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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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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시자 모택동(毛澤東)과 모주석의 일상비용지출

글: 오연등
모택동의 비서인 오연등이 쓴 "모주석의 일상비용지출"이라는 글을 옮긴 것입니다.
나는 1964년부터 1976년 모주석의 서거때까지, 계속해서 모주석집안의 관리를 맡았다. 모주석의집안은 관리하기 좋았던 것을 말하자면 관리하기 좋은 편이었다. 모주석은 한푼도 가져가지 않았고, 어떻게 쓰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관리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자면, 써야할 곳에는 반드시 써야했다. 모주석이 성냥을 구입할 때나, 화장지를 살 때도 다 돈을 써야했고, 한푼도 덜 주지 않았다. 모주석이 외부에서 차 한잔을 마실 때에도 나는 가서 반드시 계산을 했다. 인민대회당에서도 같았다. 모주석의 원래 월급은 610위안이었는데, 나중에 나라경제가 힘들어지자 모주석은 스스로의 월급을 404.80위안으로 깍았다. 강청(江靑, 모주석의 처)의 월급은 243위안이었다. 그들은 한푼도 돈을 빼가지 않았다. 그들 둘은 별도로 계산하였으며, 각자 명세장을 가지고 있었다.
모주석의 몇가지 크게 돈이드는 항목이 있다. 식사. 100위안정도.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모주석은 비공산당인사인 친구들이 특히 많았다. 황배염(黃培炎), 장사도(張士钊)등의 손님들이 오면 모주석이 돈을 냈다. 다른 항목은 담배. 매달 거의 100위안이 들었다. 그리고 찻잎. 몇십원이 들었다. 그 때 이민(李敏, 모주석의 딸), 이눌(李訥, 모주석의 딸)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 비용도 여기서 지출했다. 원래 한 아이당 매월 15위안을 주었는데, 물가가 오르면서 30위안으로 올려주었다. 비용지출은 매우 엄격해서, 이번달에 좀 많이 썼으면 다음달에는 그만큼 깍았다. 강청에게는 언니가 한 명있었는데 이운로(李雲露)였다. 그에게도 30위안을 주었다. 모주석이 그녀의 비용도 대주었고, 그녀는 모주석을 위하여 바느질 등을 도와주었다.
또 다른 큰 항목은 집임차료, 물, 전기, 가구임차료였다. 아이들과 강청 언니, 강청의 것을 모두 포함하였다. 풍택원(豊澤園)의 임차료는 전부 모주석이 부담하였고, 강청은 부담하지 않았다. 모주석의 가구도 모두 빌려온 것이었는데, 이러한 비용이 매월 84위안정도였고, 겨울에는 난방비를 내야하는데 30여위안이어서 모두 120여위안이 되었다.
또 다른 비용항목은 고향에서 오는 손님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사람도 있고, 병을 보러 온 사람도 있다. 그들의 교통비, 식사비, 그리고 갈 때는 또 약간의 돈을 집어주었다. 그러므로 돈이 매우 빡빡했으므로, 집안관리가 쉽지 않았다. 돈이 모자라는데 어떻게 했는가? 할 수없이 모주석의 원고료에서 빼 쓸 수밖에 없었다. 모주석의 원고료는 별도로 관리하였는데, 내가 쓰려면 그 때마다 따로 보고를 하고, 뒤에 명세내역을 붙여야 했다. 한푼이라도 확실하게 모주석의 사인이 있어야만 내가 중앙특별회계실에 가서 꺼내쓸 수 있었다.
내가 모주석의 집안을 관리한 것은 12년인데, 그 12년동안 주석이 책을 사느라고 쓴 돈이 8,000위안가량이다. 그러므로 내 수중의 돈은 항상 모자랐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가장 큰 임무는 모주석의 식사문제였다. 노인네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모주석은 전혀 보양품은 먹지를 않았다. 산해진미도 먹지 않았고, 하루에 세 끼를 먹었다. 모주석을 위하여는 식사팀이 별도로 있었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이 식사팀은 인민이 나에게 배려한 것이므로, 너희들에게는 먹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딸들, 언니, 그리고 우리는 같이 중남해의 식당에서 줄을 서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의 집안은 일주일에 한번 같이 식사를 하였는데, 토요일 저녁이었다. 모주석의 자녀노릇은 정말 쉽지 않았다. 모주석은 그들에 대한 요구사항이 엄격하였다. 매번 식사할 때마다 사회에서 들은 애기를 주석에게 얘기하도록 하였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얘기하도록 하였다. 만일 모주석이 어떤 의견이 있으면 거기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다시 과제를 주어 어떤 책을 읽을지를 알려주고, 다음 주에 와서 얘기하라고 하였다. 토요일 저녁식사는 시간이 꽤 길었다.
