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한 편의 시와 같은 소설들은 세상에 무언가를 더했고, 노벨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의 영상을 찾아보며, ‘작가님 참 순수해 보이신다’하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작가의 얼굴과 눈빛, 음성 모든 게 순수했다. 순수하지만 강렬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작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가 가진 순수함이 참 귀해 보였다. 모든 게 디지털화된 오늘날,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의 얼굴 같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순수함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참 멋지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그 이름도 생소한,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 산문’. 은유 작가가 한국의 시를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의 언어로 번역하는 시 번역가 일곱 명을 만나 인터뷰한 기록이다. 각기 다른 동네 책방에서 만난 그들이 시에 빠진 계기는 서로 다르지만, 공유하는 점이 있다. 시를 번역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이다. ‘순수’의 사전적 뜻은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이지만 여기에 은유 작가는 감탄할 만한 정의를 하나 더한다. ‘불순물이 없는 게 순수가 아니라 불순물까지 보는 게 순수다.’ 시인이 시를 통해 하는 일, 그리고 책에 나온 인터뷰이들이 번역을 통해 하는 일이 그것일 테다.
특히 번역은 두 세계를 오가며 한 세계를 다른 한 세계에 소개하는 일이다. 우리가 속한 세계에 불순물이란 없을 수 없기에 번역가들은 부지런히 선택한다. 그것을 보기로, 번역하기로. 그러니 번역에는 치열한 투쟁이 수반된다. 출발어와 도착어 모두에 능숙한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호영과 안톤 허는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퀴어나 인종, 페미니스트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서’ 또는 ‘좀 더 소수자 중심으로, 좀 더 변두리에 있는 이야기들로 한국문학 번역의 흐름을 바꾸고 싶어서’ 번역을 한다. 이들은 번역을 통해 순수한 소망을 품는다.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기를, 더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기를.
번역가들은 각자의 독특한 배경과 정체성으로 여러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도계 미국인 알차나는 한국과 한국어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이민자나 두 문화 사이에서 소속감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번역에 몰두한다. 이와 비슷하게 새벽은 미국인과 한국인이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불안을 겪었지만, 이제는 이를 축복으로 여기며 번역을 통해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기를 꿈꾼다. 어린 시절 독일로 이민을 간 한독 번역가 박술에게 언어는 생존의 무기였다. 최근에 그는 육아를 통해 번역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다.
“육아를 하지 않은 딱딱하고 남성적인 사고가 되게 하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렇게 맑고 획일적인 생각들이 세상의 중요한 부분은 안 보는 사람들한테서 나온 거잖아요.” -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중에서
공동체 감각을 지닌 순수는 어떤 모습일까. 소제는 ‘다른 번역가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 주고 싶’어 온라인 매거진 『초과』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한 편의 한국 시와 다수의 번역가의 한영 번역본, 각 번역에 대한 논평이 실린다. 이들 공동체는 권위적이거나 경쟁적이지 않다. 서로의 다른 관점을 존중하고 다층적 의미를 허용한다.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치열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한편, 문학이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까지 반영해야 ‘불순물까지 보는 순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번역가 승미는 문학과 사회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일본에서 한국문학이 인기를 끄는 이유라고 짚는다.
이들 번역가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투쟁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불순물까지 보기 위해서, 순수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들이 몰두하는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소수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순수한 실천이다. 순수한 것이 희귀해진 세상이라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진정 순수한 것이 살아남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시와 소설이 그랬듯이. 이제 스스로 물어보자. 나는 세상에 무엇을 더할 수 있나.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