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독서(讀書)는 글을 통하여 빛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 속에 들어가서 별을 찾는 탐구(探究)라고 합니다. 또한 서재에서 우주와 대화를 나누는 소통이라 합니다. 이렇듯 독서는 깊은 체험을 통해 지식의 정수를 터득(攄得)하는 평생의 일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것만이 풍부한 지식을 장악(掌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를 찾는 영감을 불러와야 지고(至高)의 예지(叡智)와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식이 넓고 재주가 많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옛 문인이 말했습니다. “10년은 독서에 바치고, 10년은 여행에 바치고, 10년은 그 체험을 보존 정리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保存)과 정리에 10년씩 허비하기는 너무 낭비입니다. 빠르면 몇 년이면 족합니다. 대신 독서와 여행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면 좋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그 몇 배라도 많은 시간을 바쳤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한 백년을 살아야 하니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문장은 고독이나 불행에 봉착(逢着)했을 때 비로소 걸작(傑作)이 나온다고 합니다. 심장을 파고드는 인생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생활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피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주는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보다 불우한 사람의 글이 더 감화력(感化力)이 있다고 합니다.
글짓기에서 체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없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이치(理致)에서 나옵니다. 상식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논증(論證)하다보면 논리적 사고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언어를 만들어야하고 그 언어를 또 설명(說明)하려면 논리가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언어에 의해 모호해지고 왜곡(歪曲)되며 잘못 표현되어 진리라는 것이 죽도 밥도 안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의 대량의 글들은 많은 시비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思潮)를 만들어 내려면 또 새로운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 학파가 많이 생길수록 모순당착(矛盾撞着)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글은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나가 있으면 심지어 지식무용론(知識無用論)까지 나오게 됩니다. ‘현자(賢者)는 무언, 능자(能者)는 담화하고, 우자(愚者)는 논한다’는 말처럼 말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이 경솔하고 어리석어집니다. 성현은 스스로 직접 체득한 삶을 말하고, 능자는 현자의 말을 하고, 우자는 능자(能者)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언수궁(多言數窮)은, 말이 많으면 탈이 많다는 경구(驚句)가 생겨납니다.
인간은 책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독서하는 서적이 있어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당(酒黨)은 술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마시고 취해서 유쾌해 질 수 있습니다. 만일 행락객(行樂客)이 꽃과 달이 없다면 무얼 즐길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다행히 책이 있어 독서의 즐거움이 있고, 술이 있어 취하는 흥락(興樂)이 있고, 꽃과 달이 있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과 술과 꽃과 달을 즐기면서 노닐지 않으면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이 세상에 재사가인(才士佳人)이 없다면 아름다운 이야기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곁에 재사가인이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합니다. 이 말은 문장에서 미적 추구를 위한 소재를 많이 발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배움의 시작과 배움의 실천은 판단력 응용의 차이입니다. 명료(明瞭)한 사상은 불분명한 언어로 포장(包藏)되어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반대로 명료하지 못한 사상이 명료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문체(文體)는 명료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명료합니다. 명료하지 못한 언어로 표현된 명료한 사상은 제도(濟度)하기 힘든 아집(我執)의 문체입니다.
문장은 아무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이를테면 글을 쓸 때 독자가 저자(著者)를 싫어하면 그 저서에서 아무런 배울 점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특히 초보문장가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수문필가들은 더더욱 언어의 보석인 각종 사전(辭典)을 열심히 찾아봐야 합니다. 아름답고 고유한 우리말의 잘 사용하려면 수만 톤의 언어광석이 수용됩니다. 이 광석을 캐내 다듬고 가공하면 좋은 보석이 됩니다. 문장의 힘은 언어의 올바른 사용에서 나타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넓어지면 학자가 되고, 작가의 예지(叡知)가 깊어지면 사상가로 진급(進級)합니다. 학자의 저술은 다른 학자에게서 빌려오는 것이 가능하며 인용 원전(原典)이 많을수록 좋은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상가의 저술은 자기 뱃속의 관념(觀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양자는 서로 배척되면서도 유기적으로 결합되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 장액(腸液)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학자는 입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서 새끼를 기르는 가마우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상가는 뽕잎을 먹고 비단을 토해내는 누에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학자와 사상가의 차이입니다. 글을 집필 전에는 관념의 회임(懷姙)기가 있어야 합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 진통(陣痛)을 겪으며 출산하는 작품이 역작(力作)이 됩니다. 역작이란 작가가 힘들여 지었거나 또는 힘들게 지은 그 작품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손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만 성공의 고봉에 톺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절승경개(絶勝景槪)는 험한 봉에 있다고...’
사물을 사고(思考)하는 방법은 중 하나인 인간의 예지(叡知)는 단순한 전문가적 지식의 집적(集積)이 아닙니다. 더욱이 통계적 평균치의 연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지는 안목(眼目)과 식견(識見)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입니다. 상식, 기지, 솔직, 미묘한 직감(直感)이 보다 널리 보급됨으로써 비로소 예지에 도달합니다.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 간에는 학구적인 사고는 얼마든지 많으나 시(詩)적 사고의 예는 오늘 날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독서는 자기 ‘사상의 샘’이 고갈(枯渴)되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하라고 합니다. 이 고갈은 상당히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종종 독서로 하여 아직 확고하지 못한 자기 사상을 잃어버리는 수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 건강에 죄(罪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서(良書)는 무슨 일이 있든지 꼭 읽어보아야 한다고 권장(勸獎)합니다. 만약 읽어보지 못한다면 영영 읽어볼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글을 짓는 사람이라면 광범(廣範)한 지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깊고 훌륭한 지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령 추악한 것이 아닌 온당(穩當)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많음보다는 더 나은 소량(少量)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항상 명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