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주는 특징의 하나입니다. 지구상 모든 인류는 언어를 가지지 않은 경우가 없고, 한편 아무리 고등한 유인원(類人猿)일지라도 인류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침팬지(黑猩猩)의 새끼를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같은 환경에서 길러 보았으나 인간과는 달리 침팬지는 언어를 습득(習得)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언어습득의 선천적(先天的)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교적 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유아기(乳兒期)에, 그리고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정식 언어교육도 없이, 또한 지능의 차이에도 관계없이 언어를 습득하는 보편적 사실로 보아 선천적인 언어능력(言語能力)을 갖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발달한 것이었음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언어에 의해 인간은 자연과 다른 집단(集團)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지식을 창조(創造)하고 후세로 전달이 가능해졌습니다. 한편 집단이 커지며 국가가 탄생하고 언어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공동체(共同體)의 삶을 위해 탄생한 평화로운 언어는 어느새 계급(階級)을 가르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언어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여전히 상상(想像)의 영역입니다. 문자 발생 이전이기 때문에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현대 언어학은 문자를 대상으로 발전해 언어의 기원(起源)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론(理論)을 제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언명(言明)합니다. 아담이 언어를 명명하던 시대에는 언어가 탄생하는 시기로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곧바로 존재로 직결되는 언어가 탄생했습니다. 이 신화적(神話的)인 세계는 언어와 존재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없었고, 어떠한 설명적 매개 없이도 언어 자체가 존재였던 시기입니다. 아담(亚当)과 하와(夏娃)가 선악과를 따먹은 낙원 상실 이후 인간 세계는 이성으로 구축되면서 사물과 언어를 유사성으로 묶어주는 신화적인 언어가 사라졌습니다. 사물이 자아, 너와 나의 간극을 생성하는 이분법(二分法)이 탄생하면서 인간에게는 관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인식적인 매개(媒介)가 있으므로 언어도 가치판단의 척도가 된 것입니다.
원시인(原始人)은 언어가 없었으며, 원주민의 언어도 최소한의 단어만이 필요했습니다. 1980년대의 ‘자유’와 지금의 ‘자유’가 다르지만, 오히려 원주민(原住民)에게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자유’라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삶 자체가 언어이고, 사냥도 하나의 놀이이자 생존본능(生存本能)이었으므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죄책감(罪責感)이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몇 개의 언어로써도 충분히 소통(疏通)이 가능했습니다.
아담이 말하면 시원적(始原的)인 언어가 되듯 우리가 호명(呼名)하면 언어는 바로 존재가 되고 본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의미가 함량(含量) 되어 있지 않고 의미를 내장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언어가 공공의 제도 속에서 제대로 쓰이려면 우리말사전에서 찍어낸 말이어야 하듯 우리의 말은 공준(公準)의 질서를 무시한 위조언어입니다.
우리의 말은 기존 공준의 규칙(規則)을 벗어나 있어서 문법의 궤도에서 유통될 수 없습니다. 기본의 자본 궤도에 따라 순환할 수 없는 위조화폐(僞造貨幣)처럼 기존의 범주 밖에 있습니다. 위조화폐는 금방 들통이 나지만 엄연히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해 있듯이 우리의 말도 순간순간 뒤바뀌며 변전(變轉)의 쾌감을 주며 제도권 밖을 돕니다. 해체(解體)라는 한 양식으로 존재는 하지만 기존의 언어 규칙을 준수하려는 부류들이 보기에는 가짜입니다. 위조언어는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즐거운 모반(謀反)이며 혁명적 자유를 구가하며 실제의 체계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사유가 먼저 앞서면서 언어가 따라 나옵니다. 현재는 이미 사유가 앞서 돌아가며 시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아와 타자의 문제가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먹는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먹지 못하는 철저히 왜곡되고 관념으로 파편화(破片化)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은 여성, 막대는 남성이라는 세계는 진실이 아니며, 때로 먹히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반복과 번복(飜覆)을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서는 타자이나 다른 곳에서는 주체가 될 수 있고, 장소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끝없이 반복합니다. ‘탈중심주의(脫中心主義)’라는 담론이 제기하듯 어디에서도 중심이 될 수 없다는 후기산업사회(後期産業社會)라는 현대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화적인 세계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간극이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로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는 꿈은 진실이고 인간의 원초아(原初兒)에서 분화된 자아가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억압된 본능이 꿈으로 나타나며 무의식은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또 하나의 자아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꿈이나 신화 속의 언어에는 간극이 없지만, 초자아를 거느린 인간은 객체아(客體兒; 사회적 자아)와 주체아(主體兒; 내면적 자아) 사이의 크나큰 간극이 있습니다. ‘발자국’이나 ‘양수’가 문학 속에서 관념(삶의 발자취, 태초 등)을 만들고 있듯이 덧씌워진 하나의 관념입니다. 이 같은 관념이 바로 언어폭력(言語暴力)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언어체계로부터 벗어나서 놀이의 대상으로 삼은 기존의 언어체계가 얼마나 큰 횡포를 발휘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란 언어는 적색 신호등(赤色信號燈)은 ‘서시오’ 녹색 신호등은 ‘가시오’에 불과하듯이 이미 기호로써 전락해버린 존재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의 사유는 없고 사유할 틈도 없습니다. 보편화(普遍化)된 기호인 출입국의 여권번호나 자의적 기호인 주민등록번호, 차량번호가 그렇듯이 복잡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붙여진 기호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출현하고, 하늘공원을 호명하면 ‘하늘공원’이 나타납니다. 판타지 형식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재조합됩니다. 아담은 시원에서 사물의 실재를 명명(命名)했지만 우리는 언어와 언어의 간극(間隙)을 뚫고 들어갑니다.
