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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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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어떻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는가?

已故中华民国和国民党领导人蒋中正(介石)


글: 녕녕(寧寧)
상해로 물러난 손중산은 냉정하게 반성하며 생각을 거듭한다.

손중산은 이 때 북대의 저명한 교수이자 중국공산당 북방지구 지도자인 이대쇠를 만난다. 그는 손중산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찾아왔다. 중국지부에서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보낸 지령을 받았는데, 중국공산당원은 개인신분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쇠가 찾아온 것은 패배한지 얼마되지 않은 손중산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그는 러시아혁명에서 경험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소련이 도움을 받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중산은 수중에 군대가 없었다. 혁명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남방과 북방 양파의 군벌을 도발하며 하루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더욱 한스러운 점은, 남방이건 북방이건 이들 군벌은 모두 사람과 총을 가지고 있으므로 손중산을 무시했고 그를 마음대로 부르고 쫓아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화가 날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이대쇠가 온 뜻을 알고는 손중산은 흥분한다. 친히 진독수, 이대쇠를 국민당에 가입시킨다.

공산당의 도래는 차가운 가을에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격이었다. 손중산의 희망은 새로 불씨를 살리고, 금방 사업의 봄날을 맞이한다.

1922년 10월 12일, 이미 복주까지 치고 올라간 북벌군은 허숭지(許崇智)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장개석을 참모장으로 하여 동로토적군을 구성한다. 서로토적군은 진(운남), 계(귀주), 월(광동)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다. 동서양로는 연합하여 광주의 진형명(陳炯明) 부대를 공격한다.

1923년 1월 16일, 진형명은 연합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광주를 물러나서 고향인 혜주로 도망친다.

'반역' 진형명을 쫓아낸 후, 손중산은 광주로 돌아와서, 대원수부를 재건하고, 장개석을 참모장에 임명한다.

1924년 1월 20일,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국립고등사범학교 예당에서 융중하게 개최된다. 손중산의 국민당개조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국민당 "1대"는 "연아(聯俄), 연공(聯共), 부조공농(扶助工農)"을 국민당 3대정책으로 확립한다. 공산당원이 개인명의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심지어 요직을 맡는다. 손중산은 이대쇠를 "1대"에 출석하도록 초청했을 뿐아니라, 친히 그를 대회주석단 5명의 구성원중 1명으로 지명한다. 그리고 순조롭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손중산의 천지는 광활해진다. 그가 소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바램도 수도거성(水到渠成)되었다. 손문이 실패에서 얻은 교훈의 하나는 자신의 적계부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인은 그에게 아이디어를 준다. 그리고 그가 일문일무(一文一武)의 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도운다.

하나는 "국립광동대학"이고 하나는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다. 전자는 명성이 별로이지만, 후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광주 황포도에 있었으므로, 속칭은 "황포군관학교"이다. 아마도 그것이 성립될 때의 공식명칭은 이미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23년 8월 16일, 손중산은 장개석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을 소련에 보내어 시찰하게 한다.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황포군관학교를 만들기 위함이다. 1924년 1월 24일, 손중산은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주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한다. 국민당원로 요중개(廖仲愷)를 주비위원회 당대표로 임명한다.

장개석이 자신감을 가지고 황포도로 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해진다: 폐허나 다름없는 부지에 거의 쓰러질 것같은 몇 동의 건물, 사방은 잡초가 가득했고, 매일 밀물썰물이 가져다 주는 게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엉망인 곳에 학교를 세우다니, 학생은 어디에 거주하고, 훈련은 어디에서 한단 말인가?

이어서 발생한 일은 장개석을 거의 붕괴시킨다.
장개석이 부임한 후, 매일의 업무는 식량을 재촉하는 것이나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총리의 뜻을 받들어 전군 제3군군장인 범석생에게 돈을 구하러 갔다. 생각지도 못하게 범석생은 그의 코를 가리키며 욕을 해댄다: "손대포(孫大砲, 손중산의 별명)가 나에게 돈을 빌려갈 때도 공손했다. 네가 뭐라고, 이런 태도이냐. 어르신이 돈이 있어도 너에게는 못주겠다. 꺼져라."

