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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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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심오함을 내밀하게 품는 수필에 나타나는 화자인 '나'의 자화상


수필에 대한 독학(獨學)의 취지로 이 글을 올립니다. 혹시 이 글이 저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인생살이의 이야기라던가 일상의 사소한 일화(逸話) 같은 것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필작품(隨筆作品)은 한편의 상상에서 비롯된 창작적 문학수필로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虛構)에 의한 상상인데다가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이야기를 어떻게 상상으로 연결시키었는가 하는 것이 수필작품의 매력(魅力)인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럿 수필평론(隨筆評論)에서 제가 강조한바 있지만 수필에서의 상상은 시나 소설의 상상보다 훨씬 밀도(密度)가 높은 고도의 상상으로 작가의 심오한 철학적 의미까지 내밀(內密)하게 품는 것이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수필작품에서도 그러합니다. 

인생의 이야기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아내와 함께 살았던 삶이었고 오늘날 좀 더 배포(排布)가 여유가 있고 부유(富裕)해 듯합니다. 곁에 아내가 있어야 할 나이에 아내가 없이 혼자 사는 삶입니다. 내생은 전생과 이생이 상반(相反)됨으로써 오히려 전생과 내생이 닮았다는 주장(主張)을 피력(披瀝)하게 되는 것이고 아내와 함께 살았던 전생(前生)의 삶을 싫어하지 않고 다시 아내와 함께 살게 될 내생(來生)의 삶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고백(告白)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작중(作中)의 화자인 '나'의 전생은 얼마나 어려웠고 힘든 삶이었을까요? 여기서 이 작품의 기교(技巧)가 드러납니다. 여럿 말을 길게 늘여놓지 않고 다만 월 셋집주인의 한마디를 인용(引用)하였습니다. 

“두꺼비가 고니고기를 삼켰군.” 이 말은 자신이 두꺼비처럼 살아가는 못난이라는 설명(說明)이 됩니다. 그리고 두꺼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아내의 설움도 행랑채에서 뛰어나오며 터뜨리는 '흐흑'하는 울음소리로 표현(表現)하여 냈습니다. 이는 참으로 재치 있는 표현방법(表現方法)입니다. 아주 재미있고 아이러니하게 그러나 슬프게 표현하여 낸 것입니다. 

이번 수필을 읽고 나서 월 셋집의 행랑채에서 뛰어나오는 '나'의 아내 울음소리가 귀전에 들리는 것 같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돌아가서 그 장면(場面)을 재차 읽어보게 됩니다. 

“참, 두꺼비가 고니고기를 삼키려 하다니!” 이 말도 그렇게 인상적(印象的)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수필문학에서의 가장 뛰어난 표현기법(表現技法)의 하나인 '동격대화(同格對話)' 내지 좀 바보스럽고 좀 못나고 좀 멍청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술(技術)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재차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방 '나' 이렇게 판단(判斷)합니다. '아내가 고니고기고 나는 두꺼비란 소리구나' 그러면서 아차 하고 후회(後悔)를 합니다. 월 셋집을 사는 처지에 자기 푼수도 모르고 주인이 꼬드긴다고 아내까지 행랑채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다가 이런 봉변(逢變)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작가의 상상(想像)에서 비롯되고 있는 이미지들입니다. 참으로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 같은 소설이나 시의 질량(質量)과는 판판 다른 또 다른 강력한 힘으로 독자들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필에서의 상상력(想像力)이 힘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상상적 이미지의 내면(內面)에 숨겨 있는 어렵지만 가난하고 순수(純粹)하며 참다운 '나'의 아내의 심성을 깨워내는 표현을 단 한마디의 '흐흑'하는 울음소리로 표현하여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두꺼비'와 함께 온갖 설움과 기시를 다 받아가면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아내의 내면(內面)에 숨겨 있는 착한 심성(心性)을 깨워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생은 역마살이 끼어 여기저기서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으나 곁에 '아내'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여럿 여자(女子)들과 만날 수 있으며 마음 것 바람을 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내생으로 즉 아내의 곁에로 돌아가려고 하는 속정 깊은 '나'의 숨은 배려(配慮)가 슴배어 있습니다. 곁에 아내가 있어야 할 나이에 아내가 없이 사는 인생(人生)을 어서 마치고 역마살이도 아내를 끼고 하는 역마살이를 하겠다고 고백(告白)합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질적 변화(質的變化)가 오고 있습니다. 전생과 반대되게 살아왔던 이생의 삶이란 두꺼비를 닮지 않은 것과 고니고기로 비유(比喩)되는 아내가 곁에 없다 것 말고는 온통 허위(虛僞)와 거짓 그리고 기만(欺瞞)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전히 '나'의 곁에는 아내가 없습니다. 서로 알랑거리고 뻥 치는 여자들이 무더기로 많으며 그런 여자들을 자기 기분에 따라 줄리엣처럼 착각(錯覺)하면서 어지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는 자신의 이생의 삶이 전생에서 비견(比肩)되었던 두꺼비보다도 더 구차스럽고 여유가 없는 삶이었음을 표현하는 장면(場面)이 나옵니다. 

