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S ROYCE DAWN 세대를 교체할 때마다 프런트 그릴은 변화를 강요당한다. ‘새롭다’라는 시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패턴을 변형하고, 형태를 갈아엎는다. 롤스로이스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했다. 로마 판테온 신전을 형상화한 그릴을 첫 번째 롤스로이스 이후 1백 년 넘게 고수하고 있다. 4인승 컨버터블 던을 비롯해 팬텀, 컬리넌 모두 같은 디자인의 그릴을 부착한다. 광대한 크기는 웅대한 전면부의 상징이 되고, 유서 깊은 이력은 롤스로이스의 기조를 공유하는 매개체가 된다. 신전 위에 놓인 ‘환희의 여신’의 역사도 한 세기가 넘었다. 20세기 초, 신분 차이로 연인과 혼인할 수 없던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조각을 롤스로이스에 부착했고, 이를 가다듬은 조각을 공식 엠블럼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선 금, 폴리카보네이트, 다이아몬드 등으로 주문 제작해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 요소가 됐다. 클래식 안에서의 근사한 변주. 롤스로이스가 지금의 지위를 자치하게 한 근간인지도 모른다.
HYUNDAI VELOSTER N 벨로스터 N을 실물로 마주한 당일, 부랴부랴 가격표를 뒤적였다. 당장이라도 차를 바꿀 용의가 있었다. 국내 브랜드 최초의 고성능 디비전에서 만든 모델이라는 각별한 의미 외에도 구미가 당기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선택 사양을 전부 욱여넣고도 275마력의 핫해치를 3천5백만원 아래로 거머쥘 수 있다는 계산에 신이 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직 실현되진 않았지만, 벨로스터 N은 이후 현실적인 드림카로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직접 타보지 않았는데도 홀딱 반한 이유 중 하나는 스포일러였다. 코너를 돌아나갈 때 공기의 힘으로 차체를 눌러 접지력을 높이는 게 스포일러의 주요 역할이다. 그러나 우승에 혈안이 된 레이서처럼 달리지 않는 이상 그 효과를 체감하긴 어렵다. 디자인 때문에 슬쩍 올리고 마는 무의미한 모조품도 흔하다. 이와 달리 벨로스터 N의 리어 스포일러는 WRC에서 활약 중인 ‘i20 N 랠리카’처럼 2개 층으로 설계됐다. 생색 내기용이 아닌 서킷 주행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 철저히 대비한 구조다. 도로에서 앞서 달리는 벨로스터 N의 스포일러를 볼 때마다 문득 그 능력치가 궁금해졌다. 차를 사면 꼭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늘었다.
GENESIS G90 이실직고하자면 EQ900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제네시스에서 생산하는 플래그십 세단’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차를 접하고,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직업 정신을 잊진 않았지만, 갓 서른이 넘은 사회 초년생에게 VIP를 위한 대형 세단은 너무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인식이 뒤바뀐 시점은 EQ900이 G90으로 모델명을 바꿔가며 페이스리프트를 했을 때였다. 평범했던 휠을 버리고 기하학적으로 디자인한 휠에 눈이 희번득 뜨였다. 같은 패턴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프랙털을 응용했는지, 수십 년 전 유행한 메시 타입 휠을 재해석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난하다는 표현 이상을 빌리기 어려웠던 제네시스의 디자인이 새롭게 설정한 목표점에 더 주목하고 싶었다. 차체와의 균형감, 기하학적인 패턴이 주행 중 그려내는 우아한 모양새. 내 차로 똑 떼어오고 싶은 휠에 홀린 듯, 제네시스 G90이 어느새 드림카 목록에 슬며시 올라 있었다.
FERRARI PORTOFINO ‘조향을 위한 둥근 도구’. 스티어링 휠이 내포한 의미다. 초기 자동차의 운전대는 앞바퀴의 각도를 조절하는 방향타 구실이 전부였다. 그러나 최고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기능이 복잡해지면서 스티어링 휠은 부가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진화를 주도한 브랜드는 페라리였다. 새로운 차를 통해 공표하려는 방향성을 기계적이고 복잡다단한 스티어링 휠에 함축했다. 포르토피노의 운전대에는 70여 년 동안 슈퍼카 개발에 들인 열성과 레이싱에 사활을 걸었던 창립자 엔초 페라리의 가치관이 유산처럼 남아 있다. 붉은 가죽으로 양옆을 둘러 ‘버터플라이 타입’으로 불리는 레이싱 카 운전대의 실루엣을 오마주했고, 변속 시점이 다가오면 운전대 상부에서 파랗게 점멸하는 LED 램프는 F1 머신에서 차용한 흔적이다. 기어를 한 단씩 올릴 때마다 회초리처럼 내려치는 타코미터 바늘을 바라보며 빨간 운전대를 꼭 움켜쥘 때, 고농도의 아드레날린 역시 최고조에 이른다.
MERCEDES-AMG GT S ‘쿠페’가 뜻하는 바는 시대에 따라 전이와 확장을 했다. 원래 2인승으로 작게 만들어 경쾌하게 달리는 마차를 뜻했으나, 자동차가 보급된 이후엔 도어가 2개 달린 형태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뒷문이 사라지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루프 라인을 만들 수 있었다. 유려한 실루엣 덕에 쿠페는 스포츠카의 필수 조건이 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의미가 모호해졌다. 4도어 쿠페 등의 변종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실용성을 염두에 둔 설계 아래 매끈했던 윤곽은 제멋대로 변형됐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이라며 동의보단 반문을 건네고 싶었다. AMG GT가 출시됐을 때, 그래서 측면에 선 채 고전적인 옆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기다란 보닛과 짤막한 캐빈룸이 상충하며 유발하는 팽팽한 긴장감, 차량 후미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선이 희미해진 기억 속의 쿠페를 끄집어냈다. 출시된 지 5년이 됐지만, 아직까지 AMG GT보다 아름다운 ‘진짜 쿠페’는 등장하지 않았다.