모주석의 식사시에 4채1탕(4가지 요리와 1개의 탕)을 준비했다. 고기요리 1개, 물고기 요리 1개는 필수였다. 하나는 고기/야채가 섞인 요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순 야채요리였다. 모주석은 두가지가 어려웠는데, 하나는 식사하기 어려웠고, 다른 하나는 잠들기 어려웠다. 식사하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는다. 문서를 다 안봤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주석, 식사하시지요"라고 얘기하면 "기다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석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방해할 수가 없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 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요리가 다 식어서 다시 데우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는 우리가 아예 별도로 자기로 식기를 만들면서 쟁반 위에 두껑을 덮도록 하여, 보온도 되고, 위생적으로도 좋게 하였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모주석이 전용식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는 않았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그릇이 가벼워야 했다. 그는 하루종일 그릇을 들고 책을 보는 경우도 있어서 팔이 피곤할 수 있었다. 모주석이 원래 사용하던 그릇은 경덕진(景德鎭)의 것이었는데, 어느날 모주석이 "우리 호남에 예릉(醴陵)이라고 있는데, 거기 자기가 괜찮아"라고 하였다. 우리는 얼른 예릉의 자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장인으로 하여금 제작하게 하였는데, 하나의 그릇의 무게가 124그램이어서 매우 가볍고 투명했으며, 안쪽과 바깥 쪽에 모두 꽃이 새겨져있고, 붉은 색을 위주로 하였다.  모주석은 처음에 그 그릇을 들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이거 괜찮군". 고향물건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모주석은 자신의 고향을 매우 좋아하였다. 주식이 식사할 때는 당시의 국내외정세를 고려했다. 우리는 매일 살펴봐서 큰 일이 있는 때에는 야채요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럴 때는 분명히 주석이 식사를 제대로 못할 테인데, 고기음식을 드려서는 곤란하였다.
모주석은 물고기대가리(魚頭)요리를 매우 좋아하였다. 닭내장, 물고기내장도 좋아하였다. 만일 중남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면, 우리는 가서 사와가지고 대가리를 요리하고, 물고기 몸통은 식당에 가서 팔았다. 우리는 이렇게 관리하면서 한푼도 낭비하지 않았다. 모주석은 작은 물고기, 작은 새우도 좋아하였고, 고기껍질도 좋아하셨다. 그는 칼슘을 별도로 먹은 적도 없고, 먹는 것은 매우 간단하였다. 어떤 때 우리가 "주석, 요리를 좀 더 늘일까요?"라고 하면, "나는 이것만 먹어도 괜찮다. 아직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는 또한 "중국에 나 모택동이 먹을 것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국가가 쓰지 않는 돈을 가져다가 쓴다면, 장관들, 성장들, 촌장들도 모두 가져다 쓸 게 아니냐." 그는 자신이 스스로 청렴함에서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는 한 잔의 차도 그냥 마시지를 않았고, 먹는 것, 쓰는 것에서 모두 가격대로 돈을 지급하였다. 어려운 시기는 어떻게 견뎠는가?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였다. 모주석도 다리가 부었었다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한번은 고기를 약간 올렸더니, 주석은 화를 내셨다. 주석도 물품수령책, 옷감표, 기름표를 가지고 있었다. 북경시민이 얼마를 받으면, 주석도 그만큼 받으셨다. 그의 양식 정량은 17근이었다. 만일 남으면 아이들에게 보조해주었다.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넘겼는가? 주석은 이렇게 넘겼고, 이것이 바로 인민의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모주석이 받은 선물은 매우 많았다. 먹는 것, 쓰는 것 모두 있었다. 이런 선물들은 우리가 모주석에게 안보여줄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저녁에 나가서 산보를 하고, 공기를 마셨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선물을 펼처놓고 수량을 적어가며 그에게 보여주었다. 먹는 게 수량이 많으면 식당으로 보냈고, 돈은 선물보낸 사람에게 부쳐주었다. 수량이 작으면 운전기사들에게 주거나 다른 곳에 보냈다. 한번도 이민, 이눌에게 보낸 것을 본 적은 없다. 한번도 없었다. 그 때, 녹음기, 손목시계, 금손목시계, 스위스제, 로마제는 매우 귀했다. 그리고 금은장식품도 있었다. 보면 맘에 들었다. 누가 맘에 들어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이들도 와서 같이 들고 보고는 했다. 그러고는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한번도 가져간 적이 없다. 중요한 선물은 모두 중남해의 선물창고로 보냈다. 선물을 만일 써야한다면, 차용증을 쓰고 빌려왔다.
