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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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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염석산(閻錫山)의 병사가 오발한 총알을 한발 맞은 임표(林彪)의 "괴병(怪病)"에 대한 임표 운전기사의 회고록


글: 초성서(楚成瑞)
서 요녕성 대련에 거주한다. 1945년 영구(營口)에서 동북인민자치군에 참여하고, 입대한지 3년만에 제4야전군의 총사령관 임표의 운전기사가 된다. 임표는 그의 차를 타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오고, 다시 북평에서 개봉으로 남하하고, 그후에 한구로 진입한다. 1950년초, 꽃을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그와 임표의 '승용차'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매년 이어지는 전투로 임표는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임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이 병은 일찌감치 평형관전투전에 이미 앓았다. 그때 적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했다. 그래도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을 1만명 죽이면서 아군 8천을 잃는 식은 안된다. 그에게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괴롭혀서 전략을 잘 짜는 것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머리를 너무 많이 쓰다보니 신경쇠약에 걸리고, 불면증이 시작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평형관전투때 그는 건뇌기(健腦器)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 뒤에 더욱 심해진다. 1938년 3월 1일 새벽, 명을 받들어 115사단의 직속부대를 이끌고 서진하던 임표는 국민당의 염석산(閻錫山)의 병사가 오발한 총알을 한발 맞는다. 총탄이 그의 앞가슴으로 들어가 등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그의 신경을 건드려 후유증을 남긴다. 나중에는 그 고통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임표가 심신을 가장 많이 소모한 것은 국공3년내전이었다. 1945년 9월 중앙은 "남으로 방어하고, 북으로 발전한다"는 전략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임표에게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동북을 점령하도록 명령한다. 이 결정은 영명했지만,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임표가 막 동북에 도착했을 때, 위기가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기중 하나는 근거지가 없다는 것이다. 공산당원에 있어서, 근거지가 없으면, 인민의 지지를 잃는 것이고, 모래사장으로 들어간 토끼처럼 결국은 목말라죽거나 굶어죽게 된다. 전투를 시작했는데, 들것을 들 사람조차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 때, 황극성(黃克誠)이 중앙에 전보를 보내어 동북의 아군이 서로군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 나중에 힘들게 노력하여,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3년간 힘들게 버티면서 동북의 형세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우리가 97%를 점령했고, 부대는 근 100만으로 발전한다. 국민당원들조차도 우리에게 감탄하였다. 장개석이 아끼는 장군인 두율명(杜聿明)은 이런 말을 한다. 임표의 부대는 병력부터 전략전술, 무기장비 및 전투력까지 모두 전군중 최고이다.
우리는 순풍을 탔고, 임표의 불면증은 더욱 심해진다. 잠을 잘 자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다. 나도 알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아주 힘들어 했고, 스스로 의학서적을 보고, 자신이 약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번은 그가 스스로 배합한 약을 먹었는데, 한밤중에 히스테리증상이 나타나서, 신발 한짝만 신고 눈 속으로 나갔다. 경호원들이 끌고 들어오려 했지만 끌려오지 않았다. 요심전투, 평진전투기간동안 그는 아예 치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치료할 시간도 없었고, 치료할 수도 없었다. 요심결전은 위험했다. 장개석의 5대주력중 2개가 동북에 있었다. 총사령관은 모두 항일명장들이다. 그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고, 잘못하면 임표가 힘들게 쌓아온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짧은 4개월반만에 임표는 두 번의 큰 전투를 지휘한다. 요심전투와 평진전투이다. 섬멸하과 개편시킨 국민당군대가 근 백만에 이르렀다. 당중앙과 모주석은 아주 기뻐한다. 1949년 3월 31일, 모주석은 북평에서 친히 제4야전군의 사단장이상 간부를 접견한다. 주덕, 유소기, 주은래등 중앙의 지도자들도 모두 접견에 참석한다. 듣기로 회식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야전군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특별한 상이라 할 수 있다.
