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이라고 하면 흔히 재산상속만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반적인 상속풍습에서 재산상속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재산은 집, 가장집물, 토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밖에 양반통치자들 속에서는 노비도 재산으로 되고 있었다.
가정의 대가 맏아들에게 물려지던 가부장적가족제도하에 기초한 재산상속에서도 맏아들을 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관습으로 되고 있었다.
재산상속에서 맏아들을 우대하는 생활관습은 맏아들내외가 가장권과 주부권을 물려받고 그들이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권한과 의무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은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 의무를 지닌 맏아들에게 물려주었고 둘째아들부터는 살림을 갈라 세간을 내보낼 때 다른 집을 마련해주었다. 맏아들이 물려받은 집은 다른 아들들이 받은 집들보다 규모가 상대적으로 컸다.
토지상속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그 하나는 맏아들을 우대하는 형제차등상속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형제균등상속이었다.
맏아들을 우대하는 형제차등상속이란 맏아들에게 많은 몫의 토지를 주고 그 아래 남은 아들로 내려가면서 점차 적게 차례지게 하는 상속관습을 말한다. 물론 맏아들을 우대하는 형제차등상속도 구체적으로는 아들형제가 몇 명인가에 따라 달랐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일반적이 상속관습에 의하면 아들 2명인 경우에는 큰아들에게 3분의 2정도의 토지를 주고 작은아들에게는 3분의 1정도의 토지를 주었다. 아들이 셋이면 맏아들에게는 절반정도의 토지를 주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에게, 아들이 넷이면 맏아들에게는 3분의 1정도의 토지를 주고 나머지 3분의2의 토지는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제생활형편이 매우 어려운 가난한 백성들 속에서는 맏아들단독상속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백성의 가정에서는 형제들이 나누어 가질만한 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들이 세간나면 맏형이 부모를 모시고 이미 살던 집에서 사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간혹 얼마 되지 않는 토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집과 함께 맏아들에게만 물려주었고 다른 아들에게는 전혀 줄 수 없었다. 그래도 동생들은 맏형이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받든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더구나 자기의 땅 한뙈기없이 지주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던 빈농민들의 경우에는 자손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 자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맏아들을 우대하는 형제차등상속이란 이름뿐이었다.
형제균등상속이란 모든 자손들에게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모든 자손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였다. 형제균등상속에서는 맏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손님을 맞아야 하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명목에 쓰이는 몫의 토지와 재산이 차례져야 하였다.
물론 맏이 이외에 다른 자손들에게도 토지와 재산을 상대적으로 골고루 나누어주었으나 그것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적어지기도 하였고 간혹 반대로 막내아들에게 특별히 많은 몫이 차례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막내아들이 나이가 제일 어린데다 부모들은 늙은 조건에서 그의 장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하게 되었던 것과 관련된다.
형제균등상속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경제생활형편이 상대적으로 나은 부유한 가정들에 많이 보급되어있었다. 그러나 제주도를 비롯한 일부 지방들에서는 가난한 백성들 속에서도 형제균등상속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재산상속에서 맏아들을 우대하는 것은 고대에 생겨났으나 그것이 굳어져서 생활관습으로 고착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였다. 딸들이 재산상속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근대화과정이 진행된 20세기이후였다. 고려때까지만 하여도 맏아들이외의 다른 자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형제균등상속이 있었으며 그것은 딸에게도 적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4세기사람 나익희는 어머니가 재산을 나누어줄 때 자기에게 더 주려는데 대하여 “내가 여섯남매 가운데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여 어찌 사소한 것을 더 차지함으로써 여러 자녀들을 골고루 화목하게 살도록 하려는 거룩한 어머니의 뜻을 더럽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사양한데 대하여 어머니는 의리에 맞는 일이라고 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이것은 고려 때에도 재산상속에서 아들을 우대하면서도 딸까지 포함하여 모든 자손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형제균등상속이 상당한 정도로 보존되고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제균등상속은 조선 초엽까지 적용되어왔다. 경국대전에는 부모의 노비는 대를 이을 아들인 승중자(承重子)에게 5분의 1을 더 가산해주고 나머지 자녀들인 중자녀(衆子女)들에게는 똑같이 나누어준다고 하였다. 심지어 양첩자녀나 천첩자녀들에게까지 나누어준다고 하였다. 『경국대전』의 법률적 규제는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에도 밝혀져 있다. 이것은 법적으로는 조선전기간에 걸쳐 모든 자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게 되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후반기로 내려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상속문건들을 종합분석한데 의하면 조선 전반기에는 법전의 규제와 같이 아들과 딸을 별로 차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속관계 문건들이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낳은 차례로 기록되어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맏이는 장자 그 다음부터는 차자, 다음차자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 있고 그냥 첫째, 둘째, 셋째 또는 1택, 2택, 3택하는 식으로 구별한 것도 있다. 한편 아들과 딸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으나 본처의 자녀와 양첩, 천첩의 자녀들은 구분하여 그 다음 자리에 썼다.
조선 전반기의 이러한 상속관습은 17세기중엽에 이르러 점차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맏아들을 우대하는 형제차등상속으로 변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상속에서 딸의 몫이 계속 줄어들었다.
우선 부모를 모시고 가계를 계승하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 의무를 지닌 맏아들에게 차례지는 몫이 다른 자손들에게 차례지는 몫보다 훨씬 늘어났다. 물론 그것도 처음에는 모든 자식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맏아들에게만 좀 더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중엽에 이르러서는 맏아들에게 차례지는 몫이 훨씬 늘어났으며 그러한 경향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그전에는 맏아들을 우대하는 명목으로 이른바 ‘시부모조’, ‘봉사조’라 하여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몫이 기본이었는데 18세기중엽에 이르러서는 시부모조, ‘봉사조’ 이외에도 ‘승중조’, ‘접빈객조’, ‘묘직조’라 하여 가계를 계승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무덤을 지키는 새로운 항목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맏아들을 우대하는 상속관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맏아들에게 차례지는 몫이 많아지고 지차아들들에게 차례지는 몫은 점차 작아지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조선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아들과 딸을 구별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조선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상속문건에 아들을 먼저 쓰고 그 뒤에 딸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상속문건을 작성하는 형식이 달라졌을 뿐아니라 재산상속에서 아들을 우대하고 딸을 차요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상속문건들을 분석하면 17세기 중엽부터는 재산상속에서 딸들을 점차 제외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재산상속에서 아들, 그가운데서도 맏아들에게 치중하고 점차 딸들은 재산상속에서 배제되는 경향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것은 순전히 조상제사를 맏아들이 받든다는데서 지차아들들을 소홀히 대하게 되었고 딸들은 출가하면 남의 집사람이 되어 조상제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데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진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