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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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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주도이며 만고의 주당인 무송과 노지심은 누가 주량이 더 셀까

图片信息 水浒传第五回鲁智深的做法很聪明吗?


수호전(水滸傳)은 바로 술을 마시는 역사이야기이다. 무송(武松)은 경양강(景阳冈)에서 연이어 18사발의 술을 마셨는데 이것은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일 뿐이다. 노지심(鲁智深)은 구운 고기를 가지고 이삼십 사발을 마셨다. 정말 탄복(歎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주량(酒量)이 더 세다고 할 수 있을까?

수호전(水滸傳)에서 술은 노주(老酒)와 촌주(村酒)로 나뉜다. 술의 품질로 봐서는 고급술과 하급술이다. 실제로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의 두 등급으로 분류(分類)하는 것이나 같다. 자연스럽게 노주(老酒)와 촌주(村酒)의 칭호가 나타났다.

촌주(村酒)는 일종의 증류를 하지 않은 소주(小酒)이다. 품질이 낮다. 일반적으로 시골에서 팔거나 자기 집에서 마시는데 쓴다. 대명부(大名府) 양중서(梁中書)는 양지(楊志)를 파견하여 생신강(生辰綱)을 압송하게 하는데 채경의 생일축하를 위하여 양지 일행은 황니강(黃泥崗)에 도착한다. 그 십여 명의 군인들은 백승(白勝)이 통을 하나 메고 가는 것을 보고 묻는다. "너의 통 속에는 뭐가 있느냐?" 백승은 대답한다. "백주(白酒)입니다." 여러 군인들은 즉시 기운을 차린다. "우리는 덥기도 하고 목도 모른데 왜 사서 마시지 않느냐. 더위나 풀자." 아마도 더위를 푸는 술이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미주(米酒)일 것이다. 

노지심(魯智深)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소란을 피우며 마신 것이 바로 촌주(村酒)이다. "노지심(魯智深)은 그 두 통의 술을 모두 정자에 들고 올라가서 덮개를 열었다. 그저 국자로 차가운 술을 퍼서 먹었다. 얼마 되지 않아 두 통의 술에서 한통을 다 마셔버렸다." 아마도 알코올도수가 비교적 낮아서 1통을 다 마시고서야 취한 것 같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마시는 것은 바로 촌주(村酒)이다. 오는날 말하는 증류(蒸溜)하여 이루어진 백주(白酒)는 아니다.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주(素酒), 황미주(黃米酒), 훈주(葷酒), 혼백주(渾白酒)는 모두 촌주이다.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알콜도수도 상대적으로 낮다.

수호전의 노주(老酒)는 ‘송사(宋史). 식화지(食貨志)’에 따르면 송나라에서 대주(大酒)라 불렀다. 이런 술의 알코올도수는 비교적 높다. 술의 품질(색, 향, 맛)도 모두 '소주(燒酒)'보다 뛰어났다. 생산에서부터 음주(飮酒)에 이르기까지 근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격은 비싸다. 공량(孔亮)의 청화옹(靑花瓮)이 바로 노주이다. "가게주인이 한 통의 청화옹주(靑花瓮酒)을 들고 나왔다. 진흙 뚜껑을 열고 대백분(大白盆)에 붓는다. 무행자(武行者)가 몰래 훔쳐보았을 때 단지에서 나오는 것은 좋은 술이었다. 바람이 불자 향이 밀려온다. 

