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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

글: 인신공분(人神共奮)


1. 당신과 '지도자의 사고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양주(揚州)에는 "사가법기념관(史可法記念館)"이 있다. 해방전에는 "사공사(史公祠)"라고 불렸다. 그 안에는 항청명장(抗淸名將) 사가법의 의관총(衣冠塚, 시신이 묻힌 것이 아니라 옷과 갓을 묻은 곳)이 있으며,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만든 것이다. 건륭제는 사가법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서하고, 사가법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찬양했다.
이 시호는 흥미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사가법은 항청민족영웅이다. 1645년, 청나라군대가 양주성으로 쳐들어오자, 회양독사(淮揚督師)인 사가법은 청나라에 투항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성이 함락된 후 자결한다. 청군은 양주에서 중원으로 쳐내려온 후에 가장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점으로 인하여 보복을 실시한다. 십일간이나 살인, 방화, 약탈을 벌인다. 역사에서 "양주십일(揚州十日)"이라 불리는 불행한 사건이다.
사가법은 청나라초기이래 민족영웅의 이미지로 반청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자연히 청나라조정측의 입장에서는 '언급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100여년이 지난 후, 건륭제는 직접 그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되었을까? 
당연히, 입장을 바꾼 이유는 기실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청나라의 통치가 이미 안정되었고,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등등이다. 그러나 이 일을 건륭제가 한 것은 아주 재미있다. 왜냐하면 그는 청나라황제들 중에서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기 가장 좋아했던 황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와 방법은 일맥상통한다. 예를 들어, 건륭제는 우리가 '중국식 지도자'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식 지도자에게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특징이 건륭제에게 집중되어 있다. 우수한 지도자이건 엉망인 지도자이건. 체제내이건 체제외이건. 
잠시 '사공사'에 대해서는 놔두고, 건륭22년(1757년)의 '직보'로 인해 발생한 대사건을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이 사건은 아주 복잡하다. 부정부패, 만한갈등, 행정체계, 문자옥, 파벌투쟁등등의 문제가 모두 얽혀 있다. 본문초입에서 '지도자의 사고방식'을 얘기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만일 당신이 건륭제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보자.

