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67년 8월 26일, 상하이를 순시하던 모택동은 당시 중공군대 대리총참모장을 맡고 있던 양성무(楊成武)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王), 관(關), 척(戚)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파괴하니 나쁜 자들이다. 네가 오직 (주은래)총리 한 사람에게만 보고해서 그들을 체포하도록 보고하여, 총리가 책임지고 처리하라고 해라."
왕은 왕력(王力), 관은 관봉(關鋒), 척은 척본우(戚本禹)이다. 당시 왕, 관, 척은 모두 중앙문혁소조의 구성원이고, 문혁초기 모택동과 모택동의 처이자 중앙문혁소조 부조장인 강청의 직접 영도하에 호풍환우하던 인물들이다.
다만, 모택동의 한 마디로 모택동의 3대 붓잡이 왕, 관, 척은 모두 타도되어 버린다.
왕력은 처음에 조어대 국빈관 2호루에 연금되었다. 그후, 북경 서산의 한 빌라내에 계속 연금되어 있으면서, 북경위수구에서 감시했다. 1968년 1월 26일, 구정 전날, 왕력은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히고, 이때부터 14년간 갇혀 있게 된다.
진성감옥의 왕력
<왕력반사록(王力反思錄)>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진성감옥에 들어간 후 계속 독방에 갇혀 있었으며, 아무도 심문하지 않았다.
전반 5년간은 나가지도 못하고, 그 어떤 문자로 볼 수 없었다. 매일 24시간 문에 뚫린 작은 감시구명으로 감시받았다. 잠잘때도 몸을 뒤집을 수 없었고, 반드시 그 감시구멍을 향해서 자야 했다. 잠을 자는 침대는 2개의 등받이없는 의자를 붙여서 만든 낡은 나무판이었다. 낡은 요 하나와 낡은 이불 하나가 전부였다. 낮에는 요 위에 앉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나무판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것도 지정된 위치에. 식사는 충분하지 않았는데,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물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다.
왕력이 타도된 것은 공개적으로 요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왕력이 타도되는 과정은 바로 왕력이 '실종되는' 과정이다.
1978년 왕력의 딸이 처음 허가를 받아 진성감옥에서 그를 만난다. 꼬박 10년간 왕력의 가족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왕력은 재판을 거치지도 않았고, 형을 받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14년이나 갇혀 있었던 것이다.
1982년 1월 15일, 왕력은 최고인민감찰원 특별검찰청장의 명의로 된 <면소서>를 받는다. 같은 해 1월 28일, 왕력을 석방된다. 다만 <면소서>에 열거된 문제는 모두 합법적인 증거조사나 사실확인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어서, 입증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왕력의 출옥도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왕력은 어떤 사람인가?
문혁이 발발하기 전에, 왕력은 중공이 소련공산당과 논쟁할 때 가장 중요한 붓잡이중 한명이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대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시작한 이후, 소련공산당의 내정과 외교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중공은 소련공산당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양당간이 이견이 갈수록 커진다. 그리하여 격렬한 논전까지 벌어진다. 결국 중공은 소련공산당이 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수정주의라고 규정하게 된다.
왕력은 1960년부터 중공중앙의 북경조어대 국빈관에 설립된 사작조(寫作組)에 들어가, 중소양당의 논전에 참여한다. 1962년 12월 15일부터 1963년 3월 8일까지, 왕력은 여러 편의 소련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의 기초에 참여한다. 그동안, 중공은 여러번 대표단을 소련에 보내어 소련공산당중앙과 담판을 벌인다. 대표단의 단장은 어떤 때는 국무원총리 주은래나 중공중앙총서기 등소평이었고, 어떠 ㄴ때는 중공정치국위원 팽진, 중공정치국후보위원 강생이었다. 대표단의 구성도 자주 바뀌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사람은 왕력이었다. 그리하여, 모주석의 또 다른 '어용문인' 곽말약(郭沫若)은 왕력에게 이렇게 농담했다: "십하막사과(十下莫斯科), 온좌조어대(穩坐釣魚臺)". 막사과는 모스크바이다.
