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군(文史君) 모두 일본이 닌자는 정보업무가 일류라고 얘기하며, 고대일본이야기에서 유명하다. 근대일본도 중국에 대량의 간첩을 파견해서 대륙에서 풍운을 일으켰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뉴스를 통해 일본에서 간첩을 중국에 잠복시켜 정보를 빼내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간첩전을 얘기하자면, 중국이 일본의 스승이다. 일찌기 명나라때 임진왜란시기 명나라는 일본에 간첩을 잠입시켰고, 대량의 일본정보를 수집한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전체 전쟁국면을 파악하고 승리를 거두는데 큰 작용을 한다. 여기에서는 명나라 만력제때의 명나라가 일본에 보낸 간첩과 그들의 공적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1. 대일간첩전의 시작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 5월, 조선국왕은 중국과의 변경지역인 의주로 피난간다. 10월, 5만의 명나라군대가 참점하고 원조항왜전쟁(임진왜란)이 정식으로 개시된다. 임진왜란때 명나라는 간첩전을 전개했다. 대일간첩전의 주요책임자는 바로 복건순무 허부원(許孚遠)이다. 허부원은 <청계처왜추소(請計處倭酋疎)>를 썼는데, 이는 우리가 당시 일본에 잠입했던 지하영웅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전쟁이 시작된 후, 심유경(沈惟敬), 사세용(史世用) 두 사람은 전후로 허부원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병부상서의 명을 받아 왜국으로 가서 왜국의 상황을 탐지한다. 다만 허부원은 심유경이 "나이들고 약삭빨라서 쓸 수가 없다(老而黠, 不可使)"고 여겨 북경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사세용은 "몸도 건장하고 재능도 뛰어나" 허부원은 그를 천주부(泉州府) 동안현(同安縣)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해상(海商)으로 가장하여, 해선(海船)을 타고 왜국으로 가도록 한다. "세용으로 하여금 상인으로 분장하여 일본의 사쓰마주(薩摩州)로 가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사세용은 성공적으로 일본에 잠입하고, 대일간첩공작을 개시한다.
2. 사세용의 전략서 사세용은 혼자서 일본에 잠입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일간첩의 총두목이었고, 그를 협조해준 해상들도 모두 그의 부하였다. 구체적인 간첩활동은 이들 해상들에 의해 진행된다. <청계처왜추소>에 따르면, 1592년 7월, 사세용 일행은 해선을 타고 일본연해 사쓰마번의 항구에 상륙한다. 그후 사세용은 상인신분으로 일본의 큐슈를 유람한다. 최종적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쌓은 대본영(大本營) 큐슈 나고야성(名護屋城)까지 간다. 나고야성을 유람한 후, 사세용은 온 길을 되돌아 사쓰마로 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이 노선을 따라가면서 사세용은 일본의 정치인을 만나지는 못했고, 그는 일본지리를 탐사하는 것같았다. 사세용은 유구(琉球)를 아주 중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유구를 지켜내지 못하면 일본은 유구를 발판삼아 직접 바다를 건너 명나라의 동남해연안을로 침략해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사세용은 명나라가 반드시 유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세용이 명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마침 임진왜란이 대치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명나라의 국내에서도 의화(議和)세력이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사세용은 명확히 지적한다: 일본은 위엄을 겁내기는 하지만 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군사적으로 일본을 격패시키지 않는다면 의화는 아예 할 수도 없다. 일본이 추구하는 것은 경제무역이다. 다만 조정의 책봉은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소위 "책봉만 하고 조공은 허용하지 않는" 방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세용은 전략적인 각도에서 명나라의 임진왜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했다. 그의 부하들은 일본에서 대량의 전쟁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탐지해 낸다.