2. '직보'로 인해 발생한 대사건
이 해에 막 준가르의 반란을 평정한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져서 두번째로 '강남'으로 내려간다. 누가 알았으랴 서주(徐州)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흥을 깨는 일이 벌어진다.
건륭제를 맞이한 관리중에는 이미 은퇴한 전 포정사이자 하남 하읍(夏邑) 관적의 관리 팽가병(彭家屛)이 황제에게 하남순무(河南巡撫) 도륵병아(圖勒炳阿)에 대한 보고를 올린다. 그가 하남 4개현의 심각한 수재를 감추어, 백성들이 조정의 재해구호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도륵병아는 당연히 극력 부인했다. 현지에 자그마한 홍수가 발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읽어보고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만일 당신이 건륭제라면, 이 일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처리했을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은 이러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말이 다르면, 제3자로 하여금 조사팀을 꾸려서 조사하게 하자.
그렇게 대답했다면 당신은 황제가 될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건륭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이것은 '정치적 공격'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그 배후에는 더욱 큰 음모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에 건륭제는 팽가병에 대하여 선입견이 있었다. 그는 건륮에가 아주 싫어하는 옹정제때의 중신(重臣)인 이위(李衛)의 일당이다. 바로 이런 관계로 인하여, 건륭제가 등국한 후, 팽가병은 계속하여 현재의 부성장급 직위를 돌다가 결국 은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전황제시절의 옛일까지 건륭제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처리결과는 이러했다. 도륵병아와 팽가병으로 하여금 '조사후 사실대로 보고할 것'을 명한다. 실제로는 인사갈등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건륭제는 황제로서의 책임감이 약간은 있었다. 비록 조사팀을 따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암중으로 자신의 심복인 '보군통령아문'의 원외랑 관음보(觀音保)를 보내어 살펴보게 한다.
몇달 후, 관음보가 돌아와서, 건륭제에게 오는 길에 사온 두 어린아이를 보여준다. 아이 하나를 사면 아이 하나를 딸려보내주었고, 가격은 겨우 5백문이었다. 하남 4현에 확실히 심각한 수재가 발생했던 것이고, 도륵병아가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사실은 드러났다. 확실히 '은퇴한 관리'가 백성들을 위하여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한 것이다. 통상대로라면 당연히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조사하게 될 것이다.
관음보는 역시 건륭제 신변에서 일하는 인물이니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보고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2명의 어린아이를 사와서 증거로 내민 것이다. 자신은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건은 과연 이후 파란을 일으킨다. 몇달이 흐른 후, 건륭제가 강남을 실컷 돌아다니고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서주에 들른다. 그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남관리들이 재해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전문용어가 있다. "조민틈어도고혼(刁民闖御道叩閽)". 언뜻 듣기에도 폄의사(貶義詞)라고 할 수 있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유원덕(劉元德)이라는 백성이 '고혼'을 했고, 현지관리들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니 교체해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독자 여러분들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 두 건의 사건이 발생했다면, 팽가병은 오로지 공적인 마음으로 이번 일을 벌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지도자가 되기에 아직 수련이 많이 필요하다.
백성들이 황제의 어가를 막자, 오히려 건륭제는 확신한다: 당연히 보고는 사실이다. 다만 이는 여전히 보고를 명목으로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사건이다. 이 두 사람은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보라. 다음 번에 당신이 지도자에게 무슨 보고를 한다면, 증거가 많으니 이는 확실한 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 지도자는 네가 무슨 딴 생각을 품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약간의 흔적을 남겨서 지도자가 스스로 발견하게 해야 한다. 특히 건륭제같이 "극도의 자신감, 극도의 의심증'을 지닌 지도자인 경우에는.
이렇게 보면, 건륭제가 이 사건을 처리하는 핵심은 바로 "막후에서 이 사건을 일으킨 자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어가를 막은 유원덕을 심문하게 한다. 과연 배후에서 지시한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그는 팽가병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황제가 맡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셈이 된다. 사건처리담당자는 자연히 황상이 생각하는 '막후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계속 심문한다.
며칠이 지나서, 새로운 진술이 나온다. 유원덕은 이렇게 진술한다: 팽가병이 황상이 온 것을 보고 고향마을에서 자신은 '백성들을 위하여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유원덕은 그 말을 듣고서 비로소 '고혼'할 것을 생각했다. 이어진 내용이 핵심이다. 자신은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할 말을 팽가병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하지 않은가? 만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역시 아직도 황제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건륭제는 한눈에 조사결과는 윗사람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서 짜맞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그는 "재조사"를 지시한다.
왜 건륭제는 이 사건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까? 한번 정리를 해보면서, 건륭제의 생각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3. 건륭제는 '어가를 막고 억울함을 호소한' 백성을 어떻게 대했을까
건륭제의 생각은 사건처리에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관음보의 보고를 들은 후, 건륭제는 이런 성지를 내린 바 있다: "....이 현의 건륭11년부터 20년까지 미납된 3천오백여냥의 세금을 은혜를 베풀어 면제한다." 유의할 것은 재해구조가 아니고, 관리에대한 조사도 아니고, '짐이 은혜를 베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현의 관리는 백성의 부모이다. 그런데 자식인 백성이 부모인 관리를 공격하는데, 짐이 어찌 일방적인 한편의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결국 건륭제의 뜻은 내가 강남에 온 것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기 위함인데, 이들 '고혼자'들은 그 기회를 틈타 부모인 관리들을 공격하니, 이는 아주 나쁜 짓이다.
건륭제의 처리의견은 '중국식 지도자'의 보편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바닥층의 상황을 알고 싶어하지만, 또한 '바닥층의 상황을 보고받았을 때" 사건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아나게 되지 않을가 겁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말로는 민의를 듣겠다, 바닥층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걸핏하면 어가를 막는 '조민'이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보'하는 부하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황제는 그저 정보만 알고 싶다. 그래서 그런 채널을 좋아한다. 하나는 관음보 같은 심복을 시켜서 알아보게 하는 것이고, 둘은 암중으로 조사해서 알아낸 정보이고, 셋째는 지방관리중에서 소수의 심복들이 직접 밀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민'이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직보를 하는 신하'가 가져온 정보는 왕왕 '사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는 왕조의 근본질서를 어지럽히게 된다는 것이다.
건륭제의 성지에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백성들은 자신의 분수를 지켜 현지 지방관리의 지시를 잘 따르라. 만일 지방관리가 무능하면? 그것은 당연히 '상사가 알아서 조사해서 처리할 것이고, 중하게 조치할 것이다" 
건륭제와 같은 류의 지도자들이 직장에 오면 그것은 바로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이다. 그의 의식 속에서, 부하들이 범하는 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술적인 잘못이다. 예를 들어 실적이 미달한다든지, 제품품질이 부적격이라든지, 관리비용을 낭비한다든지. 다만 그 해악정도는 그가 보기에 통제가능한 것이고, 단지 개별사건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다른 하나는 조직적인 잘못이다. 부하들간의 결당영사(結黨營私, 소집단을 만들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한다), 상호뒷발잡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런 시스템적인 리스크야말로 자신의 대국적인 통제권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런 행위가 여하한 규칙에 어긋나지도 않고, 심지어 많은 직원들로부터 환영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유원덕이 어가를 막고 '고혼'한 때로부터 이 사건의 중점은 이미 "조민(刁民, 나쁜 백성)을 엄히 방비하는 것", "통치질서유지"가 중점으로 된다. 그래서, 사건처리관리는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고혼을 지시한 죄'가 팽가병에게 있다고 심문결과를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지도자의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뜻은 이러하다. 네가 내 생각을 살펴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직접 얘기해서는 안된다. 건륭제는 '고혼을 지시했다'는 죄명을 팽가병에게 씌우면, 오히려 팽가병을 충신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사건의 재조사를 지시한다.
얼마 후, 팽가병의 보고로 관직을 잃었던 도륵병아가 다시 기용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팽가병사건을 처리하게 한다. 그러면서 건륭제는 특별히 지시한다. 사적인 원한을 공적인 권한을 이용해서 갚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4. 건륭제가 진정으로 원한 죄명은?
옥중의 팽가명은 사건을 계속 끌면서 종결시키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그리고 자신의 보고로 관직을 잃었던 도륵병아가 다시 자신에 대한 심리를 맡게 된 것을 보고, 황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느니 아예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팽가병은 '자인'한다. 자신이 사적으로 '명말야사(明末野史)'를 소장하고 있다고. 사건담당관리는 즉시 압수하러 간다. 그러나, 팽가병의 아들은 일찌감치 모든 서적을 불태워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왕 왔으면 그냥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도륵병아는 '조건에 맞지 않으면, 조건을 만들어내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집안에서 팽씨족보 1권을 찾아내고, 이를 '광망패역(狂妄敗逆)"의 증거로 삼는다.
족보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 <대팽통기(大彭統記)>라는 족보는 팽씨성의 조상을 황제(黃帝)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건륭제는 그가 신하로서 스스로 제왕의 후예라고 주장하다니, "이는 황상을 눈에 두지 않는 것이고, 사람으로서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판단한다.
이것이야말로 건륭제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다. 문자옥. 이단사상에 대한 처벌과 관리를 숙청하는 것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건륭제때 문자옥의 수량이 아주 많아서 전체 청나라의 75%를 차지한다. 매번 문자옥이 있을 때마다 배후에는 모두 '팽가병사건'과 유사한 억울한 사정이 있다.

