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중국고전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무송과 노지심은 누구의 주량이 더 셀까?

图片信息 水浒传告诉我们什么道理

수호전(水滸傳)은 중국의 장편 소설. 작가는 시내암(施耐庵) 또는 나관중이다. 북송(北宋) 선화(宣和) 연간에 송강을 수령으로 한 108명의 호걸이 양산박(梁山泊)에 모여 간악한 무리와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징벌한 후 조정에 귀순하여 요(遼)와 전호(田虎), 왕경(王慶)의 반란군을 정벌하며 큰 공을 세우나 호걸들은 점차 흩어지고 송강도 참언(讒言)에 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내용이다. 중국 사대 기서(四大奇書)의 하나이다.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최초의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여진 장회소설이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 발전하였다. 남송 때 양산박(梁山泊)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즐겨 들었기 때문에 설화인들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연출하였고, 또 문자로 기재하였다. 화본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중에는 오늘날 ‘수호전(水滸傳)’의 대략적인 줄거리, 인물의 윤곽이 갖추어졌다. ‘수호전(水滸傳)’의 중심인물인 송강(宋江) 등 36인에 대한 사적들이 ‘송사(宋史)’에도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송강(宋江)은 36인과 함께 제·위를 횡행하였다. 관군 수만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으며, 그 재주는 대단히 뛰어났다.(宋江以三十六人橫行齊魏, 官軍數萬, 無敢抗者, 其才必過人.)"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들의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고, 송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영웅적인 전설로 전해졌다. 그리고 원대에는 희극이 성행하게 되어 많은 작가들이 양산박의 이야기를 제재로 극본을 창작하였다. 당시 양산박(梁山泊)의 영웅들을 제재로 한 극본만도 33종이었으나, 지금은 극본의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호전(水滸傳)’이 문인들의 손에 의해 창작되었다. 많은 문인들이 ‘수호전(水滸傳)’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중에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 두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호전은 바로 술을 마시는 역사이야기이다. 무송(武松)은 경양강(景阳冈)에서 연이어 18사발의 술을 마셨는데, 이것은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일 뿐이다. 노지심(鲁智深)은 구운 고기를 가지고 이삼십 사발을 마셨다.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주량(酒量)이 더 세다고 할 수 있을까? 

수호전에서 술은 노주(老酒)와 촌주(村酒)로 나뉜다. 술의 품질로 봐서는 고급술과 하급술이다. 실제로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의 두 등급으로 분류(分類)하는 것이나 같다. 자연스럽게 노주와 촌주의 칭호가 나타났다. 

촌주는 일종의 증류를 하지 않은 소주(小酒)이다. 품질이 낮다. 일반적으로 시골에서 팔거나 자기 집에서 마시는데 쓴다. 대명부(大名府) 양중서(梁中書)는 양지를 파견하여 생신강을 압송하게 하는데, 채경의 생일축하를 위하여 양지 일행은 황니강에 도착한다. 그 십여명의 군인들은 백승이 통을 하나 메고 가는 것을 보고 묻는다. "너의 통 속에는 뭐가 있느냐?" 백승은 대답한다: "백주(白酒)입니다." 여러 군인들은 즉시 기운을 차린다. "우리는 덥기도 하고 목도 모른데, 왜 사서 마시지 않느냐. 더위나 풀자." 아마도 더위를 푸는 술이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미주(米酒)일 것이다. 노지심이 오대산에서 소란을 피우며 마신 것이 바로 촌주이다. "노지심은 그 두 통의 술을 모두 정자에 들고 올라가서 덮개를 열었다. 그저 국자로 차가운 술을 퍼서 먹었다. 얼마 되지 않아 두 통의 술에서 한통을 다 마셔버렸다." 아마도 알코올도수가 비교적 낮아서 1통을 다 마시고서야 취한 것 같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마시는 것은 바로 촌주이다. 오는날 말하는 증류하여 이루어진 백주는 아니다.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주(素酒), 황미주(黃米酒), 훈주(葷酒), 혼백주(渾白酒)는 모두 촌주이다.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알콜도수도 상대적으로 낮다. 