무행자(武行者)는 그 향을 맡으려 참지를 못했다. 목구멍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한다. 일어나서 빼앗아먹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무송(武松)은 술을 아는 사람이다. '빼앗아먹고 싶다'는 말에서 그것이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송은 금방 취한다. 그는 작은 계속을 따라 언덕을 가다가 똥개가 미친 듯이 짓는 것을 본다. 무송은 왼손으로 칼집에서 계도(戒刀)를 뽑아들고 한칼로 베어간다.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머리부터 계곡물에 꼬라박힌다. 송강(宋江)은 비파정(琵琶亭)에서 대종(戴宗), 이규(李逵)를 접대하는데 술집주인이 두 통의 옥호춘(玉壺春)이었다. 이는 강주(江州)의 유명한 고급술이다. 송강이 심양루(潯陽樓)에서 술에 취해서 '반시(反詩)'를 쓴다. 그때 마신 것이 바로 교풍월(橋風月)이라는 좋은 술이다. 도수가 높은 노주(魯酒)이다. 송강은 술에 취한 후에 비로소 '반시(反詩)'를 썼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결국 사람들이 그를 사형장(死刑場)에서 데려나왔고 어쩔 수 없이 양산에 오른다.

당시에는 양조기술(釀造技術)이 발달되지 못했다. 제조기간도 짧고 술이 품질도 좋지 않았다. 술을 다 만들고 나면 왕왕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마실 때는 먼저 걸러야 했다. 백거이(白居易)의 ‘문유십구(問劉十九)’라는 시에서 말하는 "녹의신배주(綠蟻新醅酒)"에서 가리키는 것은 바로 거르지 않은 술이라는 말이다. 북송 때의 진팽년(陳彭年) 등이 편찬한 ‘광운(廣韻)’에서는 '배(醅)'자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술을 아직 거르지 않은 것이다(酒未漉也)" 술을 거르면 맑아진다. 품질도 좋아진다. 그래서 '청주(淸酒)"라고 부른다. 거르지 않은 술은 바로 명나라 때의 양신(楊愼)이 말한 "일호탁주희상봉(一壺濁酒喜相逢)"에 나오는 그 '탁주(濁酒)'이다. 다른 한편으로, 통상 술을 제조할 때 알코올도수가 10도에 이르면 효모균은 번식을 중지하고, 발효과정이 정체된다. 그래서 발효과정만을 거친 술은 알코올도수가 10도 정도를 넘지 못한다. 무송(武松)이 경양강(景陽岡)에서 호랑이를 때려잡기 전에 마신 그 18사발의 술은 이런 유(類)에 속한다. 저도의 미주(米酒)이다. 일각에서는 술에 물을 탔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사발로 벌컥벌컥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가 마신 술이건 한무제(漢武帝)가 마신 술이건 아니면 조조(曹操), 이백(李白), 소동파(蘇東坡)가 마신 술이건 성질상으로는 모두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과 같다. 알코올도수가 낳았다. 그래서 고인들은 호쾌하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무송이 마신 18사발의 "투병향(透甁香)"은 바로 촌주(村酒) 중에서 정품(精品)이다. 관료들이 마시는 노주(魯酒)보다 맛이 있었다. 일종의 알코올도수가 낮은 저도주이다. 노지심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마신 술은 분명 소주(小酒)이고 그저 알코올음료에 해당한다. 무송은 술을 마신 후에 호랑이를 때려잡고 쾌활림(快活林)에서 장문신(蔣門神)을 이긴다. 그러나 노지심(魯智深)은 술에 취해서 산문을 부술 뿐이다. 술을 마신 후의 행동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무송의 주량이 노지심보다 대단한 것 같다.

노지심(魯智深)과 무송이 술을 가장 많이 마셨을 때를 보면 무송이 취하여 장문신과 싸우러 가는 노중에  열두 세 개 주점에 들러 세 사발씩을 마신다. 개략 3,4십 사발가량이다. 물론 술의 질은 가장 낮은 것이다. 노지심(魯智深)은 도화촌(桃花村)에서 마신 1호의 혼주(混酒)와 이삼십 사발의 보통주에도 맑은 정신을 가지고 소패왕(小覇王)을 마구 때려준다. 원저의 문자로 보자면 아마도 노지심(魯智深)은 이삼십 사발이 통상적인 주량인 듯하고 두 사람의 주량은 비슷했던 것 같다. 다만 수량으로 보면 노지심이 조금 더 많이 마신 것 같다. 