1963년, 중소양당의 논쟁이 가열되고, 중공중앙은 연이어 9편의 글을 발표한다. 당시 저명한 <구평소련공산당(九評蘇聯共産黨)>이다. 왕력은 8편의 작성에 참여하고, 5편은 왕력 혼자서 집필한다. "구평소련공산당"은 모택동이 국내외에서 계급투쟁을 대거 벌이겠다는 극좌사상을 나타냈고, 모택동의 극좌사상을 이론화하고 계통화하는데는 왕력이 가장 큰 힘을 보탰다.
1966년 5월 문혁이 발발한 때부터 1967년 8월 타도될 때까지, 15개월동안, 왕력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가장 빠르게, 가장 정확하게 모택동의 '최고지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중공9대, 10대, 11대에 사회주의혁명역사단계의 기본노선으로 떠받들어진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이론은 바로 왕력이 모택동의 관련 발언을 '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10년문혁때 모택동이 사람을 숙청하고, 사람을 죽이고, 나라와 백성에 해를 끼치는데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된다.
15개월동안, 왕력은 중공중앙을 위하여 대량의 문건을 초안했을 뿐아니라, <홍기>잡지와 <인민일보>에도 많은 사론과 평론글을 실어, 모택동의 '권력탈취', '주자파타도', 유소기의 수정주의노선비판의 의도를 충분히 관철했다. 모택동의 일부 지시, 비시(批示), 담화등은 이들 사론과 평론글을 통해 신속히 전국각지에 전파되었다.
모택동은 이들 글에 대하여 한 비시를 보면, "아주 잘 썼다" "이 문건은 내가 보았다. 잘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정을 했다." "그대로 발송하라" "이 문건은 아주 좋다. 공개발표하고 방송해도 좋다."등등이다.
1967년 1월, 전 중공중앙 선전부장 도주(陶鑄)가 타도된 후, 모택동은 왕력을 중공중앙선전조 조장으로 지정한다. 실제로는 중앙선전부장인 셈이다. 전당의 선전업물르 책임졌다. 이때의 왕력은 그의 정치생애에서 최고봉에 올라서고, 모택동의 가장 중요한 '메가폰'이 되었다.
왕력은 왜 타도되었는가?
하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왕력이 당보,당간에 공개적으로 '군내의 한줌무리를 솎아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왕력이 괴교부에 충격을 가하는 '왕8.7강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혁이 끝난 후, 왕력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우선 '군내 한줌'무리를 솎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보자.
왕력은 <기타 몇 가지 문제의 진상을 명확히 한다>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력은 "군내의 한줌무리"라는 단어 자체를 모른다. 무한사변이후, 7.20사건의 선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토론할 때, (중앙문혁소조 고문인) 강생은 (호북성위서기) 왕임중(王任重), (무한군구사령원) 진재도(陳再道)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으면서 '무한지구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고 칭한 바 있다. 강생은 상해의 (중앙판공청주임) 왕동흥에게 전화를 걸어, 왕동흥에게 주석에 보고하여 주석의 비시를 받도록 요청했다. 주석은 비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무한사건의 선전에서 '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왕력은 이때 다리를 조반파에게 맞아 부러졌기 때문에 휴가를 받아 일을 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선전업무는 왕력이 주관하지 않았다. 이때 신문에는 일련의 '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는 말이 나왔지만 이것은 왕력과 무관한 것이다.
다음으로 왕8.7강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왕력은 <현장역사 - 문화대혁명기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67년 8월 7일, 그는 명을 받아 와교부로 가서 상황을 파악한다; "계통적으로 무슨 발언을 한 것은 아니고, 단지 보고를 받을 대 일부 끼어들어 말한 것만 있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정리하여 소위 "왕8.7강화"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중요한 내용은 그들이 정리해서 넣지 않았다.'"
