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를 믿자니...
자칭 큰바위가 되고자 악암(岳岩)이란 필명으로 유세(遊說)하며 문학에 큰 뜻을 두었건만, 아쉽게도 나는 유명한 스승을 모시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전수받고 창작 분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린 적 없는, 초야에 묻혀사는 일개 평범한 서민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의지가 굴강(屈强)하다고 자부해 자화자찬(自畵自讚)할 따름입니다. 현실에 직면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에 빠질 때마다 가끔 고려시대 이규보의 "옹달샘에서 달을 긷다"는 시를 연상해 봅니다.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에 들어와 비로소 깨달았으니,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깊은 산 속의 옹달샘에 비낀 달은, 워낙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이 아니라, 옹달샘에 비낀 달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달을 좋아해서 옹달샘에 비낀 달이, 진짜 달이라고 착각합니다. 스님은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달의 실상(實相)은 보지 못하고, 가까운 옹달샘에 보이는 가변(可變)적인 허상(虛相)만 보게 됩니다.
당(唐) 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도 술에 억병으로 대취해서 강물에 비낀 달을 건지려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습니다. 평생 총명이 과인하여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시선(詩仙)인 이태백 역시 허상에 속아 순간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의 죽음을 두고 벼라별 설이 다 나돌았고, 꾸며낸 가설(假說)을 믿은 사람들은 또 한 번 허위 사실에 속았습니다.
이처럼 실체(實體)를 정확히 인지(認知) 못한다면, 곧 속히우는 것으로 됩니다. 속히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가려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처럼 늘 빛나는 것만은 아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려면 정체를 꿰뚫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야 합니다.
만고에 길이 빛날 천재 시인의 허망한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허황한 이야기를 꾸며냈고, 또 그 꾸며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믿고 싶었니다.
실상을 똑바로 보려면 꼭 정문일침(頂門一鍼) 각오가 돼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으로부터 눈을 감으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처세가 됩니다. 하긴 실상 그래로를 보던지, 허상을 바꾸어 보던지 간에 종당엔 엄청난 댓가가 지불됩니다.“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시(是)일까? 비(非)일까?”
“있는 그대로”를 믿고 따르자면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산 속의 중처럼 온 밤을 지새며 물병에 달을 긷는 헛수고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물론 눈에 허상이라는 콩깎지가 씌여, 한때 붓대로 세상을 벌벌 떨게 했던 이태백처럼 물에 빠져죽는 비극도 초래하게 될 겁니다.
한평생 “있는 그대로”를 성신(誠信)했는데, 무수한 고통을 감수(感受)하면서까지 정시(正視)했는데, 선인들이 남긴 교훈이 얼마나 뼈저린가를 각골히 느끼어 알 뿐입니다.
岳岩
執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