AUDI A8L 아우디의 신차가 발표되면 가장 먼저 헤드램프와 테일램프를 살핀다. 별도의 조명 전담 부서가 존재할 정도로 아우디의 정체성은 전등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다. 업적도 화려하다. R8에 세계 최초의 풀 LED 헤드램프를 장착해 누런 전조등 시대의 종말을 이끌어냈다. 방향 지시등이 한 방향으로 줄지어 깜빡이는 ‘다이내믹 턴 시그널’ 역시 아우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유행을 일으켜 개별적으로 튜닝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자 다른 브랜드도 조용히 모방할 정도였다. 4세대 A8L의 테일램프는 아우디 전등 기술력의 정점에 있다. 얇은 판이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OLED를 사용해 기존보다 정연한 디자인이 가능했고, 외부 밝기에 따라 빛의 강도를 스스로 조절한다. 백미는 리모컨으로 차량 잠금을 해제하면 순간 순차적으로 점등과 소등을 반복하며 펼치는 거창한 레이저 쇼. 누구보다 격하게 만남을 자축하는 존재에게 애정이 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TESLA MODEL X ‘콘셉트카의 배신’이라는 말이 있다. 모터쇼에 출품되는 모습만으론 당장 적금을 깨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이성을 마구 흔들어놓지만, 막상 양산형 모델이 발표되면 허무하게 맥이 풀리고 만다. 현란한 예고는 온데간데없고 싱겁다 못해 무색무취한 디자인으로의 퇴보를 숱하게 경험한다. 현실을 고려한 타협이라고 해도 부풀었던 기대를 달래기엔 뒷맛이 개운치 않다. 문이 열리는 방식은 그중에서도 단골 바람잡이다. 버터플라이 도어, 코치 도어 등으로 눈길을 강탈해놓곤 풍뎅이 날개 펴듯 문이 열리는 평범한 도어 형식을 답습한다. 이를 일갈하듯, 테슬라는 모델 X의 양산형을 거의 바꾸지 않고 출시했다. 갈매기 날개처럼 뒷문이 열리는 걸윙 도어 역시 현실이 됐다. 버튼 조작에 따라 문을 여닫고, 장애물을 감지하면 스스로 작동을 멈춘다. 현재 양산차 중 걸윙 도어를 장착한 기종은 모델 X가 유일하다. 테슬라의 배짱이 아니었다면 콘셉트카의 배신을 한 번 더 경험할 뻔했다.
VOLVO S90 EXCELLENCE 볼보가 안전에 공헌한 역사를 존중한다. 1959년, 3점식 안전벨트를 최초로 도입했고, 독점 사용권을 포기해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구했다. 완벽을 추구한 끝에 떠올린 엉뚱한 발상 역시 좋아한다. 14미터 높이에서 자동차를 떨어뜨리고, 물로 내던져 안전성을 테스트했다. 차를 부숴가며 차곡차곡 쌓은 데이터는 승객을 보호하고, 내구성이 강한 설계로 귀결됐다. 다만 볼보에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차종의 다양성이 다른 브랜드에 미치지 못했다. 플래그십 세단 S90은 중형급에 머물렀다. 브랜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쇼퍼드리븐 카가 없었다. 다행히 볼보는 극적으로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전장을 훌쩍 늘리고, VIP를 위한 뒷좌석을 장만한 ‘S90 엑설런스’를 제조했다.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뒤로 젖히는 시트와 차가운 냉장고보다 탄복한 것은 볼보의 조금 다른 접근법이었다. 소음과 진동이 발생하는 엔진 대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사용해 뒷좌석을 어느 쇼퍼드리븐 카보다 잔잔하고 고요한 공간으로 조성한다. 유별난 발상은 볼보에게 절실했던 다양성에도 유효했다.
JAGUAR E-PACE 영화 속 자동차에도 악역 전문 배우가 있다. 달아나는 007을 추격하다가 매번 앵글 밖으로 나가 떨어지는 재규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를 관람할 때마다 모범생 같은 본드 카보다 야수 같은 배기음을 울리며 주인공 곁에서 질척이는 재규어에 시선이 더 쏠렸다. 품위를 운운하면서 요란한 사생활을 그치지 않는 주인공보다 신념으로 무장한 악역에 오히려 공감이 가는 것처럼, 난폭한 성미를 숨기지 않는 듯한 직설적인 디자인에 빠져들었다. E-페이스는 재규어의 앙칼진 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콤팩트 SUV다. 자동차를 출시하며 재규어가 자청한 별명은 ‘베이비 재규어’. 악역 배우 전문 제조사의 위트는 웰컴 라이트로도 표현된다. 엠블럼을 비추는 데 그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성체 재규어를 졸졸 따라가는 꼬마 재규어가 운전자를 반긴다. 악당에서 악동으로 변한 재규어의 야살스러운 재간이라서 웰컴라이트 속의 작은 맹수가 더 애틋하다. | 피쳐 에디터 이재현 포토그래퍼 이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