왕력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끼어들어 말한 것은 "모주석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고, 거의 모주석이 한 말 그대로였다" 예를 들어, '타도진의' 구호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군중들이 타도하라고 소리치면 그들에게 소리치게 하라!" 그리고 홍위병이 외교를 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홍위병은 외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말한 것은 '홍위병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외교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 모주석의 뜻이다. 그리고 "약간의 권력이 있으면 위세를 부린다" 이것도 내 말이 아니라 모주석이 한 말이다.
왕력은 또한 모주석이 "일찌기 왕력의 8.7강화를 본 적이 있는데, 뭐 특별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의 지나친 부분은 내가 한 말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가지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모택동은 왜 왕력을 타도했을까?
모택동이 왕력을 타도한 진실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67년 무한에서 "7.20"사건이 발생한다. 무한군구사령원 진재도등이 일부군중의 문혁에 반대하는 극단적인 방식에 지지한 것이다. 이는 문혁이 발발한 이래 군대계통에서 나온 최초의 반항행동이다.
둘째, 1967년 8월 22일, 모택동의 홍위병이 영국의 주북경대표처를 불태운다. 그리하여 중국건정이래 가장 엄중한 외교사건을 일으켜, 국제적으로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군대고위장군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대외적으로 국제사회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래서 모주석은 왕, 관, 척을 버려야 했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결론
왕력은 도대체 무슨 죄로 진성감옥에 갇힌 것일까? 중공중앙은 아직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왕력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모주석은 전안조에게 왕력을 심문하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왕력이 한 모든 언행은 모택동의 지시를 충실하게 선전하고 집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력을 심문하면, 그것은 모택동을 심문하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왕력, 관펑에 체포된 후, 척본우는 동시에 모택동과 강청의 비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체포되지 않았다. 단지 정직심사만 받았다. 1967년 9월 4일, 척본우는 모택동에게 반성문을 써서 올린다. 9월 7일, 모택동이 이렇게 비시한다: "살펴보았다. 척본우동지에게 돌려주라. 잘못하는 것도 유익하다. 그것으로 깊이 반성할 수 있고, 잘못을 시정할 수 있으니까. 때가 되면 네가 관, 왕 두 동지에게 말해주어라."
1967년 8월 26일에는 모택동이 양성무에게 왕, 관, 척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은래에게 체포하도록 시키더니, 왜 19967년 9월 7일에는 모택동이 왕, 관, 척을 '동지'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모택동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 관, 척은 그저 모택동의 '메가폰'에 불과했던 것이다.
文章:王友羣
1967年8月26日,巡視上海的毛澤東對當時擔任中共軍隊代理總參謀長的楊成武這樣說:"王、關、戚破壞無產階級文化大革命,真是壞人。 你只報告(周恩來)總理一人,讓他們抓捕,由總理負責處理。"
王爲王力,官爲關鋒,尺爲戚本禹。 當時,王、官、戚都是中央文革小組的成員,是文革初期毛澤東和毛澤東的妻子,也是在中央文革小組副組長江清的親自領導下豪風還雨的人物。
只是毛澤東一句話,毛澤東的三代筆王、官、尺都被打倒。
王力最初被軟禁在釣魚臺國賓館二號樓。 此後,被軟禁在北京瑞山的一棟別墅內,在北京衛戍區進行監視。 1968年1月26日,春節前一天,王力被關進秦城監牢,從此被關押了14年。
晉城監獄的王歷
他在《王力反思錄》中這樣寫道。 進入晉城監獄後一直被關在單間裏,沒有人審問。
前5年沒出去,什麼文字也看不清 每天24小時用門上穿透的小監視救生圈接受監視。 睡覺時也不能翻身,必須朝那個監視孔睡覺。 睡覺的牀是用2個沒有靠背的椅子貼成的舊木板。 只有一箇舊褥子和一箇舊被子。 白天不允許坐在褥子上,只能坐在木板上。 那個也是在指定的位置上。 飯菜不夠,更難熬的是隻澆一點水。
王力被打倒的事情沒有公開喧譁。 祕密進行。 王力被打倒的過程就是王力"失蹤"的過程。
1978年王力的女兒第一次得到許可,在晉城監獄見到了她。 整整10年間,王力的家人都不知道他在哪裏、死了還是活着。
王力沒有經過審判,也沒有受到刑罰,不知道是什麼原因,被關了14年之久。
1982年1月15日,王力將接受最高人民監察院特別檢察廳長名義的《免訴書》。 同年1月28日,王力獲釋。 只是《免訴書》中列舉的問題都是未經合法證據調查或事實確認的,不足以證明。 不知王力的出獄是怎麼形成的。
王歷是什麼樣的人?