장개석이 어찌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의 영역범위내이니 이를 악물고 참았으며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문을 나선 후에 돌맹이를 걷어차며 욕을 했다: "냥시피(娘西匹, 장개석이 자주 했다는 욕). 네가 대단한 줄 알지만, 내가 언젠가 손을 봐주겠다."

장개석은 화를 참지 못하고 황포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은 겨우 부교장으로 선임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은 장지를 품고 총리와 환난을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1대"때 아무런 위치도 얻지 못했다. 현재 교장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자신은 부교장이라니, 죽은 진기미를 생각했다. 자신은 바보처럼 모욕을 견디고 화를 참으면서 멍청하게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하여 좋은 일만 해준 꼴이 아닌가.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난 나머지, 해산비를 나눠주고, 주비위원회를 해산한다. 총리(손중산)에게 편지 한통을 남기고, 소매를 떨치고 상해로 돌아간다.

이퇴위진(以退爲進)의 전략은 장개석이 가장 익숙하게 잘 쓰는 전략이다. 이것은 그의 성격과 맞는다. 일반인이 보기에 장개석은 마음대로이고, 조급하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함부로 떠나버린다. 이것은 과거에도 여러번 전과가 있고, 이미 상습범이다.

장개석이 떠나자, 요중개는 급해진다. 그의 형님들인 국민당중앙집행위원인 장정강, 대계도와 월군의 큰형 허숭지도 급해진다. 전보가 하나하나 계속 장개석에게 날아간다.

장정강은 장개석이 울면서 호소하는 말을 들은 후 마음이 약해져서 광주로 가서 손중산을 설득한다. 요중개와 국민당중앙집행위원 이열균, 대계도 등도 도와준다: "교장직은 장개석이 아니면 안됩니다." 허숭지도 손중산이 그에게 교장을 맡아달라는 호의를 거절하고 장개석을 추천한다. 기실 손중산은 장개석을 편애했다. 다만 그의 경력이 너무 얕아서, 교장을 맡게 되면 말들이 많을까봐 우려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장개석을 극력 추천하니, 자연히 그들의 뜻에 기꺼이 따를 일이었다.

장개석이 하루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허숭지는 친히 봉화로 가서 청한다: "형제, 너는 정말 말썽을 잘 부린다. 하늘아래 어디 총사령관이 엉덩이를 쫓아서 참모장을 찾아오는 법이 있느냐. 네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허숭지가 오자 장개석의 체면은 세워졌다. 교장으로 승진된다는 좋은 소식에 그는 더욱 마음이 풀린다. 그는 금방 설두사(雪竇寺)에서 "기회는 잃지 말라(機不可失)"이라는 점괘를 뽑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믿었고,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은 황포로 돌아온다.
장개석, 요중개는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입이 부르터라 설득하며 다녔지만, 겨우 청말의 일부 구식 기관총과 소량의 무기탄약만을 구할 수 있었고, 학생들도 겨우 교복 한 세트와 양말 한 쌍, 구두 한 벌을 줄 수 있을 뿐이었다. 낡은 건물은 비록 수리했지만, 여전히 건물밖에 큰 비가 오면 건물안에도 작은 비가 왔다. 황포군관학교는 비록 정부에서 비용을 냈지만, 당시 광동정부는 계,진,월등 군벌이 좌지우지했다. 학교경비는 자주 이들 군벌두목들에게 잘렸다. 매월의 경비도 보장이 없었다.

냉대와 고난에도 장개석은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았고, 요중개도 더욱 전심전력을 다 했다. 돈을 구하기 위하여, 요중개는 자주 밤에 광동재정을 좌지우지하는 군벌 범석생의 연탑(煙榻)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서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범석생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희 그 오합지졸 군관학교에서 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돈달라는 것이다. 네가 만일 그 일로 오는 것이면 입을 열지 말라. 내가 말을 거칠게 하면 너희 독서인들의 얼굴에 불이 날 것이다. 이돈을 만일 너 자신이 필요로 한다면 원하는 만큼 주겠다. 괜히 군관학교같은 건 하지 말라."

매번 요중개는 좋은 말로 달래면서 갖은 방법으로 돈을 구해왔다. 이 미국화교가정출신에 여러번 손중산의 조각때 재정부장을 맡았던 국민당 원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면서 집을 찾아가고 돈을 부탁했다. 이를 보면 황포군관학교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사총교관 하응흠의 회고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창립때, 캠퍼스면적이 3평방마일에 부로가했다. 경비는 매일 겨우 6000위안이었다. 인력은 학생 500명뿐이다. 무력은 소총 300정 뿐이었다.

