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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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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물, 인간세상, 삼라만상, 산천초목이 다 문장의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글을 읽고 깨달은 느낌을 종이 혹은 컴퓨터에 입력하는데 이것이 곧 ‘글’입니다. 우연히 웹사이트를 서핑하다가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를 주제로 한 문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명문장을 만나니,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워 이참에 정리, 편집하여 옮겨 놓습니다. 참고로 이 글이 배움에 정진하는 블로거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감사히 생각합니다...☜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창강(滄江) 김택영(1850~1927)이 연암의 글쓰기를 평가한 말 중에 “연암의 문장은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조선의 세 가지 최고다.”라는 評이 있다. 혹자는 연암을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될 만한 문장가’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글은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을 펴낸 박수밀교수가 진행한 2시간 동안 강의록을 편집, 정리한 것이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문예 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문학지망생들이 많다. 이들을 위해 박수밀 교수는 글을 잘 쓰기 위한 요령을 요약하여 강의하였다.

 

1) 서술어에 유의하라.

‘-이다. -하다’ 로 끝을 낸다. 흔히 ‘-인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인 것 같다.’를 많이 쓰는데 이런 문장들은 안 쓰는 편이 좋다.

 

2)같은 표현은 반복 하지 마라.

‘노래를 하고 티비를 시청하고 식사를 한다.’라는 표현보다는 ‘노래를 부르고, 티비를 보고, 밥을 먹는다.’가 좋은 표현이다. 관념적, 추상적인 사어보다는 감각적인 동사를 사용하라.

 

3) 말을 아껴라.

실용적인 글을 쓸수록 형용사, 부사를 삭제하라. ‘굉장히’, ‘많이’, ‘아주’보다는 ‘퍽’, ‘참’을 쓰면 좋다. 중언부언하거나 늘어지는 느낌이 줄어든다.

 

그는 세 가지 비결을 독자들에게 일러주며 요령의 문제는 시간 안에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요령 밖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연암 박지원의 문장이 독보적인 이유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그의 글쓰기 정신이 오늘 날에도 통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믿음의 근거를 따라가보자.

 

연암의 글을 논하기 전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보편적인 글쓰기를 알아두면 좋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고문(古文)과 소수의 학자가 주장했던 금문(今文)이 있다. 고문(古文)스타일의 글쓰기는 과거 경전(經典)에 쓰인 글을 모범으로 한 글쓰기다. 반면 금문(今文) 스타일은 내면의 자유로운 생각과 형식이나 수사를 중시한다.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는 ‘법고창신法故創新’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의 정신을 갖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것을 상생의 의미로 확대했다.

 

아! 옛것을 전범으로 삼는 사람은 낡은 자취에 빠지는 것이 병통(病痛)이고 새롭게 만드는 사람은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것이 걱정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만들되 법도에 맞는다면 지금 글이 옛글과 같을 것이다.-연암 박지원, <초정집서>

 

저자 박수밀이 이야기하는 연암의 글쓰기의 본질은 ‘천지자연을 문장으로 보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글자는 기호이며 책을 문장이라 본다. 그러나 연암은 자연의 생동, 몸짓을 문장으로 여겼다. 이는 문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연암은 그의 저서 『종북소선자서』를 통해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에 관심이 없는 자는 도무지 문장의 정신이 없는 것이고, 사물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한 글자도 모른다고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라 했다.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교감하는 등 하찮은 것에서부터 관심을 갖고 출발해야 제대로 된 문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연암의 글쓰기의 본질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가 박수밀이 말하는 연암의 글쓰기 비법을 엿보아 보자.

 

1. 기록하고 메모하라.

열하일기의 한 대목 중에 그의 봇짐 안에는 필담(筆談)했던 초고와 여행 중에 쓴 일기가 두툼하게 들어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호사설』, 『열하일기』, 『지공유설』 등의 책이 모두 그의 기록하는 습관의 산물들이다.

 

2. 사물의 생태를 꼼꼼히 관찰하라.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삼루(三壘)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리는 것이다.

