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필무(董必武), 서특립(徐特立), 사각재(謝覺哉), 오옥장(吳玉章)과 더불은 "중공오로(中共五老)"로 불리는 인물인 임백거(任伯渠)의 넷째부인 주명(朱明) 자살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임백거는 1886년 호남 안복현(安福縣)에서 태어났다. 동필무(董必武), 서특립(徐特立), 사각재(謝覺哉), 오옥장(吳玉章)과 더불은 "중공오로(中共五老)"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4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은 오복명(伍復明)으로 고향사람이다. 1남4녀를 낳는다; 둘째부인은 범락춘(范樂春)으로 1남을 낳고 몇년후 병사한다; 셋째부인은 이준(李俊)이고, 두 사람은 1937년 연안(延安)에서 결혼했고, 1남을 낳는다. 그러나 4년후 불화로 이혼한다; 넷째부인은 주명이고 함께 15년을 산다.
26세의 주명이 60세의 임백거에게 시집가다.
주명의 본명은 왕균벽(王鈞璧)으로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사람이다. 1919년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3살때 당시를 외웠고, 12살떄, <홍루몽>을 읽는다. 1930년대에 상해 광화대학(光華大學)에서 공부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가족을 따라 사천으로 간다. 거기에서 중공선전의 영향을 받아 국민참의원으로 있던 중공관리 임백거를 흠모한다. 1939년 봄, 임백거의 도움으로, 한 무리의 열혈청년이 연안으로 간다. 거기서 중공여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설립한 연안여자대학(延安女子大學)에 입학하고, 이름을 주명으로 고친다. 그후 중앙연구원에 들어가고 그후 중앙당교 제3부에서 학습힌다. '연안정풍운동'때 중공의 반복되는 세뇌를 받아 주명은 부잣집의 '규수'에서 '기꺼이 무산계급의 소가 되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개조된다. 그녀는 <원래의 계급에서 해방되다>라는 반성문을 썼고, 모범글로 인정받는다.
당시, 연안의 많은 중공고관은 상해, 북경등 대도시에서 온 예쁜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예를 들면, 45세의 모택동은 자신의 세번째 부인 하자진을 버리고, 상해에서 온 삼류배우인 24살의 강청(江靑)과 결혼한다; 50세의 유소기는 다섯째부인을 취하는데 북경에서 온 대학원생 27살의 왕광미(王光美)였다. 39살의 임표는 22살의 섭군(葉群)을 부인으로 취한다; 40세의 진의는 17살의 장천(張茜)과 결혼한다; 43세의 주덕은 17살의 강극청(康克淸)과 결혼한다.
그때 임백거는 중공섬감녕변구정부 주석을 맡고, 섬감녕변구학습지도위원회 주임도 겸하면서 정부계통에서 정풍운동을 책임지고 있었다. 주명이라는 '정풍적극분자'는 '조직'의 안배하에 임백거와 자주 접촉하게 된다. 1945년 3월 28일 임백거는 60세 생일을 맞이한다. 중공중앙은 그를 위해 생일축하행사를 열어주었다. 1945년 4-6월 중공7대가 연안에서 개최되고, 임백거는 중앙위원, 중공정치국위원에 당선된다. 바로 그 7대가 개최되는 동안인 1945년 5월 60세의 임백거는 26살의 주명과 결혼한다.
1949년 10월 1일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임백거는 전후로 중앙정부 비서장, 전인대상무위원회 제1기, 제2기 부위원장을 지내고, 주명은 중앙조직부, 중앙방직공업부감찰실에서 근무한다. 임백거는 '중공5로'중 하나로 나이가 많아서, 몸이 좋지 않았다.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을 할 때면 주명이 항상 따라가서 그의 지팡이 겸 그림자가 되었다. 여산을 오르건, 항주를 가건, 아니면 모스크바를 가건 항상 두 사람을 같이 다닌다.
강청이 항주에서 익명서신을 받다.
1953년 12월 27일, 모택동과 강청이 항주로 간다. 서호에서 70여일간 머문다. 모택동은 1954년 3월 14일 떠나고, 강청은 계속 항주에 체류한다. 3월 18일, 강청은 익명서신을 한통 받는다. 서신은 상해에서 보낸 것인데, 강소성 교제처장 당위평(唐爲平)을 거쳐 그녀에게 온 것이다. 강청은 서신을 보고 극도로 분노한다. 서신에는 중공7기 4중전회가 막 열리고, 고강, 요수석이 발각되었는데, 너 강청의 역사는 타락했다. 나는 이미 너의 자료를 중공중앙조직부로 보냈다. 그리고 서신에는 1930년대 강청이 상해에 있을 때의 각종 스캔들과 체포당한 후 변절한 역사문제를 언급했다.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서신을 쓴 사람은 강청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중공고위층의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특별히 그녀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 강청은 이를 통해 이 서신을 쓴 사람은 반드시 중공고위간부이거나 문화게의 유명인사이거나 혹은 그들의 부인이라고 추측한다.
