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사건(重慶事件)이 발생한 지 이미 몇 주가 지났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왕리쥔(王立軍)의 탈출이 중공 정계에 천지가 뒤집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중공이란 흑사회(黑社會)의 묵계(黙契)와 권력평형의 잠재규칙을 깨뜨려 각 파벌이 혼란 중에서 새로 판을 짜도록 했다. 각 파벌이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중공이 전면적인 내분상태(內紛狀態)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지금 국가안전부에 연행된 후 실종된 것은 왕리쥔(王立軍)만이 아니며 그의 가족과 동생의 행방 역시 묘연하다. 아울러 부부장 추진(邱進)을 포함해 충칭에 찾아와 왕리쥔을 데려간 7명의 국가안전부 요원들의 행방도 묘연하다.
충칭사건은 단지 보시라이(薄熙來)만 연루된 것이 아니며 중공 정치국의 9명 상무위원 전원이 연루되어 있다. 지금 또 저우융캉(周永康)에게 화가 미치고 있으며 칼끝은 장쩌민(江澤民)을 겨냥하고 있다. 각 파벌 간 세력다툼에 군부의 변동이 더해져 전체적으로 붕괴와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장쩌민은 2002년 퇴위할 때 군권(軍權)은 내려놓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가 전면에 등장한 17대에도 장쩌민은 군권을 바탕으로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의 절반 이상을 자신의 심복으로 채워 넣어 후진타오로 하여금 여러 방면에서 손을 쓸 수 없게 했다.
특히 장쩌민은 공안, 검찰, 법원 권력을 장악한 중앙 정법위(政法委) 서기 직책을 늘 자기 심복에게 맡겨왔다. 정법위는 사실상 중공의 폭력기구를 장악하고 있으며 평화적인 시기에는 정법위의 실권이 군권보다 오히려 더 막강하다. 왜냐하면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군부에서 설사 일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아야 하지만 수 천 수 만의 공안이나 무장경찰(武裝警察)을 동원하는 것은 한 시(市) 정법위 서기의 지령만으로도 가능하다. 장쩌민이 권력을 잡은 후 정법위에 이렇게 큰 특권을 부여했다.
때문에 최근 7, 8년간 비록 형식적으로 군사위원회를 장악한 주석은 후진타오지만 정법위 서기의 실권은 뤄간에서 저우융캉(周永康)에 이르기까지 줄곧 장쩌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후진타오는 형식적으로는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임에도 아무런 실권이나 권위도 없기 때문에 각 파벌 멤버들을 굴복(屈服)시킬 수 없었다. 단지 중공의 표면적인 단합과 강대함을 유지하는 것이 공동의 이익이 되었을 뿐이다.
즉, 중공이란 해적선(海賊船)을 같이 타고 있기 때문에 일단 공산당의 통치가 무너지면 장쩌민파건, 공청단파건, 아니면 태자당(太子黨)이거나 개혁파를 막론하고 모두 끝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중공의 느슨한 연맹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중공 특유의 권력에 대한 게임 규칙이다. 이는 일종의 묵계이자 약속이다. 그런데 보시라이가 앞장서서 이 묵계를 깨버렸다. 보시라이는 우선 심복인 왕리쥔(王立軍)을 이용해 전임 충칭 서기인 허궈창(賀國強)과 왕양(汪洋) 수하에서 공안국장을 역임한 원창(文昌)을 타도케 했다.
또 이를 통해 허와 왕의 약점을 잡은 후 후진타오-원자바오를 협박해 더 이상 자기 부인(구카이라이)이 탐오하고 축재한 혐의에 대해 조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앙기율위원회 서기 허궈창과 태자당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허궈창은 보시라이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먼저 왕리쥔에게 손을 썼다. 중앙기율위원회는 2009년부터 왕리쥔이 공안국장으로 있었던 톄링(鐵嶺)에서 탐오를 조사해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 그 후 먼저 왕리쥔이 톄링에 심어놓은 수족들을 제거했다.
2012년 설 이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왕리쥔(王立軍)과 비밀 회담을 갖고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며 그를 압박했다. 왕리쥔에게 보시라이(薄熙來)의 각종 대화기록 등을 제공함으로써 보시라이 타도에 협력하면 그의 죄를 상쇄(相殺)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왕리쥔은 동의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보시라이의 귀에 들어가자 두 사람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서 또 보시라이를 찾아 왕리쥔의 범죄증거를 보여주자 보시라이는 왕을 보호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연루(連累)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를 버렸다. 이에 2월 2일 왕리쥔이 갑자기 충칭 공안국장에서 물러나 한직으로 쫓겨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뒤이어 사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왕리쥔(王立軍)이 중공의 묵계를 지키는 대신 미국 영사관에 들어가 중공 내부 암투의 실질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마침 캐나다 하퍼 총리의 방중, 시진핑(習近平)의 방미와 맞물려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중공이 지난 수십 년간 거짓으로 다져온, 공산당은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하다’는 가상을 철저히 깨트렸으며 미국 국무부의 공개적인 답변과 민간의 웨이보, 트위터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왕리쥔(王立軍) 사건은 중공의 선전기구로도 진상을 은폐할 수 없었고 중국 민중들에게 ‘공산당의 거짓 쇼’를 보여주었다.
지금에 와서 설령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가 이번 사건을 타협(妥協)하고 적당히 은폐하려 해도 하기 어렵다. 보시라이(薄熙來)가 말을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갈 것이며 아울러 그는 중앙의 약속을 믿지 않을 것이다.
보시라이로서는 일단 베이징에 가면 신의라고는 없는 중공 고위층이 청산작업(淸算作業)에 들어갈 것임을 안다. 또 보시라이는 성격상 남이 자신을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위인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차라리 충칭에 남거나 혹은 그의 아버지가 군 지도자로 있었던 윈난(雲南)으로 들어가 저항할지언정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이번 사태가 각 파벌의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천의(天意)와 민심이다. 일단 중국인들이 왕리쥔(王立軍), 보시라이(薄熙來) 및 중공 배후의 사악한 계통에 대해 똑똑히 보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파룬궁수련자들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했는지 똑똑히 알게 되며, 그들이 어떻게 국민의 이익을 빼앗았는지 똑똑히 알게 된다면 이런 범죄행각(犯罪行脚)은 하나하나 역사의 치욕(恥辱)으로 기록될 것이다. 민심은 속일 수 없고 민의는 거스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