이것은 그래도 조건이 좋을 때의 일이다. 학교개교때는 소총이 겨우 30정이었다. 학생들이 보초를 서는데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은 자조하며 말했다: 한 끼를 먹으면 다음 끼는 기약이 없고, 망가진 몇 개의 총으로 천하를 얻겠다고 한다.

군벌들은 이렇게 손중산을 조롱한 바 있다: "너희가 무슨 군관학교를 만든다고. 그 팔국연합군을 칠 때 쓰든 구식총으로? 내가 대대 하나만 보내면 모조리 처리할 수 있다."

비록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장개석은 운좋게도 행복한 봄날을 맞이한다. 소련의 원조가 도착한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의 창건비용은 270만위안이고, 매월 보조금이 10만위안이다. 1924년 10월 7일, 제1차 8000정의 소총과 500만발의 총알이 도착한다. 계속하여 15000정의 소총 및 대량의 기관총과 대포도 보내온다.

비록 창건초기의 물질적 조건이 엉망이었지만, 황포군관학교는 최신식의 이념, 가장 엄격한 요구사항으로 관병을 훈련시켰다.

레닌이 홍군을 창건한 경험을 받아들여, 사상정치교육을 중시하고, 관병의 혁명각오를 배양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삼민주의전사로 길러낸다. 장개석은 매일 학생들을 만나서 얘기한다. 황포1기의 학생은 거의 모두 장개석과 단독면담을 했고, 얘기를 나눠보았다.

관병들에게 솔선수범을 강조한다. 부하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도록 요구했고,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현재 보자면 아주 통상적인 요구이지만, 당시의 군벌이 어찌 이런 말을 햇겠는가? 남자를 끌고가거나 여자를 강간했다. 백성들이 그들만 보면 도망치고 숨어야 했다.

일본군관학교의 엄격한 훈련이념을 추진하여, 학생들은 매일 아침에 섬 7-8킬로미터를 구보로 돌았다. 군관학교의 훈련장은 주강입구에 가까워서, 밀물때는 훈련장에 물이 발목까지 잠긴다. 그래도 나가서 훈련을 했다. 학생들에게 고생을 견디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매일 1끼의 밥을 한번만 퍼갈 수 있게 했고, 짚신을 신게 했으며, 찬물로 세수하고 목욕했다.

가장 엄격하게 교칙을 집행했다. "민중일심(萬衆一心), 만인제력(萬人齊力)"의 <혁명군연좌법>은 장개석이 가장 자랑하는 것이다. 적과 교전할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불문하고, 임전퇴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반장이 전체 반원을 데리고 퇴각하면 반장을 죽인다; 소대장이 전체 소대를 이끌고 퇴각하면 소대장을 죽인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에서 군단장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거꾸로, 군단장이 퇴각하지 않고, 전군관병이 퇴각하여, 군단장이 전사하면, 군단장이 소속된 사단장을 죽인다. 그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는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한다. 군관학교 대문에는 임시로 송백채문을 만들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대련을 걸었다: "승관발재청왕타처(昇官發財請往他處), 탐생외사물입사문(貪生畏死勿入斯門)", 횡비(橫批)는 "혁명자래(革命者來)"였다.

훈련장의 열병식ㅇ서, 하응흠은 소련식카키군복을 입고, 가죽구두를 신은 499명의 학생은 줄을 맞추어 행진했다. 그 영웅적인 풍모로 검열대를 통과했다. 이 성대한 대오를 보면서 장개석은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 대오는 완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비록 500명이지만, 내일은 5천, 5만, 50만 심지어 더 많아질 것이다.

장개석이 정성을 들여서 만들고 훈련시켜, 황포학생은 훌륭한 장교로 훈련되었다. 그리고 대명이 자자한 황포정신을 만든다: 친애정성(親愛精誠), 단결합작(團結合作), 위국애민(衛國愛民), 불파희생(不怕犧牲).

바로 이런 정신은 나중에 반세기동안 전체 중국을 황포의 그림자로 덮히게 만든다.

