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대 시내암(施耐庵) 또는 명대 나관중(羅貫中)의 저작으로 알려진 ‘수호전(水滸傳)’은 상이한 판본이 많이 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중 ‘100회본’은 북송 말기 송강(宋江)을 수령으로 하는 도적의 무리가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양산박(梁山泊)이라는 호수 한가운데에 수상요새를 거점으로 삼기까지의 경과와 이후 조정에 귀순해 절강(浙江)에서 일어난 방랍(方臘)의 반란을 평정해 공을 세우는 내용으로 구성(構成)돼 있다.
그러나 청조 초반 김성탄(金聖嘆)이 ‘100회본’ 중 송강 등 108호걸이 모두 양산박 요새에 결집해 서열(序列)에 따라 각기 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분담(分擔)하는 대목까지 서술한 70회만 택하고 나머지는 위작(僞作)이 삽입된 것으로 판정하면서 이후 ‘수호전(水滸傳)’이라고 하면 모두 ‘70회본’을 가리키게 됐다. ‘수호전’의 모든 주인공이 각각 독자적인 결말에 도달한 점에 주목(注目)한 저자는 장편소설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검토(檢討)해 보면 사실상 옴니버스, 즉 ‘단편들의 집합(集合)’에 더 가깝다고 설명한다.
'수호전'은 주로 천강(天罡), 지살(地殺)의 108개별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에서 체천행도(替天行道)한다는 이야기이다. 작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충의(忠義)는 양산박의 응집력(凝集力)이 아니라 진정 그들을 양산박으로 와서 반란에 참가하도록 한 것은 책에서 암시하고 있는 천강지살이론(天罡地殺理論)이다. 송강(宋江)은 천강지살이론의 신화전설(神話傳說)을 가지고 108명이 하늘의 별의 주인이라고 신격화(神格化)시켰고 마침내 각종 수단으로 108명을 양산에 모이게 만든다. 그렇게 하여 천강지살이론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양산에 오르고 나서 모든 사람이 별의주인이라는 것은 난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도 공손승(公孫勝)은 어렵지 않게 해결한다. 그의 건의와 조작 하에 송강(宋江)이 노력하고 오용(吳用)의 협조 하에 마침내 천서(天書)가 내려왔다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하늘의 뜻은 어길 수가 없다. 송강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여러 영웅 간에 평형(平衡)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원칙(原則)이 있어야 했다. 송강이 자기 마음대로 정했다는 것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말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처리한 것이지만 모두가 쉽게 받아들일 만한 신비한 형식으로 자신의 목적(目的)을 달성한다.
첫째는 송강(宋江)과 오용(吳用)의 기득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송강은 양산의 우두머리이다. 오용은 양산의 군사(軍師)이다. 이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바로 송강과 오용의 묵계(默契)와 합작 하에 양산은 비로소 별 볼일 없는 산적무리에서 점차 강호제일의 조직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서열2위의 노준의(盧俊義), 서열4위의 공손승(公孫勝)은 어느 정도 얼굴마담역할이다. 노준의는 송강이 일체를 불구하고 양산으로 모셔온 인물이다. 하북삼절(河北三絶)중의 한 명이다. 이것은 양산으로 하여금 세력을 북으로 확장(擴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노씨집안의 모든 재산도 양산에 헌납했다. 이 점은 그 누구도 비견(比肩)될 수 없다. 또 핵심중의 하나는 노준의(盧俊義)의 무공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양산(梁山)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 공손승(公孫勝)이 양산에 대하여 한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영웅의 서열을 정한 법단(法壇)을 주재(主宰)한 것이다.
관승(關勝)이 서열5위에 올랐는데 이는 임충(林沖)의 팬들이 불만을 가지는 부분이다. 관승에게는 대단한 조상이 있고 본인의 무공도 뛰어나며 의표도 당당하다. 게다가 송강이 가려는 초안(招安)의 길에 오호상장의 첫 번째는 관승이 아니면 안 된다. 만일 임충이 첫 번째라면 아마도 고구(高俅)가 더더욱 초안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명(秦明)은 송강(宋江) 심복 중 최고의 맹장이다. 그리고 송강의 두 번째 명장이다. 임충의 뒤에 놓이는 것이 정상적인 자리이다. 호연작(呼延灼)은 명인의 후손일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양산이 거둔 최초의 정규군의 전투경험을 가진 장수(將帥)라는 점이다. 실력(實力)도 있고 집안도 좋다. 그래서 서열8위에 두는 것이 적합하다.
둘째는 양산의 가치관(價値觀)을 보여준다. 오호장(기실 4호장이다)의 뒤에는 서열9위부터 서열12위까지 양산의 특수한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화영(花榮), 시진(柴進), 이응(李應), 주동(朱仝)등 4명의 양산박 서열은 양산집단의 이익정수를 보여준다.
화영(花榮)은 송강(宋江)의 천강지살이론(天罡地殺理論)의 최초추종자이다. 게다가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전(神箭)이다. 9위에 놓는 것도 억울할 지경이다.
시진(柴進)은 선조가 황족이다. 양산의 모든 영웅들이 내심으로 경외하는 시세종(柴世宗)의 후손이다. 이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혈통의 우세를 지녔다는 것을 말한다. 양산의 경제와 혈통(血統)에 큰 도움을 준다. 관건은 그가 양산과 조정의 소통에 가장 적합한 중간역할을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진은 송강(宋江), 임충(林沖), 무송(武松) 등에게 은혜가 있어 양산의 은인이다. 10위에 놓는 것이 적합하다.