다음날, 강청은 절강성 공안청정으로 있던 왕방(王芳)을 만난다. 왕방의 회고에 따르면, 강청은 익명서신을 꺼내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한번 훑어보고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강청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네가 안읽어보면 누가 읽어보겠는가? 이건 반혁명익명서신이다. 너 공안국장이 제대로 보고 범인을 밝혀내라. 누군가 거짓말로 나를 모함하고 있다. 취옹지의부재주. 창끝은 실제로 모주석을 향한 것이다." 강청은 나에게 익명서신을 다 읽게 한 후에 돌연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양범(揚帆)을 아는가?"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는 상해에서 공안국장으로 있습니다. 우리는 내왕이 많고 관계도 긴밀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청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너는 그가 옛날에 무슨 이름이었는지 아느냐? 그는 과거에는 양범이라고 불리지 않았고, 은양(殷楊)이라고 불렸다. 국민당남경극전에서 일한 바 있다." 강청은 다시 물었다. "너는 담효청(譚曉晴)을 아는가?" 담효청은 당시 절강성 부련 복리부 부부장이었다. 1930년대 상해의 중공지하당원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지는 못합니다." 나중에 나는 알게 되었다. 1934년 강청이 상해에서 체포되었을 때, 담효청과 강청이 같은 감옥방에 있었는데, 담효청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체포된 원인은 강청이 먼저 체포된 후에 적에게 그녀의 이름을 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비한 "18호사건"
북경으로 돌아온 후, 강청은 익명서신을 받은 상황을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이 엄중한 반혁명사건이라고 말하면서 공안기관을 시켜 범인을 잡아내도록 요구하여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낸다. 익명서신을 받은 날짜가 1953년 3월 18일이므로 이 사건은 "18호사건"으로 불렸다.
얼마 후, 중공중앙 화동국은 상해에서 전문회의를 개최한다. 화동국 제3서기 담진림(譚震林)이 주재하고, 화동국 제2서기 진의(陳毅), 절강성 공안청장 왕방, 상해시공안국장 황적파(黃赤波)가 참석했다. 회의는 이 익명서신사건을 '특대사건'으로 규정해 수사하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18호사건"은 공안부장 나서경(羅瑞卿)이 총책임을 지고 상해시에서는 황적파가 책임지고, 절강성에서는 왕방이 책임지기로 한다. 회의후, 수사는 비밀리에 진행된다.
익면서신에는 '화동문위(華東文委)'라는 글자도 있고, 서신도 상해에서 보낸 것이므로, 강청은 수사부서에 상해시 당정부문과 1930년대에 상해문예계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도록 요구했다. 사건은 일시에 해결되지 않았다. 1954년, 가경시(柯慶施)가 상해시위서기로 가서, 직접 사건수사를 책임지고, 역량을 강화하여 밀어부친다. 전안조에 100여명이 소속되고, 며칠에 한번씩 회의를 진행했다. 전안조는 전후로 800여 혐의자의 필적을 수집했고, 과거에 강청과 관계가 좋지 않거나 그녀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했던 사람은 모조리 혐의대상이 된다. 그중에는 동남함대사령관 도용(陶勇)의 부인 주람(朱嵐), 1930년대 강청이 상해에 살던 집주인집에서 일하던 진계정(秦桂貞)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사기간이 길어지면서 혐의가 가장 큰 사람은 전 상해시문화국장 뇌소기(賴少其)의 처인 증비(曾菲)였다. 당시 증비는 상해에서 모택동의 전처 하자진의 이웃이었고, 하자진의 생활처지에 대해 극히 동정적이어서 자주 가서 만났다. 모택동이 1952년 상해로 왔을 때 병석에서 외롭게 투명하는 하자진을 문병하지 않은데 대하여 불평을 한 바 있다. 뇌소기는 상해시 제1기당대회에서 하나의 의안을 제출한 바 있는데, 하자진의 생활을 보살펴주자는 것이었다. 가경시는 전안조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증비는 사건혐의가 크다. 전안조는 비밀리에 증비의 필적을 수집해서 감정했는데, 필적이 비슷했다. 다만, 전안조가 대량의 비밀조사를 거쳤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단순히 필적이 비슷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범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강청은 여러번 사건의 진전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전안조내에 누군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의심했다. 여러번 공안부장 나서경, 부부장 서자영(徐子榮)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사건은 일시에 해결되지 못했지만, 전안조는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안부에서도 대량의 인력, 물력을 투입했다. 1961년에 이르러, 중앙판공청주임 양상곤의 '의외의 발견'으로 사건은 방향을 틀게 된다.