수호전의 노주는 ‘송사.식화지’에 따르면, 송나라에서 대주(大酒)라 불렀다. 이런 술의 알코올도수는 비교적 높다. 술의 품질(색, 향, 맛)도 모두 '소주'보다 뛰어났다. 생산에서부터 음주에 이르기까지 근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격은 비싸다. 공량(孔亮)의 청화옹(靑花瓮)이 바로 노주이다. "가게주인이 한 통의 청화옹술을 들고 나왔다. 진흙 뚜껑을 열고, 대백분(大白盆)에 붓는다. 무행자(武行者)가 몰래 훔쳐보았을 때, 단지에서 나오는 것은 좋은 술이었다. 바람이 불자 향이 밀려온다. 무행자는 그 향을 맡으려 참지를 못했다. 목구멍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한다. 일어나서 빼앗아먹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무송은 술을 아는 사람이다. '빼앗아먹고 싶다'는 말에서 그것이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송은 금방 취한다. 그는 작은 계속을 따라 언덕을 가다가 똥개가 미친 듯이 짓는 것을 본다. 무송은 왼손으로 칼집에서 계도를 뽑아들고, 한칼로 베어간다.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머리부터 계곡물에 꼬라박힌다. 송강은 비파정(琵琶亭)에서 대종, 이규를 접대하는데, 술집주인이 두 통의 옥호춘(玉壺春)이었다. 이는 강주(江州)의 유명한 고급술이다. 송강이 심양루(潯陽樓)에서 술에 취해서 '반시(反詩)'를 쓴다. 그때 마신 것이 바로 교풍월(橋風月)이라는 좋은 술이다. 도수가 높은 노주이다. 송강은 술에 취한 후에 비로소 '반시'를 썼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결국 사람들이 그를 사형장에서 데려나왔고, 어쩔 수 없이 양산에 오른다. 

당시에는 양조기술이 발달되지 못했다. 제조기간도 짧고, 술이 품질도 좋지 않았다. 술을 다 만들고 나면 왕왕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마실 때는 먼저 걸러야 했다. 백거이의 ‘문유십구’라는 시에서 말하는 "녹의신배주(綠蟻新醅酒)"에서 가리키는 것은 바로 거르지 않은 술이라는 말이다. 송나라 때의 ‘광운’에서는 '배(醅)'자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술을 아직 거르지 않은 것이다(酒未漉也)" 술을 거르면 맑아진다. 품질도 좋아진다. 그래서 '청주(淸酒)"라고 부른다. 거르지 않은 술은 바로 명나라 때의 양신(楊愼)이 말한 "일호탁주희상봉(一壺濁酒喜相逢)"에 나오는 그 '탁주'이다. 다른 한편으로, 통상 술을 제조할 때 알코올도수가 10도에 이르면, 효모균은 번식을 중지하고, 발효과정이 정체된다. 그래서 발효과정만을 거친 술은 알코올도수가 10도 정도를 넘지 못한다. 무송이 경양강에서 호랑이를 때려잡기 전에 마신 그 18사발의 술은 이런 류에 속한다. 저도의 미주이다(아마도 물도 탔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발로 벌컥벌컥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가 마신 술이건, 한무제가 마신 술이건, 아니면 조조, 이백, 소동파가 마신 술이건 성질상으로는 모두 '삼완불과강'과 같다. 알코올도수가 낳았다. 그래서 고인들은 호쾌하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무송이 마신 18사발의 "투병향(透甁香)"은 바로 촌주 중에서 정품(精品)이다. 관료들이 마시는 노주보다 맛이 있었다. 일종의 알코올도수가 낮은 저도주이다. 노지심이 오대산에서 마신 술은 분명 소주(小酒)이고, 그저 알코올음료에 해당한다. 무송은 술을 마신 후에 호랑이를 때려잡고, 장문신을 이긴다. 그러나 노지심은 술에 취해서 산문을 부술 뿐이다. 술을 마신 후의 행동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무송의 주량이 노지심보다 대단한 것 같다. 

