지킨다.

이숙민의 사연을 들은 융관수는 이옥평에게 "정말 고달픈 아이구나.동굴에 사람이 살면 어떻게 되겠니?이제 몇 개월만 지나면 날씨가 추워질 테니, 네가 그녀를 해라우리까지 데려와 풀자"고 말했다.

융관수는 이숙민이 불쌍해지자 그녀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융관수 할머니를 본 이숙민은 하루 종일 혁명사업을 위해 달려가자 스스로 걱정거리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융관수는 이숙민의 이름을 소운으로 바꾸었고, 이때부터 소운은 운송을 맡았다.정보를 주고받는 일.

업무 중에 그녀는 이경춘 동지와 의기투합하여, 두 사람은 곧 부부가 되었고, 딸을 임신하였다.

소운이 숨지자 이경춘은 융관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융관수는 이옥평과 함께 소운을 키울 것이라며 안심시켰다.소운이 세 살 되던 해, 이옥평은부대를 따라 산시로 가야 한다전쟁을 하다.

이옥평은 일이 매우 바빠서, 아이의 성장을 그르칠까 봐 소운을 자신이 신뢰하는 역사에 맡겼다홍전 부부, 증서를 써내다:지금 어떤 자성이 형이 장의 존속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명소운 생일인 1942년 4월 16일 4시 46분 장사걸 스쯔청(史子城)이 모습을 감췄다.

그중 장사걸은 이경춘의 호칭이고, 사자성은 사홍전이다.장의존은 사경운이다.

(3) 혁명열사여 영원불멸이다

사경운은 사홍전과 장군의 보살핌 아래 점점 성장하여,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사홍전 부부를 직감하면그녀의 친부모.

1998년 사홍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사경운은 아버지의 유품을 처치했다.

그녀가 작은 약병 속에서 뜻밖에 입양 계약서를 발견하자, 사경운은 그제서야 자신이 불렀다는 것을 알았다.평생의 부모님, 알고 보니양부모.

그녀는 그 계약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고, 그녀는 이 장사걸이 대체로 자신의 생업이라는 것을 알았다아버지.

사경운은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으니, 생모를 찾을 수 없는 이상, 아니 스스로 위안을 삼곤 했다과거를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연이다.천의가 있다.

하지만 2006년 겨울, 상황은 반전됐다.

당시 남쪽에 폭설이 쏟아지자 사경운은 고난을 겪는 동포들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남편과 함께 집 안 네 곳에 있었다따뜻한 옷을 찾아다니다.

그 국가적 대의가 사경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계기가 됐다.

어머니가 궤짝 안에 눌러둔 큰 솜저고리는 사경운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솜옷을 주셨을 때를 회상하며, 장군과의 사소한 일까지 추억하며 조심하고 있다이 솜저고리를 조심스레 털다먼지.

그러나 먼지와 함께 떨어진 것은 얼룩덜룩한 헌 종이 한 장이었다.종이에 적힌 글씨는 관하여어린이단의 자료.

사경운은 '깊이 캐기'를 계속하면 뭔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흩어진 종이 조각을 찾아내 침식을 잊고 긁어모았다.

종이가 복원되면서 그의 신상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사경운은 이렇게 정리된 11건의 자료를 통해 자신이 열사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세 살 때.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경운은 보고만 있다가 울기 시작했고, 그녀는 반드시 어머니의 유해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퇴직한 사경운은 융관수의 손녀 이수령과 군 간부들을 긴밀하게 연결하기 시작했다가설양 장군.

그들은 이 일을 알게 된 후, 얼굴에 감동의 빛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형죽림에서 백구은병원 부원장을 지낸 형죽림을 찾아냈다라고 말하며 사경운은,자신의 어머니는 확실히 명열사이고, 아버지이다친척이 살아있다고 해서 이름을 장젠궈라 불렀다.

사경운은 곧 장젠궈를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중태에 빠져 인사불성이 됐다.

사경운은 파멸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다음에 할 일은 어머니의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당시 소운과 관계를 맺었던 동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그녀의 매장 주소를 찾을 수 없었다.。

모두 그녀를 두 그루의 회화나무 옆에 묻었다는 것만 기억하지만,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시비가 붙었다.

사경운은 소운의 대체 매장 자리에 도착하여 잠시 동안 노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떨며 어머니를 위해 공물을 차리고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경운은 황토를 몇 줌 집어 유골로 삼아 유골함에 넣었다.이 황토는 어머니가 남겨둔 것이다흔적, 바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사수한 것이다보호 토지.

2011년에도 민정부, 소운 동지를 열사로 추인하고 소운 열사를 이장하기로 했다평산현의 수로 열사의 능원.

소운 동지는 마침내 자신만의 귀결점을 갖게 되었고, 또 자신만의 전시관을 갖게 되었다.

사경운은 그 '혁명열사 증명서'를 들고 장젠궈의 병상 앞에 왔고, 장젠궈도죽더라도 여한이 없는 셈이다.