주명 "외죄자살(畏罪自殺)"
1960년 5월 29일, 74세의 임백거가 북경에서 병사한다. 그의 부인 주명은 한때 아주 비통해 했고, 기운이 없었다. 1961년 2월, 주명은 중앙판공청에 남방으로 가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고 요구하여 비준을 받는다. 그동안 주명은 당중앙에 서신을 쓴다. 임백거가 죽은 후 일부 역사적인 문제(주로 문헌처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서신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곤에게 올라간다. 1953년 업무관계로 양상곤은 여러번 강청이 받은 그 익명서신을 본 바 있다. 익명서신의 필적에 대하여 인상이 깊었다. 양상곤이 주명이 당중앙에 쓴 보고서를 보고는 거기의 필적이 익명서신의 필적과 아주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양상곤은 즉시 공안부 부부장 서자영에게 전화를 건다. 공안부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두 서신의 필적은 동일인이 쓴 것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후 양상곤, 서자영은 주명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눈다. 주명은 시원시원하게 그 익명서신은 자신이 썼다고 인정한다. 원래 모택동이 북경으로 돌아가고 강청이 그 익명서신을 받기 전의 기간동안 임백거와 주명도 항주에 며칠 머물렀다. 당시 절강성 공안청장인 왕방이 접대를 담당했다. 왕방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강청의 곁에는 함께 다녀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임백거부부와 전부인과의 사이의 딸인 임리(林莉)를 함게 강청을 만나게 어레인지 한다. 임리는 어려서부터 모스크바국제아동교양원에서 자랐고, 나중에 소련에서 대학을 다녔다. 1949년 강청이 소련으로 가서 치료하는 기간동안, 임리는 그녀의 통역을 담당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었고, 서로 잘 맞았다. 당시 강청은 왕방이 그렇게 어레인지 한데 대하여 불만은 없었다. 그 익명서신은 아마도 주명이 항주에 있을 때 써서 상해로 간 후에 부친 것일 것이다.
주명은 이 일이 폭로되면 강청이 반드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강청이 그녀에게 독수를 쓰기 전에, 집안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자살한다. 그때 주명의 나이 42살이었다. 얼마 후, 주명의 죽음은 '반혁명외죄자살'로 규정된다. 문혁시기에 주명은 '반혁명분자'로 규정된다.
결론
당시 연안으로 갔던 젊은여성들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중공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중공고관들과 결혼한 후, 비록 한동안 허영이 만족되고 특수한 대우를 받았지만, 대다수는 액운을 피하지 못했다. 임백거의 처 주명은 자살했다. 모택동의 처 강청도 결국은 자살했다. 유소기의 처 왕광미는 진성감옥에 11년간이나 갇혀 있었다. 임표의 처 섭군은 결국 임표와 함께 몽골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중공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극들은 하나하나 주는 교훈이 크다. 후세인들이 당연히 거울로 삼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董必武、徐特立、謝覺),、吳玉章和德佛是被稱爲"中共五老"的人物任伯渠第四夫人朱明自殺之謎。
