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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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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동맹회를 발기하고 설립한 원로인 왕정위(汪精衛)가 잘못된 곳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에 매국노로 전락

글: 양각목염자(楊康穆念慈)
어떤 사람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인구, 자원, 공업생산능력에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미국에 전쟁을 건 것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짓이라고 본다. 그런, 그런 생각은 일면적이고, '사후제갈량'이다.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물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방면이다. 만일 전쟁이 항상 '물량'의 방면에서 우세한 측, 즉 사람이 많고, 총이 많고, 돈이 많은 쪽에서 승리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주 간단해질 것이다. 고금중외의 전쟁역사에서, 이소승다(以少勝多), 이약승강(以弱勝强)의 사례는 아주 많다. 이들 전투의 성공은 모두 '사람'의 우세로 '물양'의 부족을 보완한 것이다.
적벽대전때, 손권은 5만의 병력으로 조조의 71만대군에 도전한다. 이것이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짓인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때, 청나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는데, 일본의 국력은 중국과 러시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봉은 '사람'의 우세를 가지고 이약승강의 승리를 이루어낸다. 2차대전때 일본의 국력은 확실히 미국에 비하여 부족했다. 그러나 절대 일본이 미국을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미국이 일본을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이 미국을 기습한 것은 기실 중국의 소위 '초한전(超限戰)' 사강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이기려면, 강자들이 제정한 '전쟁규범'을 지켜서는 안된다.
2차대전의 양대진영인 "영국프랑스미국"과 "독일이탈리아일본"이었다. 인구, 자원, 공업생산력등 '물'적인 분야를 보면, 자연히 '영국프랑스미국'의 동맹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전쟁은 도박이다. '물'적인 방면의 열세자는 주머니안에 돈이 얼마 남지 않은 도박꾼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도박에서 이겨서 일거에 부호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그들은 '고주일척(孤注一擲)'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크게 이기지 않으면 크기 지는 것이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고주일척으로 '영국프랑스미국'에 도전했다. 이런 대박심리를 안고서. 당연히, '독일이탈리아일본'은 확실히 '영국프랑스미국'에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장군들이 착오를 좀 더 적게 범하고, "영국프랑스미국'의 장군들이 조금 더 잘못을 많이 범했더라면, 2차대전의 승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측일 수도 있었다.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한 것은 기실 '겨우 승리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영국프랑스미국'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진영이 긴장되게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느 진영이 승리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장개석은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하는데 걸어서 항일전쟁을 견지했고, 왕정위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이기는데 걸어서, 대일강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승자왕후패자적"이라는 역사관으로 왕정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당시 왕정위가 대일강화한 행동은 무슨 매국행위라고 할 수가 없다. 만일 2차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진영이 승리했다면, 중국이 만일 '영국프랑스미국'의 진영에만 줄을 섰다면, 불가피하게 전패국으로서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처참한 제재를 당했을 것이다. 그때 중국은 아마도 일본의 한개 지방으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천년의 중화눔화는 이로서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다. 만일 일찌감치 일본과 강화했다면 중국은 전패국이 되어 영토흘 할양하고 배상금을 무는 가혹한 제재는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중화문화를 구차하게나마 연명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왕정위일파의 대일강화의 생각과 목적이었다.