노지심과 무송이 술을 가장 많이 마셨을 때를 보면, 무송이 취하여 장문신과 싸우러 가는 노중에  열두세개 주점에 들러 세 사발씩을 마신다. 개략 3,4십 사발가량이다. 물론 술의 질은 가장 낮은 것이다. 노지심은 도화촌(桃花村)에서 마신 1호의 혼주와 이삼십 사발의 보통주에도 맑은 정신을 가지고 소패왕(小覇王)을 마구 때려준다. 원저의 문자로 보자면 아마도 노지심은 이삼십 사발이 통상적인 주량인 듯하고, 두 사람의 주량은 비슷했던 것 같다. 다만 수량으로 보면 노지심이 조금 더 많이 마신 것 같다.  

양산호한 중에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적지 않다. 무송, 노지심, 임충, 이규와 송강 등등이 모두 술고래이다. 모두 술을 마시고나서 경천동지할 일을 이룬다. 송강은 술을 마시고 반시를 썼고, 임충은 술을 마시고 산신묘(山神廟)에서 세 명을 죽인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수호전에서 잊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과 노지심이 도화촌(桃花村)에서 취해서 소패왕을 패는 것일 것이다. 이 두 사람만이 양산에서 주량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도대체 누구의 주량이 더 센지는 시내암(施耐庵) 선생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 글: 유전록(劉傳彔)


젊어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라 

『수호전(水滸傳)』은 『삼국연의』와 함께 널리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 소설이다. 그래서 『수호전』은 늘 『삼국연의』와 함께 병칭되었고, "젊어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연의』를 읽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 『삼국연의』에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으니 이미 삶의 연륜이 쌓인 노회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 하다는 뜻이고, 『수호전』은 정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니 젊음 그 자체가 발산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 것이다. 

『수호전』에는 무려 108명의 비범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각각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이 대개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암흑가 출신이거나 땡땡이 중이거나 관료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거나 모함을 받아 도망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문인 출신이든 하층민 출신이든 모두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의 부패와 불합리성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 질서에 반항하는 용감한 싸움꾼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민중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영웅호한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나라를 세운다든가 민중을 해방시키는 등의 거창한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의 재물을 약탈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하고 여인네를 겁탈하기도 하는 부도덕한 면도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는 등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는 부적절하며 악한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 때문에 오히려 민중은 그들을 매우 인간적인 친근한 영웅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수호전』의 영웅들이 가지는 이러한 계급투쟁적인 특성은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요소는 지배층 관료와 문인들이 『수호전』을 금서(禁書)로 낙인찍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수호전』의 내용에 불만을 가진 문인들이 내용을 수정해서 서로 조금씩 다른 작품으로 변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수호전』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1) 중 가장 복잡한 판본을 지닌 작품이 되어 버렸다. 

청(淸)나라 때의 김성탄(金聖嘆)은 자신의 비평을 포함해 새롭게 출간한 『제오재자서시내암수호전(第五才子書施耐菴水滸傳)』에서 송강(宋江)을 비롯한 무리들이 송나라 황제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대개 100회나 120회본의 길이를 가진 다른 판본의 작품들이 송강의 무리가 관군에 투항한 뒤 황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서, 김성탄은 이러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여 70회본으로 대폭 줄여버린 것이다. 도적 출신의 무리가 국가를 대신해 오랑캐나 반란의 무리와 싸운다는 설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도적의 무리는 결국 황제의 품으로 귀순해야 하며, 그들에게서 충의(忠義)를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김성탄의 생각은 『수호전』을 발분저서(發憤著書)2)에 비교해 『충의수호전』이라고 명명한 명(明)나라 때의 이지(李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처럼 『수호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갈래는 『수호전』 출간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중국의 어느 일간지에 실린, 한 여성의 상담 요청문이 기억난다. 그녀는 매일 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들에게 중국의 고전 소설을 읽어주었는데, 온통 도적과 강도들의 종횡무진 활약기인 『수호전』을 과연 읽어줘야 하는지 고민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민중들의 유토피아, 양산박 
『수호전』은 『삼국연의』와 마찬가지로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작품이다. 다만 『삼국연의』가 7할이 사실이고 3할이 허구인 역사소설이라면, 『수호전』은 사실에서 기원하나 대부분의 내용이 허구라는 차이가 있다. 오랜 기간 민간에서 전설, 강창3), 희곡(戱曲) 등의 형태로 전승된 작품들은 대개 대중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기보다는 영웅적 인물의 활약상에 비중을 둘 때 더욱 흥미를 유발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수호전』은 민중들의 염원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작품 속에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삼국연의』 보다 창작의 자유를 누린 작품이다. 『수호전』의 근간이 되는 기원 설화가 어떻게 『수호전』으로 정착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쉽게 확인된다. 