우리의 언어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다음의 글을 보기로 합시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개인이나 물론 마찬가지이겠지만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수덕상(修德上)의 장해를 적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좋지 못했던 장해물(障害物)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날카롭게 바꾸어 놓을 뿐이다. 그런데 허다히 많은 가련한 영혼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지지를 잃고 만다. 여기엔 아무런 해독도 아무런 위험도 없다. 단지 이것을 계기로 성장할 뿐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서는 법, 걷는 법들을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신봉하던 미신을 빼앗기면 인간은 자칫 고독 속으로 말려든다. 그러나 그가 외부적으로 기대고 있던 지지물을 빼앗기게 되면 결국 자기의 내면세계를 알게 되며 나중에는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는 꿈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곧 꿈이 진실이고 현실이 가면(假面)이기 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자 작가였으며 논리학, 정치학, 자연과학까지 모든 학문을 포괄(包括)하는 학자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단편적이지 않은 측면에서 하나로 통일된 세계를 지향(志向)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허물고 새롭게 접속시키면서 이성으로 축조(築造)해온 인간 중심, 기계 중심, 물질 중심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 똑같이 통합된 세계를 꿈꾸는 언어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이성적(理性的)인 언어로는 통합된 세계를 꿈꾸지 못합니다. 신화적 언어 이전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에 위반(違反)의 언어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인용구(引用句)의 특징은 명사, 동사, 부사들로 고정된 문자의 세계를 일거에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고착화된 기존의 문법체계(文法體系)를 무너뜨리며 유쾌하게 놀고 있습니다. 축제에서는 모든 것이 용인되어 본능대로 행동해도 허용이 되듯 문법의 중력에서 일탈하여 의미와 사유를 떠나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모든 관습과 편견(偏見)의 더께가 녹아내림으로써 기존 이성적인 의미망들이 구축한 세계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서정시, 리얼리즘시, 모더니즘시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며 세계를 재현(再現)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리얼리스트나 모더니스트들의 문명을 슬기롭게 극복(克服)해가려는 의도 자체가 애시 당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울이 깨지면 복원(復元)이 불가능하듯 해체주의자에게 현실 세계는 복원 불능한 실재인 것입니다. 단지 즐겁게 신화세계로 환원(還元)하여 해체하면서 함께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경쾌(輕快)하고 리듬감 있게 문자들이 시소를 타고 있으며 기존의 심각한 세계들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을 “아름다운 노랫소리 물처럼 흘러나”오듯 부드럽게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들이 한판 축제(祝祭)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독본’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거운 관념(觀念)과 철학, 상상적 사유마저도 자본의 욕망과 결탁(結託)해 있는 현실을 마음껏 신나게 가볍게 조롱하며 넘나들고 있습니다. 인생독본 속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방정식(方程式)을 풀고 있는데, 톨스토이가 나타나 “언어로 만든 인생”을 상기(想起)시켜 줍니다. 결국 인생의 방정식은 해답(解答)이 없는 것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언어도 다양하게 발달(發達)하였습니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몇 개의 언어로 소통(疏通)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양적으로 팽창(膨脹)했다고 해서 언어가 발달했다고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언어 논리입니다. 우리의 언어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시원적(始原的)인 언어로의 복원 의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저 언어라 함은 물리적 현상을 지혜와 희생(犧牲)의 문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함은 영원한 법칙(法則)입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인력이나 화합(和合)이나 기타의 물리학 법칙과 같이 불가피한 법칙으로 그칠 뿐 실행(實行)되지 않는다면 전혀 쓸모없는 것입니다. 덧붙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물리학(物理學)의 많은 법칙들은 그 언제인가 한때는 갖가지 의문을 받기도 할 것이며 자연이 보여주는 온갖 현상에 모두 합당(合當)하지는 않지만 연구한 결과 불가피한 것이라 인정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적인 법칙(法則)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努力)에 의하여 닦여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어는 온갖 존재의 끝없는 각성(覺醒)과 결합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활해 나가면서 우리는 각 개인이 저마다 잡으려고 하는 언어가 아니고 지혜로운 방법에 따라 각각의 존재(存在)가 다른 존재의 언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