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시대에, 일련의 풍운인물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에게는 몇가지 별호가 붙었다. 계계삼거두(桂係三巨頭), 천군사거두(川軍四巨頭), 황포삼걸사흉(黃埔三傑四凶), 그리고 풍옥상의 십삼태보, 서북군오호, 당생지후하의 형합이장, 장개석의 팔대금강, 삼거두등등이 있다. 그중 장개석의 팔대금강에 대하여 알아본다.
첫째, 팔대금강의 첫째인물은 하응흠(何應欽)이다. 이 사람은 동맹회원, 황포군관학교총교관을 지내 장기간 장개석 수하의 2호인물이었다. 육해공삼군참모총장, 군정부장을 역임했다. 나중에 <<당고협정>>을 체결하여 매국노, 친일파로 낙인찍히지만, 계속하여 권력을 장악했고, 위세는 꺽이지 않았다. 대만으로 퇴각한 후에 비로소 지도부에서 밀려나고, 편안하게 만년을 보낸다. 하응흠 본인은 원래 병사를 이끈 적이 없고, 계속하여 본부에서 지위하였다. 항전이 종료된 후에는 중국지역에서 총사령관으로 일본의 투항을 받았다. 하와 장의 관계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응흠은 일찌기 두번 장개석에 대하여 다른 마음을 품은 저이 있는데, 한번은 계(桂)계 장군들과 연합하여 장개석의 제1차 하야를 주도하고, 두번째는 서안사변때 무력토벌을 주도했다. 장개석은 이치대로라면 하응흠을 제거해야하지만, 장개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응흠의 수하는 국민당내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으로서는 그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응흠이 계속 고위직에 머물렀던 이유이다. 하응흠은 양생지도를 잘 알았고, 사람을 잘 대했던 걸출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하여 장수하였고, 97세까지 살았는데, 국민당내에서는 장수자중의 하나이다.
둘째, 당연히 진성(陳誠)이다 이 절강사람은 포병출신으로 동정에서 세번의 포로 적을 잡아, 장개석의 환심을 샀다. 나중에 담상과 결혼하여, 장개석과는 간친(干親,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양자, 양부모등의 관계)이 되고, 장개석에게 중용된다. 11사단에 있을 때, 이묵암, 초건등과 연합하여 사단장을 몰아낸다. 당생지토벌과 중원대전때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나중에 홍군의 포위공격때에도 계속 자기의 세력을 확대했다. 은연중에 하응흠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장개석의 묵인에 의한 것이고, 장개석도 당내에서 하나의 세력을 키워 하응흠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진성은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고, 이로 인하여 진성이 형성한 토목계(土木係)는 한꺼번에 국민당의 군정에 있어서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그 18군은 중앙군의 5대왕패의 하나가 되었다. 진은 날이 갈수록 장개석의 중용을 얻고, 노산군관훈련단에서 계속 부단장을 맡으며, 항전후에는 4차에 걸쳐 무한회전을 지휘한다. 이후 제6전구사령관을 맡아 중경을 지킨다. 내전때는 동북을 지휘하나, 패하여, 대만으로 가고, 대만에서 수년간 잘 관리하여 장개석이 도망치는데 좋은 길을 열어준다. 이로 인하여 국민당의 2호인물이 된다. 65년에 죽었다. 진성은 특별한 재주를 지닌 것은 없었고, 일을 열심히 하고 조용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군인의 풍모를 중시했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풍모를 유지했다. 사람이 담량이 있어, 일찌기 비행기가 폭격을 할 때도 조용히 30분을 서 있었다. 영웅이라고 할 만하다.
셋째, 고축동(顧祝同)이다. 이 사람은 하응흠과 유사하다. 북벌 때 군대를 이끈 것을 제외하면 본부에서 업무를 하였다. 서안사변후에 장개석의 명을 받아 장작림, 양호성의 부대를 와해시키는데 일처리가 깔끔했다. 항전시에는 제3전구를 지휘하였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그 때 완남사변이 발생하는데, 이로 인하여 국민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내전중에는 국방부를 지휘했고, 장개석의 군사진공계획을 책임졌으며 장개석의 신임을 깊게 받았다. 아쉽게도 수하중에 중국공산당의 지하당원이 있어서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된다. 나중에 대만으로 가서도 계속 중요한 인물이었다. 87년에 죽었는데, 국민당에서 장수자중의 하나이다. 고축동은 사람이 조심스럽게 근신하며 날카로움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았다. 군중성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깊이가 있어,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생동안 여자를 쫓아다니기를 좋아했다.