얼마 후, 임표는 제4야전군을 이끌고 다시 남하한다. 처음에 전투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면서 무한에 도착한다. 그러나 '소제갈(小諸葛)'이라는 별명을 가진 백숭희(白崇禧)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백숭희는 아주 교활했다. 임표는 서너번 그를 생포하려고, 전투를 벌이고 그를 섬멸하려 했으나, 매번 그는 도망쳤다. 백숭희의 병사들도 도망을 잘 갔다. 그들은 가볍게 입고, 장비도 가벼웠다. 그리하여 밭두렁이나 좁은 길, 늪지로 다녔다. 추격도 못하고, 체포하지도 못했다. 임표는 조급해져서 더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형보전투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약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전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조건은 더욱 좋아지게 된다. 임표는 그러나 더 약해진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 나중에는 두통으로 발전한다. 갈수록 심해져서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머리가 어지럽게 되어,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힘껏 눌렀다. 한참 누르면 약간 좋아졌다. 그때는 그가 길을 걸으면서 손으로 작은 수건을 들고 머리를 누르는 것을 항상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대신 눌러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찌된 일인지 배탈이 났다. 듣기로는 복숭아 2개를 먹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임표는 과일도 꺼려하게 된다.
1950년초, 임표는 한구에 거주한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는 단련을 열심히 한다. 처음에는 거주하던 집에서 자전거를 탔다. 그는 아주 빨리 탔고, 경호원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단련해도, 효과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두게 된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게 야생오리를 잡으러 가자고 권했다. 장소는 무창의 동호(東湖)이다. 나는 차를 운전했고, 그에게 총을 주고, 총알을 장전해주었다. 야생오리를 잡아도 그는 먹질 못했고, 병사식당에 모두 보냈다. 몇번 잡으러 가지도 않았고, 몸도 별로 좋아지지 못했다. 그래서 더 이상 잡으러 가지도 않게 된다.
나중에 임표의 병세가 더욱 악화된다. 할 수 없이 당중앙에 신청하여, 전선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가 치료하기로 한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먼저 남조장(南操場)에 거주했다.나는 그때도 임표의 차를 몰았다. 임표의 신체가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외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 일도 바쁘지 않았다. 어떤 때 나가면 모주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중남해의 풍택원(豊澤園). 그때도 내가 운전했다. 나는 모주석이 그에게 잘 대해준다고 느꼈다. 매번 얘기를 나눌 때마다 모주석이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곤 했다. 그때 그의 병은 주로 추위를 타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당시의 북경은 봄에도 추웠다. 임표의 차에는 히터가 없었다. 차에 온도계는 있었다. 임표는 당시에 온도를 항상 살폈다. 차안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나도 방법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임표가 차를 타고 나갈 때면, 나는 4,5명의 경호원들에게 먼저 차 속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먼저 차를 몰고 몇 바퀴를 돌았다. 경호원들은 모두 밑바닥에서 온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총사령관의 차를 타는게 새로웠고 모두 즐거워했다. 사람이 많이 타면 온도가 올라간다. 처음에 이렇게 하고 난 후에 임표가 차에 타서는 오늘은 차 안이 따스한데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사실대로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는 말을 들은 후, 그렇지 사람도 난로이지라고 말했다. 그는 몸이 너무 약해서, 잠시 따스하다고 하여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번은 그가 모주석에게 갔는데, 돌아와서 차에서 내리자 겨우 십여미터를 걷고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집안으로 걸어들어가질 못했다. 설회생(薛會生)이라는 경호원이 그를 등에 업고 집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같은 근무자들도 통지를 받았다.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임표의 집안에서도 준비를 했고, 출국하기 힘든 내근인원은 교체했다.
나중에 한국으로 가지 않았다. 지금 적지 않은 책에서 임표가 '꾀병'을 앓으며 한국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말이다. 임표는 일찌감치 병이 있었다. 전투는 항상 힘들었고, 동북에서 화중까지 싸우면서 나중에는 정말 버티질 못했다. 모주석의 비준을 받아 북경으로 돌아와 치료했는데, 돌아온 것이 1950년 3월이다. 항미원조에 나선 것이 1950년 10월이니까 반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임표의 병세가 심해져서 나는 보직을 바꾼다.