주동(朱仝)은 양산의 양대천왕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관운장(關雲長)과 같은 용모도 지녔다. 주동이 양산에 가입한 것은 양산의 의기(義氣)를 한 단계 끌어올려주는 일면이 있다. 그래서 12위에 놓는 것도 말이 된다.
제11위는 이응(李應)에게 돌아갔다. 이건 약간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응은 축가장(祝家莊)을 진정으로 타파한 공신이다. 또한 양산에 전량을 공급하는 최초의 기둥 중 하나였다. 축가장을 치면서 송강(宋江)은 양산에서 위명을 세웠고 인심이 그에게 몰렸다. 그가 양산박에서 서열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 이응의 공로이다.
셋째는 마보수(馬步水)의 서열이다. 마보수 삼군 중에서 양산에서 가장 중용되지 못한 것은 수군(水軍)이다. 대명자자한 수군의 큰형 이준(李俊)은 몰차란(沒遮攔) 목홍(穆弘)의 뒤를 차지한다. 양산에 오르기 전에 이준(이립, 동위, 동교), 목홍(목춘), 장횡(장순)은 모두 같이 게양령(揭陽嶺)의 삼패(三覇)였다. 이준의 지위가 더 높았다. 관건은 두 사람이 모두 게양령(揭陽嶺)에서 송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목가형제는 하마터면 송강을 죽일 뻔했다. 그러나 이준은 송강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 몇 가지를 종합하면 이준(李俊)의 위치는 당연히 목홍보다 높아야 맞다. 이것이 아마도 이준이 끝까지 송강(宋江)을 따라 동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배를 타고 떠나버린 원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목홍은 마군(馬軍)의 우두머리이다. 그리고 집안의 전량은 모조리 양산(梁山)에 바쳤다. 이것도 아마 점수를 딴 점일 것이다.
이준(李俊)이 좋은 위치에 놓이지 못했고 왕씨삼웅(阮氏三雄)과 장씨쌍웅(張氏雙雄)도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에 놓이지 못했다. 주요 원인은 아마도 양산이 수군을 중시(重視)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방랍(方臘)을 칠 때 크게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넷째는 인품(人品)을 고려한다. 양산은 충의(忠義)를 가장 중시한다. 배반이나 투도(偸盜)는 배척한다. 백승(白勝)은 지취생신강(智取生辰綱)의 참여자이다. 다만 관부에 체포된 후에 조개(晁蓋)와 오용(吳用)을 팔아먹는다. 서열(序列)이 끝에서 세 번째인 것은 당연하다. 욱보사(郁保四)는 증두시(曾頭時)의 사람이다. 그 주인을 배신하고 양산박의 간첩(間諜)이 된다. 게다가 증두시에서 일찌기 조해를 죽였다. 그래서 서열(序列)이 끝에서 네 번째이다.
시천(時遷)은 놀라운 공을 많이 세웠고 본인도 정명(正明)하고 능력 있다. 절대로 수퍼급의 스파이이다. 양산의 스파이두목이다. 양산의 잠규칙(潛規則)은 투도(偸盜)를 폄하(貶下)하는 것이다. 그래서 닭을 훔쳐서 세 번 축가장(祝家莊)을 치는 일을 일으킨 시천(時遷)은 끝에서 두 번 째, 마적 단경주(段景住)는 서열이 꼴찌가 된다. 이들 4명에 3명의 여장은 바로 양산 잠규칙(潛規則)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풍류객 휘종과 기녀 이사사(李師師)’ ‘도적 송강과 장군 송강’ 등 책에 실린 9편의 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수호전(水滸傳)’ 중에서 특색 있는 등장인물을 뽑아 소설적 허구(虛構)에 가린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뒤 ‘사기(史記)’의 열전(列傳)을 쓰듯이 이들의 전기를 새롭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송대(宋代)의 양산박은 이야기 그대로 도적과 비밀결사의 은신처(隱身處)였고 수백 년간 계속된 황하(黃河)의 물길 변화로 양산박(梁山泊)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원대(元代)까지만 해도 양산박이 둘레 800리에 달하는 큰 호수로 남아 있었으나 청조 강희 6년(1667)의 기록을 보면 이때 이미 호수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송강(宋江)과 휘종(徽宗), 채경(蔡京), 방랍(方臘) 등 많은 등장인물들의 행적이 예상보다 역사적 사실에 근접해 있음은 물론 그동안 흥미 위주로 꾸며낸 허구로 간주돼온 인신공양(人身供養)이나 식인풍습(食人風習) 등의 잔혹한 내용도 문헌기록(文獻記錄)을 제시하며 역사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强調)한다. 판본문제를 비롯한 ‘수호전(水滸傳)’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송나라의 정치·경제제도 등에 대한 해박((該博)하고 평이한 설명에서 새삼 저자의 학문적(學問的)인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쟁과 내란으로 사회 전체가 혼란(混亂)에 빠진 12세기 초반 원형이 탄생한 ‘수호전(水滸傳)’은 이처럼 사실에 근거(根據)했지만 민중의 갈망(渴望)이 개입되면서 허구화(虛構化)의 과정을 겪게 된다. 현실에서 보잘것없는 도적(盜賊)이었던 송강(宋江)이 때맞춰 단비를 내려준다는 ‘급시우(及時雨)’란 별명으로 불리며 만인의 존경(尊敬)을 받는 독특한 존재로 된 것이 단적인 사례(事例)다.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연구’ ‘옹정제(雍正帝)’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저자는 “중국을 아는 데 ‘사서오경(四書五經)’보다 ‘수호전(水滸傳)’이 더 유용하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