차용증에 관한 얘기를 하나 할까 한다. 1945년전에 모주석은 손목시계가 없었다. 중경담판때,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곽말약(郭沫若)은 모주석이 손목시계가 없는 것을 보고는 모주석이 담판시간을 잘 배분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손목시계를 끌러서 드렸다. 모주석은 기꺼이 받아서 차고 다녔다. 이 손목시계는 1969년까지 계속 차고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시계가 느려져서 어느날 모주석이 "이 손목시계좀 가져가서 수리해와."라고 하였다. 나는 왕동흥(汪東興)에게 시계 하나를 빌려서 모주석이 임시로 쓰도록 했다. 왕동흥은 선물창고에서 금시계를 하나 꺼내주었다. 모주석은 "물건을 빌렸으면 차용증을 써줬어야지. 시계 다 고치면 돌려주도록 하자."라고 하고는 빌린 시계는 2개월을 쓰고는 반환했다.
모주석의 창고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그가 소련을 방문할 때 입었던 외투와 모자였다. 그것은 가장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그러나 방문에서 돌아온 후에는 한번도 입지 않았다. 20여평방미터의 창고에는 5개의 장이 있었다. 모주석의 것이 3개였고, 강청의 것이 1개, 나머지 하나에는 모안영(毛岸英, 모주석의 장남으로 6.25때 한국전쟁에서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사망함)의 물건을 놓아두었다. 창고에는 낡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의 내복은 여러번 기워서 입는 것이었다. 그의 창고에는 면이불이 없었다. 북경에 들어온 이후에 면이불이 없었다. 날씨가 더우면 침대덮개 1개, 봄가을에는 2개, 겨울에는 3개를 덮었다. 같이 겹쳐서 잘 때는 끌어당겨서 잤다. 모주석의 침대덥개는 가장 많은 것은 75군데 구멍을 기워서 썼다. 기우는데 쓰는 것도 모두 낡은 덮개에서 나온 것이다 너무 오래된 것도 안되지만, 새것도 안된다. 두께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덮개는 다 기운 것이다. 모주석의 양말의 대부분은 우리가 기웠다. 기운 곳이 너무 많아지면 새것을 구해서 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외빈접대라도 할 때, 바지가 들렸을 때, 양말에 기운 것이 보여서는 곤란했었다. 모주석에게는 외투가 하나 있었는데, 연안때 강청이 만든 것이다. 소매가 짧아서, 다시 조금 더 붙였다. 마지막에 모주석을 팔보산으로 보내드리면서, 모주석의 의복장을 열었을 때, 우리는 모두 울었다. 모두 낡은 옷밖에 없었다. 국가의 지도자의 모습이 이러했던 것이다.
모주석의 침대위에는 두개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송경령(宋慶齡, 손문의 부인,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의 언니, 국민당 재정부장 송자문의 누나. 큰언니 송애령과 더불어 송씨 삼자매로 불림)이 보낸 오리털베개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장정때 가기고 다닌 담요이다. 주석의 침대는 나무침대였는데, 절반은 책이 쌓여있고, 그는 침대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등을 기대는데 너무 딱깍하면 그 담요를 대곤 하였다. 우리가 바꾸자고 하여도 그는 못하게 하였다. 그는 혁명의 성공을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다.
