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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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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화두로 떠오른 인류세

Image :GQ Korea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개념이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로 급부상했다. 격변하는 지구 환경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당신과 나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 이것은 올해 10월 개막하는 타이베이 비엔날레 2020의 제목이다. 전시 기획을 맡은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와 마르탱 기나르 Martin Guinar는 이 문장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일례로, 도널드 트럼프와 그레타 툰베리는 확실히 같은 행성에 살지 않죠! 트럼프의 세계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은 환경적 위협이 아니고, 온실가스 배출은 근거 없는 믿음이며, 기업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정상 운영돼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지지자들은 분명 심각한 생태 위기의 희생자들과 다른 땅에 살고 있어요.” 세계의 분열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세계와 미래의 무고한 세계가 충돌하는 곳에서,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미술이 공통의 지구를 회복할 수 있는 외교적인 협상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정작 미술은 어떤 땅 위에, 어떤 행성에 있을까?

지난 몇 년간 지구는 미술의 주제로 급부상했는데, 이는 ‘인류세 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류세는 인간 활동이 지구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촉구하기 위해 파울 크뤼천 Paul Crutzen이 제안한 가설적 개념으로, 과학계를 넘어 여러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과학 기술의 힘으로 지구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다른 이들은 지구를 쥐어짜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며 ‘자본세 Capitalocene’에 대항하는 생태사회주의적 해법을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행성적 규모의 거대한 문제 앞에서 무기력에 빠졌다. 이에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 Donna Haraway는 “어떻게 무고하지 않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며 ‘쑬루세 Chthulucene’라는 또 다른 인류세의 변종을 제안했다. 이는 창의적인 생태계 교란종으로서 인간이 이웃하는 존재들과 자기 자신을 함께 변형시켜 다양한 혼성물들을 만들어내며, 상호 의존적으로 살고 또 죽는 방법을 시행착오 속에서 배워 나가는 세계로 그려진다.

많은 미술가들과 큐레이터들이 이처럼 과학 기술, 자본주의, 그리고 생태적, 혼종적 상상력에 의해 변형되는 지구를 미술의 새로운 탐구 주제로 받아들인다. 이스탄불 비엔날레 2019 <일곱 번째 대륙>을 기획한 니콜라 부리오 Nicolas Bourriaud는 “340만 제곱킬로미터의 해수면을 뒤덮은 7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를 낯설게 변모하는 우리의 행성에 대한 시적 상상력의 무대로 삼는다. 부리오는 일찍부터 인류세를 미술의 새로운 의제로 받아들여 인간과 자연의 비대칭한 관계가 허물어지는 세계에 대한 미술의 탐구를 지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위기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행동 방안이 결여됐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나는 모호하고 성찰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미술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수몰 위기에 처한) 하산케이프의 거주자들, 아마존 토착민들, (터키 정부에 의해) 투옥된 활동가들, 플라스틱을 먹고 죽어가는 수백만의 바다 생물들, 대기 오염으로 병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건 그런 미술이 아니잖아요.” <프리즈Frieze>의 선임기자 제니퍼 히기 Jennifer Higgie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직접적인 행동이에요.”

환경 문제에 대해 실효성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말만 하던 때는 끝났어요. 이제는 행동할 때라고요.” 영국 정부와 주요 문화 기관에 기후 위기 선언을 촉구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친 ‘익스팅션 리벨리온 Extinction Rebellion’의 활동가 윌리엄 스키핑 William Skeaping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를 방문해 “사람들은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미술 작품을 사러 마이애미까지 날아와요. 바로 여기가 기후 변동의 최전선인데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전지구적 서커스를 계속 홍보하고 용납할 수 있나요?”라고 분노를 표했다. 아트 바젤은 기후 변동을 주제로 토론회를 준비했지만, 활동가들은 미술의 탁상공론이 아니라 미술 산업의 구체적인 탄소 배출 저감 계획을 요구한다. 2019년은 미술계에서도 그레타 툰베리 효과가 뚜렷이 나타난 해였다. 툰베리는 기후 위기라는 복잡한 문제를 2015년 파리 기후 협약을 이행한다는 명확한 목표, 즉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로 제한하기 위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도록 모든 국가와 산업에 압력을 가한다는 액티비즘의 전략으로 바꿔놓았다. 이런 관점에서 작업이나 전시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무용할 뿐일까? 스키핑은 생태 위기로 식량이 바닥나면 문화 예술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미술이 육체적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치품이었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문명이 붕괴된다면,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면, 누군가는 당장 할 일이 없는 시간에 숯을 갈아 문신을 새기거나 나무토막을 깎아 작은 형상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미술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정신적 생존을 위한 무기이며, 운이 좋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효력을 발휘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2019 <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을 기획한 랄프 루고프 Ralph Rugoff는 미술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을 함부로 약속하거나 요구하는 데 회의적이다. “미술은 세계 각지에서 국가주의 운동과 전체주의적 정부가 부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는 비참한 운명을 완화시킬 수도 없고요. 그렇지만 아마도 간접적으로, 이렇게 ‘흥미로운 시대’를 어떻게 살며 또 생각할 수 있을지 일종의 가이드를 제공할 수는 있겠지요.”

흥미롭다는 것은 좋든 싫든 신경이 쓰인다는 것, 순간적으로 시선을 끌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보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과 사랑 사이의 각성 상태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관의 <태양과 바다(마리나) Sun and Sea(Marina)>는 그런 흥미로운 작업의 한 사례일 것이다. 루길레 바르즈주카이테 Rugile Barzdziukaite, 바이바 그라이니테 Vaiva Grainyte, 리나 라펠리테Lina Lapelyte가 공동 작업한 현대 오페라로, 모래 해변처럼 연출한 전시장에서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드러누워 각자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언뜻 보면 인스타그램에 어울리는 행복한 모습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일상의 경험은 모두 기후 변화의 목격담이다. 그럼에도 다들 불평만 할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 루시아 피트로이스티 Lucia Pietroiusti는 많은 관객들이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한다. “비평가들은 결국 오락거리라고 하겠죠. 리투아니아관에서 울다가 태평하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고요.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감정이 누출되는 순간이 지구 환경에 관해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느껴요.”

하지만 어떤 작업도 비엔날레의 막바지에 베니스를 덮친 기록적인 홍수만큼 충격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니스의 많은 미술관과 역사 유적들이 침수되었고 피해액이 추산 10억 달러에 달했다. “엄청나게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죠. 그렇지만 이건 베니스가 무엇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는 커다란 기회이기도 해요.” 베니스에서 바다와 미술의 새로운 관계를 탐구하는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TBA21아카데미의 디렉터 마커스 라이만 Markus Reymann의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위기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걸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베니스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위대한 예술의 현장이기 이전에 자연의 파도와 미완의 첨단 방어벽, 관광산업과 정치적 부패가 교차하는 상습 침수 지역이다. 지금 미술이 서 있는 곳은 그처럼 아슬아슬한 땅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 그것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의 질문이다. | 글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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