『수호전』의 기본 모티프는 북송 시대 산동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송강 무리의 기의(起義)4) 사건이다. 역사책에는 송강을 비롯한 36인이 기의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서 정벌되었다고 매우 간략히 기재되어 있지만, 이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등장인물은 점차 108인으로 증가하고 보다 흥미진진한 허구화된 영웅담으로 발전해 갔다. 

송강(宋江) 
예를 들어 『수호전』의 배경이 되는 양산박(梁山泊)은 『송사(宋史)』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보자면 송강의 무리는 하북(河北)에서 일어나 산동(山東)과 하남(河南) 지역을 치고 회수(淮水) 이남인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북부와 안휘성(安徽省) 일대를 침범한 뒤 강소성 북부의 연해 지역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수호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양산박과 산동성에 위치한 양산박은 거리상으로나 실제 모습으로나 매우 차이가 있다. 초기의 '36호한고사(好漢故事)'5)는 태행산(太行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태행산은 금(金)나라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인물들이 모였던 곳이었다. 또한 몇몇 관련 설화에 묘사된 양산박의 모습은 초주(楚州)의 모습이다. 이로써 보건대 『수호전』에 그려진 양산박은 산동의 양산박, 태행산, 초주 등의 묘사가 종합되면서 새로운 허구의 양산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허구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편찬자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 시내암(施耐菴)과 나관중(羅貫中)이다. 시내암은 신상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다가 그가 과연 최종 편집자인지에 관해서도 이론이 분분한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나관중이 작자라는 주장이나 나관중과 시내암이 함께 작업했다는 주장, 심지어 나관중과 시내암이 동일인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희곡과 민간 전설, 강창 등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온 『수호전』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여 편찬한 첫 번째 인물이 시내암이고, 나관중은 이후 문체와 표현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발생하는 크고 작은 민란이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인데, 『수호전』의 배경이 된 사건은 어떻게 해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일까? 기의(起義)는 때로는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부군의 토벌과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곤 한 것이 사실이다. 북송(北宋) 때 발생한, 송강을 비롯한 36인의 기의는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도, 왕조의 존망을 위협할 만한 반란도 아니었다. 그래서 관군에 의해 사건은 평정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사건의 중심인물들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민간의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양산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시의 민중은 여기에 모인 호한들에게서 희망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부패한 관료와 무능한 군주는 봉건 시대 지배 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민중은 그저 내세를 기약하거나 아니면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나마 양산박의 호한들은 부패한 관료와, 민중을 착취하는 부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마치 하느님이 비를 기다리는 농사꾼의 마음을 헤아려 비를 내려 주는 것처럼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송강의 별명이 오죽하면 '때마침 내리는 비'라는 뜻의 급시우(及時雨)였을까? 민중들은 현청의 관료 출신인 송강이나 군관 출신인 임충(林忠) 같은, 봉건왕조를 위해 일한 적이 있는 지배층 출신의 사나이들부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武松),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파계승 노지심(魯智深), 물불 안 가리며 쌍도끼를 휘두르는 술고래 이규(李逵) 등 독특한 성격의 하층민 출신 영웅들의 활약상에서 현실 속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절망감을 해소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웅호한들이 모인 양산박은 민중의 영원한 유토피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장을 휘두르는 노지심(魯智深) 
양산박의 영웅들은 결국 송나라에 편입되어 남방의 방랍(方臘)과 북방의 요(遼)나라를 모두 토벌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요나라를 토벌 - 이 일은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 하는 부분에서는, 북송의 멸망과 원의 통치로 이어지는 이민족 치하에서 억눌렸던 한족의 민족적 적개심이 분출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 양산박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의와 충의 변증법 
양산박 호한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던 구심점이자 행동원리는 '의(義)' 또는 '협의(俠義)'라는 것인데, 그 원형은 멀리 선진(先秦) 시대의 이야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의를 지나칠 수 없어서 타인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간장막야(干將莫耶)」6)의 협객이나, 나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복수를 결심하고 이를 실행하다가 죽은 예양(豫讓)의 이야기7)에서 우리는 협의의 정신을 본다. 