양산호한 중에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적지 않다. 무송(武松), 노지심(魯智深), 임충(林冲), 이규(李逵)와 송강(宋江) 등등이 모두 술고래이다. 모두 술을 마시고나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을 이룬다. 송강은 술을 마시고 반시를 썼고 임충은 술을 마시고 산신묘(山神廟)에서 세 명을 죽인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수호전에서 잊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무송(武松)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과 노지심이 도화촌(桃花村)에서 취해서 소패왕(小霸王)을 패는 것일 것이다. 이 두 사람만이 양산에서 주량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도대체 누구의 주량이 더 센지는 시내암(施耐庵) 선생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수호전(水滸傳)’은 ‘삼국연의(三國演義)’와 함께 널리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 소설이다. 그래서 ‘수호전’은 늘 ‘삼국연의’와 함께 병칭(竝稱)되었고 "젊어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연의’를 읽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 ‘삼국연의’에는 경험(經驗)이 부족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으니 이미 삶의 연륜이 쌓인 노회(老獪)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 하다는 뜻이고 ‘수호전’은 정의감(正義感)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니 젊음 그 자체가 발산(發散)하는 혈기(血氣)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 것이다.

‘수호전’에는 무려 108명의 비범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각각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이 대개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順應)하거나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암흑가 출신(暗黑街出身)이거나 땡땡이 중이거나 관료생활(官僚生活)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거나 모함(謀陷)을 받아 도망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문인 출신이든 하층민 출신이든 모두 자신의 처지에 불만(不滿)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의 부패(腐敗)와 불합리성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 질서에 반항(反抗)하는 용감한 싸움꾼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민중의 탄성(歎聲)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영웅호한(英雄豪傑)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나라를 세운다든가 민중을 해방시키는 등의 거창한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의 재물을 약탈(掠奪)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기도 하고 여인네를 겁탈(劫奪)하기도 하는 부도덕한 면도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는 등 약점(弱點)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는 부적절하며 악한(惡漢)에 불과하다고 폄하(貶下)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 때문에 오히려 민중은 그들을 매우 인간적인 친근한 영웅(英雄)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수호전(水滸傳)’의 영웅들이 가지는 이러한 계급투쟁적인 특성은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요소는 지배층 관료와 문인들이 ‘수호전’을 금서(禁書)로 낙인찍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수호전’의 내용에 불만을 가진 문인들이 내용을 수정(修訂)해서 서로 조금씩 다른 작품으로 변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수호전’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가장 복잡한 판본을 지닌 작품이 되어 버렸다.

청(淸)나라 때의 김성탄(金聖嘆)은 자신의 비평을 포함해 새롭게 출간한 ‘제오재자서시내암수호전(第五才子書施耐菴水滸傳)’에서 송강(宋江)을 비롯한 무리들이 송나라 황제에게 투항(投降)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대개 100회나 120회본의 길이를 가진 다른 판본의 작품들이 송강(宋江)의 무리가 관군에 투항한 뒤 황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서 김성탄(金聖嘆)은 이러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여 70회본으로 대폭 줄여버린 것이다. 도적 출신의 무리가 국가를 대신해 오랑캐나 반란의 무리와 싸운다는 설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도적의 무리는 결국 황제의 품으로 귀순(歸順)해야 하며 그들에게서 충의(忠義)를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김성탄(金聖歎)의 생각은 수호전‘을 발분저서(發憤著書)에 비교해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이라고 명명한 명(明)나라 때의 이지(李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처럼 수호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갈래는 ‘수호전(水滸傳)’ 출간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중국의 어느 일간지에 실린 한 여성의 상담 요청문(要請文)이 기억난다. 그녀는 매일 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들에게 중국의 고전 소설(古典小說)을 읽어주었는데 온통 도적과 강도들의 종횡무진(縱橫無盡) 활약기인 ‘수호전(水滸傳)’을 과연 읽어줘야 하는지 고민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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