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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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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명예 재부를 가진 자들은 왜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인가?


인류는 사회과학을 포함한 과학을 발전시킴에 따라 문명과 문화 또한 발전했는데 그 결과 성관념(性觀念) 또한 체계적으로 변화하였다. 그중 가장 특기할 만한 주의사항은 바로 함부로 이성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귀축(鬼畜)이나 색마(色魔)와는 이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호색한(好色漢)은 성희롱과 섹스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다. 

그 예로 정종(定宗)은 특이하게도 본부인인 정안왕후(定安王后)와는 자식이 없었지만 후궁들 사이에서 엄청난 자식을 보아 조선조에서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왕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 수와는 별개로 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호색한(好色漢)이지만 본처에게도 충실한 인물이었다. 

태종(太宗)은 그냥 조선의 한량(閑良)으로 후궁 및 자식들의 숫자가 매우 비범하다. 정비 원경왕후 사이에서 둔 자식이 요절(夭折)한 아들 4명을 포함 8남 4녀이며 다른 후궁에서 난 자식까지 합치면 형 정종을 이어 자식 수 랭킹 2위이다. 왕자 시절부터 새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여종을 겁탈(劫奪)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하 2명이 서로 기생을 차지하는 거 놓고 싸우자 "왜 싸우냐?"하고 둘 다 벌한 후 그 기생을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또한 원경왕후의 여종을 왕자 시절 첩으로 들이고 경녕군(敬寧君) 이비를 낳아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싸운 적도 있었다. 

한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군 세종대왕(世宗大王) 역시 그 이미지에 맞지 않게 후궁을 많이 들여 아들만 18남을 낳음으로써 조선조(朝鮮朝)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이 되었다. 그런데 양친과 달리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 다만 세종의 후궁 수는 긴 재위 기간도 고려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성종(成宗)은 정식 후궁만 9명으로 역시 후궁 수가 굉장히 많았고 연산군(燕山君)은 아예 길 가다가 검열삭제(檢閱削除)를 즐겼을 정도 숙종(肅宗)은 알다시피 정치적 이유(政治的理由)도 컸지만 사랑 때문에 자신의 왕비를 두 번이나 갈아치웠다. 

의자왕: 현대에 와서 의자왕(義慈王)은 호색한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의자왕이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는 명확(明確)한 증거가 없다. 도리어 백제(百濟)의 패망 후에 신라나 당나라 측에서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날조(捏造)한 것일 확률이 높다. 

충혜왕: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람이나 그 실체는 연산군(燕山君)을 연산군 따위로 만들 정도로 악행과 엽색 행각(獵色行脚)에 있어서는 연산군보다 한 술 더 뜨는 막장 인간이다.  

강희제 : 총 64명의 후비와 애첩(愛妾),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청 황조(皇朝)에서 가장 많은 후궁과 자식을 두었다. 이 기록은 중국사 전체에도 적용된다. 다만 이는 단순히 강희제(康熙帝)가 호색한이라고만 보기는 무리가 있다. 강희제는 청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 산 황제이자 최장 재위 황제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청나라 최장수 황제이자 강희제의 손자인 고종 건륭제가 인종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난 이유가 감히 강희제보다 황위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을 정도로 강희제는 성군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세종대왕(世宗大王), 빌 클린턴, 앙리 4세와 여러 모로 닮았다. 

니시나 마사키 : 아래 마츠카타 히로키의 아들 중 하나이다. 아버지만큼 인기는 못 끌면서 바람기만 닮았다. 여동생이 소개해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던 것을 현행범(現行犯)으로 걸려 여동생과 절연(絶緣)할 뻔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첩을 많이 둠에 따라 늦둥이도 보았다. 더 충격적(衝擊的)인 것은 어린 소년과의 남색이 보편화(普遍化)되어 있었던 보통의 무장들과 달리 철저하게 여성만 찾았다는 것이다. 가신들이 미소년(美少年)을 바쳐도 받지 않고 오히려 미소년들에게 누나 있느냐고 묻는 등 역시나 여자만 찾았다고 한다. 