아마도 아래의 이름만 보아도 놀라서 소리지를 것이다:

호종남, 송희렴, 여정만, 유제시, 계영청, 정동국, 황유, 손원량, 두율명, 진성, 장영보, 임육용(임표), 좌권, 유주서, 유지단, 서상겸(서향전), 장선운, 왕이탁, 주사제, 허계신, 진갱.....

아무도 태어나면서부터 장군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황포출신의 장군이다. 이때이후, 이들은 장개석을 교장이라고 칭한다. 자칭 황포 몇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하나의 특이한 국면이 형성된다. 그것은 바로 스승이 학생을 치고, 학생이 스승을 치고, 동창이 동창을 서로 친다. 이것이 다반사가 된다.

만일 이 학교가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이 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손중산을 여러해동안 따라다닌 요중개가 황포군관학교의 당대표를 맡고, 얼마 후에 암살당한다.

이제심(李濟深)은 한동안 교련부주임을 맡은 후, 신사군에 군장으로 간다.

대계도는 손중산의 마전졸(馬前卒)이고, '당국이론가(黨國理論家)'이다. 정치부주임을 맡은지 1달도 되지 않아, 아무 말도 없이 황포군관학교를 떠난다.

이렇게 하여, 전체 황포군관학교의 대권은 모조리 장개석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비록 장개석은 교장의 좋은 점을 잠시 보지 못했지만, 몇 달 후, 그는 수확을 거둔다. 그것도 아주 풍성하게.

 

蒋介石密谋黄埔军校校长始末

 

文/薛颖杰

坐落在前清虎门、长洲要塞附近的黄埔岛,四面环水,隔绝城市,地当枢要,实为军事重地。孙中山认为该岛便于兴学习武,决定利用设在岛上的原广东陆军学校及海军学校的旧地,创建国民党陆军军官学校,通过军校训练出一批革命军人。军校因该地得名,这就是中国现代史上赫赫有名的黄埔军校。

黄埔军校校长,在当时的国民党内并非是特别显赫的职位,然而对蒋介石来说,担任黄埔军校校长,却是他政治生涯中一个具有决定意义的契机。正是以黄埔军校校长为跳板,蒋介石才得以飞黄腾达,走进权力的长廊,进而跃向权力的巅峰。

蒋介石出任黄埔军校校长,并非如一般人所想像的那样顺理成章,黄埔军校校长人选,开始也并非是蒋介石,而此位最终为蒋介石所得,是其处心积虑,耍弄各种手腕,经一波三折才获得的。

赴苏俄考察

1922年8月下旬,共产党人李大钊自北京来到上海莫里哀路孙中山的寓所,与孙中山讨论振兴国民党、振兴中国的问题。

此时的孙中山,终从陈炯明的叛变中省悟:单纯利用旧军人、旧军阀去打倒另一军阀的道路行不通,必须依靠工农大众,联合共产党,改造国民党,走新的道路,否则国民党将会在堕落中死亡。

同月,孙中山通过李大钊,邀请共产国际代表马林,在由国民党主要人员出席的会议上,阐述发动群众运动和改组国民党的意见。孙中山决定“以俄为师”,派代表团去苏俄考察,以便建立一支新军。

1923年2月21日,孙中山由上海回到广州,准备重建广东革命根据地。当天在东郊设立陆海军大元帅府,任命蒋介石为大元帅府参谋长,命其速来就任。

1922年陈炯明叛变后,孙中山任命许崇智为东路讨贼军总司令、蒋介石为参谋长,计划取道闽南攻击潮汕,直捣陈炯明老巢惠州。因此次军事出击行动流产,蒋介石便回其老家浙江奉化溪口逍遥去了。蒋介石接到命电,却迟迟不归,直到4月20日才抵达广州就任。然而,到任不足3个月,因为不称心,便于7月20日“愤而辞职”,离开苦战中的孙中山,回避香港。

身居香港闹市的蒋介石,听到孙中山与苏俄代表协商已定,将组团赴苏俄考察的消息,怦然心动,遂将目光投向了遥远的俄罗斯。他按捺不住心头急迫,立即给大元帅府秘书长杨庶堪写信,毛遂自荐,表达自己急欲赴苏考察的强烈心愿:“为今之计,舍允我赴欧外,则弟以为无一事是我中正所能办者……如不允我赴俄,则弟只有消极独善,以求自全……”