 

연암은 <능양시집서>를 통해 까마귀 깃털색의 미묘함을 짚어냈다. 모네가 루앙성당을 시시각각 다른 빛의 양에 따라 달리보이는 색채로 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사람들은 개성과 스타일, 가치를 하나로 두는가?’에 대한 물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움 추구, 예법을 벗어나는 성품이 글에서 드러난다.

 

3. 사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사물과 대화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은 자연사물을 말한다.

연암의 대표작 『호질』 은 형식적, 정신적인 면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학교에서는 이 작품을 위선적인 유학자에 대한 풍자로 가르친다. 하지만 박수밀은 인간과 문명의 관계를 짚어낸 차원 높은 문제의식이라고 본다. 자연사물을 대표하는 호랑이의 관점에서 작품을 쓴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나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와 비슷한 맥락이다.

 

4. 상식을 의심하고 관습에서 벗어나라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다가 읽기 싫어하기에 꾸짖었더니, 그 애가 말합디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굶어 죽이겠소. <답창애지삼> 中에서

 

천자문의 시작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의미다. 실제 하늘은 푸른데, 천자문에서는 하늘은 검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상식이라고 생각하던 것의 맹점(盲點)을 짚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상식 중에 콜럼버스(Columbus, Christopher)의 달걀이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창의적인 발상이라고 강의를 하던 중, 한 학생이 지적을 했다. 물리적으로 달걀을 억지로 깨뜨린 것을 제국주의적 발상(發想)이 아닌지 묻는다. 그런데 사실 그렇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의 터전을 침략(侵略)한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을 뒤집어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관점(觀點)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진실(眞實)은 달라진다.

 

연암이 우리나라의 명동, 인사동 격인 북경의 유리창이라는 번화가를 간 기록(記錄)을 보면, 그 곳에서 군중 속의 고독(孤獨)을 느낀 장면이 나온다. 어느 곳에 가든, 관습(慣習)적인 생각보다는 독특한 감수성(感受性), 길들여지지 않는 시선(視線)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특정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그의 서술방식은 세밀한 관찰(觀察)을 통해 앎을 얻고 다작(多作)을 이룰 수 있었던 비법(祕法)이다.

 

5. 경계에서 생각하라

당시는 ‘소중화사상’으로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팽배(澎湃)했다. 그러나 연암이 바라본 북경의 문명은 유럽의 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물론 척결(剔抉)의 대상을 인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진리는 경계(境界)에 있음을 박지원은 믿었다. 어느 한쪽편이 아닌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취하겠다는 입장이 그의 저서 『도강록(渡江錄)』 에 드러난다.

 

내가 말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닐세. 이 강은 이쪽과 저쪽이 만나는 경계로써,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천하에 존재(存在)하는 백성의 도리(道理)와 사물의 이치(理致)는 물이 언덕에 경계한 것과 같다네. 도는 다른데서 구할 게 아니라 곧 이 경계에 있다네.”

 

경계를 생각하는 연암의 인식(認識)이 열하일기를 탄생(誕生)시켰다. 각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본(飜譯本)을 찾아서 일독(一讀)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외수 작가는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육안(肉眼)으로, 머리로(지식으로), 심안(心眼), 영안(靈眼)으로 본 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대상을 알기 위해서 관찰하는 것이 영안을 보는 것이다. 모든 대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아무리 나쁘다고 하는 사람도 좋은 면이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양면을 보아야 객관성을 획득(獲得)할 수 있다. 무엇이 나의 본질(本質)인지는 모르지만 하나하나는 다 진실이다.”

 

연암처럼 글을 쓰기를 위해서 ‘관찰’하고 ‘교감(交感)’하고 ‘대화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먼저 그는 일상의 평범한 것들에 의미를 발견해보길 당부(當付)했다.

 

“의미(意味)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해냈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 세상에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시각에는 하잘 것 없던 것이 어느 때에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렇다. 시간이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상이나 모든 것은 눈의 성찰에 의하여 의미는 만들어 지는 것, 스스로에게 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 잡히는 것, 보이는 일들,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자 . 나의 의미를 위하여  .... 

능재 이선웅 삼가며

 岳岩 執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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