모주석은 첫째 그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이 큰 나라가 모주석 한 분을 잘먹고 잘살게 못하였겠는가? 그는 모든데서 절약하였다. 그는 이렇게 큰 나라에서는 조금도 낭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풍택원이 낡아서, 담장이 많이 벗겨지고, 한번은 그에게 수리하는게 좋겠다고 하였다. 모주석은 화를 내면서, 돈써야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데 돈을 쓰라는 거냐고 하였다. 모주석은 담배를 많이 피워서 성냥도 많이 썼다. 나는 그를 따라 12년을 있으면서, 그가 라이터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였다. 절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성냥불을 긋지 않았다. 항상 자신쪽으로 성냥불을 그었다. 반 쪽을 다 쓰고 나면, 나머지 반쪽을 썼다. 청소할 때 우리는 낡은 것을 버리곤 했다. 그는 새 것을 보면, "전에 건 어떡했느냐"고 물었다. "그 성냥갑은 아직 괜찮았는데.." 우리는 금방 알아듣고, 낱개로 사서는 옛날 성냥갑에 넣고, 붓으로 화약을 다시 발랐다. 그러자, "흠..괜찮군"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식사할 때 음식을 식탁에 떨어뜨리면, 그는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그는 "농민들은 지금 매우 힘들잖아."라고 하였다. 그는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였다. 70여세때 본인이 병을 얻었는데, 그 때도 사람을 문두구(門頭溝)로 보내서 탄광광부들의 업무환경이 어떤지, 진폐증은 줄어들었는지를 물었다.
두번째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도록 요구했다. 중남해의 사람들은 모두 모주석집안의 어린애들에 대하여 인상이 특히 좋았다.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모주석은 그의 자녀들에게 "내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동료들이다. 전부 너희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납은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내가 나이가 더 어리다고 하여도, 이납은 "안된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정한 규칙이니까 따라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나가면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볼 때 2마오를 똑같이 낸다. 그리고, 모주석이 부르지 않으면 절대 주방에 가서 한 끼라도 식사를 한 적이 없다. 그의 아이들은 정말 괜찮다. 현재 그녀들은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있고, 관직을 하지 않고 있다.
모주석은 일생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전력을 다해서 인민을 위해서 봉사한 일생이었다. 되돌아보건데, 많은 일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우리는 그 때 매일매일 모주석을 뵐 수 있었다. 현재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만일 모주석이 없었더라면 중국인민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8341부대는 모택동의 경호부대


8341, 8341부대, 모택동, 중앙경위단
중국에는 8341부대라고 부르는 부대가 있다.
정식 명칭은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으로, 당중앙 즉, 모택동 주석을 경호하고 보위하는 부대이다.
1949년 현재의 중앙경위단은 원래 공안2사령부내의 제4단으로 중국의 지도자가 거주하는 중남해를 방어하였다. 2년후 공안2사령부는 경위사령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원래의 제4단은 제1단으로 변경되었다. 임무는 여전히 중남해의 경호보위업무였다. 1953년에는 제1단이 경위사령부에서 분리되어 별도로 중앙경위단을 성립시켰다. 이후 중앙경위단은 계속하여 중남해의 경호보위업무를 맡아오고 있다.
중앙경위단의 부대번호는 여러번 바뀌었다. 1953년에는 총참모부의 통일번호를 따라 "總字001"로 불렀다. 이 명칭은 1950년대말까지 사용되었다가, 다시 3747부대로 명칭이 바뀌어서 1964년까지 사용하였다. 1964년경부터 8341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임표사건이후 잠시 57001부대로 바꾸었다가 다시 8341부대라는 명칭을 회복하였다.

8341부대라는 명칭에 대하여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모택동 주석이 호남성을 방문했을 때, 어느 고승이 모택동주석의 명을 봐주고는 당신은 "83세까지 살 것이고, 41년간 집권할 것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앙경위단을 8341부대로 바꾸었는데, 과연 모주석은 1893년 12월 26일에 태어나서 1976년 9월 9일에 사망하였으니 83살때 죽었고, 1935년 공산당주석을 맡은 이래로 1976년까지 꼭 41년간 국가지도자로 지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원래 8341부대는 군용창고의 번호였는데, 창고가 철거되면서 이 부대의 번호가 비어있게 되고, 중앙경위단의 기밀유지를 위하여 부대명칭을 바꾸곤 하였는데, 마침 그 번호가 비어있어서 중앙경위단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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