国民党组团赴苏俄考察,主任代表即代表团团长的人选,最有资格的莫过于廖仲恺。廖仲恺最积极支持孙中山的“联俄、联共”政策,也是最受孙中山信赖的忠诚同志,实为孙中山左右的核心人物。也许是廖仲恺要随时协助孙中山处理政务,实在难以脱身率团,也许是为了安抚蒋介石的情绪,孙中山最后答应由蒋介石为主任代表,率“孙逸仙博士代表团”赴苏俄考察军事。代表团成员为王登云、沈定一,以及共产党人张太雷。

后来蒋介石得以出任黄埔军校校长,与被派赴苏俄考察有很大关系。

1923年8月16日,蒋介石一行乘“神田丸”号轮船自上海出发至大连,乘火车由东北地区出境,经西伯利亚铁路,于9月2日下午1时抵达莫斯科,开始对苏俄新式军队进行实地考察。

在苏考察期间,蒋介石代表孙中山跟苏俄政府交涉援助广州革命政府的一些事宜。

同年11月29日,代表团循原路线回国。

负气出走

蒋介石于12月15日上午9时回到上海,随即去拜访了盟兄张静江,当天下午,给孙中山寄了一份《游俄报告书》后,便登船回奉化老家。

孙中山对蒋介石此举很不满意。这期间,苏联派驻广州的常设代表鲍罗廷早已到达,计划筹办军校已有了眉目,孙中山有意让蒋介石出任军校筹备委员长,可蒋偏偏不来。孙中山于12月30日打电报给蒋介石:“兄此行责任至重,望速来粤报告一切,并详筹中俄合作办法。”

军校招生、考试在即,但在广州仍见不到蒋介石的身影,孙中山火烧眉毛,便让廖仲恺、汪精卫、胡汉民等人连发6封电报催蒋南归。

蒋介石接到电报,继续在溪口慈庵呆了两周,终日拂案焚香,绕茔抚树,直到1924年1月16日才回到了广州向孙中山复命。1月24日,蒋介石受命为军校筹备委员长。

此时,适逢国民党第一次全国代表大会在广州举行。羊城内外,喜气洋洋,宣布创办黄埔军校的消息不胫而走,给这喜庆又添一重氛围。

蒋介石虽然也出席了国民党第一次全国代表大会,但在165位抵粤代表中,备受冷落,大会选出的中央执行委员24人中没有蒋介石扮演的角色。候补中央委员17人中,有共产党人林伯渠、毛泽东、张国焘、瞿秋白等,也没有他蒋介石的名字。蒋介石也不是浙江省的代表,浙江代表6人,其中3人由孙中山指定,另3人则由该省党员选举产生。

蒋介石心中闷闷不乐,他又想到孙中山只是委任他为军校筹备委员长,并没有明确宣布他即为军校校长,同时参与筹建的人中,有好几位功高资深的,叫谁当校长还很难说。他一气之下,于1924年2月21日留书请辞,连照面都不打便“拂然而行”。

孙中山看了中央执行委员会转来蒋介石的辞呈,不觉一怔:唉,这个中正!去年派他赴苏俄考察,就指望他回来挑这副担子,可回来也不马上复命,本党改组刚刚完毕,这样随便如何可以?便提笔在蒋的辞呈上批了这样的几句话:“该委员长务须任劳任怨,勉为其难,从穷苦中去奋斗,百折不回,以贯彻革命党牺牲之主张。所请辞职,碍难照准。”

孙中山不准蒋介石辞职,而蒋介石也并不是真的要辞职,于是他便上演了一场讨价还价的闹剧。

蒋介石撂挑子,还受其政治心态的支配:他极不赞成孙中山“联俄、联共”的政治主张。国民党第一次全国代表大会改组国民党,就是要容共、联共,学习俄国人的方法,走俄国人的道路,孙中山态度很明确:“我党今后之革命,非以俄为师,断无成就。”正是在这个根本的原则问题上,蒋介石跟孙中山产生了分歧。他在《游俄报告书》中就曾毫不讳言地表达:“俄党无诚信可言,与英、法、美、日这些帝国主义比起来,也不过只是五十步与百步之差。”

现在,令他难以容忍的是,共产党进入了改组后的国民党中央领导机构,谭平山当上了组织部长、林伯渠当上了农民部长、毛泽东当上了中央宣传部代理部长,而他蒋介石却在改组后的国民党中央没有得到相应的地位和权力,只是在中央执行委员会下属的军事委员会中担任一个委员。远离权力中心,其对孙中山心怀不满就可想而知了。

