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얼굴, 날씨: 우리의 선택이 만든 이야기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했던 적이 있다. 메일함으로 매일 발송되는 ‘일간 이슬아’를 구독할 때였다. 그의 동료 작가가 쓴 도살장 탐방기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2년여 간의 노력은 부끄럽게도 중단됐다.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라는 건 어떤 변명을 대도 핑계라는 걸 안다.
불성실한 필자와는 다르게 성실하게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해 오고 있는 이슬아 작가의 계기는 한 영상이었다. 작가는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살처분되는 돼지의 영상을 보다 ‘한 명’의 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불안. 공포. 고통의 얼굴. 그는 쓴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돼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는 자신과 영상 속 돼지 사이의 무수한 공통점을 알아차렸고 더 이상 돼지를 먹을 수 없었다. 이슬아의 어머니 복희 씨는 딸의 비건 지향 결심을 듣고 동참하기로 했다. 복희 씨의 말이 뇌리에 박힌다.
“이건 동물에 대한 이야기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되는 이야기야.”
이슬아 작가의 칼럼집 『날씨와 얼굴』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성실한 前 비건 지향인도 다시금 비건 지향 생활을 마음에 품어 보게 하는 책이다. ‘날씨’와 ‘얼굴’이라니? 두 단어의 조합에 묘하게 마음이 이끌렸다. 날씨와 얼굴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책의 한 부분을 옮겨오면 이해가 될 것이다.
공장식 축산은 전 세계 평균기온을 상승시키는 데에 분명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가 동물에게 겪게 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겪게 할 고통의 시스템을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다. (...) 축산업 내부에서 동물이 강제당하는 생의 모든 순간이 착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맥락에서 ‘얼굴’은 동물들의 얼굴을 가리킨다. ‘공장식 축산’이라는 인간들의 폭력에 고통받는 동물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그러나 책은 동물의 얼굴에만 한정 짓지 않는다. 동물 외에도 쿠팡 노동자, 이주 여성, 전맹 시각장애인 친구 등의 얼굴이 날씨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억압과 차별, 폭력은 대상이 달라져도 그 모습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보다 약자인 동물에 대한 폭력은 여성, 노동자, 장애인… 무수한 약자에 대한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슬아는 ‘중요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기 위해, ‘누락된 목소리를 정확하게 옮겨 적’기 위해 쓰는 사람이다. ‘어떤 얼굴들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먹는 동물의 얼굴에 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매일 먹는다. 그 말인즉슨 매일 적어도 두세 번은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뭘 먹을지. 요리의 형태로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건 주로 가공된 형태다. 여러 공정을 거치는 사이 동물의 모습은 형태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놓인 음식에서 동물의 얼굴을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해 보면 어떨까. 떠올려 보면 어떨까. 비인간 동물 친구의 얼굴을. 우리는 계속해서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식탁 위 요리나 매대 위 제품에서 동물은 추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고통 같은 건 매끈하게 닦여 나간 뒤다. 그러나 우리 역시 동물이라 그 고통을 헤아릴 줄 안다. 이 상상력은 아름다운 우유 크림 케이크에서도 가축화된 동물의 생을 그리게 한다.
Unsplash의 Luke Stackpoole
‘고기’라는 말은 식용하는 온갖 동물의 살을 의미한다. 비거니즘 잡지 『물결』에 따르면 이 단어에는 “처음부터 살아있는 존재, 고통을 느끼는 존재의 자리가 없”다. ‘고기’라는 단어는 온 비인간 동물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우리는 은연중에 단어로써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을 은폐하고 외면한다. 우유가 아니라 소젖, 달걀이 아니라 닭알이라고 표현하면 착취한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고 마니까. 죄책감 없이 마구 먹기 위해 교묘하게 단어를 사용해 온 거다.
다른 단어를 사용해 보면 어떨까. 단어에 생각을, 행동을 바꾸는 힘이 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죽을 때까지 다른 언어를 배우고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우리의 인식을 바꾼다고 생각하면, ‘새 마음으로’ 새 언어를 쓰는 것이 비건 지향 생활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새 언어를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새 음식을 먹는 것에 익숙해지면 우리의 ‘날씨’가 변할까. 눈앞에 닥친 기후위기를 조금은 더 나중으로 미룰 수 있을까.
비건 지향 생활 역시 완벽할 수 없고 나는 앞으로도 크고 작은 부끄러운 짓을 반복하겠지만,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관두지 않고 싶다.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의 앞뒤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며 우리를 격려하는 것 같다. 한발 앞서 행동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작은 움직임을 더하라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고 싶어진다.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지나쳤던 무수한 얼굴들을, 이제 다시 상상해 본다. ‘나 하나쯤은 괜찮아’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 힘을 보태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