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나이에 요절한 중국고대 3대신동(神童)은 누구도 18살까지 살지 못했다.
글: 천애간점(天涯看點)
장강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고, 천고의 풍류인물들은 그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중국역사에서 수많은 빛나는 영웅인물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들중에서 일부 인물은 어린 나이에 명성을 떨친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나이에 진흙을 가지고 놀고 있을때, 그들은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주 짧은 시간만에 다른 사람은 평생을 쏟아부어도 얻기 힘든 성취를 거두었으나, 하늘이 재주를 질투하였는지, 한창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아,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예를 들면 아래의 세 사람이다. 이들은 중국고대에 공인된 신동들이다. 지혜가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모두 단명했다. 누구도 18살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항탁(項橐)
<삼자경(三字經)>에 이런 말이 있다: 석중니(昔仲尼), 사항탁(師項橐), 고성현(古聖賢), 상근학(尙勤學). 중니는 공자(孔子)의 자(字)이다. 즉 공자가 항탁이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자가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 항탁은 어린아이이다. 당시 공자와 제자가 동쪽으로 유람을 떠나 비곽(碑廓)에 도착했고, 산천이 수려한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멀리서 그들의 마차를 보고 한켠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오직 한 아이만이 도로의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아이가 바로 항탁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는 그 모습을 보고 수레를 멈추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항탁은 꼼짝하지 않는다. 공자는 호기심으로 그를 향해 왜 그런지 물어본다. 항탁은 그의 말이 불손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약간 불쾌해 한다. 그래서 이들을 놀려주려고 생각한다. 서로 말이 오고 갔고, 공자가 일련의 문제를 낸다. 그러나 항탁이 모조리 풀어버린다. 공자는 이 아이의 지식이 넓고 깊어서, 자신이 말로는 상대가 되지 않겠다고 여긴다. 그래서 졌다고 하면서 항탁에게 말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로다. 내가 너를 스승으로 모시겠다."
항탁이 공자를 세번이나 곤란하게 만든 이야기가 널리 퍼진 후, 제후와 국군 그리고 주천자는 이 아이가 나중에 성장하여 어느 제후를 보좌하게 되면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하여 앞다투어 무사를 보내어 항탁을 데려가고자 한다. 그러나 항탁은 그들의 요청을 모조리 거절한다. 자신은 고향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나라에서 온 무사는 며칠간 설득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져온 건량이 바닥나자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기 전에 항탁이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를 죽여버린다. 총명한 항탁은 제후들간의 다툼에 희생된다. 그의 나이 12살때였다.
감라(甘羅)
항탁은 공자를 이겼지만, 감라의 성취는 그보다 더욱 컸다. 감라는 진(秦)나라의 좌승상 감무(甘茂)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12살때 여불위(呂不韋)의 아래에서 일했고, 자진하여 진나라에서 조나라로 보내는 사신으로 간다. 그는 자신의 총명함으로 조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와 맹약을 맺는다. 진나라의 태자단을 돌려보내고, 조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게 되고, 조나라는 5개의 성읍을 진나라에 넘겨준다.
진나라는 그의 외교노력으로 5개의 성을 얻었으니 이런 공적은 세우기 힘든 것이다. 1개의 성도 빼앗으려면 매우 어려운 것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감라는 12살때 진왕에 의해 상경(上卿, 승상에 해당함)의 직위를 받는다. 나이 어린 그가 이런 성과를 거두다니 나중에 나이가 들면 더욱 큰 성취를 이룰 터였다. 그러나 감라는 역사서에서 사라진다. 아마도 항탁과 마찬가지로 질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 것이다.
조충(曹冲)
조충도 마찬가지로 고대에 비교적 안타까운 신동중 하나이다. 그는 조조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애하기로 유명했다. <삼국지>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5,6살에 그의 지적능력은 성인과 같았다." 즉 그는 5,6살때의 지적능력이 어른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충칭상(曹冲秤象)의 이야기도 남겼다. 모두 알다시피 조조는 인재를 아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총명하니 자연히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조조는 심지어 자신의 지위를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만일 조충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조조의 지위를 누가 물려받았을지 알 수가 없다. 조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8년(건안13년), 조충은 중병으로 요절한다. 죽을 때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조조는 그의 병중에 여러번 하늘에 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는 애통해 마지 않았다. 매번 이 아들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눈물을 흘렸다. 특별히 견황후의 일족에서 죽은 여자를 그와 합장시켜주기도 했다.