1953년 봄, 임표의 병세는 계속 반복된다. 원래 앓고 있던 병이 치료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병을 얻었다. 도시에 사는 것은 시끄럽다고 여겨서 6월에는 이화원 안의 취운헌(翠雲軒)으로 이사간다. 당시 임표의 병은 이미 심했다. 나는 당시에 이화원으로 가는 길이 울퉁불퉁해서 자동차가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것에 임표를 싣고 취운헌으로 갔다.
이 해는 임표가 1938년 3월에 부상을 입은 후 병세가 가장 심했던 때이다. 주로 추위를 겁내고, 더운 것도 겁내고, 두통, 요통, 불면증이었다. 하루종일 저녁때까지 조용히 있지 못하고 계속 활동했다. 저녁이 되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잠들지 못했고, 내근인원들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매일 그를 최소 20여시간 돌봐야 했다. 여러 내근인원들이 모두 피로해서 쓰러졌다. 그는 귀찮아하고 힘들어했다. 내근인원들도 견디기 힘들었다. 주로 몸이 버티질 못했다.
임표의 병이 심해지면서 외출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자동차가 필요없게 된다. 그래서 운전기사인 나도 기본적으로 실업상태가 되었다.
하루는 상사가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차를 몰지 말고 지금 몇몇 내근인원들이 피로해서 도저히 안되겠으니, 네가 도와주어야겠다." 그리하여 나도 내근직으로 바꾸게 된다.
그때 나는 젊었고, 몸도 좋았다. 임표에게 감정도 있었다. 내근을 하면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하루 이십여시간을 병석에 누워있는 임표를 지켰다. 그때의 임표는 이미 병이 극도로 심해졌다. 그는 얼굴색이 창백했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말하는 것에 힘이 없었다. 하루종일 그저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나도 보기 힘들었다. 그도 움직이고 싶어했으나, 앉을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의 손과 팔뚝을 주물러주면 그가 조금 편안해 했다. 
임표는 평상시에 말을 많이하지 않았다. 지금 병이 심하니 더욱 말수가 줄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눈을 멀거니 뜨고 있었다. 마치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좋을 때면 나에게 몇 마디 했다. 예를 들면 나의 집안 사정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익숙해지고 나서는 나도 그에게 몇 가지 물어보곤 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내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전투시에 며칠 밤낮을 자지 않으면 피곤하지 않았냐고. 그는 피곤했다고 말했다.
그가 거처하는 곳은 낡은 방이었다. 안에는 나무판으로 벽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그림이 조각되거나 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무판은 아마 장목(樟木)이었던 것같다. 냄새가 났고, 임표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할 수 없이 사람을 시켜 그 나무판으로 만든 벽을 철거했다. 방이 넓어지니 더욱 추워보였다. 그렇다고 나무를 땔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전열곤(電熱棍)을 추가했다. 자곤(瓷棍)에 전열사를 감고 전기를 통하면 발갛게 되고 열을 발산했다.
빛을 겁내서, 그의 방에는 3중으로 커텐을 쳤다. 사람이 들어가면 마치 동굴에 들어가는 것같았다. 눈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낮에 들어갈 때도 손전등을 가져가야 했다. 그는 손전등의 빛도 너무 강하다고 여겨서 싫어했고, 천으로 감싸야 했다. 햇볕은 보지도 않고, 통풍도 되지 않으며, 잠자는 이불과 요도 자주 갈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침대에 습기가 찼다. 나는 두 세트의 이불과 요를 준비해서 매일 햇볕을 쬐었다. 나중에는 3세트로 늘여서 돌아가며 햇볕을 쬐고 매일 갈았다. 만일 흐린 날이면, 난로 위에 올려서 말렸다. 이렇게 하다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역시 네가 잘하는구나. 이불과 요를 어떻게 말렸지?라고 말했다.

가장 힘든 것은 나였다.
임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문가가 진단같은 것을 하는 외에, 그의 곁에는 의료소조가 있었다. 북경의원의 주원장, 간호사 1명, 그리고 나이다. 나는 생활을 담당했고, 주원장은 검사를 담당했고, 간호사는 주사를 놓는 것을 책임졌다.