蒋介石于1924年3月14日致函廖仲恺,抱怨廖“专以顺从”孙中山的“联俄、联共”政策,露骨地批评廖“过信俄人”,说“俄党对中国之惟一方针,乃在造成中国共产党为其正统,绝不信吾党可以与之始终合作,以互策成功者也。”最后声称:“如仍以弟言为不足信而毫不省察,则将来恐亦不免堕落耳。”

周恩来在上个世纪40年代也曾说过:“蒋介石开始办黄埔军校时,表面上赞成革命,但他的思想实际上是反共反苏的,并不是真心诚意地与共产党合作。”

此时,蒋介石似已看出,在苏俄扶助下的中共,将是对他将来权力的严重威胁,他之所以未敢公开提出清党反共,只是当时羽翼还未丰。 当蒋介石带着娇妻陈洁如来到上海西藏路张静江公馆时,张静江显得非常讶异。军校3月21日即将举行入学考试,而这个入学考试的委员长不在广州黄埔坐阵,却跑来上海。他不解地问蒋:“介石,中山先生器重你,委托你办军校,也就是将本党之命脉交由你,责任重大,你理应尽力才是,怎么在这个节骨眼上来上海?你若手头吃紧,我可以再资助你一些。”

“我个人倒不缺钱,”蒋介石愤愤不平、牢骚满腹道:“黄埔岛那个弹丸之地,一片荒凉,白手起家办军校谈何容易,今天去催粮、明天去借钱,滇军第三军军长范石生竟敢指着我的鼻子奚落我;还有,大本营那个禁烟督办杨西岩竟目中无人,胆敢拒绝拨付军校的开办费!巧妇难为无米之炊,罢了,我还去当许崇智的参谋长,带兵打仗吧!”

“中山先生不是让你当军校筹备和入学考试委员长了吗?”

“静兄,你只知其一不知其二,中常委打算让孙先生兼任校长,而孙先生属意程潜和许崇智,只让我和李济深为副校长,我实在不愿意给人家做嫁衣裳!”

蒋介石这句话总算让张静江明白他负气出走上海的真实意图,是在以退为进,给孙中山施加压力,是在要挟孙中山。

“你回去,”张静江见自己盟弟受如此委屈,便一拍桌子:“我马上给孙大炮写信,校长之职非你莫属,我的话他不会不听,一定叫他让你当校长!”“反正我已向总理提出辞职了,先回奉化看看动静再说。”

“对!”张静江怂恿道:“他不委任你为校长,你就不要出山!”

张静江、蒋介石都曾是上海证券交易所的经纪人,两人义结金兰,换贴拜把,情深义笃,利害相关。刚才张静江对蒋介石讲的那番话并非是口出狂言,他与孙中山的交谊确非寻常。

早在1902年5月,孙中山赴欧美向华侨募捐革命经费,在轮船上邂逅浙江湖州四大富豪之一的张家公子张静江,他当时正赴法国出任清廷驻法国公使馆一等参赞。孙中山见张静江虽也算朝廷命官,但官位不高,且尚年青,谈吐不俗,便将自己真实姓名和推翻清廷的革命主张相告。经说服、引导,张静江愿意参加孙中山的组织,当即慷慨表示,愿以白银3万两相助,让孙中山凭其亲笔信到纽约通运公司找姚叔兰(张的妻舅)提取。3万两白银,这在当时可算一笔惊人的数目。孙中山到了美国,果然凭信取得白银3万两。以后,张静江对孙中山继续疏财相助,孙中山对他虽说不上言听计从,却也十分重视。

蒋介石原以为他这一走了之,可以使军校办不起来。然而,在蒋负气出走后,孙中山即命廖仲恺代蒋职,继续筹办军校事宜。同时,于2月29日亲自电陈蒋介石复职,内称:“军官学校以兄担任,故遂开办。现在筹备既着手进行,经费亦有着落,军官及学生远方来者,逾数百人,多为慕兄主持校务,不应使热诚倾向者失望而去。”

