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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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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 손상되지 않은 외래어, 합의된 욕망 _ 조형진

 

중국에서 대부분의 외래어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다.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는 풍조가 강했던 20세기 초에는 민주주의(democracy) "더모커라시(德謨克拉西)", 과학(science) "싸이언쓰(赛恩斯)" 등으로 썼던 걸 보면,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서방 제국주의의 용어를 그대로 쓸 수 없다는 사회주의적 유산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중화민족이 만든 위대한 유산인 한자와 중국어에 대한 강렬한 민족주의가 쇠퇴하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대신하여 작동하게 되었다. 북한의 더욱 끈질긴 외래어의 "주체적인 조선어"로의 변용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과 북한의 언어 차이가 외래어 표기법에서 극대화되듯이 중국과 대만도 외래어에서 언어 차이가 심한 편이다. 최근 일상용어에서는 영어 발음이나 알파벳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공식적인 용어는 기어이 중국어로 된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예를 들어보자. 거대한 인구와 영토,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데다 빠르게 성장을 거듭하면서 21세기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신흥 4개국을 지칭했던 브릭스(BRICs)는 글자 그대로 하면 금 벽돌 4개국 또는 금괴 4개국으로 번역될 수 있는 "金磚四國(Jinzhuansiguo)"이 표준어로 정해졌다. 브릭스의 발음과 철자가 영어의 벽돌(brick, 중국어로는 )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여기에 금()자를 붙여 잘 나간다는 의미를 더한 것이다. 본래 "金磚"이라는 단어가 벽돌 모양의 금괴를 의미하다보니 브릭스 4개국은 금괴 네 개가 되었다. 이후 호사가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추가해야 되지 않느냐면서 브릭스의 소문자 's'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의미하는 대문자 'S'로 바꾸어 "BRICs"보다 "BRICS"가 유행하게 되었다. 운 좋게도 중국인들은 금 벽돌 한 개를 더해 금 벽돌 5개국으로 바꾸어 "金磚五國(Jinzhuanwuguo)"으로 부르면 그만이었다.

 

이름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도 최대한 중국식으로 만들어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한자로 된 이름이 있으면, 자기들 발음대로 부르면 그만이다. 뜻이 있는 외래어는 들어맞는 한자를 찾으면 된다. 백악관(The White House)은 대통령이 사는 '하얀 집'이니 "하얀 궁전(白宮)"이다. 그러나 한자가 없는 이름들은 어떻게든 발음을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아오빠마(奧巴馬)"이다. 주중국 미국 대사관이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하얀 궁전"보다는 그냥 뜻 그대로 "하얀 집(白屋)"으로 하고, 오바마도 더 본래 발음에 비슷한 "어우빠마(歐巴馬)"라고 하자고 공식적으로 요구했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자신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하얀 궁전"에 살고 있는 "아오빠마"를 바꾸지 않았다. 공식문서의 중국어 번역본에서 "어우빠마"를 고집하던 미국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아오빠마"를 자기들 대통령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시 위안화 절상, 티벳 문제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데다 대만이 오래 전부터 "어우빠마"를 사용하고 있어 잘못하면 중국이 대만을 따라가는 꼴이 되니 그랬을 수도 있다. 1981년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보도하면서 이제까지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발음을 따라 "리건"으로 쓰던 한국 언론들이 레이건 대통령이 굳이 "레이건"으로 발음한다는 소식에 순식간에 "레이건"으로 표기를 바꾸었던 것과 비교하면, 중국이 외래어에 대해 가지는 오기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외래어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난 특출한 단어가 바로 "CBD(Central Business District)"이다. 한국어로는 "중심업무지구"로 번역되는 CBD는 중국어로도 "중심상무구(中心商務區)", "중심상업구(中心商業區)", "상무중심(商務中心)" 등으로 손쉽게 번역된다. 말 그대로 CBD는 서울의 여의도나 뉴욕의 맨해튼처럼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과 고가의 명품을 파는 최고급 상점들이 즐비하고 땅값이 턱없이 비싼 거대 도시의 비즈니스 중심지를 의미한다. 영어 단어가 단 하나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한 베이징의 택시기사들도 CBD(발음 그대로 씨비디”)는 알아듣는다. 오히려 중국어로 "중심상무구"라고 또박또박 말하면, 대도시에 처음 와본 촌놈이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때때로 베이징의 샐러리맨들은 자신이 출퇴근하는 사무실이 CBD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다닌다는 뜻일 게다.