마오쩌둥 : 거의 신으로 숭배 받던 시절 그에게 성병(性病)이 옮은 여성들은 그것을 영광(榮光)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고관들 중에는 호색한이 매우 많았다. 오히려 애처가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별종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사마염 : 손호의 후궁까지 몽땅 다 끌어 모아서 1만 명이다. 숫자가 너무 많은 나머지 어느 방으로 가야 할지 잡기 어려워 양이 이끄는 수레에 타고는 "너희들 멋대로 가라" 라며 골라잡았을 정도였다. 후에 이것을 안 후궁(後宮)들은 자신의 방에 양이 좋아하는 잎이나 소금물을 두어 자신의 방만 찾게 했다고 한다. 

유승 : 자손이 120여명 이상이었다. 봉토(封土)를 받은 아들만 무려 21명에 달한다. 이 사람의 후손들 중 하나가 바로 촉한(蜀漢)의 건국자인 유비(劉備)로, 스스로를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유비 어쩌고 할 때 그 중산정왕이 유승(劉勝)이다. 

유자업 : 이쪽은 호색한을 넘은 답이 없는 귀축(鬼畜)이다. 무려 고모와 친누나를 겁탈했다. 사실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저지른 유송의 황제는 이놈 말고도 더 있지만 말이다. 

원술 :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후궁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숫자는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편인데 일개 호족(豪族)에 불과한 채모도 첩이 100명은 되었다. 그걸 감안하면 한 때 황제를 자칭하기까지 한 원술(袁術)의 경우는 당대로서는 평범한 편이다. 

이토 히로부미 : "남자는 배꼽 아래로는 인격(人格)이 없다."라는 말을 남긴 인물이다. 

여포 : 연의에서의 묘사 때문에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낭만파(浪漫派)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거 없고 그냥 부하의 아내와 간통(姦通)을 저지르는 호색한에 불과했다. 바로 아래에 언급되는 조조(曹操)가 자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포(呂布)한테 "그대는 부하들 아내들을 건드리지 않았소?"라고 일침(一針)을 놓자 여포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연의에서도 초선(貂蟬)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처자식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조조 : 그놈의 호색한 기질(氣質) 때문에 큰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정실부인이었던 정부인, 아끼는 부하인 전위까지 한 방에 잃었다. 

테고시 유야 : 현 일본 남자 아이돌 중 최고의 호색한이다. 미성년자(未成年者)와 놀아난 적도 있으나 멀쩡히 잘 활동했다. 심지어 이 호색한 기질 때문에 팬이 됐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미성년자 둘을 끼고 놀다가 건드리면 안 되는 그룹을 건드려서 결국 연예계(演藝界) 생활에 위기가 왔다. 

도널드 트럼프 : 결혼을 무려 3번이나 했다. 또한 어느 정도의 네거티브를 감안(勘案)하더라도 여성들을 성추행한 전적(前績)이 꽤 있었다는 의혹도 있을 만큼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데릭 지터 : 여자 친구로 올스타 팀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많은 할리우드의 톱스타들과 사귀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던 건 한 번에 한 여자만 만나서 양다리나 불륜(不倫)을 저지르지 않은 점과 경기장(競技場) 안팎으로 보여준 모습 덕분에 오히려 지터를 남자들의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디에고 마라도나 : 본인이 인정한 사생아(私生兒)만 둘이며 둘 다 어머니가 다르다. 이에 격분(激憤)한 차녀 지아니나가 아예 애들로 올스타를 만들지 그러냐고 말할 정도이다. 

람세스 2세 : 첫 번째 정비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해 여러 명의 왕비(王妃) 및 후궁을 두어 정확(正確)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무려 100여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고 개중에는 자신의 친딸을 후궁(後宮)으로 받아들이고 관계하여 자녀 겸 손녀를 두었다. 

