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POLITICO)>는 지난 2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보수 성향의 한 판사가 작성한 판결문 초안을 공개했다. 그 문서는 2021년 미시시피주에서 임신 15주 이후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법안에 제기된 위헌소송에 대한 연방대법원 판결내용을 적은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내용이 담긴 것(기사 원문).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성폭행당한 여성 '로'(가명)가 당시 지방검사였던 '웨이드'에 맞서 임신 24주 이내 임신중단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은 역사적 판결이다.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인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경우, 여성의 임신중단권은 무효화되고 미국 내 26개 주에서 즉각 임신중단이 금지된다고 한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21년 10월 29일 자 '美 낙태 권리 48년만에 뒤집어지나...26개주에서 '낙태 금지' 빨간불') 초안을 작성한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 판례가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됐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BBC 5월 3일 자 '낙태법: 미 대법원, 낙태권 인정 판결 뒤집을까...문건 유출 파문') 이에 분노한 여성과 시민단체들은 즉각 시위에 나서고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임신중단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임신중단이 금지되면 여성들은 어떻게 할까?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다른 주까지 이동해서 임신중단을 받고 있을까? 국제학술지 <랜싯 지역건강-미국>에 2022년 3월 발표된 논문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바로 가기 : 미국 내 임신중단을 위한 이동: 2017년 주를 횡단하는 여성의 이동에 대한 관찰연구) 저자인 스미스와 동료 연구팀은 이용 가능한 자료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2017년 질병관리청의 임신중단 데이터, 미국 비영리기관인 구트마허 연구소의 임신중단을 제공하는 의료진 센서스, 미국 정부의 임신‧출산‧임신중단 보고서, 미국 인구센서스 자료를 조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 각 주별 임신중단 비율(15~44세 여성 1000명당 임신중단 건수)과 임신중단을 위해 거주 지역을 떠나 다른 주로 이동한 환자 비율, 임신중단 시설의 밀집도(15~44세 여성 100만 명당 임신중단 시설 개수)를 계산했다. 또한 각 주의 임신중단 관련 정책을 분류하고(임신중단에 적대적인 주, 중립적인 주, 지원하는 주) 이에 따라 환자 이동비율, 임신중단 시설 밀집도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했다.
임신중단에 적대적인 곳일수록 더 많은 여성이 이동한다
2017년 기준, 전체 미국 50개 주에서 임신중단을 위해 지금 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주로 떠난 여성은 6만5835명으로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의 약 8%에 달했다. 각 주별로 살펴보면, 여성의 이동비율이 높은 주는 와이오밍(74.4%, 536명), 사우스캐롤라이나(57.4%, 6536명), 미주리(56.1%, 5440명), 미시시피(50.8%, 2505명) 순이었다. 이 4개 주에서는 임신중단을 한 여성 중 절반 이상이 사는 지역을 떠나 다른 주로 이동한 셈이다. 그 외 12개 주에서는 임신중단서비스를 받은 여성 4명 중 1명 이상이 주 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임신중단 관련 정책에 따른 분류를 보면, 그룹 간 차이는 분명하다. 임신중단에 적대적인 그룹(29개 주)에서는 여성의 평균 이동비율이 11.7%였으며, 임신중단 시설 밀집도는 6.9로 나타났다. 임신중단에 중립적인 그룹(8개 주)와 지원하는 그룹(14개주)에서는 평균 이동비율이 각각 9.8%, 3.3%였으며, 임신중단 시설 밀집도 역시 각각 18.1, 21.2로 나타났다. 적대적인 주에 비해 지원하는 주에서 여성의 이동비율은 약 4분의 1 수준으로 낮았고 시설 밀집도는 약 3배 높았다.
이동해야 하는 여성에게 전가되는 부담
저자들은 임신중단을 위해 주 경계를 넘어야 하는 여성의 부담은 곧 공중보건의 부담이라고 강조한다. 주 경계 근처에 사는 이들은 집 근처 임신중단 시설을 이용하려고 거주 지역을 떠나는 게 수월할지 모른다. 그러나 면적이 넓은 주에 사는 경우 주 경계를 넘는 건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여행 자체로 인한 어려움 외에도 임신중단을 위해 거주지를 떠나는 것은 다양한 부담을 낳는다.
건강보험이 거주하는 주 지역에서만 적용되거나, 민간보험 역시 의료이용에서 지리적 제한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주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임신중단을 위한 건강보험 적용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특히 임신중단은 진료받는 이들에 대한 낙인이 큰데, 먼 길을 찾아간 이들에게 낙인은 더 강화될 수 있다. 임신중단 진료를 위해 이동하게끔 만드는 주 정부의 적대적인 정책과 이용 가능한 임신중단 시설의 부족은 결국 환자에게 고스란히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때 여성 건강은 퇴보
앞서 말한 판결문 초안이 확정되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무효화될 경우, 임신중단이 금지된 주에 사는 여성은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심지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상황까지도 발생할 수 있고, 이동할 수 없으면 가까운 불법시설을 찾아야 할 수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지역에서 임신중단을 하는 의료기관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과 장거리 이동으로 생기는 정서적 불안과 경제적 부담도 크다. 음성적인 불법시술로 발생할 수 있는 건강문제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이후, 미국 대법원 앞에서는 5월 2일 밤부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 시위는 여성과 시민단체의 전국적인 직접행동과 행진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임신중단 처벌법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다. 이 판결로 2021년 1월부터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2020년 12월 31일까지 제정됐어야 할 대체입법은 여전히 공백상태다.
임신중단과 관련한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하는 국회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안전한 임신중단은 아직도 먼 이야기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4월 11일 자 '"낙태죄 위헌 3년, 이제 '임신중단'은 낙인 아닌 공적 의료의 영역"') 임신중단을 공중보건과 공공의료의 영역으로 적극 논의해야 할 시기에, 여성가족부 폐지 법안이 국회에 발의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 여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서지정보
- Smith, M. H., Muzyczka, Z., Chakraborty, P., Johns-Wolfe, E., Higgins, J., Bessett, D., & Norris, A. H. (2022). Abortion travel within the United States: An observational study of cross-state movement to obtain abortion care in 2017. The Lancet Regional Health-Americas, 10, 10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