3. 일본정치에 대한 정보수집 허예(許豫)는 복건 천주의 해상이다. 그는 사세용과 함께 일본에 들어간다. 사세용이 일본을 유람할 때, 허예는 그의 해상신분을 이용하여 사쓰마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일본의 지방영주들과 접촉한다. 그는 한때 사쓰마번의 가로(家老) 이주인 다다무네(伊集院忠棟)와 직접 접촉하기도 한다. 일본사학가 마츠우라 아키라(松浦章)의 연구에 따르면, 허예가 일본에서 간첩활동에 종사한 기간은 순월(旬月, 열흘 혹은 한달)이라고 한다. 1593년 정월, 허예는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복건순무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실제지도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봤는데, 일본에서 실제 권력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토요토미는 57세이고, 아들은 이제 2살이며, 양자 30살짜리가 있다. 둘째, 제1차 조선침략때, 일본이 화의를 한 것은 일본에 사상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고, 물자조달압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궤계강화(詭計講和), 방득탈귀(方得脫歸)"(기만술을 써서 강화에 성공하고, 비로소 몸을 빼서 귀국할 수 있었다) 셋째, 토요토미는 최근 지방에 명을 내려 대선을 만들도록 했고, "화혼불성(和婚不成), 욕난입대명등처(欲亂入大明等處)"(제1차 조선침략전쟁이 끝난 후, 중국과 일본이 의화했는데, 일본의 의화조건중 하나는 천황이 대명공주를 취하는 것이었다) 넷째, 일본은 중일상인들의 무역하는 틈을 타서, 간첩을 대명에 잠입시켜 정보를 빼내려 하고 있다. 다섯째, 토요토미는 일본의 66주를 통할하고 있지만, 반수의 주는 그에게 불복하는데 그들과는 '의화를 맺었다'(토요토미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지방영주와는 의화하여 상호타협했고, 토요토미는 명목상의 통일을 이룬다). 각 주는 아들을 토요토미에게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각국은 잠시 굴복했지만, 원한은 잊지 않고 있다." (여기의 국은 주를 가리킨다. 즉 일본 지방의 번을 말한다. 그 뜻은 일본의 각주는 잠시 토요토미에게 굴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토요토미에 대한 원한을 잊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섯재, 복건, 절강, 강소의 3개성의 백성들 중에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일본의 3/1의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 거주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대다수는 애국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여 나라에 공을 세울 뜻이 있다." 그들을 발동시키면 일본에서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 멀리는 그들을 국내로 불러들여서 대일전쟁에서 힘을 보태게 할 수도 있다.
4. 일본군사역량에 대한 정보수집 장일학(張一學), 장일치(張一治)도 사세용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간 상인이다. 그들은 사세용을 따라 큐슈를 유람하고, 최종적으로 나고야성에 이른다. 사세용이 돌아간 후에도 장일학, 장일치는 계속 나고야성에 남아서 주로 일본의 군사역량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들이 얻은 정보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공과정.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의 만남;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한 것;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력을 이끌고 참모를 죽였으며, 관백의 직위를 차지한 것등. 장일학이 알아낸 정보는 대체로 토요토미가 성공한 진실한 역사에 부합한다. 둘째, 조선침략의 일본군 우두머리는 이시다(石田), 아사노(淺野), 오타니(大谷)으로 세 사람은 모두 토요토미의 심복이다. 셋째,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물자조달이 곤란하다 그리하여 일본국내에 물자부족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스럽다. "집집마다 애통해하는 소리가 나고, 곳곳에서 원망의 소리가 들린다." 넷째, 일본의 조선침략은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의 손실이 아주 크다. 예를 들어, "큰 배에 병사 삼백을 싣고 갔는데, 돌아온 자는 오십인이었다." 다섯째, 사쓰마는 각지의 선박이 집결되어 있고, 일본의 인후이다. 여섯째, 일본군이 쓰는 도검, 갑옷, 궁전, 조총은 모두 일본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만 조총의 탄환에 쓰는 주요원재료인 납은 대명에서 생산한 것이고, 광주에서 사왔다. 일곱째, 일본에 국왕이 있다. 그러나 토요토미가 정권을 빼앗았고, 스스로 "대각왕(大閣王)"이라 칭한다.
결어 사세용, 허예, 장일학, 장일치등이 탐지해낸 정보는 대체로 일본의 진실한 상황이었다. 이는 명나라에서 대일정책을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허예가 일본에 있을 때, 사쓰마의 고위층에 깊이 들어가 한때는 사쓰마번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와도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허예는 시마즈를 도발하여 토요토미와 맞서게 하려 했다. 이렇게 되면 명나라는 "여러 번간의 싸움을 붙여서 왜를 평정할 수 있다" 이번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명경세문편>의 기록에 따르면, 시마즈 요시히사의 오른팔이자 사쓰마번의 군사인 승려 겐류(玄龍)은 1593년 명나라간첩을 따라 복건으로 간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명나라에서 일본과 의화해야한다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었다. 복건순무 허부원을 포함하여, 대일간첩활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관리들은 일본과 사통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후임 복건순무는 일본의 내란을 도발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겐류는 다시 일본으로 쫓겨갔고, 토요토미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간첩의 역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는 일본에 보낸 간첩을 통해 일본의 국내사정, 일본민족의 성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조정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된다. 특히 왜인은 "위엄은 겁내지만 덕을 품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본은 아예 예의염치를 모른다. 오로지 무력만 무서워하고, 평화협상은 되지 않는다, 일본은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협상은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함이다라는 것을 알게 도니다. 1597년초, 일본은 과연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명나라의 반응은 신속했다. 2월에 재차 출병한다. 명나라가 이렇게 신속히 출병할 수 있었던 것은 사세용 특히 허예가 제공한 일본이 선박을 제조하고 잇다는 정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사세용은 전선으로 보내어지고, 명군총지휘 형계(邢階)의 참모가 되어, 직접 대일전쟁전략을 책임진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명나라의 간첩이 임진왜란에서 발휘한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명나라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는데 큰 작용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