믹 재거 : 양성애자였던 그가 역시 양성애자(兩性愛子)라는 얘기가 있는 데이비드 보위와 불륜(不倫)을 저질렀다는 말도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당시 그의 부인은 정작 남편이 데이비드 보위의 부인과 간통(姦通)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매직 존슨 : HIV 양성반응(陽性反應)이 나왔는데 하도 많이 해 댄 바람에 누구한테 옮았는지 모르겠다는 섬뜩한 발언(發言)을 했다. 그럼에도 은퇴 후 수십 년째 사업가로서 잘 살아있는 걸 보면 운이 더럽게 좋다. 

베슬리 스네이더르 : 아들 둘의 어머니가 모두 다르며 그 중 하나와는 불륜(不倫)으로 만났다. 그러나 그 두 여자와 둘 다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앙리 4세 : 이 사람은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世宗大王)에 비견될 만큼 지금까지도 프랑스인들에게 무수한 존경을 받는 성군(聖君)이다. 그런 그가 당대에 '팔팔한 오입쟁이'라는 별명까지 들었을 정도라면 역시 정치를 잘해서 칭송(稱頌)을 듣는 것과는 별개로 불륜 스캔들로 인해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빌 클린턴의 프랑스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현재의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성적 관계(性的關係)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임기(任期) 중 검열 삭제하다가 복상사(腹上死)한 대통령도 있다. 

아우구스트 2세 : 작센 선제후령의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다. 별명이 강건왕(剛健王)일 정도였다. 확인된 사생아의 수가 300명이 넘고 애인 중에는 그의 생물학적(生物學的) 딸도 있었다. 하도 사생아(私生兒)가 많아서 애인의 친모가 다른 애인 중 한 명이었던 것도 몰랐던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 : 그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方程式)이 외간 여자와 노닥거리는 와중에 구상한 것이라 한다. 더불어서 슈뢰딩거 본인은 물론 부인도 슈뢰딩거의 동료(同僚)랑 바람을 피우는 등으로 인해 부부관계가 막장이었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관점에 따라선 가장 영리한 호색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호색한 기질도 정치 술수(政治術手)에 잘 써먹었을 정도였다. 또한 유부녀(有夫女)들과 자주 바람을 피웠는데 여자들은 물론이고 그 남편들에게까지 칼빵을 맞지 않았으며 그 남편이 알고도 카이사르가 좋다고 할 정도였다. 

Eazy E : 가사에서도 여성비하(女性卑下) 발언이 심했고 그의 집에서 관계를 가진 어린 팬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그런 생활 탓인지 에이즈에 걸려 합병증(合倂症)으로 사망했다. 

존 F. 케네디 :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관계가 유명하며 그 외에도 혼외정사(婚外情事) 의혹이 있다. 

지미 새빌 : 이놈은 단순한 호색한 수준을 넘어선 희대의 악질 성범죄자(惡質性犯罪者)다. 오죽하면 그의 사후에 세워진 추모비(追慕碑)가 그의 실체가 밝혀지자마자 바로 부서졌을 정도다. 

찰리 채플린 : 여성 편력(女性遍歷)이 매우 많았으며 16세~20세 여고생 정도의 연령대를 좋아했다. 

콜린 패럴 :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호색한인 배우다. 이와 관련된 일화(逸話)로 해변에서 한 비키니 차림의 미녀를 눈여겨보더니 작업을 건 지 30분도 안 돼서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함께 가는 과정이 파파라치에 의해 자세히 찍히기도 했다. 다행히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런 성향(性向)은 달라졌다고 보여 진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유로 2004가 끝난 직후 그의 절친 호나우지뉴를 포함한 동료 몇몇과 쇼 걸 20여명을 불러 희대(稀代)의 섹스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 파티에 초대된 쇼걸들은 하룻밤에 몇 백 달러 수준이 아니라 하룻밤에 만 달러(한화로 약 천만원)에 육박(肉薄)하는 전 유럽 최고의 파티걸들이었다. 말리부 클럽을 통째로 빌려 밤새도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여기 참여한 파티걸의 말에 따르면 호날두는 마치 야생마(野生馬) 같았다고 한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 세 번의 결혼(結婚)을 통해 5명의 아이를 얻었다. 하지만 결혼생활 동안 잦은 혼외정사(婚外情事)를 저질러 5명 중 3명의 아이를 얻을 정도로 사생활(私生活)은 깨끗하지 못하다. 