 

 

鬼子刺死女情报员,随后将怀中婴儿扔在路边,却成功传出绝命情报 

來源 | 装睡者

“国家兴亡,匹夫有责”。

民族危难关头,愿意挺身而出的不仅仅是热血豪迈的七尺男儿,还有很多飒爽英姿的女英雄。

诸如赵一曼、刘胡兰还有江姐,她们用自己的鲜血演绎了何为女子气概。

她们的故事感人至深,令人读来,不觉间已潸然泪下。其实,像她们这样的人还有很多,都值得我们永世铭刻。其中有一位女战士怀抱婴儿送情报,被鬼子刺死,婴儿被扔路边,情报成功传出。

(一)、贞节烈女,宁死不屈

1942年9月15日,初秋的河北平山夜幕降临,空气中已见了几丝凉意。

24岁的素云细心地给3个月大的女儿整理好衣物,与往常一样出了家门。

她此行的目的地,是位于县城东南角的王子村。

从家里到这的路程,靠脚力虽有些遥远,可素云早已不厌其烦地走了好几百遍。

出发时已经天黑,抵达时已近子时。

就在快要临近村庄时,素云突然遇上了几个日本兵。

当时日本人在平山根基不稳,一直挖空心思的要铲除地下党组织,不定期不定地的在乡间小路上盘查过往的行人。

这些日本兵本就嚣张跋扈,眼见素云孤身一人,又带着孩子,便想欺侮一番。

他们走上前去,用蹩脚的中国话说道:“这么晚了出来,还抱着孩子,肯定不是什么好人。”

别看素云年纪虽小,她却是个久经沙场的老情报员。

她不紧不慢地对日本人说道:“正从娘家回来,往家里赶呢”。

领头的日本人喝了些酒,便想和素云多纠缠一番。

他厉声说道:“你是不是地下党?怀里掖着重要的情报!”

说罢,还戏谑地掏出了别着的那把日本军刀,将刀尖正冲素云。

素云条件反射似地抱紧了孩子,其他人一听,纷纷笑着点头附和。

语毕,一帮日本人横七竖八地向素云扑来,欲对她盘查一番。

素云一边摇着头,一边推搡着日本人的搜身。

不知他们究竟是有非分之想,还是认定了素云的情报员身份。

尽管搜查无果,可日军还是一口咬定,素云身上携带着八路军需要的东西。

素云怀里的婴儿因惊吓过度不停地啼哭,素云只得一边拍打着孩子,一边向日本人解释。

或许是厌烦了婴儿的吵闹,日本鬼子一把将素云的孩子夺过,随后将怀中婴儿扔在路边的野地里。

素云见状急忙上前去抱孩子,可日本人一枪托击中其脖子,将素云打倒在地。而后,一群人马上开始不由分说的殴打素云。

此时的素云知道自己难逃一劫,与其这样被动受辱,倒不如主动反击。

她看了一眼孩子,目光坚毅地挣扎着站起,当即向日本人冲了上去。

这些骄纵的日本士兵打心底里看轻中国人,眼见素云胆敢反击,纷纷拿着刺刀向其射去。

刹那间,素云就被日军刺死,再也没有了呼吸。

(二)、胆大心细,不辱使命

那些日本兵并不知道素云的真实身份,他们宁愿错杀一千,不可放过一个。

看着血泊之中的素云,他们仍然不放心,又对着尸体进行了一番搜身。

可是素云的身上异常干净,根本没有日本人想要的东西。他们冲着素云的尸体啐了一口,而后若无其事般的在一片欢笑声中离去。

或许在他们眼里,杀害一个中国人就如同杀死蚂蚁一样简单,也不需要有任何的负罪感。

地下党的同志眼见向来守时守约的素云没了踪影,心中已经有了不好的预感。

第二天,众人分头找寻素云,果然在王子村外发现了她的遗体。

彼时的素云嘴唇干裂,怒目圆睁,身上布满了血渍,它们在诉说着素云对抗日事业未竟的那份不甘,和对女儿的满心祈盼。

同志们为素云举行了一个简短的安葬仪式,可他们也很奇怪,素云的情报究竟去了哪里?素云的女儿又去了哪里?

经过多方打听,大家得知,有个拉黄豆的老汉在夜晚捡到了一名女婴。

由于夜色太黑,以至于他未能看清女婴旁边躺着的素云遗体,好心的老汉,正在四处找寻女婴的亲生父母。

地下党员们找到了老汉,并向他阐明了事情的原委。

说着说着,豆大的泪珠已经从老汉干瘪的脸庞中滑落,他不自觉地咒骂其那些侵华日军。

地下党将孩子接了回去,在为她换洗衣物时,偶然发现她的连环贴身衣上有缝着的针口,用手一摸,明显能感觉到其中有东西。

众人拆开一看,发现这正是女情报员素云拼死守护的情报。她宁愿自己被刺死,也不愿出卖组织,而她怀中的孩子,却成功地传出了绝命情报。

那么,这位素云究竟是何许人也?