죽여라! 건륭은 가을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팽가병에게 자진을 명한다. 다만 그의 아들은 '부친을 위하여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한다. 

5. 지도자가 진정으로 신임하는 사람은?
다시 이슈를 직장으로 되돌려 보자. 그리고 지도자의 속마음을 알아보자.
모든 지도자들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조직발전의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그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아있어야 한다는 목표이다. 그들이 보기에, 개인의 목표가 실현되어야 조직의 목표도 실현될 수 있다.
국유기업의 경영자이건, 민영기업의 오너이건, 아니면 고위지에 앉아 있는 직업경영자이건, 많건 적건 모두 이런 심리상태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일처리에서 모순적인 모습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 지도자들은 반드시 제도와 조직구조를 통하여 조직의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직질서를 해치는 여하한 방식은 그것이 숭고한 명목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들이 경계하게 된다. 대다수의 부하들이 잘못한 것은 모두 개별사건으로 처리한다. 이를 통해 전체 경영진에게 영향이 미치는 것을 막으려 한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하를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사적인 욕심이 있고, 부하의 비통상적인 행동을 보이면 그들은 부하의 진정한 의도를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신뢰의 기초는 없지만, 지도자들은 부하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은 권한을 나누어 서로 다른 부하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서로 견제하게 만든다. 그 댓가는 바로 조직의 효율저하를 감수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분할과 견제와 균형은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파벌투쟁. 결국 지도자는 부하를 믿지 못하게 된다.
기실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인물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무수한 '문자옥'을 일으켰고, 무수한 충신들이 반역을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썼다. 그런데, '반청복명'을 한 것이 분명한 사가법에게는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것은 죽은 사람만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在乾隆帝手下做官有多危险?三朝元老因译错一个词,两次被判死刑
关注

文/格瓦拉同志

清朝乾隆帝是一位雄猜阴狠、刻薄寡恩的皇帝,在他手底下做官的风险性极大,一着不慎就掉脑袋的比比皆是。比如,三朝元老阿克敦仅仅因为“译错”一个词,竟然两度被判处死刑,实在是令人匪夷所思。今天,我们就来聊聊这件奇闻。

阿克敦出身满族权贵之家,章佳氏,字仲和,满洲镶黄旗人。按照满清入关后的传统,阿克敦仅凭高贵的出身便能够入仕,不过此君倒是颇有些傲气,不愿意走如此捷径,而是踏上一条靠科举谋出身的路子。康熙四十八年(1709年),对自己的学识颇为自信的阿克敦,果然考取了进士,起初被授予庶吉士,不久便进入翰林院做编修,由此踏上仕途升迁的“快车道”。