헨리 8세 : 헨리 8세는 호색한(好色漢)이라기보다는 당장 살고 있는 부인과의 관계에 충실(忠實)했고 단지 그런 부인을 여러 번 바꾼 전적이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게 더 옳다. 정부(情婦)를 여럿이나 데리고 다니던 다른 나라의 군주(君主)들과는 달리 그는 체면치레하느라고 둔 여인 세 명이 고작이었을 만큼 정부를 두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부인과의 관계에만 집중(集中)했다. 문제는 그리도 사랑하던 부인 두 명의 목을 달아나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데 라 쿠에바 : 이분도 한 여성편력(女性遍歷) 하신다. 가장 유명한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에게 자식뻘인 이복형제(異腹兄弟)가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엔리케 또래의 혼외자(婚外子)도 있다. 또한 아버지인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푸가는 88세에 득남(得男)해서 손자 엔리케는 자기보다 29살이나 어린 삼촌이 있다. 

똑같은 호색한(好色漢)들인 이 인간들보다는 수천 배는 더 낫다. 유퉁은 너무 부인을 자주 갈아치워서 문제지 억지로 성폭행(性暴行)을 하거나 멀쩡한 부인을 냅다두고 간통(姦通)을 저지른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인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첩의 자식이었던 조앙을 의붓아들로 삼아 그에게 정말 친아들 이상으로 정을 쏟으며 진심으로 아꼈다고 한다. 결국 조앙이 죽자 아들을 죽게 한 비정한 아비라며 조조(曹操)에게 욕을 퍼붓고는 이혼(離婚)해버렸다. 천하의 조조마저 정부인에게 달려가 재결합을 애원했으며 임종 직전에도 정부인과 조앙에 대한 회한(悔恨)을 말할 정도로 이 일을 후회했다. 

대표적으로 클레오파트라와의 스캔들이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본래 이집트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지위(地位)에 더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에사리온을 통해 로마를 냉큼 먹으려했다. 이 당시의 로마는 알다시피 이집트 같은 왕국이 아닌 공화국(共和國)이었던 지라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철저하게 오리발을 내밀어서 그녀의 뒷통수를 쳤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도 감탄(感歎)하긴 했으나 그녀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경제적인 잠재력(潛在力)을 더 탐내어서 철저하게 이용해먹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클레오파트라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만은 아니고 엄연히 클레오파트라도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이용(利用)해서 자기 왕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간에 대립(對立)이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끌어들임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를 쫒아낼 수 있었다. 

정부(情婦)를 두는 게 무슨 체면치레하는 거냐고 볼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정부가 많을수록 남자답다는 인식(認識)이 있었으므로 정부가 없거나 한 명만 있으면 오히려 고자 소리 듣기 딱 좋았다. 그래서 아무리 부인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군주(君主)라도 어쩔 수 없이 정부를 두세 명 정도라도 두긴 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대에 엄청나게 욕먹은 이유(理由) 중 하나도 루이 16세가 본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충실(忠實)해 정부를 아예 두지 않자 사람들은 루이 16세가 남자답지 못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질투(嫉妬)가 심하다고 욕했다. 

어렸을 때 "삼국외사" (三國外史)에서 본 이야기다. 동탁(董卓)의 행실을 보다 못해 허도(許都)를 뛰쳐나온 조조(曹操)는 길에서 중모(中牟) 현령 진궁(陳宮)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진궁은 조조를 놓아주고 같이 따라 떠났다가 도중에 혼자 돌아와서 "알고 보니 맹덕(孟德, 조조의 자)은 장차 나라를 훔칠 큰 도둑이 될 놈이었소. 내가 그를 버리고 돌아온 것은 나중에라도 천하백성들의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소."라고 변명(辨明)한다.  그랬던 진궁이 몇 십 년 뒤에는 조조(曹操)의 손에 잡혀 죽게 된다. 조조와는 원수 간이었던 여포(呂布)를 섬겼던 탓이었다. 