가장 힘든 것은 나였다. 그때 임표는 식사나 대소변도 모두 침대위에서 해결했다. 무서워하는 것이 더욱 많아졌다. 햇볕을 무서워하고, 물을 무서워하고, 바람을 무서워했다. 그 '바람' 때문에 나는 두번이나 그에게 혼났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너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나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너무 빨리 걸어서 바람이 나온다. 나중에 나는 그의 말을 잊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냐. 그 다음부터는 주의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딸 두두(豆豆)가 소학교를 다녔는데 그를 보러 오곤 했다. 당시 항상 캄캄한 방안에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하니,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딸이 오면 임표는 아주 기뻐했다. 그는 두두의 손을 잡고는 "두두! 두두!"라고 말했다. 두두는 부친에게 티벳족 춤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바람이 생길까 겁내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문밖에서 임표에게 춤을 보여주었다.
임표는 어떤 곳에 있든 여름에 모기장을 걸지 않았다. 그는 모기장을 치면 답답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화원은 곳곳에 물과 풀이 있어서 잘 때 모기장을 치지 않으면 모기가 많았다. 할 수 없이 그를 위해 모기를 잡아야 했다. 모기를 잡으면서 바람은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낸다. 대나무 장대에 수건으로 채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모기를 한마리 한마리 벽에 눌러서 죽여야 했다.
빛을 겁냈기 때문에, 임표의 방에는 등이 없었다. 체온계를 보기 위한 대등(臺燈)만이 있었다. 그 등에도 천을 몇겹 덮었고, 단지 구멍 하나만을 남겼다. 그는 추위도 겁내고 더위도 겁냈으므로, 저녁에 잘 때는 세번 요를 바꿔야 온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 잘 때는 침대보만 덮는다. 한밤중이 되면, 수건으로 바꾼다. 아침 5,6시가 되면 담요(毛毯)로 바꾼다. 바꿀 때도 아주 번거롭다. 그가 추우면 안되기 때문에, 먼저 바꾸는 것을 동그랗게 말아서 그의 목아래 놔두고, 그후에 조금씩 위에서부터 조금씩 벗겨내면서 조금씩 덮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다 벗기고, 새걸로 갈아주면 끝이다. 매일 밤에 두번 소변을 보는데 일반적으로 9시경에 한번 새벽1시경에 한번이다. 역시 침대위에서 해결한다. 그때도 그가 추우면 안된다. 이렇게 하루 밤을 보내다보면 나는 겨우 2,3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그가 아침에 식사를 하고나서야 나는 다시 잠깐 잘 수가 있다. 그러나 2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할 일이 생긴다.
한 사람이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능력이 있더라도, 일단 병석에 눕게 되면 그저 남이 해주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서는 임표가 백만대군의 총사령관이었고, 나의 총사령관이었지만, 그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는 내가 그의 총사령관인 셈이다. 내가 그의 내근일을 하기 시작한 후로 그는 누구도 필요없다고 하고 나만 찾았다. 그때 그는 내 말을 들어야 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뭘 하라고 하면 그는 뭘 해야 했다.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했다. 세수같은 것도 다른 사람이 말하면 안되지만 내가 그에게 말하면 그는 세수를 했다. 단지 그는 반복하여 말했다. 감기 걸리지 않게 해야 한다. 감기 걸리지 않게 해야 한다. 나도 그가 감기에 걸리는 것이 겁난다. 그래서 젖은 수건을 가지고 그를 닦아 주었다. 그는 손을 닦지 않았다. 손에는 주름이 깊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닦아 주었다.

그를 속이다
당시, 내가 의사를 만났고, 그가 먹는 약의 대부분은 신경안정제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의 정신이 몽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체온에 신경을 많이 썼다. 체온이 항상 보통사람보다 높았다. 항상 37도이상이었다. 매번 체온을 잴 때마다 물었다.일단 체온이 내려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그는 불안해 했다. 주원장이 그에게 설명했다. 이건 별 문제가 아니다. 나도 그에게 말했다. 항상 이렇게 누워계시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듣지 않았다. 항상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번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날 나는 돌연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주원장을 찾아갔다. 주원장이 무슨 방법인지 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믿으니, 내가 두 개의 체온계를 가지고, 하나는 고장난 것으로 항상 36도에 맞춰놓고, 다른 하나는 진짜로 해서, 체온을 잴 때 나는 체온계를 바꿔치기해서 그에게 진짜 체온계를 보여주지 않고 그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니, 주원장이 그게 가능하겠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는 체온을 36도까지 낮춰달라고 요구하는데, 그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방안이 캄캄하니 그 본인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나는 한번 시험해 보았다. 체온계의 온도를 36.6도로 설정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계속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려갔지? 그 말을 듣자 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빨리 내려가는 것도 그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가짜 체온계의 온도를 36.8도로 고쳤다.