왕정위는 1905년 동맹회를 발기하고 설립한 원로이다. 그는 가장 먼저 손중산을 따른 신도중 한 명이다. 왕정위는 국민당내의 지위와 위신이 아주 높았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주석을 맡았다. 비록 군권을 장악한 후기지수 장개석에게 실권을 빼앗겼지만, 왕정위의 당내 정치적 지위는 장개석보다 항상 위였다. 왕정위는 처음부터 대일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1931년 "9.18사번"후 장개석의 비저항정책과 비교하면, 왕정위는 저항을 주장하는 주전파였다. 당시의 애국학생은 왕정위를 애국지도자로 생각했다. 1931년 12월 5일, 전국애국학생은 남경으로 가서 청원할 때, 당시 하야해 있던 왕정위가 정치무대로 되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내걸은 표어는: "호당구국의 왕선생을 환영한다", "민주정치실현을 주장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 "비저항주의에 반대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 "동북실지의 즉시회복을 주장하는 왕선생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12월 6일, 왕정위는 전국대학생대표를 접견할 때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국면에 대응하는 방법을 본인은 8글자로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일면저항(一面抵抗), 일면교섭(一面交涉)." 왕정위는 장학량의 비저항퇴각을 비판할 때 이렇게 말한다: "유관(楡關)을 하루만에 잃고, 열하(熱河)를 7일만에 함락당하다니 실로 말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먼저 저항한 후 교섭해야 한다. 이후 비저항은 외교에 영향을 반드시 미칠 것이다. 오늘이후 저항이 더욱 힘을 얻으면, 교섭에 더욱 희망이 있을 것이다." 1938년 11월 3일, 일본정부는 제2차대중국성명을 발표한다. 이전에 국민정부를 교섭상대방으로 보던 방침을 바꾸어, 장개석의 하야를 제기하고,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건하에서, 일본은 국민정부와 정전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왕정위는 일본정부의 제2차대중국성명이후, 장개석의 사직을 요구하고, 일본과 정전을 실현하고자 한다. 왕정위는 말했다: "우리는 신속히 함께 사임하여 천하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말한다 "우리가 만일 사직하면, 도대체 누가 정치적 책임을 진단 말인가?"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언쟁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헤어진다. 장개석을 설득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왕정위는 장개석과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단독으로 '화평구국'을 하기도 한다. 왕정위는 장개석이 섬서로 가서 군사회의에 참석하느라 중경에 없는 틈을 타서, 12월 18일 밖에 강연하러 간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고 중경을 떠나 곤명으로 가고, 다시 당시 프랑스식민지이던 월남의 하노이로 간다.
왕정위가 떠날 때, 장개석에게 장문의 결별서신을 남긴다. 거기서 그는 장개석과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목적은 모두 구국이라고 말한다. 왕정위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그대는 쉬운 길을 가고 나는 어려운 길을 간다(君爲其易, 我任其難)". 당시의 애국분위기하에서, 항전을 소리높여 외치는 길은 과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일본과 강화하는 길은 비교적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왕정위는 장개석에게 말한다: 너는 쉬운 항전을 이끌어라. 나는 어려운 화평업무를 맡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왕정위가 일본에 의탁한 것은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정반대이다. 왕정위는 원래 장개석과 함께 안전한 대후방 중경으로 도망가 있었다. 만일 왕정위가 장개석과 함께 항전을 소리높여 외쳤다면, 절대로 아무런 생명위협이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정위가 중경을 떠나 일본인과 합작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것이다. 왕정위가 하노이로 도망친 후, 장개석이 보낸 특무가 그의 비서를 죽인다. 만일 왕정위의 비서가 왕정위와 방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왕정위는 하노이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정위의 '화평공작'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도박이었지, 절대로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정위는 일본인의 지지하에 유신정부를 성립한다. 중국은 국제적으로 아주 절묘한 위치에 처해지게 된다. 절반의 중국인은 영국프랑스미국의 진영에 가담하고, 또 다른 절반의 중국인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진영에 가담한 것이다. 만일 영국프랑스미국이 승리하면, 장개석을 대표로 한 중국이 전승국이 되고, 왕정위의 정권을 접수할 것이며; 만일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승리하면, 왕정위를 대표로 한 중국이 전승국이 되어, 장개석의 정권을 접수할 것이다. 중국은 2차대전에서 유일하게 어떻게 되더라도 패전하지 않는 '이중보험'을 든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만의 하나 전쟁ㅇ서 패배하더라도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거나 분할되어 망국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중국인만이 아마도 이처럼 절정총명한 생존의 도리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서양인들도 탄복해마지 않을 것이다.