在文革爆發之前,王歷是中共同蘇聯共產黨爭論時最重要的筆手之一。
1956年蘇聯共產黨20多歲開始批評斯大林後,蘇聯共產黨的內政和外交發生了巨大變化。 中共認爲蘇聯共產黨的方式是錯誤的。 因此兩黨之間的分歧越來越大。 於是展開激烈的論戰。 最終,中共將蘇聯共產黨所做的不是馬克思列寧主義,而是修正主義。
王歷從1960年開始加入在中共中央北京造魚大學國賓館設立的寫作組,參與中小兩黨的論戰。 1962年12月15日至1963年3月8日,王歷將參與多篇批判蘇聯共產黨的文章的基礎。 此前,中共多次派代表團前往蘇聯,與蘇聯共產黨中央進行談判。 代表團團長有時是國務院總理朱恩來或中共中央總書記鄧小平,有時是中共政治局委員彭晉、中共政治局候補委員姜生。 代表團的構成也經常發生改變。 唯一沒有改變的人是王歷。 於是,毛主席的另一位"御用文人"郭沫若這樣對王歷開玩笑:"十下莫須科,穩坐釣魚臺"。 幕蘋果是莫斯科。
1963年,中蘇兩黨爭論加劇,中共中央接連發表9篇文章。 這是當時著名的《九評蘇聯產黨》。 王力將參與8篇的寫作,而5篇由王力獨自執筆。 "舊平蘇聯共產黨"表現出了毛澤東在國內外大舉展開階級鬥爭的極左思想,在理論化和系統化毛澤東的極左思想方面,王力起到了最大的作用。
從1966年5月文革爆發到1967年8月打倒爲止的15個月裏,王歷最主要的工作是按照自己的說法,最快、最準確地傳達毛澤東的"最高指示"。
在中共九大、十大、十大、十一世被奉爲社會主義革命歷史階段基本路線的"巫山階級獨裁下的持續革命"理論就是王力"統合"毛澤東的相關發言後創造的。 這是10年文革時期毛澤東肅清人、殺人、危害國家和百姓最重要的理論基礎。
十五個月來,王力不僅爲中共中央起草了大量文件,還在《紅旗》雜誌和《人民日報》上刊載了大量社論和評論文章,充分貫徹了毛澤東的"奪權"、"走人法塔圖"、劉少奇的修正主義路線批評意圖。 毛澤東的部分指示、批示、談話等通過這些事論和評論文章迅速傳播到了全國各地。
毛澤東對這些文章的批示是"寫得很好"、"這個文件我看過了。 我認爲寫得很好。 然後進行了修改。"——"就那樣發送吧","這份文件很好。 可以公開發表並播出。"等等。
1967年1月,前中共中央宣傳部部長陶鑄被打倒後,毛澤東指定王力爲中共中央宣傳組組長。 實際上,他是中央宣傳部部長。 負責全黨宣傳工作。 此時的王力在他政治生涯中登上了最高峯,成爲毛澤東最重要的"巨型手機"。
王歷爲什麼被打倒?
