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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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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양산박 두령 천웅성(天雄星)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

[圖片信息  천웅성(天雄星)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 


임충(林冲)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6위이자 천강성(天罡星)의 천웅성(天雄星)에 해당한다. 얼굴이 표범처럼 생겼다 하여 표자두(豹子頭)이라는 별호로 불린다. 사모(蛇矛)의 명수로 창술 및 봉술에서는 양산박(梁山泊) 제일의 실력을 자랑한다. 

수호지(水滸志)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첫 등장은 노지심(魯智深)이 건달들과 놀고먹고 있을 때 노지심이 선장(禪杖)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는데 아름다운 아내가 간신 고구(高俅)의 양자 고아내(高衙內)의 유부녀 취향(趣向)에 아내가 위험에 빠지는 소식을 듣고 아내를 구했다. 이때 임충(林冲)도 고아내를 때려잡아 패려고 하지만 고아내의 아버지(양아버지)가 고구라서 아내를 보호(保護)하면서 참아내는 것 외에는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이후 아들의 취향을 존중(尊重)한 고구가 임충의 친구 육겸(陸謙)을 이용해 임충을 육겸이 유인(誘引)해 주막으로 가게하고 그 사이에 임충의 아내를 육겸의 집으로 유인해 고아내가 겁탈(劫奪)하려는 계책을 꾸몄으나 임충의 시녀(侍女)가 눈치를 채고 임충에게 알려서 임충이 아내를 구했다. 

임충(林冲)은 자신을 속인 죽마고우(竹馬故友)였던 육겸(陸謙)을 죽이려고 하나 육겸은 고구(高俅)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고 결국 임충은 노지심(魯智深)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한탄(恨歎)한다. 고구는 상사병(相思病)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임충과 그의 아내를 떼어내야 한다고 판단(判斷)하고 자신의 보검(寶劍)을 하인에게 시켜 임충에게 판매(販賣)하고 어두운 틈에 임충을 호출(呼出)하여 고구의 관청 안으로 무기를 품고 들어온 임충을 암살 시도 혐의(嫌疑)로 몰아 귀양 보낸다. 원래는 무조건 사형(死刑)을 내리려 했으나 사건을 맡은 하급 관원인 손부처(별명) 손정(孫定)이 그나마 강직한 성품(性品)이라 임충의 혐의에 대해 사사건건 지적했고 고구도 켕기는 게 있어서 그나마 귀양형으로 낮출 수 있었다. 그러나 임충의 아내는 임충이 귀양 간 후 고아내(高衙內)가 겁탈하려 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임충이 양산박(梁山泊)의 두령이 된 뒤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는 이미 장인과 아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야채 장수에게 시집간 아내의 하녀 금아(琴兒)의 말에 따르면 아내의 자살 후 딸을 잃은 슬픔에 시달리던 장인은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귀양을 가는 도중 관원 동초(董超) 설패(薛覇)의 심술에 큰 고생을 했으나 다행히 의형인 노지심(魯智深)이 관원들에게 손을 본 뒤 죄수가 아니라 왕같이 행차하였다. 창주(滄州)에서 노지심과 헤어지고 그 곳에서 시진(柴進)의 도움으로 손님처럼 죄수 생활을 어느 정도 대접(待接)을 받으며 하게 된다. 도중에 예전에 도와주었던 이소이(李小二)라는 술집주인과 다시 친분(親分)을 얻는데 이소이가 자기 가게에서 육겸을 봤다는 진언을 하자 임충은 다시 육겸(陸謙)을 죽이려고 하나 육겸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지현(知縣)이 마초장(馬草場)으로 임충을 지기로 보냈다. 초료장 생활 중에 주막(酒幕)에 술을 마시러 들려다가 옥지기의 집이 대설(大雪)으로 인해 무너지고 악묘(岳廟)에서 잠시 몸을 뉘였던 도중 임충을 죽이려고 온 부안(富安), 육겸과 육겸에게 매수된 관발이 마초장을 태운 다음 임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하는 것을 듣고 그들을 차례로 죽이고 내장을 찍어버리고 복수한 후에 탈옥(脫獄)한다. 탈옥하는 중에 추위로 인해 술이 먹고 싶어 큰 술을 가진 일꾼들을 습격(襲擊)하고 큰 술을 다 먹었지만 취해서 눈밭에 쓰러졌다가 일꾼들에게 어떤 집으로 끌려갔다. 이 때 시진(柴進)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 어떤 집이 시진의 별장(別莊)이었다. 