왕정위의 유신정부는 중국이 패전하지 않도록 만드는 '이중보험'의 역할을 하는 외에, 측면에서 장개석과 공산당을 구해주었다. 왕정위를 대표로 하는 중국과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요구하는 정전조건은 만족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장개석에게 계속 진격하지 않게 된다. 만일 왕정위를 대표로 하는 중국과 일본이 화평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일본군은 체면이 상하지 않는 정전이유를 만들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계속 공격하여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소멸시키려 했을 것이다. 일본은 1939년 더 이상 중경으로 물러가 있는 장개석정부에 대규모공격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왕정위가 이미 중국을 대표하여 일본과 강화를 맺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1939년이후 일본이 대규모 대중국군사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전선이 너무 길어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제에 맞지 않는다. 나중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 수백만 병력이 전체 전선에서 출격하고 대거 동남아로 진공한다. 그러나 1937년에서 1938년에 중국침략전쟁에서 투입한 병력은 최대 7,8십만이었다. 일본이 다시 200만군대를 투입했다면, 중경, 연안을 함락시키는 것은 아마도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정위가 중국을 대표하여 일본과 '평화우호'관계를 건립했기 때문에, 일본은 중경으로 계속 진격하지 않은 것이다. 장개석과 공산당이 8년항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 공산당 양당의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왕정위의 '매국' 해위(解圍)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외에 왕정위정부는 '이중보험구국'에서의 의미이외에, '구민(救民)'의 분야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전후 국민정부는 적군점령지구의 백성들이 '억고사첨(憶苦思甛)'하도록 호소하고 왕정위정부가 호가호위하고 인민을 박해한 죄행을 고발하도록 하였지만, 실제로 드러낼만한 것은 찾지를 못했다. 반대로 적군점령지구의 인민은 왕정위정권하에서 살만했고, 기본적인 물품공급이 안정되었고, 시장물가도 평온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장개석이 '환도'한 이후, 오히려 통화팽창과 물가폭등이 일어난다. 백성들의 생할은 왕정위시대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공산당이 문혁때, '억고사첨'의 소고대회(訴苦大會)를 열었을 때도, 왕정위정부시대의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왕정위가 통치한 북경, 남경, 상해등 대도시에서 백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었따. 양표, 포표를 발행하여 먹고 입는 것을 제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식청년' 시민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가정을 해체시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당정부의 정치적업적보다도 나았다. 왕정위정부가 일본인과 물자를 놓고 다투어 얻어내서, 적군점령지구의 인민들은 먹고 입는것이 보장되었다. 적군점령지구의 인민들이 어찌 8년의 기나긴 세월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만일 당시에 왕정위등이 일본인과 합작하지 않았떠라면, 일본군인은 점령지구의 물자를 모조리 빼앗아가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점령지구의 백성들은 일본군인의 총탄은 피한다고 하더라도, 굶어죽고 얼어죽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왕정위정부와 일본인들과 물자를 다투어 얻어내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수천만의 인민들의 목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나서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도 스스로 다른 민족의 괴뢰나 주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구든 노예가 되고 괴뢰와 주구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부득이한 것이다. 만일 왕정위가 스스로 원해서 적극적으로 기꺼이 일본인의 괴뢰와 주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왕정위가 매국노로 된 것은 그가 잘못된 곳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이다. 만일 2차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승리했더라면, 왕정위는 장개석을 미국의 주구 매국노로 심판대에 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아마도 <왕주석문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역사에 가설은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역사인물을 비판해야 한다. 반드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성패를 가지고 영웅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不以成敗論英雄)