一個見解是這樣的:因爲王力在黨報和黨刊上公開表示"要剷除軍隊中的一撮人",另一個見解是因爲王力發表了對傀儡教部造成衝擊的"王8.7強化"。
文革結束後,按照王曆本人的說法,這兩種主張都不成立。
首先,讓我們來看看"軍隊內部要剷除一撮人"吧。
王力在《弄清其他幾個問題的真相》一文中這樣說:王力根本不知道"軍內一把"這個詞。 武漢事變後,在討論如何宣傳7.20事件時,(中央文革小組顧問)姜生沒有直接點名(湖北省委書記)王任重、(武漢軍區司令員)陳再道的名字,而是稱其爲"武漢地區內軍內漢主幹派"。 姜生致電上海(中央辦公廳主任)王東興, 要求王東興向主席報告, 接受主席的批示。 主席作了批示。 因此,在無限事件的宣傳中,加入了"黨內軍內限頻"的說法。
王力當時因爲腿被早班派打斷,所以沒去休假工作。 這個時期的宣傳工作沒有王力主管。 當時報紙上出現了一連串的"黨內軍內汗珠派"的說法,但這和王歷無關。
接下來我們來看一下王8.7強化的內容。
王力在《現場歷史-文化大革命紀事》中這樣回憶道。 1967年8月7日,他奉命到瓦教部瞭解情況; "系統上不是說了什麼話, 只是一些接到報告的人插話了"; 別人把它整理成所謂的"王8.7講話"。 "一些重要的內容沒有由他們整理後加入。'"
王力這樣說。 他插話說"這是根據毛主席的話說的,幾乎是毛主席說的那樣",比如說對於"打倒真醫"的口號毛澤東曾這樣說過:"如果羣衆喊打倒我,就讓他們大喊大叫吧!"對於紅衛兵搞外交,毛澤東說:"我沒有說'紅衛兵不能搞外交'。 我說的是'能夠處理紅衛兵問題的人也可以處理外交'。" 這不是我的意思 毛主席的意思。 而且"稍微有一點權力就會發威"也不是我說的,而是毛主席說的話。
王歷還看到過毛主席"一把手王歷的8.7強化,沒什麼特別的。 因爲其中的過度部分正如我所言。"
以上兩個都不成立,那麼毛澤東爲什麼打倒王歷呢?
毛澤東打倒王力的真實原因有兩個。
第一,1967年武漢發生"7.20"事件。 武漢軍區司令員陳在道等支持了部分羣衆反對文革的極端方式。 這是文革爆發以來軍隊系統首次採取的反抗行動。
第二,1967年8月22日,毛澤東的紅衛兵將焚燒英國駐北京代表處。 因此引發了中國建國以來最嚴重的外交事件,受到了國際上的強烈抗議。
對內要平息軍隊高層將軍的憤怒,對外要平息國際社會的憤怒。 因此,毛主席不得不拋棄王、官、戚,並把他們當作替罪羊。
結論
王力到底因什麼罪被關進真性監獄? 中共中央至今沒有給出正確的答覆。
爲什麼呢?王力的話擊中要害:"毛主席不讓全安祖審問王力。"因爲王力所作的一切言行都是忠實地宣傳和執行毛澤東的指示的。 因爲審問王歷,那等於審問毛澤東
王歷、關鵬被捕後,戚本宇同時擔任毛澤東和江清的祕書,所以沒有立即被捕。 只接受了停職審查。 1967年9月4日,戚本宇給毛澤東寫檢討書並上傳。 9月7日,毛澤東這樣卑詩:"我照顧過你。 還給戚本友同志。
文化大革命是中国比较大型的一个文化改革事件,很多有才的文人之士都死于文化大革命,在文革时期有三个比较有名的人物,分别是王力、关锋、戚本禹,下面十万个为什么网小编将为你解答文革三大笔杆子是谁(王力 关锋 戚本禹),他们怎么死的?
