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글쓰기는 지나간 세월의 흐름과 함께 경과(經過)했던 마음속에 깊이 묻혀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글로 나타내는 일입니다. 어릴 적에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좋았던 일, 기분 상했던 일, 기억하기 싫은 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은 일, 가슴 아프게 후회되는 일을 다시 떠올려 오늘의 자신을 성찰(省察)합니다.
그러므로 비망록, 회고록, 자서전 등 다양한 장르를 차용(借用)한 나의 글은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과 실존적 고독, 나와 인간관계 등을 나만의 특유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捕捉)하고 있습니다. 심리학 연구를 했던 이력은 나의 글에 독별한 시상(時狀)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꿈, 내면, 무의식 등을 직관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나의 내면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고 난 이후로 더는 나를 예전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인식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나를 순수(純粹)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나를 지켜봤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쓴 글을 접한 뒤부터는 나의 무엇도 하나 당연(當然)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글은 단순한 사고와 시간순의 흐름으로 사실을 이끌어나가기보다는 단문이나 짤막한 일화(逸話)를 촘촘히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빚어냅니다. 비단 나뿐 아니라 각종 동식물과 다양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주체(主體)’가 되어 단편적인 부분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이러한 개체들의 개별적인 삶의 방식과 존재의 의미에 남다른 관심을 표명(表明)합니다.
나는 나의 일련의 글들을 통해 인간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면서 실제 지나온 삶에 등장했던 요소들을 적절히 접목(接木)합니다. 그리하여 현실과 초자연적 현상이 공존하는 새롭고도 독특한 우주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순환적 원형(原形)을 특징으로 하는 흐름속의 시간을 넓게 펼쳐 보입니다. 나의 글 속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나만의 시간도, 나 개인의 자전적 시간도 아닌 사실적인 영원한 현재를 역설(力說)합니다.
나의 글에서는 내가 화자(話者)로 등장하거나 내가 중심인물이 되어 진실의 축을 담당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특히 태어나서부터 성장, 출산, 노화,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특히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데 주력(主力)하고 주관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려는 성향(性向)을 쉽사리 엿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는 시간을 붙들고 한 발자국 떨어져 그 시간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이념이나 편견에 맞서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글로 적지 않는다면 영원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 속에는 통상 수많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진실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둘러싼 질서나 순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을 붙잡고 싶다는 바람 외에도 내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내가 경이(驚異)롭게 생각하는 것들과 의아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서로 어울려 공존하는 사회적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로서 자신만의 질서와 인과율(因果律)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완전한 허구도 아니고 실제의 재현도 아닌 경계 목적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지적(全知的) 시점으로 전개되는 나의 글은 어제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몇 편의 조각 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각 글의 주인공은 어제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들인 나의 가족과 그 이웃들, 외부인들, 동식물, 사물 등입니다. 각각의 한 토막은 언뜻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시공간 속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로 긴밀하게 뒤얽히고 맞물려 있으며 하나의 중심 사상을 향해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되며 흘러갑니다.
글의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어제’는 내가 사는 인근에 있는 마을로 글의 첫 문장을 통해 설명하고 있듯이 ‘우주의 중심’에 놓인 곳입니다. 마을 이름인 ‘어제’는 한국어로 ‘오늘의 바로 하루 전날. 어저께. 작일’ 즉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합니다. 어제는 어디에나 있음 직한 평범한 시골마을이라는 점에서 시공(時空)을 초월한 ‘열린 공간’입니다. 하지만 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인간들이 지구촌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고유한 질서와 법칙의 지배를 받는 ‘닫힌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제’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허구와 현실이 절묘하게 중첩(重疊)되는 공간입니다. 어제의 시간들에서는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가 대립하는 동시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시 서사기법을 활용하여 거대 서사를 축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삶 속에 스러져 간 익명(匿名)의 존재, 어제의 뒤편에서 소수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의미를 환기(喚起)합니다. 다양한 개인적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내가 강하게 여기는 것은 삶에는 기록되지 않은 혹은 기록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입니다.
어제는 오늘을 위한 상상력의 보고(寶庫)입니다. 예술은 신비한 언어의 수호자(守護者)입니다. 내게 어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삶은 내가 종(種)으로서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세상을 정돈하는 역할을 합니다. 융(戎)의 견해처럼 나도 어제가 종(種)의 기억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배울 필요가 없으며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확고한 사상을 나는 믿습니다.