“하루는 새벽녘에 매달리는 ‘애인’을 뿌리치고 나오다가 발끝에 물컹하고 걸리는 수상한 돌멩이를 하나 걷어찼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것이 돌멩이가 아니었다. 서너 마장 떨어진 곳에 채이어 간 그 물건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자세히 내려다보니 두꺼비였다.” 

“나는 괜히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곁에 아내가 있어야 할 나이에 아내가 없고 혼자 사는 인생이란 오로지 이렇게 바람피우고 다닐 때만이 배포가 생겨 여유로워 지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항상 배가 불러 보이게 둥그렇게 부풀어 있는 몸통을 가진 두꺼비의 느릿느릿 급하지 않은 여유로움이다. 나의 발길에 채이어 몇 바퀴 뒹굴고도 여전히 저렇게 여유(餘裕)롭게 지어는 당당하게 기어가고 있다.” 

'나'는 전생에서 두꺼비 소리를 듣고 이생에서 두꺼비를 닮은 데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다행으로 간주(看做)합니다. 결국 두꺼비보다도 더 배포가 없고 여유(餘裕)도 없으며 당당하지도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꺼비는 '나의 발길에 채이어 몇 바퀴 뒹굴고도 여전히 저렇게 여유롭게 지어는 당당(堂堂)하게 기어가고' 있지만 '나'는 이른 새벽녘에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하나같이 '도둑놈 보따리를 방불케 하는 큰 가슴을 가진 여자들입니다. 그런 여자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줄리엣의 가슴인양 착각(錯覺)하고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나'의 이생은 비록 두꺼비를 닮은 데는 없지만 오히려 두꺼비보다도 더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두꺼비로 비견(比肩)되었던 전생보다 못한 이생이었음을 고백(告白)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불가의 윤회설(輪迴說)은 인생이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이생이 전생과 정반대(正反對)라면 내생은 이생과도 정반대가 될 것인데 정반대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은 정반대되지 않는 다는 '나'만은 주장(主張)을 펼칩니다. 그리하여 다행스럽게도 내생은 이생이 아닌 전생을 빼닮을 것이라는 희망(希望)은 이 수필작품이 비록 아픔, 슬픔, 고통 등 이런 것들을 내면에 품으면서도 그것이 절망(絶望)으로 가라앉지 않고 스스로 헤어 나오는 방법의 치유(治癒)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필의 결과에 가서는 전체적(全體的)으로 그렇게 밝지 못하였던 작품(作品)을 활짝 트이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이 수필작품에서 '나'가 '나'에게 제시(提示)하는 분명한 해법(解法)이기도 합니다. 다시 전생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수필작품은 다만 전생의 이야기만이 상상이 아니게 됩니다. 전생을 멀리 던지고 이생의 이야기만 가지고는 이런 작품(作品)이 결코 만들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체험이야기가 가미(加味)된 이생의 이야기가 전생의 상상과 화합(化合)하여 문학적 창조의 세계를 열어낸 것입니다. 즉 나는 이번 수필에서 이생의 체험을 상상화(想像化)하여 전생의 이야기로 되돌려놓고 내생의 삶을 전생과 한데 이어놓는 시도(試圖)로 문학에의 완성도(完成度)를 높여낸 것입니다. 

나의 작품(作品)들은 언제나 나 자신이 작품에서 써내고자 의도(意圖)하였던 감동이 길게 여운으로 남는 것이 특징(特徵)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잘 보았듯이 수필문학에서의 상상은 바로 이런 감동적인 여운(餘韻)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수필(隨筆) 또는 에세이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산문문학(散文文學)이라는 것을 재차 상기(想起)시킵니다. 주제(主題)에 따라 일상생활처럼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경수필(輕隨筆)과 사회적 문제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중수필(重隨筆)로 나뉩니다. 특히 중수필에서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쓴 것을 칼럼이라 합니다. 또한 독서수필(讀書隨筆), 한거수필(閒居隨筆), 일신수필(馹訊隨筆) 등에서 처음 수필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필이 포함하는 글의 형태로 잡록(雜錄), 일기(日記), 기행(紀行), 내간(來簡), 야담(野談), 패설(悖說), 시화(詩話), 비평(批評) 등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感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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