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글짓기 묘법
옛말에'만 권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걸으며, 만 명 벗을 사귀라(讀萬券書, 行萬里路, 交萬人友)'고 했습니다. 그 뜻은, '배움이란 깨닫는 것이다'라는 일깨움입니다. 즉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獨行)"인데 암,"넓게 배우며, 살펴 물으며, 삼가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하라"는 가르침이입니다. 또 "거거거중지, 행행행이학(去去去中知, 行行行裡學)"이라고,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걷고 걷고 걷는 속에서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부언하면, 책 속의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 실천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높은 차원에서의 글짓기란, 세사에 정통하고 인정에 숙달하는 지극한 문필(文筆) 기교(技巧)가 필수(必須)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자명(自明)한 일이지만, 글짓기의 원동력은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입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그만큼 힘이 커집니다. 머리가 텅 비면 좋은 글, 알찬 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을 아니 타듯이,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은 충족한 샘줄기가 원천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에 든 것이 없으면 얼마 못 가서 밑천이 바닥나고 맙니다. 종이로 불을 쌀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原理)입니다.
그럼 책은 어떻게 읽고,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답이 궁(窮)할 때면 나는 언제나 책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옛글에 글을 잘 짓자면,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문장을 보기 쉽게 쓰고, 쉬운 글자를 사용하며, 읽기 쉽게 쓰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실로 옛글의 그 오묘한 뜻과 심오한 내용에 경악(驚愕)을 금치 못합니다. 비록 간단한 문구 같지만 읽고 또 읽고, 자꾸만 읽어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록새록 참신(斬新)한 내용으로 안겨옵니다.
선인(先人)은 참답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장은 책 읽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독서는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산천초목(山川草木)의 움직임과 일상의 사소한 일이 모두가 다 독서다.” 만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면 천지만물 그 어느 것 하나가 훌륭한 문장이 아닌 것이 없고, 기막힌 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천지만물, 삼라만상은 그 자체가 모두 멋진 책입니다. 다만 그것을 정시(正視)하는 안목이 없어 무심코 스쳐 지날 뿐입니다.
사람과 세상의 모든 일을 보고, 듣고, 느낄줄 안다면 실로 천하의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글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책을 꼭 펼쳐놓고 몇 줄을 어설프게 읽은 뒤에야 비로소 책을 읽었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것은 비록 백만 번을 읽더라도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꼭 문자로 된 종이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닙니다. 삼라만상이 다 문자요 책입니다. 삶이 곧 독서입니다. 죽은 지식, 아집과 편견만을 조장(助長)하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 독입니다. 옛사람의 글 속에서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천하에서 옛 법도에 따라 차례를 지켜 조금도 어그러질 수 없는 것에 계절의 차례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장의 법칙입니다.
글쓰기의 방법을 옛사람은 묘한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글쓰기가 같은 원리 위에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 했습니다. 또 “나는 배움이 넓지 못한데, 만년에는 더욱 게을러져서 평소에 혹 책을 마주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눈과 귀로 접하는 일월(日月) 풍운(風雲) 조수(鳥獣)의 변화하는 자태로부터, 방안에 늘어선 책상이나 손님과 하인들의 자질구레한 말에 이르기까지 글 아닌 것이 없었다”고 술회(述懷)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또한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으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것에 참여할 수 있을가요?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기술의 방법을 바꾸어,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다르다고 해도 또한 안 됩니다.(謂之純同不可, 謂之不同亦不可)’로 결속되는 구문이 세 차례 이어집니다.
무릇 천하 문장이 되려면, 대나무처럼 마디마디 견정(堅貞)해야 하고, 물처럼 굽이굽이 굴곡(屈曲)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장의 정수(精髓)요, 절창(絶唱)입니다.천혜(天惠)의 땅은 영혼웅지(雄志)를 분진(奮進)시키는신성한 곳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장엄함과 웅장함이 인간을 압도합니다. 즉 역사의 흐름은 단절이 없고, 문장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제각기 하나의 단락을 이루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문장가의 끊어졌다 이어지는 기이함을 잃었다 할 것입니다. 한줄기 맥락이 암암리에 이어져 정취의 기이함이 거나하였습니다. 보며 유람하는 장쾌함을 이미 비의 힘에 힘입었으니, 세상에 다 좋기만 하고 나쁜 점이 하나도 없는 일은 있지 않듯이, 또한 다 꽉채워 가장자리조차 없는 글은 있지 않은 법입니다.
진실이란 꼭 사실 그대로다란 뜻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나열했대서 그것이 문장이 아니요, 하물며 문학되는 것도 아님을 재언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작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진실을 사실 그대로 요해하고 추구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허상 너머로 왜곡된 가상을 통해 진실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저 활자를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닙니다. 글로 쓰는 것만 문정이 아닙니다. 글로 씌어지지 않고, 문자로 고정되지 않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천하 사물은 명문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글짓기 묘법은 바로 글로 읽지 않고 문장으로 보지 않는 속에서 있습니다.
岳岩 執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