文章:王友羣
林伯居1886年出生於湖南安福縣。 董必武、徐特立、謝覺),、吳玉章和德佛被稱爲"中共五老"。 一輩子結婚4次,老大夫人伍復明是老鄉。 生1男4女;二夫人範樂春生1男,幾年後病逝; 第三任妻子是李俊,兩人於1937年在延安結婚,生下一子。 但4年後因不和而離婚; 第四夫人是酒名,同住15年。
26歲的周明嫁給60歲的林伯渠。
主名原名王鈞璧,是安徽省定遠縣人。 1919年出生於官僚家庭,3歲時背誦了當時的情景,12歲時讀了《紅樓夢》。 1930年代在上海光華大學學習。 抗日戰爭爆發後,隨家人去四川。 在這裏,我欽佩受中共宣傳的影響,擔任國民參議員的中共官員林伯居。 1939年春,在林伯渠的幫助下,一羣熱血青年奔赴延安。 在那裏,他考入爲培養中共女幹部而設立的延安女子大學,並改名爲主名。 之後進入中央研究院,之後在中央黨校第3部學習。 "延安整風運動"時接受中共反覆的洗腦,朱明從富家"閨秀"改造成"想成爲無產階級牛的新人"。 她寫了《從原來的階級中解放出來》的反省書,被認可爲模範文章。
當時,延安許多中共高官嫁給了來自上海、北京等大城市的漂亮年輕女子。 例如,45歲的毛澤東放棄自己的第三任妻子夏子珍,與來自上海的三流演員24歲的江青結婚;50歲的劉少奇娶了第五任妻子,是來自北京的27歲研究生王光美。 39歲的林彪娶22歲的葉羣爲夫人;40歲的陳毅娶17歲的張晨;43歲的朱德娶17歲的康克清。
當時任白居擔任中共陝甘寧邊區政府主席,兼任陝甘寧邊區學習指導委員會主任,在政府系統負責整風運動。 主命這一"糾風積極分子"在"組織"的安排下經常與林伯居接觸。 1945年3月28日,林伯渠將迎來60歲生日。 中共中央爲他舉行了生日慶祝活動。 1945年4-6月中共七大在延安舉行,林伯居當選爲中央委員、中共政治局委員。 就在那7代舉辦期間的1945年5月,60歲的林伯渠與26歲的周明結婚。
1949年10月1日,中共掌權後,任白舉前後擔任中央政府祕書長、全國人大常委會第一屆、第二屆副委員長,周明在中央組織部、中央紡織工業部監察室工作。 任伯居是"中共五路"之一,年紀大,身體不好。 他在國內外活動的時候, 周明總是跟着他, 成了他的柺杖兼影子。 不管是爬廬山,還是去杭州,還是去莫斯科,總是兩個人在一起。
江青在杭州收到匿名信。
1953年12月27日,毛澤東和江清將前往杭州。 在西湖停留70多天。 毛澤東於1954年3月14日離開,江清繼續滯留在杭州。 3月18日,江青收到一封匿名信。 書信是從上海寄來的,是經江蘇省交際處處長唐爲平後寄來的。 江青看到信函極度憤怒。 書信中剛剛召開中共七屆四中全會,古康、遼石被發現,你江清的歷史墮落了。 我已經把你的資料送到了中共中央組織部。 信中還提到了1930年代姜青在上海時的各種醜聞和被捕後變節的歷史問題。 內容非常具體。 寫信的人很瞭解江青的歷史,也很瞭解中共高層的情況。 特別知道她的行蹤。 江青由此推測,寫這封信的人必須是中共高層幹部,或者是文化蟹的名人,或者是他們的夫人。
第二天,江清見到了浙江省公安廳廳長王芳。 據王芳回憶,江青拿出匿名信要他念。 我瀏覽了一下就再也讀不下去。 江清一臉嚴肅地說:"你若不讀, 誰來讀? 這是反革命匿名信。 你由公安局長看準,把犯人查出來。 有人在用謊言誣陷我。 醉翁之不在 矛頭實際上指向了毛主席。" 江青讓我讀完匿名信後突然問我:"你知道揚帆嗎?"我馬上回答:"他在上海當公安局長。 我們有很多來往,關係也很緊密。" 接着又繼續說道。 "你知道他以前叫什麼名字嗎? 他過去沒有被稱爲良犯,而是被稱爲殷楊。 曾在國民黨南京極戰中工作過。" 姜清再次問道。 "你知道譚曉晴嗎?"譚曉晴當時是浙江省婦聯福利部副部長。 1930年代,他曾是上海的中共地下黨員。 我回答:"我知道她。 但我不太清楚,"後來我知道了。 1934年姜青在上海被捕時,譚曉青和姜青在同一個監獄裏,據譚曉青回憶,自己被捕的原因是姜青先被捕後向敵人喊她的名字。