1905年發起同盟會併成立的元老汪精衛在錯誤的地方賭博,因此淪爲賣國賊。


文章:楊康穆念慈愛
有的人認爲,日本偷襲珍珠港,向人口、資源、工業生產能力比自己大幾倍的美國發動戰爭,是失去理智的瘋子。 這種想法是片面的,是"事後諸葛亮"。 戰爭的勝利不能單純靠"數量"來決定。 更重要的是"人"方面。 如果戰爭總是在"物量"方面佔優勢的一方,即人多、槍多、錢多的一方獲勝,人類的歷史將變得很簡單。 在古今中外的戰爭歷史上,以少勝多、以弱勝強的事例非常多。 這些戰鬥的成功都是以"人"的優勢彌補了"物養"的不足。
赤壁之戰時,孫權以5萬兵力向曹操的71萬軍發起挑戰。 這是失去理智的瘋子嗎? 日清戰爭、日俄戰爭時,日本向清朝俄羅斯宣戰,日本的國力遠不及中國和俄羅斯。 日薪以"人"的優勢取得異軍突起的勝利。 二戰時期日本的國力確實不如美國。 但是,絕對不能說日本沒有戰勝美國的可能性。 只是可以說美國戰勝日本的可能性更大。 日本突襲美國實際上是中國所謂的"超限戰"四強。 弱者要想戰勝強者,就不能遵守強者制定的"戰爭規範"。
他們是二戰的兩大陣營"英國、法國、美國"和"德國、意大利、日本"。 從人口、資源、工業生產力等"水"領域來看,"英國、法國、美國"的同盟軍自然是絕對有利的。 但是,戰爭是賭博。 "水"方面的劣勢者, 跟口袋裏沒剩多少錢的賭徒一樣, 他們在賭博中獲勝, 試圖一舉成爲富豪。 要想做到這一點,他們只能採取"孤注一擲"的方法。 大贏不算大輸。 《德國、意大利、日本》以高周尺向"英國、法國、美國"發起挑戰。 抱着這種大發心理 當然,"德國、意大利、日本"確實有可能戰勝"英國、法國、美國"。 如果"德國、意大利、日本"的將軍們犯得少一些錯誤,"英國、法國、美國"的將軍們犯得更多一些錯誤,那麼二戰的勝者有可能是"德國、意大利、日本"。 "英國、法國、美國"獲勝實際上只是"勉強獲勝"。
中日戰爭爆發的1937年,"英國、法國、美國"和"德國、意大利、日本"陣營正緊張對峙。 當時人們無法預測哪個陣營會獲勝。 蔣介石主張"英國、法國、美國"獲勝,堅持抗日戰爭;王政委主張"德國、意大利、日本"獲勝,主張對日強化。 如果我們不以"勝者王后敗者賊"的歷史觀批評王政委,那麼當時王政委對日強化的行爲就不能算什麼賣國行爲。 如果"德國、意大利、日本"陣營在二戰中獲勝,如果中國只站在"英國、法國、美國"陣營的隊伍中,必然會受到割讓領土並賠償的慘痛制裁。 當時中國也許可以編入日本的一個地方。 數千年的中華分享可以由此畫上句號。 如果早早就與日本加強,中國就不會受到成爲戰敗國割讓領土、支付賠償金的殘酷制裁。 中華文化得以苟延殘喘。 這就是王政偉一派對日強化的想法和目的。
王政委是1905年發起同盟會併成立的元老。 他是最早跟隨孫中山的信徒之一。 王政委在國民黨內的地位和威信很高。 孫中山去世後,任國民黨主席。 雖然實權被掌握軍權的後旗手張介石奪走,但王政委的黨內政治地位始終高於張介石。 王政委從一開始就沒有主張對日強化。 與1931年"9.18司號"後蔣介石的非抵抗政策相比,王政委是主張抵抗的主戰派。 當時的愛國學生認爲王政委是愛國領導人。 1931年12月5日,全國愛國學生前往南京請願時,要求當時下野的王政委重返政治舞臺。 他們懸掛的標語是:"歡迎護黨救國的王先生"、"歡迎主張實現民主政治的王先生"、"歡迎反對非抵抗主義的王先生"、"歡迎主張立即恢復東北實地的王先生"等。
12月6日,王政委接見全國大學生代表時這樣說:"本人可以用8個字概括應對當前局面的方法:一面抵抗,一面交涉。"王政委在批評張學良的非抵抗退卻時這樣說:"一天之內失去關卡,七天之內就淪陷熱河,實在不像話。 必須先抵抗後再進行交涉。 此後,不抵抗必將對外交產生影響。 如果今天以後抵抗更加有力,交涉就更有希望了。"1938年11月3日,日本政府將發表第二次對華聲明。 也就是說,改變以前把國民政府視爲交涉對象的方針,在提出蔣介石下臺、承認"滿洲國"的條件下,日本將與國民政府進行停戰協商。 王政委要求日本政府發表第二次對華聲明後,蔣介石辭職,與日本實現停戰。 王政委說:"我們要一起迅速辭職, 通告天下", 但是蔣介石說 "如果我們辭職,到底誰來診斷政治責任?"兩人紅着臉爭吵,心情不好就分手了。 在沒能說服蔣介石的情況下,王政委決定走與蔣介石不同的道路。 有時還會單獨進行"和平救國"。 王政委趁蔣介石去陝西參加軍事會議不在重慶之際,於12月18日以外出演講爲由乘飛機離開重慶前往昆明,再次前往當時法國殖民地越南河內。