孙中山拍完电报,又于3月17日将禁烟督办杨西岩免职查办。

按说,这已是给足了蒋介石的面子,他该回任了吧?可还是没有。他私下里向人透露,本人的“行止不应以杨西岩免去而定”。很明显,他只不过是借杨西岩不拨经费为发难之借口罢了。

3月2日,蒋介石曾给孙中山写了一封长信,开首之言,不外是“知遇之隆,并世稀有”这类的奉承话,接下来笔锋一转,便端出陈其美(陈英士)。

陈其美的确是孙中山的信徒,孙中山搞中华革命党,要党员摁手印向他个人效忠,连黄兴这样老资格的革命党人也拒绝,而陈其美则二话没说。蒋介石正是由陈其美介绍并监誓而加入同盟会的。辛亥年,蒋介石在杭州举事成功后赴沪,出任陈其美的沪军第五团团长,遂跟陈其美换贴拜把结为兄弟,这是蒋介石生平多次结拜异姓兄弟之第一遭。后来,在孙中山最倒霉的时刻,在许多老朋友纷纷离他而去的时刻,经陈其美引荐,蒋介石才得以单独拜会孙中山,始与孙直接牵上线。于是,他在信里用标榜自己与陈其美的关系,希冀打动孙中山。他写道,自己与陈其美“万古交情,虽手足之亲,未足间其盟契;骨肉之挚,不能逾其思义,肝胆相照,可质天日”而盟兄对他“信之专爱之切而知之深也”。接着便和盘托出他蒋介石侍奉孙中山于永丰舰的事。那是在陈炯明叛变后,蒋介石从上海赶到广州,冒险登上永丰舰,护卫孙中山,率海军与叛军对抗,深得孙的好感。蒋介石颇有心计,不仅让人拍下了孙中山坐在藤椅上、自己身着戎装威武地站在孙中山身后的照片,而且事后还写了一本《孙大总统广州蒙难记》的书。孙中山不仅为该书作序,称蒋介石“日侍予侧,而筹划多中,乐与予及海军将士共死生”,并且还对外国记者说:“蒋某此来,不啻增加两万援军也。”这也就成了蒋介石在国民党内崭露头角的一笔丰厚的政治资本。这次他又旧事重提,说有几人能像他蒋某这样对先生忠心赤胆、生死与共呢?

一番表功之后,他便将话挑明了:“如吾党同志果能深知中正,专任不疑,使其冥心独运,布展菲材,则虽不能料敌如神,决胜千里,然进战退守,应变致方,自以为有一日之长,断不致临时纷乱,乃陷危境……”最后,他进一步要求:“先生不尝以英士之事先生者期诸中正乎,今敢还望先生以英士之信中正者而信之也。”

蒋介石在信中答应孙中山于日内起程。实际上,他是先应付过去,至于何时动身,还要等待火候。

见好就收

蒋介石出走后,黄埔军校一应筹备事务,全摊在廖仲恺身上,但蒋介石挂着名,许多事情不经过他又不好决定,可他又迟迟不归。廖仲恺最后也有些忍耐不住了,不得不于3月26日电蒋:“转介石兄,归否?请即复,俾得自决。”言下之意,来与不来必须明白回话,不要说来而又不动身。不来,这边即另行考虑。

事实上,蒋介石自交辞呈后,粤沪两方不断地往奉化函电相催,说尽了好话,不断满足他的具体要求。他的另一盟兄胡汉民曾两次致函蒋介石,劝他见好即收,再消极下去恐怕物极必反。

至此,蒋介石也知道,军校不会因他辞职而不办,遂以婉转的文字给廖仲恺复电:“函电敬悉,弟必来粤勿念。”并在电报中对校务做了一些安排。

因尚未获悉孙中山是否决定委任其为校长的准确消息,所以蒋介石又拖了一些日子,孙中山实在等不及了,不得不命粤军总司令、蒋的盟兄许崇智去奉化找他,并交代说,无论什么理由,蒋必须立即返回。显然,孙中山也生气了。

许崇智绝非等闲之辈,其祖父曾为前清浙闽总督,他本人从日本士官学校毕业,清末就官至协统,资历比蒋介石深得多了。这个“王孙公子”还是颇有智谋的,他摸准他的参谋长蒋介石的脾气,便来个请将不如激将。