양산박의 호한들은 이러한 협의의 정신을 동경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핍박받으며 살기보다는 양산박에 모여서 함께 마음껏 마시고 먹으며 통쾌하게 한 세상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불의한 자들에게서 재물을 빼앗거나 그들을 처단하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의를 행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그들을 모으고 움직이게 했던 이념이자 행동강령이 '의'였음은 양산박 한가운데 위치한 본당이 '취의당(聚義堂)'으로 명명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양산박 집단에 지식인 관료 출신인 송강이 들어오고 그가 새로운 집단의 두령으로 추대되면서 행동강령은 점차 '충(忠)'으로 경도되기 시작한다. 송강은 염파(閻婆)를 죽이고 양산박에 합류하여 제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인물이다. 양산박에 잠시 몸을 맡긴 것일 뿐, 결국 조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수호전』 제42회8)에는 송강이 구천현녀(九天玄女)에게서 천서(天書) 세 권과 함께, "그대는 일심으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하는 데 마음을 쓰시오. 그대는 충성을 다하여 의리를 지키고 신하로서는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그릇된 것을 버리고 바른 길에 들어서야 하오"라는 가르침을 듣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본심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송강은 제1두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취의당의 현판을 충의당(忠義堂)으로 바꾸고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고 나라를 도우며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깃발을 내걸기에 이른다. 송강은 양산박 무리가 일개 지방의 도적집단이나 반역자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언젠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충을 구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송강과 그의 무리는 결국 송나라에 귀순한 후 남방의 도적인 방랍을 토벌하러 떠나게 된다. 

그런데 양산박의 호한들은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 하나씩 목숨을 잃는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용감하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영웅들이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일까? 『수호전』의 여러 영웅은 민중의 이상이 투영된 인물들이고, 현실의 불만적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민중의 현실에 대한 불만은 지배 계층에 대한 것이기는 해도 봉건제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현실 극복 의지는 부패한 관리의 타도, 외세 침입의 극복 등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왕권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웅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결국 왕의 품 안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 순간 각각의 영웅들은 개성을 잃고 만 것이라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수호전』 전반부의 주제는 '의'고, 『수호전』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호희(水湖戱)에서도 '협의'가 매우 중요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소설 『수호전』에 이르면 주제가 '충의'로 변모하고, 특히 『수호전』 후반부에서는 '충'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작품의 주제로서의 '충'의 부각과 『수호전』의 비극적 결말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호전』이 출현할 당시 희곡과 소설 등 대다수의 통속적인 작품들은 대개가 인과응보(因果應報)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신선이나 도사, 귀신 따위가 등장하는 초현실적 설정을 취하거나 현실생활에서의 정절과 효심을 강조하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왕권에 도전하는 도적의 이야기는 정치적인 면에서나 기존의 윤리적 측면에서나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수호전』에서 송강의 무리가 송조에 귀순하는 내용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 의에서 충으로의 변모 과정이 없었다면 소설 자체의 성립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전승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라에 귀순해서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방랍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싸우는 내용이 부각됨으로써 『수호전』은 비로소 불온한 도적의 이야기에서 충의를 실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SF로 부활하는 영웅들 
기존의 중국의 많은 신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은 대개 천상에서 죄를 짓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죄를 씻을 정도가 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소설의 경우, 장르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에 이같은 초현실적인 적선(謫仙)9) 모티프의 사용이 빈번했는데, 실생활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다 신성시할 때 이러한 방법이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중국의 천재 시인으로 꼽히는 이백(李白)이다. 

