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증국번(曾国藩)은 사위 5명을 왜 하나같이 못난이들로 골랐을까?

 

: 한정우기(閑情偶記)

청나라말기의 명신 증국번은 독보적인 안목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누구든 실수할 때가 있는데, 증국번의 실수도 유명하다.

 

증국번에게는 다섯 명의 딸이 있는데, 사위를 고를 때마다 항상 실수했다.

 

증국번의 장녀는 증기정(曾紀靜)(1841-1871)인데, 증국번의 한림원 동료이자 친구인 원방영(袁芳瑛)의 아들 원유생(袁楡生)에게 시집을 갔다. 원유생은 방탕하기 그지없는 자였고, 부채만 쌓여갔다.

 

증기정과 결혼한 후에도 여색을 탐하고 술독에 빠져 살았으니 쓰레기 같은 인물이었다. 결국 증국번이 직접 감독하려 하자, 이 사위는 아편을 먹고 자살하여, 증국번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린다.

 

증국번의 차녀는 증기요(曾紀耀)(1843-1881)인데, 진원연(陳源䆓)의 아들 진송년(陳松年)에게 시집간다. 진송년은 과거에 실패하고, 성격이 포악해서, 자주 증기요를 때렸다. 둘째딸은 평생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다.

 

증국번의 삼녀는 증기침(曾紀琛)(1844-1912)인데, 나택남(羅澤南)의 아들 나윤길(羅允吉)에게 시집간다. 나윤길도 성격이 아주 포악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증기침에게 불같이 화를 냈으며, 증기분(曾紀芬)에게 마통(馬桶)을 닦도록 시키기도 했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가 없다. 증국번은 사위교육을 잘 시키지 못했고, 딸이 친정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증기침은 나씨집안에서 죽을 때까지 참고 지내야 했다.

 

증국번의 사녀는 증기순(曾紀純)(1846-1881)인데 대청의 중신 곽숭도(郭嵩濤)의 아들 곽의영(郭依永)에게 시집간다. 그러나, 곽의영은 몸이 좋지 않았고, 증기순과 결혼한지 3년만에 병사한다. 증기순은 과부로 지내다가 36살에 병사한다.

 

증국번의 오녀는 증기분(曾紀芬)(1852-1935)인데, 18살에 섭집규(聶緝槼)에게 시집간다. 섭집규의 부친은 현관(縣官)으로 하급관리였고, 섭집규도 뛰어나지 못했다. 과거에 응시하여 계속 낙방한다.

 

증국번이 발탁해서 섭집규는 상해제조국에서 일을 맡았고, 나중엔 순무까지 승진한다. 그가 증국번의 사위 중에서는 가장 나은 편이다. 그러나 뛰어나다고는 할 수가 없고, 모두 증국번이 도와주어서 얻은 자리였다.

 

五个女婿,两个混蛋,曾国藩后悔地说:选女婿不能只看他爹啊!

 

原创: 作家金满楼 作者:金满楼

曾国藩被誉为“近代完人”、“最后的大儒”,其治家严谨,子侄辈大多有出息。

然而,他的五个女儿,除了小女儿曾纪芬还算幸福外,其他四人都所托非人。

譬如其长女曾纪静的夫婿袁榆生,其不仅冷落自己的夫人,而且在外面花天酒地,并干下贪污等事。而对于这场婚姻,作为曾家长女的曾纪静也是有苦难言。

由于夫婿不争气,夫妻间的关系也不和谐,她很想回娘家居住了此残生,但作为父亲的曾国藩却劝其忍耐,恪守妇道。

在写给曾纪泽的信中,曾国藩反复叮嘱:“吾家读书居官世守礼仪,尔当告诫大妹、三妹忍耐顺受。……尔谆劝诸妹,以能耐劳忍气为要。” 

某次,曾纪静从湘潭来到安庆大营与其夫同住,曾国藩感到不妥,其在家书中指出:

“大女理应在袁家侍姑尽孝,本不应同来安庆”;

“余每见嫁女贪恋母家富贵而忘其翁姑者,其后必无好处。余家诸女当教之孝顺翁姑,敬事丈夫,慎无重母家而轻夫家,效浇俗小家之陋习也。”

同治三年,因为长期抑郁的缘故,时在两江总督署的曾纪静生了一场大病,曾国藩在其家书中说:

“大女儿日内气痛,其病甚不轻,盖亦久有肝郁耳”;“大女儿病殊不轻。盖肝郁是其本病,而气痛不食则其标病。”

尽管对大女儿的处境表示同情,但曾国藩仍主遵守三纲之道。在曾纪静病好后,曾国藩仍将女儿送往湘潭袁家。最终,在4年后,29岁的曾纪静在婆家去世,无儿女。

事实上,曾国藩五个女儿中,除了最小的女儿曾纪芬出嫁后还算家庭美满外,其他几个都不幸福,让曾国藩为之扼腕叹息。

大女婿就不必再说了,曾家二女婿陈远济幼时聪颖,成年后却庸庸无为、不思进取,令二女曾纪耀为之郁郁寡欢;

三女婿罗兆升(湘军将领罗泽南之子)和大姑爷一样,也是个嫖赌逍遥的花花公子。据载,罗兆升喜欢流连于风月场所,即便在曾国藩府上也不加克制。

某次,曾纪琛尚在做月子,他也不忘去秦淮河找乐子而被人绑架。为此,曾国藩曾恨恨地说,“十八九岁作父亲的人,还这样不懂事,外出冶游两天两夜不归家!”之后,鉴于长女的教训,曾国藩令三女曾纪琛长期住在娘家;

四女婿郭刚基学问和为人尚可,但体弱多病,二十一岁便撒手人寰,留下曾纪纯与两个小孩孤苦伶仃;

女儿们的种种不幸,让身为慈父的曾国藩经常陷入深深的自责之中,其曾与人说:

“别人都说我会看人,可我连女婿都没选好,还谈得上什么会看人!我心里惭愧啊!”

其又说,“过去选女婿,其实不是选婿而是选其父。父亲好,不一定儿子就好,小时聪明,长大未必成器。”

由此,晚年醒悟的曾国藩也改变思路,其认为,虎父也有犬子,“联姻不必富室名门”。由此,曾国藩对最小的女儿曾纪芬的婚事,即不再仅看眼前而是从长远考虑。

事后证明,曾国藩的眼光还是很准的,曾纪芬后来嫁给同乡翰林、湖南衡山人聂尔康之子聂缉椝后,福寿两全,夫婿也事业有成,并先后出任过江苏、安徽巡抚等职。

如此,九泉之下的曾国藩或许会为之欣然,并感到一丝安慰吧。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