이렇게 한달여 그를 속였는데, 그건 정말 효과가 있었다. 그는 신색이 많이 좋아졌다. 주원장도 기뻐했다. 나에게 '너 정말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임표는 체온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단 체온이 내려가면 그는 마음을 놓았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한다. 일어나서 앉아있고 싶다. 내가 그를 부축해서 일으키고서 그를 보자 깜짝 놀랐다. 그가 누워있을 때는 방안이 너무 어두워 수염이 그렇게 길게 자란지 몰랐다. 앉으니 수염이 반자(1자는 30.3센티미터)나 자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놀라서 멍하니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그는 물었다. 왜? 나는 수염이....깍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돼. 깍으면 너무 추워. 나는 그럼 좀 다듬기만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승락했다.
듣기로 나중에 섭군(葉群, 임표의 처)도 자주 임표를 속였다. 나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길 바란다.

총리가 천막을 치는데 동의하다.
임표가 병을 앓는 동안, 임표를 보러 온 고관들은 아주 많았다. 가장 많이 온 사람은 주은래이다. 총리는 우리같은 일하는 사람들과도 모두 잘 알았고, 태도도 아주 온화했다. 나를 보면 바로 물어보셨다. 린총사령관은 요즘 어떠신가? 그때마다 나는 임표의 근황을 총리에게 보고했다.
임표의 몸이 약간 호전되었을 때, 총리가 다시 오셨다. 나는 총리에게 우리가 한 일들을 보고했고, 총리를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칭찬해 주었다. "아주 잘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나는 총리에게 건의했다. 임표의 방 바깥에 천막을 세워서, 임표가 나와서 태양을 쐬게 해주면 좋겠다고. 총리는 좋다고 말했다. 금방 총리는 사람을 시켜 나의 요구대로 작은 천막을 세워 준다.
이 천막은 폐쇄식이다. 그러나 3면의 가림막은 걷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걷어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임표에게 문을 나가 햇볕을 보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나는 이미 등을 가린 천의 구멍을 조금씩 크게 넓히다가, 그 후에는 등을 덮은 천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어쨌든 그는 점점 적응해 나갔다. 사람이 햇볕을 전혀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임표는 문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듣자 극력 거부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내가 업고 나갈테네 한번 해보자. 나중에 그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나는 천막 안에 등나무의자를 놓아두고, 그를 등에 업고 나와서 잠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업고 방으로 되돌아갔다. 점점 그는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업히지 않겠다고 하였고, 부축을 받고 걸어나올 수 있었다.
활동이 많아지니, 몸이 점점 회복되었다. 그러자 다른 것들도 천천히 좋아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식사하는 것도 원래는 겨우 오리알도 청피(靑皮)만 먹었고, 황피(黃皮)는 못먹었다. 만일 만두를 먹으면 기껏해야 작은 만두 2개를 먹었다. 그리고 고기다진 것과 채소로 만든 작은 완자를 먹을 수 있었다.

그를 흔들다
임표는 그 때 한가지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손과 팔을 두드리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와 여러 해동안 같이 지냈고, 그의 생활습관을 아주 잘 알았다. 오랫동안 관찰해보니, 전투를 할 때 그가 일단 차를 타면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침대에서 잠을 잘 자지 못했지만, 차에서 어떤 때는 아주 푹 자곤 했다. 한번은 그가 견디기 힘들어 하면서 나에게 팔을 두드려 달라고 했다. 그의 손을 두르르고 팔을 두드려도 안되었다. 그러자 나에게 어깨를 두르려 달라고 했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기분이 나빠했다. 그래서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차를 태우는 것이다. 차를 타고 흔들리면 온몸이 진동하지 않겠는가. 온몸이 흔들리면 더욱 좋지 않을까?
