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마이크론 제재'라는 공포탄을 쏘아 올렸다. 미국의 반도체기업인 마이크론이 중국 정부가 실시하는 '사이버 보안평가'를 통과하지 못해 중국에서 제품판매가 중단됐다. 중국의 공포탄은 표면상 적극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비단 미국에만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경고에 관련 국가들은 내심 뜨끔했을 것이다.
도리어 느닷없이 미국 의회에서 한국이 마이크론 자리를 대체하지 말라는 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한국이 주목받게 되었다. 얼마 전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역을 맡은 한석규가 제자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걸 알아챘냐고 놀라 묻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을 알면 그 의도가 보이고, 의도가 보이면 행간도 읽히는 법이죠." 중국과 미국과의 갈등 속에 우리가 꼭 곱씹어봐야 하는 명대사가 아닌가 싶다.
최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 양국의 일련의 정책들은 결국 그들이 추구하려는 목표 달성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이에 휩쓸려서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김사부의 말처럼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고 의도의 행간을 읽고 대응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중국 견제 한발 물러서는 미국
미국은 지난 2021년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2년 동안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압박해 왔다. 미국은 내년에 대선을 앞둔 만큼 중간 성적의 정산이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2년간 미국의 성적은 어떨까?
미국은 지난 2018년 '수출통제개혁법' (Export Control Reform Act, ECRA)을 제정하여 '신흥 및 기반 기술'에 관한 규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에 대한 이행력을 강화하기 위한 추가적 행정명령 및 제재 등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더해 '반도체법'(CHIPS Act), '과학법'(Science Act) 제정을 통해 미국 국내 반도체 산업을 정책적으로 전격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은 타국의 관련 산업의 성장을 간접적으로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일련의 숨 가쁜 행보는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적이던 미국 산업계의 '추세'를 돌려세웠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향후 중국과의 기술격차 확보 차원의 방어와 공격을 위한 제도적 배수의 진을 마련한 것도 미국으로서는 나쁘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세계로부터 비판받았던 '미국 우선주의'가 표현만 '동맹과 함께 (미국 우선주의)'로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은 이전 행정부 때보다 더 철저하게 관철되었다.
미국의 조치는 마치 중국을 겨냥해 새로 짜는 공급망 판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정책 변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에 관한 전략 기조를 '중국 디커플링(de-coupling)'에서 '중국 디리스킹(de-risking)', 즉 '분리'에서 '위험 제거'로 전환했다. 또 미국에 중국 반도체 공장 건설을 최종 승인했다.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킬 듯 몰아붙이던 미국이 한순간에 태세를 전화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중국 배제'가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닌 듯하다.
경제 안보를 위시한 보호주의
미국은 처음에 동맹국과 '함께'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었다. '함께'에 방점을 찍은 동맹국들은 너도나도 미국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데 있어 동맹국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대신해 중국을 압박하는데 동맹국을 이용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미국이 설계한 정책은 중국 압박이 아닌 자국 산업 보호가 목적이다. 중국 견제는 자국 산업 보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조치라고 볼 수 있다.
WTO 체제라는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산업보조금을 통한 보호주의 정책은 미국이 아니면 용납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국제 여론이 미국의 산업 보호 정책이 아닌 편 나누기에 쏠린 틈을 이용해 내부적으로는 보호막을 만들었다. 미국은 과거 냉전 시기에도 이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 바 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연합(EU) 내 일부 국가들을 비롯해 아시아지역 동남아국들로부터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적 보호주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디리스킹'이라는 말 바꾸기로 물러서는 듯 보이지만, 당분간 자국의 산업 보호주의는 계속될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경제 안보를 내세운 보호주의의 확산에 있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하는 무역 제재는 WTO 체제에서도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WTO 규정은 국가안보에 대한 자국의 판단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안보'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이 매우 자의적일 수 있다.
또 과거에는 국가안보의 개념이 군사적 충돌에 기인했기 때문에 무역분쟁에서 관련 규정을 원용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최근 국가안보의 개념은 경제문제, 특히 디지털산업의 경쟁력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디지털산업에 관한 국제질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도나도 경제 안보를 이유로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자유무역 질서의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벌써 그런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두에 언급한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의 법률적 근거가 '보안평가 부적격'이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외국 기업에 대한 직접적 조치를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관련 법률이 만들어진 이례 최초의 법률 이행사례이다.
또 디지털통상협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디지털/데이터 자유주의' 규범화 원칙이 어느 정도 완화되고 있다. 미국은 국내 경제안보 목적에 따른 규제 정책을 국제협정에서 '정당한 공공정책' 등 예외 조항 형태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각자도생
결론적으로 지금은 각자도생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하는 미국마저도 자국의 살길을 찾는 상황이다. 그 길에 중국이 필요하다면 미국은 어제든지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인플레이션감축법을 비롯하여 국내법률 정비를 마쳤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 (IPEF)와 같은 대외 중국 압박 메커니즘도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중국과의 협상을 위한 대내외 여건이 어느 정도 마련된 듯 보인다. 얼마 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고 양국 정상이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닌 듯하다.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비단 중국이나 미국만이 아니다.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서 중국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유럽의 국가들 동남아국들이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전략을 짜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내 편'은 없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위기에 이리저리 휩쓸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빙빙 둘러 말을 해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것이 아무리 상대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들어줘야 할지라도 우리의 이익이 저해된다면 조정을 해야 하는 단호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