素云原名李淑敏,出生在1918年的山西省灵丘县,其家境异常贫瘠,因而自幼被父母送去婆家当童养媳。

她每日都要从事最繁重的体力劳动,却只能吃一丁点粮食,还要时常遭受夫家的毒骂与殴打。无法忍受之后,李淑敏辗转来到了河北平山的下盘村。

1940年8月的一天,晋察冀八分区情报员李玉平去平山县岭根送完情报,经过南山时发现了一个蓬头垢面的女人。

两人一经交谈,李玉平得知了李淑敏悲惨的身世。可她当时有任务在身,只能与其匆匆作别。

完成任务后,李玉平回到了下盘松,她和老革命戎冠秀提起了李淑敏的事。

戎冠秀有着“子弟兵母亲”美誉,她心地善良,又处处维护革命战士。

听完李淑敏的遭遇后,戎冠秀对李玉平说道:“可真是个苦孩子,她一个人住在洞里怎么能行?再过几个月天就冷了,你把她带到咱下盘松吧。”

戎冠秀眼见李淑敏楚楚可怜,便好心的收留了她。

李淑敏眼见戎冠秀老人,整日为革命事业奔走,便主动提出要替她分忧。

就这样,戎冠秀把李淑敏的名字,改成了素云,从此素云便承担起了运送来往情报的工作。

工作中,她与李景春同志情投意合,两人很快结为伉俪,并孕下了女儿。

素云不幸牺牲后,李景春马上赶到了戎冠秀家里。

戎冠秀请他放心,称她会和李玉平抚养小云。等到小云三岁那年,李玉平要跟着部队去往山西作战。

李玉平工作很忙,生怕耽误了孩子成长,便把小云托付给了自己信赖的史洪全夫妇,并写下字据:今有子城哥把张义存密保小名小云生日1942年4月16日4时46分 张士杰 史子城 定不面。

其中的张士杰,正是李景春的代号;而史子城,就是史洪全。至于张义存,则是史庆云。

(三)、革命烈士,永垂不朽

史庆云在史洪全与张君的呵护下渐渐长大,她从未怀疑过自己的身世,一直觉得史洪全夫妇就是她的亲生父母。

1998年史洪全因病去世,史庆云在悲痛中处理着父亲的遗物。

她在一个小药瓶里意外发现了一张收养契约,史庆云这才知道,自己叫了一辈子的爸妈,原来是养父母。

她看着那张契约,陷入了深思,她知道,这个张士杰,大抵就是自己的生父。

史庆云常常自己安慰自己,这么多年都已经过去,既然无法找到生母,不能探析过去,这一切自有天意。

不过,2006年的冬天,事情迎来了转机。

当时南方突发暴雪,史庆云看着患难的同胞很是着急,她和丈夫在家中四处找寻保暖衣物。

正是这份国家大义的传递,给了史庆云揭开谜团的契机。

母亲压在柜子里的一件大棉袄,引起了史庆云的注意。

她正回忆着当时母亲给她棉袄时的场景,追忆着和张君的点点滴滴,小心翼翼的给这件棉袄抖去灰尘。

然而和灰尘一同落下的,还有一张布满斑驳的旧纸。纸上的字迹,是关于儿童团的资料。

史庆云认为,如果继续“深挖”定当有所收获。

于是,她找出了很多散落的纸张碎片,废寝忘食地将它们拼凑起来。

而她的身世,也随着纸张的复原,而一点点地浮出水面。

史庆云通过这整理出来的11份资料得知,自己是烈士子女,在三岁时,险些丢了性命。

史庆云看着看着,就哭了起来,她立志一定要找到母亲的遗骸。。

退休了的史庆云,开始紧锣密鼓地联系戎冠秀的孙女李秀玲,和部队干部贾雪阳将军。

他们得知此事以后,不免为之动容,也很快地行动了起来。

他们顺藤摸瓜的找到了曾经担任过白求恩医院副院长的邢竹林,从邢竹林的口中,史庆云得知,自己的母亲的确是名烈士,父亲还活着,改名叫作张建国。

史庆云很快找到了张建国,可此时的他已经病入膏肓,不省人事。

史庆云看着父亲忍不住崩溃大哭,她下一步要做的,是为母亲正名。

然而,时间过去太久,当时和素云有联系的同志,大都已经离世,终究是未能找到她的埋葬地址。

大家只记得将她埋在了两棵槐树的旁边,可几十年过去,物是人非。

史庆云来到素云的大体埋葬位置,顿时间老泪纵横。

她颤抖着为母亲摆放好贡品,又哽咽着为母亲磕了头。

史庆云抓了几把黄土,当成骨灰,放进了骨灰盒。这黄土,有着母亲留下的痕迹,正是她拼死守护的土地。

在2011年民政部还是决定追认素云同志为烈士,又把素云烈士移葬于平山县河渠烈士陵园。

素云同志终于有了属于自己的归宿,也有了属于自己的展览馆。

史庆云拿着那张“革命烈士证明书”,来到了张建国的病床前,张建国也算是死而无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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