언급할만한 점은 조충의 요절이 또 다른 신동의 사망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주불의(周不疑)이다. 이 두 신동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조조는 두 사람이 교류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친구였기 때문에 주불의까지 목숨을 잃게 된다. 조충이 죽은 후, 조조는 주불의가 총명하다는 것을 꺼려서 사람을 시켜 그를 죽여버린다. 조충이 죽은 후에 손을 쓴 것은 그의 생각에 조충이라면 주불의를 콘트롤할 수 있지만, 조비는 아마도 주불의를 콘트롤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떄문이다.
英年早逝的中國古代3大神童誰也沒有活到18歲。
文章:天涯看點
長江之水東流,千古風流人物從歷史洪流中消失。 中國歷史上曾出現過許多光輝的英雄人物。 他們當中有些人物小有名氣。 當其他人同樣年紀在玩泥巴時,他們便揚名天下。
可以這麼說。 短短的一段時間裏, 別人傾盡一生也取得了難得的成就, 也許是老天妒忌才華, 英年早逝, 令人惋惜。 比如說下面三個人。 他們是中國古代公認的神童。 智超人,皆短命 誰也沒有活到18歲。
項鐸
《三字經》中有這樣一句話:昔仲尼、師項鐸、古聖賢、尚勤學。 仲尼是孔子的字。 也就是說,孔子尊奉了項卓爲師。 還有孔子拜師的李恆鐸是小孩子。 當時孔子與弟子東遊,到達碑廓,看到山川秀麗,正騎馬往東觀賞風景。 幾個孩子遠遠地看到他們的馬車,躲到一邊去了。 但只有一個孩子在道路的中央一動不動。 這孩子就是項託。
孔子的弟子子路看到他的樣子後,停下車大聲喊道。 但是,港卓卻一動不動。 孔子好奇地問他爲什麼。 項卓見他的話不恭,心裏有點兒不痛快。 所以想逗他們玩。 言傳身教,孔子出一系列問題。 但是,航託會全部解除。 孔子這個孩子知識淵博,自以爲談不上對手 所以一邊輸一邊對項卓說 : " 後生可畏。 我來拜你爲師。"
在項卓三次使孔子陷入困境的故事廣爲流傳後,諸侯、國軍和周天子認爲,如果這個孩子後來長大輔佐某個諸侯,就可以實現霸業。 於是爭先恐後地派武士去領航。 但是,港卓拒絕了他們的全部要求。 說自己不會離開家鄉。 從吳國來的武士勸導了好幾天,但都沒有成功,在自己帶來的乾糧用完後,爲了不讓項卓回到自己國家之前爲別國工作,就把他殺了。 聰明的項託犧牲於諸侯之間的爭鬥。 那時他12歲.
甘羅
項卓雖然戰勝了孔子,但甘拉的成就卻比他更大。 甘羅是秦朝左丞相甘茂的孫子。 從小聰明就與衆不同。 12歲時在呂不渝的手下工作,自願從秦朝送到趙國的使臣。 他以自己的聰明才智說服趙,與趙結盟 送回秦國的太子團,趙國攻打燕國,趙國把5個城邑讓給秦國。
秦國在他的外交努力下,獲得了五個姓氏,這樣的功績是很難立的。 因爲想要奪走一個城堡是非常困難的。 因此甘羅在12歲時被秦王授予上卿(相當於丞相)的職位。 年紀輕輕的他居然取得了這樣的成績,以後年紀大了,一定會取得更大的成就。 但是甘藍從歷史書中消失。 也許和項卓一樣,是被嫉妒的人殺死的。
曹衝
趙忠也是古代比較遺憾的神童之一。 他是曹操的兒子。 從小以聰明仁愛著稱。 《三國志》對他的評價是這樣的 : " 小時候就很聰明。 5、6歲的時候,他的智力就像成年人一樣。" 還留下了曹衝瓊象的故事。 衆所周知,曹操愛才。 但是自己的兒子如此聰明,自然受到曹操的喜愛。 曹操甚至想讓出自己的地位。
要不是趙忠年少夭折,曹操的地位誰承繼無從得知。 也有可能不是曹妃。 但遺憾的是,在208年(建安13年),趙忠因重病夭折。 他去世時年僅13歲. 曹操在他的病中多次向天空祈禱。 他死後哀痛不已。 每次提到這個兒子,總是淚流滿面。 還特意將甄皇后一族死去的女子與他合葬。
值得一提的是,趙忠的夭折又導致了另一個神童的死亡。 他就是周不疑。 這兩個神童的關係很好。 曹操贊成兩個人交流。 但沒想到的是,因爲他是朋友,連周佛義都失去了生命。 趙忠死後,曹操怕主不義,就派人把他殺了。 趙衝死後動手,在他看來,如果是趙衝,可以控制周不義,但曹妃可能控制不了周不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