神祕的"18號事件"
回到北京後,江青把收到匿名信的情況報告給毛澤東。 而且說這是一起性質嚴重的反革命事件,要求公安機關抓捕犯人,得到毛澤東的同意。 因爲收到匿名信件的日期是1953年3月18日,所以該事件被稱爲"18號事件"。
不久,中共中央華東局將在上海召開專門會議。 華東局第三書記譚震林主持,華東局第二書記陳毅、浙江省公安廳廳長王芳、上海市公安局局長黃赤波出席。 會議決定將匿名書信事件規定爲"特大事件",進行調查。 同時,"18號事件"由公安部長羅瑞卿負總責,上海市由黃赤波負責,浙江省由王芳負責。 會後,調查祕密進行。
熟面信中有"華東文委"的字樣,書信也是上海寄來的,因此江青要求調查部門重點調查上海市黨政部門和1930年代在上海文藝界工作過的人。 事件一時沒解決。 1954年,柯慶施擔任上海市委書記,親自負責案件調查,加強力量,予以推進。 全案組有100多人,每隔幾天舉行一次會議。 全安祖前後收集了800多名嫌疑人的筆跡,過去與強青關係不好或對她說過不好的話的人全部成爲嫌疑對象。 其中包括東南艦隊司令陶勇的夫人朱嵐、1930年代在江清家住上海的房東家工作的秦桂貞等。
隨着調查時間的延長,嫌疑最大的是前上海市文化局局長賴少其妻曾菲。 當時曾妃是上海毛澤東前妻河子鎮的鄰居,對河子鎮的生活處境極爲同情,經常去見面。 毛澤東1952年來到上海時,曾對沒有探望在病牀上孤獨透明的瑕疵鎮表示不滿。 雷少奇曾在上海市第一屆黨代會上提出過一個議案,就是要照顧夏子珍的生活。 嘉慶市在前案組會議上這樣說。 曾飛案情大。 田安祖祕密蒐集並鑑定了曾妃的筆跡,筆跡相似。 只是,雖然全安組經過了大量祕密調查,但完全找不到直接證據。 不能單純憑筆跡相似就斷定是犯人。
江清多次詢問事件的進展,懷疑前案組內是否有人在動手。 他多次對公安部長羅先卿、副部長徐子榮表示不滿。 事件一時沒解決,但全安祚沒有放棄這個事件。 公安部也投入了大量的人力、物力。 到1961年,事件轉向了中央辦公廳主任楊尚昆的"意外發現"。
朱明:"畏罪自殺。"
1960年5月29日,74歲的林伯渠在北京病逝。 他的太太周明一度悲痛欲絕,無精打采。 1961年2月,朱明向中央辦公廳提出想去南方度假的要求,並得到批准。 其間,朱明在黨中央寫書信。 林伯居死後認爲應該解決一些歷史性問題(主要是文獻處理問題)。 書信將交給當時的中央辦公廳主任楊尚坤。 1953年,樑尚昆因業務關係多次看過姜青收到的匿名書信。 對匿名信的筆跡印象很深。 看到楊尚昆主名寫在黨中央的報告後,發現那裏的筆跡與匿名信件的筆跡非常相似。
楊尚昆立即給公安部副部長徐子英打電話。 經公安部專家鑑定,兩封信的筆跡是同一個人寫的 之後楊尚昆、徐子英去找朱明聊天。 周明爽快地承認那封匿名信是自己寫的。 原來毛澤東回北京, 江清收到那封匿名信之前, 林伯居和周明道在杭州住了幾天。 當時浙江省公安廳廳長王芳負責接待工作。 據王芳回憶,當時江清身邊沒有人陪伴他。 因此,她與拒絕林伯父和全夫人之間的女兒林莉相遇。
林莉從小在莫斯科國際兒童教養院長大,後來在蘇聯讀過大學。 1949年江青去蘇聯治療期間,林莉擔任她的翻譯 那時兩人早晚在一起,很合拍。 當時江清對王芳那麼粗魯沒有不滿。 那封匿名信可能是周明在杭州時寫的, 到上海後寄出的。
周明很清楚,這事曝光了, 江青一定會把她逼死的。 於是姜青在給她下毒手之前,在家裏大量服用安眠藥自殺。 當時朱明已經42歲了。 不久後,朱明的死亡被定性爲"反革命外罪自殺"。 在文革時期,主名被定爲"反革命分子"。
結論
當時前往延安的年輕女性們決定,在她們人生中最重要的時刻與中共同行。 特別是與中共高官結婚後,雖然許榮滿足了一段時間,享受了特殊待遇,但大多數人還是躲不過厄運。 林伯巨的妻子朱明自殺了。 毛澤東的妻子姜清最終也自殺了。 劉少奇的妻子王光美被關在晉城監獄11年。 林彪的妻子燮君最終和林彪一起在蒙古元杜爾幹因飛機墜毀而死亡。 縱觀中共的歷史,每一個悲劇都給我們留下了深刻的教訓。 薩達姆當然要當鏡子來警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