 

사진 1  베이징(北京)의 CBD

 

CBD는 미국과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 발전 과정에서 출현했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1920년대부터 주요 대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공장들과 주택들이 점차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주요 기업들의 사무실과 금융, 고가 소비재 판매 등 고도화된 기능만이 도시의 핵심부에 남게 되었다. 이처럼 CBD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의 산업 고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CBD를 갖춘 대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응집된 CBD를 중심으로 주거지와 굴뚝 산업이 외곽에 위치하는 동심원의 형태가 된다. 또한 활발한 경제활동을 위해서 CBD부터 주거지까지 촘촘한 도로망과 지하철이 배치되어야 한다.

 

중국에서 CBD는 뒤늦게 탄생했다. 개혁·개방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식 산업화는 주거지, 공장, 상점이 뒤엉킨 복잡한 도시 형태를 가져왔다. 계획경제 시기 강조되었던 중공업 발전의 유산으로 거대한 공장들이 여전히 도심 한 가운데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1989년 천안문 사건을 지나 1990년대 초 다시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새로운 도시계획들이 입안되었으며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CBD가 등장하게 되었다. 베이징의 경우, 1993년 국무원이 베이징 도시 종합 규획(1991~2001)을 비준하면서 CBD 건설이 도시개발의 목표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재정적 곤란으로 CBD 개발은 늦춰졌다. 본격적인 CBD의 등장은 2000년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CBD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장구한 산업발전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물이 아니라 계획과 결정을 통해 탄생되었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비싼 것들이 구심력을 발휘하고 싼 것들이 원심력을 발휘하며 서서히 무르익어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의 CBD는 종종 지리적으로 중심이 아닌 외곽에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베이징의 CBD는 도심의 지속적인 확장 덕분에 이제는 중심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애초의 기준으로는 동쪽에 치우쳐 있다. 중앙에 박혀있는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퇴조하던 중공업 공장들이 위치하던 지역이라 토지 이용이 성겨 오래된 것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대체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결코 중국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서구의 학자들은 천안문 사건의 아픈 경험으로 인해 정치적 중심인 자금성 일대에 인구가 밀집된 경제중심지를 중첩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도 반영되었다고 본다. 본래의 CBD와 상이한 탄생 과정을 거쳤지만, 오늘날 중국의 대도시들은 뉴욕, 런던 등 대표적인 CBD를 갖춘 도시들보다 더 이상적인 CBD를 갖게 되었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초고층 빌딩들이 가득하고 가격표의 자릿수를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초고가 명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중국의 대도시들이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만에 가장 CBD다운 CBD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중국의 CBD는 절대적인 시간상으로는 뒤늦었지만 상대적으로는 지나치게 빨랐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중국의 CBD는 규모와 속도가 중국답게 더 거대하고, 더 빨랐을 뿐 서울과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의 대도시 탄생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 2  우한(武汉)의 CBD

 

다시 CBD라는 단어로 돌아오자. 일상적으로 중국 인민들이 CBD를 쓰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관방 언론은 어떨까?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CBD는 반드시 한자와 병기되었으며 CBD라는 철자 없이 중심상무구 등 중국어만 기재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인민일보조차도 CBD를 독자적으로 쓰는 경우가 늘어 이제는 거의 CBD만 단독으로 쓰고 있다. 최근 가장 첨예한 이슈인 싸드(THAAD)를 보면, 인민일보는 영어 약자를 병기하지도 않은 채 발음만 빌려 반드시 인용표기인 따옴표로 둘러싸서 "싸더(薩德)"로 표기하고 있다. "THAAD"라는 표기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생소한 단어였던 2009년에 단 한 차례 있을 뿐이다. 중국의 관방 언론들은 외래어와 신조어에는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따옴표를 붙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CBD는 이제는 따옴표조차 벗어버렸다. 자존심 강하고 표기에 민감한 인민일보조차 CBD라는 외래어를 글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CBD는 전문적인 학술연구에서 탄생한 지나치게 현학적인 단어라서 정작 영어권 국가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한다. 어쩌면 오늘날 CBD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국가는 중국이지 않을까? 이 따옴표도 벗어버린 외래 신조어가 일상용어를 넘어 관방 언론에서조차 손상 없이 쓰일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와 인민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된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 런던, 파리처럼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들을 완성하려는 국가의 계획과 이 도시에서 뉴요커, 런더너, 파리지앵처럼 살고 싶은 개인들의 목표가 일치하기 때문에 CBD는 공산당의 글말과 인민들의 입말에서 자연스럽게 따옴표도 없이 사용된다.

 

【신조어로 보는 중국문화 3】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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