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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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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다지는 마음가짐으로 본바탕에 돌아가라

 

 

제가 글을 쓸 때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초심’과 ‘본바탕’입니다. 즉 초심(初心)은 처음에 품은 마음이고, 본바탕은 사물의 근본(根本)이 되는 본디의 바탕, 본질, 본체, 본판(本板)입니다. 

그렇습니다. 초심과 본바탕은 인간이란 생물체 개개의 유전형질(遺傳形質)을 나타내는 원인이 되는 인자로서 “생식세포를 통하여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유전정보를 전달된 본체는 디엔에이(DNA)”, 또는 고급동물로서 인간만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원초적인 본능으로서 사물에 대한 옳고 그름의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논리적인 사고와 사유(思惟)하는 능력과 소통하는 언어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과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흔히 문학작품에서 인간을 영물(靈物)의 고급동물이라고 극찬합니다. 그런데 이 극찬(極讚)이 때로는 아주 좋지 못한 부작용을 일으켜 총명함을 뽐내는 일부 인간이 교만해지게 합니다. 교만(驕慢)함이 과도한 이런 인간은 자기가 남보다 더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강한 자만심이 정신을 지배(支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사고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일련의 동물적 본능이 잠재(潛在)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해서 개인적이나 혹은 집단적인 생활 속에 나타나 각종 불미스러움을 유발하는 연유(緣由)가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교만심을 자랑하는 데는 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를 파괴(破壞)할 만큼의 강대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도 불완전합니다. 위험에 대처하고 예비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고 환경에 적응(適應)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하여 누군가는 '인간의 두뇌(頭腦)는 동물의 코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는 기관일 뿐이다'라고 극언(極言)한바 있습니다. 태고로부터의 진화를 따져보면 우리 조상들은 물에서 살았고, 정글(密林)의 숲 속에서 살았습니다. 인간의 진화(進化)는 너무 쾌속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초고속으로 진보(進步)하여 현대문명의 발전 속도는 비약적인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창조한 문명의 성과는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造物主)까지도 경악(驚愕)해할 정도입니다. 자연계의 온갖 생물은 빠른 속도로 새 환경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생존경쟁에서 적응되지 않으면 멸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자신이 창조한 문명에 빠르게 적응(適應)하지 않으면 도태(淘汰)됩니다. 이것은 다 생존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워낙 인간의 초심과 본바탕은 훌륭하고 우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점차적으로 야만으로 몰락하고 치닫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도덕적인 발상(發想)인가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인간이 영리한 존재라면 저물어가는 생명의 태양을 다시 동산 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경주(競走)해야만 합니다. 그 지극한 발상(發想)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퇴화된 문명을 사수(死守)해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디 조물주(造物主)는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우량한 정신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합니다. 문명과 조율(調律)적으로 어울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또 세계를 파괴하고 후퇴(後退)해도 무방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후퇴란 불완전한 것을 말합니다. 후퇴를 내용의 범위는 광범(廣範)합니다. 여기에 모든 사악과 비리, 그리고 각종 범죄를 망라합니다.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만 사람이 사람 존재를 무시하고 짓밟고 억압(抑壓)하고 탄압하고 심지어 살인도 주저 없이 감행(敢行)하는 천추에 용서 못할 만행을 더는 묵과(默過)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이 만든 법칙과 규제(規制)와 제도는 결국 소수의 권력자에게 의해 조종되어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합니다. 이런 사회의 부조리는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점차 일반적인 습관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분노(憤怒)하고 있지만 분노만으로는 이런 불공정한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변시킬 수 없습니다. 

말로만 국민을 위한다는 권력자(權力者)의 말은 다 거짓입니다.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진정으로 이 사회를 국민의 요구대로 치국하려는 권력자는 고금동서의 역사를 살펴봐도 몇몇 뿐입니다. 이런 사회적 폐단(弊端)을 폭로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학은 점차 권력의 힘에 지배되어 무력화(無力化)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폭로는 말 그대로 사회의 여러 가지 어두운 면에 대한 탕척(蕩滌)을 목적하는 문학입니다. 바야흐로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환경오염은, 지금 인간을 포함한 척추동물 수컷이 점차 암컷화 되는 비정상적인 생태현상을 변출(變出)하고 있습니다. 하여 그토록 아름답던 만고강산(萬古江山)이 이제 더는 산 좋고 물 맑다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야생자원이 점점 멸진(滅盡)되면서 인류와 더불어 동생공존(同生共存)하던 동물들이 안온한 보금자리를 강탈당해 완전 멸종위기(滅種危機)에 임박하였으니 절통한 일입니다. 그 반면 마약 사용과 에이즈 범람, 테러와 전쟁이 빈발(頻發)하고 있으며 허위와 가면으로 사는 사람이 더욱 기만적이고 더욱 음흉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를 비행(飛行)하는 불의와 부정,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과 증오심을 격발(激發)시켜, 천추에 용서 못할 잔혹한 추악성을 폭로 비판하여야 합니다.

물론 사회의 밝은 면을 긍정하는 구가(謳歌)는 퐁퐁 솟구치는 샘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부여하여야 하고, 사회의 어둔 면을 부정하는 폭로(暴露)는 겨울날 추위처럼 맵짜고 무자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문학이란 폭로하는 대상을 통하여 좋고 나쁨의 진가를 구별하고 옳고 그름의 시비를 의논하며 곱고 미움의 우렬(優劣)을 표준하고 선악의 실허(實虛)를 파악하여 아담(雅淡)하고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거기에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작가라면 구가고 폭로고 간에 사회생활을 진실하게 반영(反映)하여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문제들을 잘 그려내어 제때에 해답을 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태평연월(太平煙月) 노래하는 찬송가(讚頌歌)라 해서 다 사회에 대한 분칠(粉漆)이 아니요, 부정부패를 발거(拔去)하는 성토문(聲討文)이라 해서 다 사회에 대한 먹칠(墨漆)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러자면 작가들은 지금이라도 초심을 가지고 문학의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당한 책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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