그의 천재성은 종종 하늘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신선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비유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ㆍ청 시대에 성행한 여러 장회소설의 도입부에는 어김없이 소설의 주인공과 관련한 적선 모티프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작품 내에서 이 모티프가 갖는 서사적 중요도는 서로 다르지만 주인공의 신성함과 비범함을 강조하고, 작품 속의 주요 사건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배경과 원인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삼국연의』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났음을 명예롭게 여기는 대목이 많이 나오며, 『홍루몽』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어 숙명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호전』에서도 어김없이 처음부터 적선의 모티프가 등장한다. 현실세계에서 대부분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수호전』의 영웅들이 천상계의 신이었다는 설정은 주인공들의 비범함을 더욱 배가시켜줌과 함께 존재적 필연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티프는 현대 사회에서 『수호전』이 환상적인 버전으로 재창조될 수 있는 훌륭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수호전』의 인물들이 기존 사회에 반항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등 다분히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출신이 초현실세계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구조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새롭게 이야기를 재창조해서 보여줄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최근 문화 콘텐츠 산업이 21세기 각국 경제를 이끌 핵심 산업으로 등장하면서 서사(敍事)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그에 따라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 문화 콘텐츠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성과 대중성을 갖춘 『수호전』 역시 이 과정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재창조되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환상수호전'과 '수호전: 천도 108성' 등의 게임으로 만들어져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수호전』은 컴퓨터 게임에 필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다양한 능력과 개성화된 성격을 지닌 『수호전』의 영웅 108명은 공상과학소설의 상상력에 기반한 첨단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고, 이들이 양산박이라는 무리를 형성하는 과정 및 여러 전투를 벌이는 과정은 다양한 게임의 플롯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 원전 『수호전』이 주요 인물들의 비교적 독립적인 영웅담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열전(列傳)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개별적인 영웅 중심의 독립적인 싸움의 구조를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원전의 스토리와 상관없이 영웅들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새로운 싸움의 구조를 만들어 훨씬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게임화에 필수적인 싸움의 구성 요건을 충분히 갖춘 『수호전』은 향후에도 다양한 현대적 콘텐츠로 재창조되리라 기대하는 바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모두 실재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소설들이다. 그러나 『수호전』을 『삼국연의』처럼 역사소설로 분류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 
『수호전』이 역사소설이 아닌 까닭은 소설 속 서사의 중심이 실재하는 역사적 사건에 있지 않고, 허구화된 인물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야기의 시작은 실재 사건에서 비롯했으나 신출귀몰한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영웅담으로 발전해 가면서 이야기는 역사소설의 범주를 벗어나 허구화된 영웅전기가 되었다. 

2. 『수호전』이나 『삼국연의』의 주인공들을 모두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에 보이는 영웅 형상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가장 큰 차이점은 『삼국연의』의 영웅들이 제왕이나 장상의 고귀한 혈통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서 『수호전』의 영웅들은 상당수가 사회 하층민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삼국연의』의 영웅들은 왕조의 재건을 위해, 다시 말해서 권력의 장악을 위해 다른 세력과 투쟁 했다면, 『수호전』의 영웅들은 봉건제의 불합리성 때문에 기존의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했다. 따라서 『수호전』의 영웅들은 철저히 민중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대부분의 고전소설들이 행복한 결말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에 비해, 『수호전』은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당시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설명해 보자. 
『수호전』의 영웅호한들은 의리를 숭상하고 민중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어 인기가 높았지만 대부분 도적질과 살인 등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의가 아니었거나 모함을 당하는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현실 사회의 법 테두리 안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호전』의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결말은 현실 사회와 상관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끝맺거나 아니면 타협하고 현실사회로 돌아오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전자는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판타지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현실의 봉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후자의 길을 택했고 수호의 영웅호한들은 황제의 품으로 귀순해서 도적의 집단이라는 멍에를 벗고 황제를 위한 전쟁에 참여해서 충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맺었다. 그리고 『수호전』은 비로소 충의의 영웅담으로써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