王政委離開時,給蔣介石留下長篇分手信。 在那裏他跟蔣介石走的路不同,但都說目的都是救國。 王政委最後這樣寫道。 "君爲其易,我任其難。" 在當時的愛國氛圍下,高聲呼喊抗戰的道路果然是件容易的事。 但是,與日本加強的道路比較困難。 所以王政委對蔣介石說:你引導簡單的抗戰。我負責艱難的畫評工作。"
不少人說,王政委依賴日本是因爲貪圖生活,害怕死亡。 但實際情況恰恰相反。 王政偉原本和蔣介石一起逃到了安全的大後方重慶。 假如王政委和蔣介石一起高聲呼喊抗戰,絕對不會有任何生命威脅。 相反,王政委離開重慶與日本人合作是冒着生命危險的行爲。 王政委逃往河內後,蔣介石派來的特務殺死他的祕書。 如果不是王政委的祕書要和王政委換房,王政委可能已經在河內喪生了。 因此,王政委的"和平工作"是冒着生命危險進行的賭博,絕對不是貪圖生活、害怕死亡的人能做的事情。
王政委在日本人的支持下成立了維新政府。 中國將在國際上處於非常絕妙的地位。 一半的中國人加入了英國、法國、美國的陣營,另一半的中國人加入了德國、意大利、日本的陣營。 如果英、法、美獲勝,以蔣介石爲代表的中國將成爲戰勝國,接管王政委的政權;如果德國、意大利、日本獲勝,以王政委爲代表的中國將成爲戰勝國,接管蔣介石的政權。 中國成爲二戰中唯一一個擁有"雙重保險"的國家,無論怎樣都不會戰敗。 這使中國擺脫了即使萬一戰爭失敗也要割讓領土、賠償或分割而亡的危險。 也許只有中國人才能想出如此精明的生存之道。 也許西方人也佩服不已。
王政委的維新政府除了發揮防止中國戰敗的"雙重保險"作用外,還從側面拯救了蔣介石和共產黨。 由於以王政委爲代表的中日簽訂了和平條約,日本人要求的停戰條件得到了滿足。 因此日本不會繼續向蔣介石進攻。 如果以王政委爲代表的中國和日本沒有簽訂和平條約,日軍將很難創造出不體面的停電理由。 一定要繼續進攻,消滅蔣介石的國民政府。 1939年,日本不再對退居重慶的蔣介石政府發動大規模進攻。 那是因爲王政委已經代表中國與日本締結了和約。
有人說1939年以後日本之所以沒有采取大規模的對華軍事行動,是因爲日本戰線太長,兵力不足。 這不符合實際。 後來日本發動太平洋戰爭時,數百萬兵力從整個戰線出擊,大舉進攻東南亞。 但1937年至1938年在中國侵略戰爭中投入的兵力最多爲7810萬。 如果日本再次投入200萬軍隊,那麼攻陷重慶、延安應該不成問題。 由於王政委代表中國與日本建立了"和平友好"關係,日本沒有繼續向重慶進軍。 蔣介石和共產黨之所以能在8年抗戰中生存,不是因爲國民黨共產黨兩黨的軍隊頑強抵抗,而是因爲王政委的"賣國"解圍。
除此之外,王政委政府在"雙重保險救國"的意義之外,在"救民"領域也做出了不少努力。 戰後,國民政府呼籲敵軍佔領地區的百姓"苦思冥想",並告發了王政委政府護駕護航、迫害人民的罪行,但實際上沒有找到可揭露的。 相反,敵軍佔領地區的人民在王政委政權下生活還算不錯,基本物品供應穩定,市場物價也比較平穩。 沒有發生百姓因沒有食物而大量餓死的事件。 蔣介石"還道"後,反而會出現通貨膨脹和物價暴漲。 百姓的生肖不如王政委時代了。 後來共產黨在文革時召開"告誡詞瞻"的訴求大會時,幾乎沒有人說王政委政府時期的生活是最艱難的。
在王政委統治的北京、南京、上海等大城市,百姓的生活基本得到了保障。 發行洋票、布票限制吃穿的事情也沒有發生。 也沒有發生讓"知識青年"市民下鄉解散家庭的事情。 這比共產黨政府的政治業績還要好。 王政委政府與日本人爭搶物資,使敵軍佔領地區的人民吃穿得到保障。 敵軍佔領地區的人民怎能度過8年的漫長歲月? 假如當時王政偉等沒有與日本人合作,日軍就把佔領地區的物資全部搶走、銷燬了。 佔領地區的百姓即使避開日軍人的槍彈,也很難避免餓死凍死的命運。 如果不是王政委政府和日本人爭搶物資,至少數千萬人民的生命就會消失。
人的本性是追求自由和獨立。 誰都不想站出來成爲別人的奴隸。 沒有人願意自己成爲其他民族的傀儡或主謀。 無論是誰,只要成爲奴隸、成爲傀儡和住口,那都是不得已的。 假如王政委自願積極成爲日本人的傀儡和走狗,那是誤解了普遍人性。
客觀地說,王政委當賣國賊是因爲他在錯誤的地方賭球。 如果德國、意大利、日本在二戰中獲勝,王政委就會把蔣介石作爲美國的"賣國賊"送上審判臺。 我們今天也許在刻苦學習《王主席文選》。 當然,歷史上沒有假設。 但是,應該客觀地批判歷史人物。 必須遵守最基本的原則:不以成敗論英雄。