文革时期有着三个比较出名的“笔杆子”:王力、关锋、戚本禹,这三个人都是文学界响当当的人物,不过生在文革时期并不会有好的结局。
王力在进“中央文革”之前,就写了一系列重要文章,“中央文革”成立时,在“中央文革”内部,关锋、戚本禹、姚文元的地位要比王力低,因此,那时,说王力是“中央文革”第一号“大笔杆子”,一点也不过分。
1966年,毛泽东下决心发动“文化大革命”,并重新设立“中央文化革命小组”,隶属于政治局常委之下。王力成为“中央文革小组”成员之一。
进入“中央文革”的王力,实际上成了江青、康生手下的干将。“文革”中发生的著名的“七二○事件”,就是王力捅的“大娄子”。那时,毛泽东已经对他十分不满了。但王力却不知进退,又把手伸向中央更多的部门,在全国各条战线都制造出一种“乱”的局面。
因武汉事件与江青意见相左,1968年1月26日被关入秦城监狱14年,直到1982年才被释放。1996年10月21日,王力在北京肿瘤医院病逝,终年75岁。
关锋原名周玉峰,1919年7月生于山东省与河北省交界的庆云县。他14岁时加入中国共产党,19岁担任中共山东乐陵县委书记。20岁时,因为做地下工作的需要改名为关锋。
1955年,中央党校在山东成立中央党校第四中级党校,关锋担任副校长。那时的关锋,以笔杆子见长,经常写作和发表文章。这些文章,引起了北京一些理论家的注意。1956年,关锋被借调到北京,在中央政治研究室工作。在1957年反右斗争中,关锋成为“左派新秀”,很快受到中央的重视和重用。
1958年6月1日,中央创办《红旗》杂志。关锋被调到《红旗》杂志,编辑专供毛泽东参阅的《思想理论动态》,后来又调到中央政治研究室工作,并逐渐引起毛泽东的注意。毛泽东酝酿发动“文革”时,关锋被作为《中共中央通知》(即“五一六通知”)的起草人之一留在毛泽东身边工作。
1966年“中央文革小组”成立时,关锋成为其中一员,由此,他摇身一变,成为“中央首长”。在“文化大革命”中,红卫兵都这样称呼他。
1967年被打倒,关进北京秦城监狱,2005年过世,享年八十六岁。
戚本禹(1931— 2016)山东威海人。1949年后加入中国共产党,曾任中共中央办公厅信访科科长、《红旗》杂志历史组编辑组长、中央文革小组成员、中央办公厅秘书局副局长、《红旗》杂志副总编辑、中共中央办公厅代主任。1983年11月2日北京市中级人民法院以反革命宣传煽动罪、诬告陷害罪、聚众打砸抢罪判处有期徒刑18年,剥夺政治权利4年。
1967年4月14日,宣布遇罗克所写《出身论》是大毒草,并致其最终于1970年3月5日被宣判死刑。
1968年1月被中共中央隔离审查,并撤消党内外一切职务。是中央文革小组“小三”王、关、戚(即王力、关锋、戚本禹)中最后被隔离审查的。1980年7月14日被北京市公安局依法逮捕。1983年11月2日北京市中级人民法院以反革命宣传煽动罪、诬告陷害罪、聚众打砸抢罪判处有期徒刑18年,剥夺政治权利4年。
1986年出狱后在上海市图书馆收藏部当图书管理员,至1990年代初退休。育有二子一女。晚年和妻子邱云英及小儿子一家住在一起。与人合作的《大人物的变态心理》由吉林省时代文学出版社出版后,曾引起一阵风波(因疏漏在版权页署上了他的名字)。
中央文革小组最后一名成员戚本禹2016年4月20日7时58分在上海病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