넷째, 유치(劉峙)이다. 유치의 일생은 그의 외호에서 알아낼 수 있다. 불벌시에는 복장(福將)이었고, 중원대전때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으며, 항일전쟁때는 장퇴장군(長腿將軍, 긴다리, 잘 도망친다는 뜻)이었고, 내전때에는 서주를 지휘했는데 춘저장궁(蠢猪將軍, 멍청한 돼지)이었다. 공정하게 말하면, 유치는 초기의 군사이력은 화려했다. 운이 좋았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공인된 것처럼 그렇게 엉망이거나 나이만 많고 아무런 힘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중에 비록 계속 패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능력은 갖춘 사람이었다. 유치는 팔대금강중에서 군사적인 재능으로 본다면 끝에서 첫번째가 될 것이다. 사실 내전중에서 멍청한 돼지장군이라는 칭호는 너무 심하다. 중원포위돌파시에 판단착오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회해전투에서는 그는 거의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였다. 그의 위로는 장개석, 고축동이 있었고, 그의 아래로는 두장군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그런 인물이 못된다고 보고 군대지휘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속죄양이 된다. 대만으로 가지도 못하고, 인도네시아로 간다. 거기서 소학교 교사로 생을 보낸다. 나중에 대만으로 가지만 이미 이 때는 사람도 상황도 모두 달라졌다. 유치는 원래 탐욕스러운 것으로 이름났고, 사방에서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나중의 결과도 좋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장치중(張治中)이다. 이 유명한 붉은 장군이 장개석의 팔대금강에 속한다는 것은 매우 의외일 것이다. 그러나 장치중의 사람됨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치중은 아주 전통적인 유가이다. 손중산선생의 발탁을 받아 황호군관학교의 건립을 책임진다. 이후 계속하여 손중산의 유지를 잇는다. 황포군관학교의 초기에, 공산당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이 삼대정책은 잘 지켜졌다. 장치중은 유일하게 공산당과 전투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고, 그는 극력 내전을 피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는데, 이유는 내전은 손중산의 유지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장치중은 손중산에 충성한 사람이었지, 장개석에 충성한 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대륙에 치우치는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다. 장개석과 장치중의 관계를 말하자면 장개석은 장치중을 계속 존중했다. 장치중의 의견은 모두 고려했다. 이것은 장치중의 개인적인 재능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개석이 장치중을 깊이 신뢰했다는 것이다. 중원대전때, 장치중은 중임을 맡아 위기국면이 지난 후, 황포군관학교로 돌아가 교육장을 맡아 병사를 훈련시킨다. 장치중은 항전개시후부터 장개석의 신변에서 정치부장과 삼청단서기장등의 요직을 맡는다. 나중에 서북행영장관을 맡아, 성세재에 의하여 구금되어 있던 공산당을 구해준다. 그는 두번에 걸친 평화협상을 이끈다. 두번째 평화협상시에 대륙에 남는다. 장치중의 일생을 보면, 재물에 욕심이 없고, 스스로 규율을 엄히 하며, 내전을 싫어하고, 애국열정이 높았다. 사나이 대장부라고 볼 수 있고, 진짜 영웅이다. 문혁중에 타격을 받았으나, 모택동과 주은래의 비호하에 크게 상처입지는 않는다. 나중에 세상을 뜬다.
여섯째, 전대균(錢大鈞)이다. 이 사람의 일생은 다양했다. 여러번 군대를 이끌기도 하였다. 본부에서 전체전투를 계획하고 지휘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상해시장을 맡은 경력도 있다. 그의 군사이력은 특별히 뛰어난 곳은 없다. 조기의 2차동정에서 여섯연대의 사병으로 진형명의 4천병사를 무너뜨린 것이 뛰어나다면 뛰어난 전과이다. 이후의 북벌, 중원대전, 공산당소탕전에 모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공로는 없다. 고생만 했다. 아마도 이 점때문에 장개석은 그를 자기의 신변으로 불러 시종장을 시켰다. 서안사변때는 한번 장개석의 의심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가 총탄을 한 발 맞았다는 점으로 인하여 연루되지 않고 오히려 동정을 받는다. 나중에 군정부 차장을 지내고 항전후에는 상해시장 겸 송호경비총사령관을 맡는다. 나중에 대만으로 갔다. 이 사람도 장수했는데, 89세가 되어서 죽었다. 전대균은 재물을 좋아했고 유치보다 심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서 "釣大錢, 큰 돈을 낚는다.)고 고쳐불렀다. 항전후에도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면서 큰 돈을 모았다. 대만에 온 후에는 체육사업에 정진하여 대만의 체육에 걸출한 공헌을 한다.
일곱째, 장정문(蔣鼎文)이다. 원래는 원수부의 부관이었다. 나중에 군중에 자리를 하나 차지한다. 일찌기 공산당소탕전에 참전하고 장계전쟁(蔣桂), 중원대전에 참여한다. 복건사변을 해결하고, 서안사변때 서신전달을 맡아서 장개석과 송미령이 고마워한다. 항전후에는 서북행영주임을 맡고 나중에는 제1전구사령장관을 맡는다. 예상계전투에서 궤멸하여 천리를 도망치고 이로 인하여 사직한다. 나중에 국민당에 있기는 하나, 중요한 직위를 다시는 못맡게 된다. 그래서 그는 사업으로 방향을 바꾸어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둔다. 대만에 간 후에는 의식도 풍족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장정문은 여자늘 밝히는데는 고축동을 능가했고, 특히 그는 매춘을 좋아하여 성병을 옮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여덟째, 진계승(陳繼承)이다. 이 사람도 장개석의 중용을 받아, 여러 사건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다지 중요한 곳은 없었다. 큰 공이 없었기에, 큰 잘못도 없었다. 그다지 뛰어난 점이 없었는데, 하나 유명한 것은 청년학생을 진압한 75참변이었다. 나중에 대만으로 가서 52년에 전역한다. 초상국에서 고문을 맡다가 편안하게 죽었다.
이 여덟사람을 살펴보면 모두 장개석의 첫번째 적계이다. 그들은 보정학교를 졸업하거나, 각성의 속성학당을 졸업했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급을 지낸 인물이다. 장개석의 부대에서 그들은 첫번째 군단장 사단장이었고, 장기간 중화민국에서 활약했고, 국민당내에서 활약했다. 그들은 황포계의 원로이며, 장개석의 부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