 

汪精衛簡介


汪精衛(1883-1944)名兆銘,字季新,號精衛,廣東番禺人。

1901年應番禺縣試,中秀才。1903年考取留日法政速成科官費生,次年入東京法政大學學習,受西方國家觀念及主權在民思想的影響,“固有的民族思想,勃然而興”。1905年7月謁見孫中山,加入同盟會。1912年1月南京臨時政府成立前夕,按孫囑咐代起草臨時大總統府就職宣言。

1921年任廣東革命政府高等顧問、教育會會長等職。次年任國民黨本部參議,參加國民黨改組工作。在1924年1月的國民黨“一大”上被孫指定為大會主席團成員之一,當選為中央執行委員,後出任中央宣傳部長。11月隨孫北上入京,任秘書。1925年2月孫病危時受命記錄孫的遺囑。

孫逝世後以擁護三大政策的“左派”和孫的信徒面目出現。7月任國民政府常務委員會主席兼軍事委員會主席、宣傳部長等職。1926年1月在國民黨“二大”上當選為中央執行委員會常務委員會委員。“中山艦事件”發生後,被迫辭職,出走法國。

次年4月歸國,任武漢國民政府主席,一度與叛變革命的蔣介石進行爭權鬥爭。7月15日在武漢實行“分共”,與蔣合流,但隨後仍一直與蔣明爭暗鬥,歷任國民黨中央特別委員會委員、國民政府委員、行政院院長兼外交部長、國防最高會議副主席、國民黨副總裁等職。

1938年12月離開重慶,發表“艷電”,公開投日叛國,充當大漢奸。1940年在南京成立偽國民政府,自任主席。1944年11月10日在日本名古屋病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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