요즘 누군가 임표가 사람에게 차를 태워서 흔들리게 해달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한다. 당시에 그런 방식은 내가 생각해낸 것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생각해낸 것이다. 그때는 이화원 안은 습기가 너무 많아서, 우리는 이미 향산에서 멀지 않은 유광사(遺光寺)로 옮겨가 있었다.
나는 먼저 중형트럭을 구했고, 뒤에 천으로 천막을 둘렀다. 양쪽에 각각 1개씩의 창문을 낸다. 뒷쪽으로는 문을 두 개 달았다. 요즘 나오는 베이징지프의 것과 비슷했다. 비서들은 내가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자 바로 물었다. 뭐 하는 거냐고. 수장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가. 바깥의 길이 평탄하지 않으니 차를 타면 그가 흔들릴 것이다. 비서는 말했다. 그래도 되겠느냐고. 섭군도 와서 물었다. 내가 설명하자 그녀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준비를 마치고, 나는 임표를 데리고 나왔다. 나가서 좀 흔들리면 좀 편안해질 것같다고. 그는 하지 않겠다고 하고, 앉지 않으려 했다. 나는 말했다. 먼저 잠시 앉아보십시오 안되겠으면 우리 하지 맙시다. 그는 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결국 내가 말한 것이 통했다. 결국 좋다. 해보자. 너에게 맡겨보마.
나는 경호원들에게 등나무의자를 가져오게 하고, 경호원들은 앉은뱅이의자에 앉아서, 임표를 부축하게 했다. 준비를 마친 후 나는 차를 몰고 상홍기(厢紅旗)에서 출발하여 향산(香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때 상홍기에서 향산까지는 모두 돌길이었다. 노면이 울퉁불퉁했다. 차가 그 위를 달렸다. 돌아와서 물어보니 임표가 괜찮았다고 했다. 다음 날에도 다시 차를 태웠다. 매일 한번씩 타고 돌았다. 그렇게 여러번 차를 타자 그의 정신은 훨씬 좋아졌다. 나중에는 스스로 정원을 천천히 돌 수도 있었다.

임표는 "나가서 돌아보자"는데 동의하다
임표를 보러 자주 오는 사람은 주은래 총리, 나영환(羅榮桓), 팽덕회(彭德懷)와 황극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총리는 1달에 한두번 오고, 팽덕회는 조금 더 자주 왔다. 황극성이 오는 것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고나면 나에게 아주 상세하게 물어보았고, 여러가지 아이디어도 내주었다.

여기서 황극성에 대해서 얘기해보기로 하자.
임표의 몸이 약간 좋아진 후, 하루는 황극성이 임표를 보러 왔다. 보고난 후에 나에게 물었다. 어떠냐, 한번 나가서 돌아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가 말하는 나가서 돌아보자는 말이 외지로 요양가서 한동안 지내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섭군에게 물어보겠다고 대답한다.
섭군은 비록 그의 부인이지만, 임표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임표는 누구에 대해서도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섭군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어떤 때는 섭군이 임표에게 혼나고 있었고, 임표가 큰소리를 치면서 그녀에게 "꺼지라"고 소리치는 것도 들었다. 그래서 그때 섭군도 임표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의 방에 가는 일이 많지 않았다. 다만 임표의 치료와 행동은 섭군도 다 알고 있었고, 의견을 내곤 했다.
내가 임표를 외지로 요양가는 일에 대하여 섭군에게 얘기하자, 섭군은 그녀도 결정할 수 없으니 본인에게 물어보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직접 임표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먼저 그의 작은아들 노호(老虎)를 불러서, 그를 시켜 부친에게 외지로 가보자는 말을 하게 했다. 노호는 아직 어려서 철이 없었다. 그에게 무엇을 시키면 바로 했다. 그는 임표에게 달라붙어 외지로 나가보자고 계속 말했다. 그러자 임표의 '결점'이 다시 나타났다.
그 방식은 안통했다. 다음에는 황극성이 왔을 때,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황극성이 내가 한번 말씀드려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임표가 동의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전용열차를 타는 것은 안되고, 일반백성들과 같이 일반객차를 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상부에서도 임표의 요양에 대한 비준이 내려왔다.