삶은 어제의 시간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키워드입니다. 일상적인 대상에 초현실적 마술성이 부여되고 평범한 공간 속에서 환상적인 요소들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에서 차용한 환상적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모든 존재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삶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생존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가시덤불이 놓여있지만 인간은 간난신고를 용케 이겨냅니다. 그런데 참된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상실한 채 ‘늑대 인간’처럼 변해버린 나쁜 인간도 이 삶의 무대에 혼재(混在)하면서 신출귀몰(神出鬼沒)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접점(接點)입니다. “글에는 불멸의 변치 않는 뿌리, 원형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그 원형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영감(靈感)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원형을 바탕으로 뭔가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서술해나가려 애씁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만는다는 건 내 생각으로는 영원한 작업인 것 같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한정(限定)된 시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시간과 그 변화의 과정에서 집단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 간에 다른 이들에게 전달(傳達)해야 할 강한 필요성을 실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결국 ‘언어’만큼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의 시간들에서 나타나는 글의 공간적 배경이자 가상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래된 옛날’ 혹은 ‘원시의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글의 시간적 배경은 태고(太古)가 아니라 근현대이며 역사적 사실이 곳곳에 개입(介入)되어 있습니다. 현실 세계로부터 유리된 신화적 시공간을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실제에 발을 딛고 있는 일종의 모순어법입니다.
거의 100여 년에 이르는 비교적 긴 세월을 배경으로 거대한 역사의 줄기를 따라가고는 있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직선적 시간’이 자취를 드러냅니다. 또한 다양한 표현적 중심사상을 통해 한 사회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과 그 속에 누적(累積)된 상징적이고 보편적인 표상을 부각(浮刻)시킴으로써 ‘순환적, 원형적인 시간’이 더불어 펼쳐집니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어제’라는 우주에서 단선적 시간과 복합적 시간이 만나 경고하게 얽혀 있는 것입니다.
어제는 인간과 동식물, 사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입니다. 어제에는 비단 인간뿐 아니라 자연이나 동식물 그리고 커피 연삭기처럼 생명력이 없는 사물들까지도 자신만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을 유지하며 나름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주어진 시간 속에서 생성(生成)과 멸망(滅亡)을 되풀이 합니다. 평범한 인간들의 삶과 더불어 진실적 성향을 지닌 존재들의 사실적인 이야기가 병렬(竝列)로 이어지면서 어제의 공간 속에서 시간은 다양한 층위(層位)로 포개집니다.
어제의 시간들을 통해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통합적(統合的) 합일을 이루어냈습니다.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관념과 실제, 환상과 현실, 변화와 반복, 이 모든 항목들이 나의 세계에서는 결코 영구적(永久的)으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뒤섞입니다. 나의 의식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세계도 존재하지 않지만 자연과 생명의 무구(無垢)한 리듬에서 동떨어진 인간의 의식도 존재하지 않음을 저자는 역설합니다.
어제의 시간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은 저마다 치열하게 각 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제의 시간’에서는 나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과 존재방식을 설명하고 결국 그것은 나의 삶 전체를 관통(貫通)합니다. 나의 시간이 모여 나의 삶을 구성하듯 개별적인 존재의 시간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쓴 글의 주제는 작품의 제목이 일컫듯 아주 먼 옛날인 태고, 즉 시원(始元)에서부터 존재했던 인류의 시간입니다. ‘어제’라는 소우주를 중심축(中心軸)으로 삼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의 시간이 유유히 흘러가는 곳이 바로인 ‘어제’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장소입니다. 그 시간과 장소를 채우고 있는 인간들은 탄생과 성장, 노화, 죽음에 이르는 보편적인 생의 과정을 통과해나가며 유구한 삶의 원형(原形)을 이어오고, 종국에는 시간의 풍화작용(風化作用) 속에서 스러져 신화가 됩니다. 내가 굳이 시간을 일컫는 ‘어제’라는 단어를 지명(地名)으로 뜻하는 고유명사(固有名詞)로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언급했듯이 가상의 공간인 어제는 생성과 소멸(消滅)의 과정 안에서 지속과 변형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이야기는 공간(空間)에 대한 이야기이자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됩니다.
나의 글에서 삶이 태동(胎動)하고 다시 그 삶이 역사가 되고 신화를 지어내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와해(瓦解)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결국 신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화가 또다시 현실로 탈바꿈하는 가운데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는 바로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탄생되고 변주(變奏)되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 속에 어제의 시간들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어제의 시간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지만 아무도 나의 글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 글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보기에도 내 글이 재미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글을 쓰기보다 아는 것을 글로 쓰기가 좋습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오늘도 이렇게 멋쩍게 씁니다. 누구한테 보이려고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滿足)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