作为满族文官中的佼佼者,阿克敦因学问渊博、才华卓著深得康熙帝的赏识(“阿克敦学问优,典试有声名。”见《清史稿·卷三百三》),在翰林院历练数年后,便被进拜为侍讲学士,成为皇帝身边深受倚重的顾问人员。此后数年间,阿克敦因表现优异,又相继担任侍读学士、詹事、内阁学士、兵部侍郎等职务,在政坛上的地位与日俱升。

雍正帝登基后,阿克敦的仕途继续呈上升的态势,到雍正四年(1726年)时,已经官至国子监祭酒,成为全国最高学府的领导。然而,阿克敦在这个职位上并没有做多久,便被雍正帝委派为署理两广总督兼广州将军。阿克敦任职期间,大力弹劾当地官员的不法行为,由此招致他们的嫉恨。恰巧阿克敦本身也并不干净,任内有过不少违规之举,从而为政敌提供发难的把柄。

因此,当阿克敦调任广西巡抚后不久,广东部分地方大员便纷纷上章对他进行弹劾。在这些奏折中,地方大员们声称阿克敦曾指示广东新会县将强盗案件改为盗窃案件、挪用广东海关的额外税银,并指使家人向暹罗来广州的运米船索取“规礼”,所犯罪行累累。雍正帝看到弹章后大怒,下令将阿克敦逮捕入狱,经过审理后,刑部建议判处他绞刑。

然而,还没等雍正帝对判决发表意见,阿克敦包庇贪赃的下属一事被揭发,皇帝一怒之下,亲自下令判处他“斩监候”(即斩首缓期执行),时在雍正六年(1728年)。好在雍正帝爱才,最终并没有处死阿克敦,而是将他派到苏北去疏浚河道,期望他能戴罪立功。工程结束后,阿克敦因功免于刑罚,不久后又回到朝廷做官,等到雍正帝驾崩前,他已官至署理镶蓝旗满洲副都统、工部侍郎。

乾隆帝即位之初优礼老臣,身为两朝重臣的阿克敦因政务娴熟、办事谨慎,因此得到进一步提拔。到乾隆十三年时,阿克敦已身兼协办大学士、刑部尚书、翰林院掌院学士,是皇帝深为倚重的满族老臣。然而,就在阿克敦迎来人生巅峰之际,一场意外却将他抛入人生谷底,并险些两次要了他的性命。一切,还要从孝贤纯皇后富察氏的去世说起。

乾隆十三年(1748年)三月十一日,富察皇后在跟随乾隆帝结束东巡、回返北京的途中,病逝于运河中的御船上,时年才37岁。由于富察皇后跟乾隆帝的感情极其深挚,所以她的死对于皇帝来讲,不啻于晴天霹雳一般。此后,极度悲痛的乾隆帝开始性情大变,对臣子们的态度由优礼转变为苛责,稍有不顺心便对他们进行严厉斥责,甚至是处死。而阿克敦,正是在这种情况下遭殃的。

当年四月,乾隆帝在翻阅翰林院所制的皇后册文时,发现满文译文中将“皇妣”译成“先太后”(其实并没有问题),立时勃然大怒,于是召来阿克敦前来问罪。没想阿克敦头脑发昏,竟然在没有候旨的情况下,便擅自退出宫殿回府,让乾隆帝勃然大怒。为惩戒这位三朝老臣,皇帝不仅褫夺阿克敦所有的官职,而且还把他送交刑部严审。

刑部官员认为上司并没有错,但顾及皇帝的情绪,经过多轮商议后,最终决定判处阿克敦“绞监候”(即绞刑缓期执行)。然而,暴怒之中的乾隆帝并不满意,竟下旨严责刑部官员“党同徇庇”、“故意宽纵”,并把他们全部拿下问罪。事后,乾隆帝下旨,按照“大不敬”的罪名,亲自判处阿克敦“斩监候”。就这样,在20年的时间里,阿克敦被4次判处死刑,在官场上也算是一则奇闻。

好在乾隆帝只是一时之气,等到恢复理智后,便开始意识到自己的错误。因此,阿克敦在狱中仅仅被关了2个多月便获释,先是出任署理工部侍郎,1个月后又晋升为署理刑部尚书、兼翰林院掌院学士,相当于官复原职。由深受倚重的三朝元老到两次被判死刑,再到获释并被重新起用,在短短两个月的时间里,阿克敦经历了人生中的大起大落,实在是过于“刺激”。

此后7年间,阿克敦又相继升任协办大学士、署理左都御史、步军统领等要职,并加太子少保,直到乾隆二十年(1755年)以目疾致仕。次年,阿克敦病逝,终年72岁,卒谥文勤。阿克敦有一子名阿桂,后来成为乾隆帝深为倚重的将领,曾参加平定大小和卓叛乱,为国家保住新疆百万平方公里的国土,可谓功在千秋。| 史料来源:《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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