임표같은 간부가 외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전용열차가 준비된다. 임표가 의심하지 않도록, 철도부와 상의하여, 임표의 전용열차를 먼저 일반객차와 같이 세워두었다가. 임표가 전용열차에 탄 후에 다시 일반객차를 먼저 보냈다. 임표는 전용열차칸 안에 있으므로 바깥의 일을 알 수는 없었다.
기차가 출발할 때도 임표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동안이 지난 후, 임표는 창의 커튼을 열어서 바깥을 보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척 화를 내며, 바로 열차를 세우라고 소리치며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엄중하게 내게 물었다. 이게 누구 아이디어냐고. 나는 모르는 척했다. 모릅니다. 그는 다시 수행하던 곽비서에게 물어본다. 곽비서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는 그래도 차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내가 나서서 그를 설득했다. 세우라면 세울 수는 있는데, 세우고나서 어떻게 하실 거냐. 정말 세우게 되면, 모든 열차가 다 서야 한다. 그러면 손실이 적지 않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남경으로 데려가고 다시 항주로 갔다.
임표는 기차 안에서 잠을 잘 잤다. 아마도 기차가 달릴 때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임표는 기차를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때문일 것이다.

항주의 대철상(大鐵床)
항주에 머문 시간은 비교적 길었다. 임표의 몸도 점점 호전된다. 단지 그는 '차를 타고 흔들리는' 것을 즐기고 싶어했다. 그의 몸은 흔들리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건 나에게 또 난제를 던진 것이다. 항주는 북경과 다르다. 어디에 가서 중형트럭을 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중형트럭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북방의 돌길을 찾기 어려웠다.
그 상황을 듣고, 항주의 현지인원들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들은 이표를 위해 전동으로 흔들리는 침대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 엔지니어를 불렀다. 요구조건을 그 엔지니어에게 얘기하자, 그 엔지니어는 이해를 전혀 못했다. 결국 내가 그에게 얘기했다. 침대를 하나 만드는데, 전기를 켜면 말을 타는 것처럼 흔들리게 만들면 된다고. 그는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그런 것은 설계한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도 불러서 같이 연구해보겠다고 한다. 그후에 그는 다시 설계했고, 도면을 그렸다. 아주 진지하게 일했다. 결국 정말 하나를 만들어 냈다. 내가 보니 현대화된 것이고, 전기로 움직이며, 기어도 있고, 가죽끈도 있고, 반원형이었다. 방 한칸을 꽉 채웠다. 그리고 무게가 몇톤이나 되었다. 모터를 돌리면, 웅웅하면서 움직였고, 그 위의 철상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 '대철상'을 설치한 후, 임표를 불러서 경험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딱 한번 해보았다. 그것도 3분이 되지 않았다. 그후에 다시 찾지 않았다. 이런 진동방식과 군용트럭을 타고 느끼는 감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영화에서 전투를 하는 것과 실제로 전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듯이. 임표는 실제로 흔들리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임표에게는 이기지못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임표에게는 이기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몸의 병이었다. 1938년 3월 염석산의 병사에게 총알을 맞은 후, 그는 평생 좋아지지 못했다. 이 총알은 간단하지 않았고, 임표의 일생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터에서 적을 상대할 때는 임표에게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몸의 병을 상대하는데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소련을 간 적도 있다. 국내국외의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모두 그의 병을 치료해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할 수 없이 스스로 처방을 내렸다. 의학서적 한 권을 동북에서 관내로 관내에서 화중으로, 다시 화중에서 북경으로 가지고 다녔다. 하도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는 경호원을 시켜 단약을 만든 적도 있다. 스스로 여러 배합법을 수집하기도 했다. 들은 바에 따르면 쌍성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약을 먹었는데 바로 쇼크가 왔다. 듣기로 임표의 병이 가장 심했을 때는 경호원의 손을 잡고 "형제여 나를 도와달라!"(죽여달라는 듯)고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임표의 병은 어떤 때는 아주 심했고, 어떤 때는 아주 가벼웠다. 다만 그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의사들이 그를 진단했을 때는 기록이 모두 남아 있다. 이런 고위직의 간부에 대하여 중앙에서도 모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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