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닐 때, 중국에 대매국노가 있는데, 왕정위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중일전쟁기간동안, 전국인민이 공산당의 영도하에 일치하여 대일항전을 벌이는데, 오직 그만이 일본에 빌붙어서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였다. 장개석도 가짜로 대일항전을 하고, 진짜로는 반공에 열을 올렸다고 하였다. 그때는 교과서에 모두 이렇게 쓰여 있었고, 이렇게 선전했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드니, 그는 가가대소를 하면서 말했다: "교과서는 틀렸다. 선생님도 틀리게 말했다. 실제상황은 그렇지 않다."
"선생님과 교과서가 모두 잘못되었다니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틀렸다." 부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장개석이 반공하였지만, 그는 항일도 했다. 항일을 이끈 최고지도자였다."
나는 말했다: "항일을 이끈 것은 모주석이 아닌가요?"
"그때는 모주석이 없었다. 장위원장 뿐이었다. 중경담판때, 모택동은 장위원장 만세를 외친 사람이다. 이것은 유언비어가 아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부친의 말을 듣고는 나는 놀라서 멍해 있었다.
왕정위에 대하여는 부친이 여러번 언급했다. 매번 얘기한 내용은 조금씩이었다. 그는 왕정위를 왕조명(汪兆銘)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진짜 이름이라고 했다. 그의 의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용모가 잘생겼고, 재능이 있었고, 인품이 훌륭했다. 왕조명은 미남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협기에 넘치는 두 눈이다. 남자들도 그를 보면 마음이 움직였다. 호적(胡適)도 자신이 여자라면 반드시 그에게 시집갔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음은 왕정위의 재주이다. 그는 시문을 잘 썼다고 한다. "얼마나 잘 썼나요?"라고 내가 물어보았다.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 "왕조명의 글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정치계에서는 지도자였지만, 붓을 들면 문인이었다." 부친은 여러번 나에게 왕정위가 옥중에서 썼다는 <<피체구점(被逮口占)>>을 암송했었다:
강개가연시(慷慨歌燕市),
종용작초수(從容作楚囚),
인도성일쾌(引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
왕정위는 북경으로 가서 청나라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기 전에, <<치남양동지서(致南洋同志書)>>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거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살아서 돌아올 가망이 없다. 채시구(사형집행장소)의 거리에서 피를 흘릴 때, 눈을 부릅뜨고 혁명군의 사람들의 도문을 바라보겠다." 부친은 또 말했다: "그 때의 왕조명은 무술변법의 담사동과 비견하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마찬가지로 큰 뜻을 품고 피가 끓었다." 부친은 또 말해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손중산의 <<총리유언>>인 "나는 국민혁명에 사십년을 바쳤고, 그 목적은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게하기 위함이다..."는 실제로 왕조명의 대필이고, 손중산은 한자도 쓰지 않았다."
왕정위의 인품에 대하여,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국노에게 무슨 인품이 있나요?"
부친은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시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등장할 때까지, 그리고 이국에서 객사할 때까지, 왕조명은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인품에 있어서는 평생동안 흠잡을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돈과 재물을 탐하지 않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마약을 하지도 않았고, 기생집에 가지도 않았고, 도박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치적인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개석, 모택동과 비교하자면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나는 "인심사한(人心思漢)"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일항전승리후, 장개석은 전국에 접수인원을 파견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겁수(劫收)"관원이라고 불렀다. 모조리 "오자등과(五子登科)"했는데, 여기서 '오자(五子)'는 건물(房子), 현금(票子), 황금(金子), 차량(車子), 여자(女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국민당에서 접수하면서 백성들의 민원이 비등했다. 당시의 신문에는 "인심사한"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원래의 의미는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지만, 암암리에 매국노 왕정위를 그리워하고, 그의 인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놀라서 멍해졌다.
부친은 서재에서 아마도 홍콩에서 발간된 듯한 <<쌍조루시사고(雙照樓詩詞稿)>>를 꺼내서, <<금루곡(金縷曲)>> 페이지를 펼쳐보여주었다: "이것은 왕조명이 옥중에서 진벽군에게 쓴 사랑의 시이다. 읽어봐라. 아마도 네가 배운 산곡과 비교해도 절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왕정위가 감옥에 들어간 후, 진벽군이 북경으로 와서 그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왕정위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랑을 표시했고, 평생을 맡기겠다는 뜻을 전한다. 왕정위는 이를 읽고는 감동한다. 그리하여 청나라초기 고량분이 오조건에게 보낸 <<금루곡>>의 "계자평안부(季子平安否)"를 고쳐서 지었다:
<<금루곡>>에는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도 들어 있고, 남녀의 사랑도 들어있는데, 모두 지고지순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나는 그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소위 '매국노'라는 것이, 절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야비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금루곡>>의 뒤에 왕정위는 피로써 다섯 글자를 추가로 적었다: "물유경가화(勿留京賈禍)". 진벽군에게 북경을 떠나서 화를 입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며칠후, 왕정위는 진벽군으로부터 서신을 한통 받는다. 서신에서 다시 한번 왕정위에게 사랑을 호소한다: "두 사람은 지금부터, 마음 속으로 부부가 되기로 맹세한다" 왕정위는 진벽군의 진심에 감동한다. 자신은 이미 무기징역을 받아서, 출옥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만난다고 하더라도, 피차간에 이미 머리칼이 허연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 피로써 한 글자를 쓴다. "좋다(諾)" 진벽군은 왕정위의 혈서를 받고 3일을 통곡했다고 한다.
왕정위의 일생동안 정치를 하였지만, 시사도 함께 했다. 그는 병이 깊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글을 남기지 말라. 남길만한 것은 시사 몇개 뿐이다. 그의 시는 산하를 노래하고, 민생을 슬퍼하고, 절개를 읊는 등 처량하고 비감한 것이 많다. 모두 우국적인 정서를 표출한 것들이다. 사학(詞學)의 대가인 용유생(龍楡生)은 왕정위의 시는 '애국지음(哀國之音)'이라고 한 바 있다. 학자인 섭가영(葉嘉瑩)은 왕정위의 시에는 '정위정결(精衛情結)'이 들어 있는데, 소위 '정결'은 한 사람의 내심에 시종일관 추구하고 집착하는 이념을 가리킨다. 왕정위의 이름은 <<산해경>>에 나오는 "정위전해(精衛塡海)"에서 따왔다.
그가 지은 싯구중에 "위석성치절(衛石成痴絶), 창파만리수(滄波萬里愁)"라는 것이 있다. "위석"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바다를 메우는 정위조(精衛鳥)이다. 한 작은 새가 작은 돌을 물고서는 무너진 중국이라는 창해를 메우는 것이다. 메울 수 있겠는가? "곡선구국(曲線救國)"과 "주화(主和)"사상으로, 민족의 위기순간에, 왕정위는 일본점령지역의 일부 민중과 토지를 지켜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했다. 이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과 담판을 했다. 일본인들은 조건을 잘 받아주었다. 일단 발걸음을 내딛자 조건은 금방 바뀌어 버렸다. 거기에 장개석이 타격을 가하고 배척을 한다. 일단 배에 올라탄 왕정위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되돌아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섭가영은 말한다. 정위전해에서 바다를 메우지 못하는 것은 그렇지만, 이런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왕정위가 한 것은, 바로 이처럼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생동안 "위석성치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생의 '창파만리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왕정위를 시를 살펴보면, 큰 뜻을 피가 끓어 읊던 때부터 처량함과 고통으로 가득찬 것까지, 이 '정해정결'이 시종일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