이것은 바로 도둑을 놓아주었던 자의 보응(報應)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한실(漢室) 천하를 도둑질했던 조조와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도둑에게 자신이 죽어야만 했던 진궁의 이야기다. 역시 이 이야기와 비슷한 또 하나 46년 전에 닉슨 전대통령의 재임기간(再任期間) 미국에서 발생했다. 

'워터게이트 도청사건(盜聽事件)'을 저지르고도 한참 자기의 결백성을 주장해오던 닉슨 전 대통령이 종당에는 잘못을 시인(是認)하고야 말았다. 그러자 붐이 일어났다. 백악관 비서실의 적잖은 직원들이 사표(辭表)를 내던지면서 한 말인즉 자기들이 믿었던 닉슨대통령이 이런 사람인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결백(潔白)한척 하더니 어떻게 갑자기 이런 추악상(醜惡相)이냐며 격분(激憤)한 직원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대통령(大統領)을 모시지 못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자기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닉슨도 닉슨이겠지만 그 닉슨에게서 믿음을 배신(背信)당했다고 생각하고 백악관(白堊館)을 박차고 나가버린 아메리카대륙의 멋진 신사들에게야말로 한번 찬탄(贊嘆)을 보내볼만 하다. 그 직원들도 우리 "삼국지(三國志)"속의 진궁(陳宮)과는 역시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바로 자기 양심(良心)의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고 나아가서는 믿음을 중히 여기는 서양사회의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후세사가(後世史家)들이 나라와 백성들까지도 모조리 도둑질했던 조조를 심판대(審判臺)에 올릴 대신에 그를 정치가로 군사가로 시인으로까지도 하늘높이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조는 도둑이라도 대의(大義)를 밝힌 큰 도둑이기 때문에 칭송(稱頌)할 만하다는 것이다. 대신 진궁(陳宮)은 자신의 이익(利益)부터 살폈기 때문에 소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이 말은 대의(大義)를 밝히는 큰 도둑(임금) 옆에 어진 부하가 떠나가고 자기 이속밖에 모르는 소인배(小人輩)들이 몰려들 때는 이미 그 도둑은 벌써 칭송받을만한 도둑이 못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 세상도 바로 이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떠나버린 진궁(陳宮)을 소인배라고 규정해놓고 보면 조조(曹操)의 신변에 몰려든 부하들은 모두가 어진 부하들로 둔갑(遁甲)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현대사회가 민주화(民主化)된 사회라고 해도 도둑이 밉상스럽고 그 폐해가 싫은 것은 어떤 나라에서라도 다 마찬가지겠다. 가석(可惜)한 것은 바로 천하 세상까지도 다 도둑질했던 조조보다도 더 큰 도둑들을 자꾸 내뱉고 있는 이 세상 제도자체의 극한(極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도둑들에게 한마디 전한다. 세상을 너무 더럽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모두들 자기 앞에 주어진 운명에 순종(順從)해야 한다. 석 짐 질 힘밖에 없다면 겸연(慊然)하게 두 짐만 지는 것은 바라지 못하겠지만 결코 석 짐 이상을 넘보지 말기 바란다. 그 넘보는 세상의 불신요소(不信要素)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시국안정(時局安定)의 가장 주요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나가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한 나라의 대통령(大統領)으로부터 아래로는 자그마한 단체의 한 단체장(團體長)에 이르기까지 같은 도리다. 

자기자리 아닌 남의 자리에 틀고 앉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적당(不適當)한 인물이 앉지 말아야 할 요긴(要緊)한 자리를 사기 쳐서 차지하고 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사(大事)를 그르치고 정치를 망침으로써 위로는 임금이 하늘의 뜻을 살리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법도(法道)를 지키지 않는다. 세상은 도를 믿지 않고 기술자들은 척도(尺度)를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을 남용(濫用)하여 제멋대로 비리를 저지르고 국민 여성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요즘 정치가(政治家)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라고 간곡히 지적(指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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