蒋介石见总司令、盟兄亲自到奉化,心头窃喜,但表面上仍是言不由衷地进行试探:“我宁愿一辈子辅佐你总司令镇守南关,黄埔那份差事让廖仲恺、程潜、李济深他们去逞能吧,要枪没枪,要钱没钱……”

未等蒋介石牢骚发完,许崇智便抢过话头:“你再在溪口雪窦山里呆下去就迷糊了,世上的事全不知晓了。告诉你,孙先生已经跟苏俄要了几千条枪正由海路朝广州运呢,还有大批款项,四周军阀都红了眼。你倒好,聪明一世,糊涂一时,把个聚宝盆拱手相让!”许崇智一本正经地警告蒋介石:“你要再不回军校,可就坐失良机!孙先生已经发话了,若你此次不跟我回去,校长一职将考虑他人!”

蒋介石聚精会神地倾听着,一双机警的眼睛盯住许的脸,内紧外松地淡淡一笑,问:“先生物色些什么人?”

许崇智品了口茶,不紧不慢地拍了一下胸脯:“不瞒你老弟说,在下就是一个,可我不能夺自家兄弟的位子!”孙中山拟让许崇智出任军校校长,而许崇智又不愿干这份差事,蒋介石早有所闻,现在他所要急需知道的是还有些什么人在跟他争这个宝座。

许崇智从蒋介石的脸上觉察到他已动心了,便漫不经心地放低声音说:“先生见我不肯干,又提出要破格提拔你司令部那个上校参谋陈翰誉来当。”

“陈翰誉,他有什么资格当军校校长?”蒋介石愣着脸,几乎是拍着桌子吼道。

许崇智接着说,“还有孙先生的卫士队大队长姚观顺也在跃跃欲试,先生也有意于他,他可是护驾有功之臣噢!”

“哼,姚观顺!”蒋介石从鼻子里轻蔑地哼了一声,说:“一个华侨,匹夫之勇,连讲武堂都未进过,哪里懂得办现代军校。既然孙先生看不中我,我干脆再也不回广州了!”

“你看你,怎么这么讲?你不干,总得有人来干吧!”许崇智目光炯炯地盯着蒋介石的脸,见火候已到,便转换话头:“但先生对于你毕竟是偏爱的,本来就有意让你办校治军,再加上你那个盟兄张静江,又是写信又是拍电报,这么一鼓动,先生也就决定由你为军校校长了!”

“那李济深呢?”

“他只当个教练部主任,季陶兄当政治部主任!”

听到这里,蒋介石这才松了一口气,知道自己此次罢职已大获全胜,禁不住脸上闪过一丝不易被人觉察的笑意。

终任校长

蒋介石是千呼万唤始南归,终于在1924年4月21日心满意足地回到广州,于26日到黄埔军校办公。

5月3日,孙中山正式任命蒋介石为黄埔军校校长兼粤军参谋长,并允诺给予他办军校在人事与财政上更多的权力。廖仲恺亦于5月9日正式出任黄埔军校中国国民党代表,孙中山自兼军校总理。

在孙总理、廖党代表之下,蒋介石名列第三。直至次年,孙、廖相继辞世后,蒋才真正坐上黄埔军校第一把交椅。

黄埔军校是国共合作的产物,是在苏俄大力支持下创办起来的,根本制度效法苏联。著名共产党人周恩来出任军校政治部副主任(次年,即1925年3月升任政治部主任兼军法处处长),担任政治教官的共产党人还有恽代英、萧楚女、包惠僧、高语罕等人,另外还有苏联顾问和教官数十人。

蒋介石虽然隐忧共产党势力的发展将是他的心头大患,但慑于中共在黄埔军校的力量,同时也为了获得中共和苏联的更大支持,以便使自己在国民党内能迅速崛起,所以上任初始,他一再声称自己对共产主义绝无异义,是极为赞同的,并公开发表言论说:“我们要党成功、主义实现,一定要仿效俄国共产党的办法”、“三民主义之成功与共产主义之发展,实相为用而不相悖”、“中国革命是‘世界革命中的一部分’、世界革命不能无共产主义”、“国民党、共产党不可分,而应合”,甚至还当众诅咒发誓,愿“为国民革命、三民主义、共产主义而死”。

由于蒋介石表演得天衣无缝,确实迷惑了世人,一时间,黄埔军校被称为“红色黄埔”,蒋介石亦被誉为“红色将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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