이 후 시진(柴進)의 집에서 도피생활(逃避生活)을 하다 왕륜(王倫)이 괴수로 있는 양산박(梁山泊)으로 가서 그 곳의 두령이 되려고 하나 임충(林冲)의 능력을 시기(猜忌)한 왕륜이 푸대접을 하고 불만(不滿)이 나날이 쌓였다. 입당 조건으로 사람의 목을 베라고 하자 임충은 3일 동안 기다렸지만 지나가던 양지(楊志)과 싸우다가 왕륜이 말린다. 왕륜은 양지를 산채에 남겨 임충을 견제(牽制)하려 하지만 양지는 벼슬을 다시 얻으려고 떠나고 임충은 두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왕륜은 푸대접을 한다. 그 때 양산박으로 도피(逃避) 해온 조개(晁蓋) 일당이 임충을 포섭(包攝)하였고 임충은 직접 왕륜의 목을 베어 반란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다. 

관군 집안의 자제로 수도에서 80만 명의 금군(禁軍)에게 창봉술(槍棒術)을 가르치는 교두(敎頭)이었다. 태위인 고구(高俅)의 양자 고아내(高衙內)가 임충의 아내 장씨를 보고 반해서 임충(林冲)의 친구인 육겸(陸謙)과 함께  임충이 칼을 차고 고구의 집에 들어가도록 함정(陷穽)을 꾸몄다. 그 탓에 죄인이 된 임충은 창주(滄州)로 유배를 가서 마초장(馬草場)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나 한겨울에 육겸의 흉계로 암살당할 뻔 한다. 위기(危機)를 간신히 모면한 그는 그들을 죽이고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의 추천으로 양산박 산적에게로 도주(逃走)한다.  

양산박(梁山泊)에서는 임충(林冲)을 경계하는 두령 왕륜(王倫)의 박해를 받았으나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와의 결투가 계기가 되어 양산박에 입단한다. 이후 양산박에 거처를 의탁하러 온 조개 일행을 왕륜이 내쫒으려 하자 더는 못 참고 그를 죽인 뒤 조개(晁蓋)를 새 두령으로 앉힌다. 그 후 아내를 찾았으나 이미 자결(自決)한 뒤였다. 

조정에 귀순하기 전이나 귀순(歸順)한 후 모든 양산박 장수 중에 가장 많은 활약을 하며 전공(戰功)을 세운다. 요(遼)의 보밀성과 하탁 살해하고 전호(田虎)의 장수 오숙, 예린, 고개를 죽였다. 왕경(王慶)의 장수 유원, 방납(方臘)의 장수 두경신, 냉공, 왕인 등을 살해(殺害)했다.  

방납 토벌(方臘討伐) 직후 중풍에 걸려 육화사(六和寺)에서 무송의 간호를 받다 끝내 병사한다. 사실상 수호지(水滸志)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고 무공(武功)도 제일 뛰어나 많은 활약(活躍)을 한다. 

임충(林冲)은 양산박의 108두령 중 경력(經歷)이 가장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서열(序列)'로 놓고 봐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기도 하다. 임충은 양산박(梁山泊)의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당대의 간신인 고구(高俅)와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원수(怨讎)를 지는 사람이다. 양산박 산적(山賊)들 치고 고구와 친했던 이가 있던 건 아니지만 정말인지 임충의 경우는 모든 독자들이 동정(同情)을 하게 되는 정도이다. 그럼 일단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임충에게는 장씨(張氏)라는 아름다운 부인(夫人)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구(高俅)의 양자가 그 유부녀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삼류드라마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삼각관계(三角關係)로 인해 비극은 시작된다. 자신의 양아들이 상사병(相思病)으로 시름시름 앓자 고구는 아들을 위해 직속부하이기도 한 임충(林冲)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고구(高俅)의 함정(陷穽)에 빠진 임충은 결국 죄인이 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귀양을 가기 전에 고구의 아들이 자신의 부인을 해코지 할지도 모른다하여 이혼(離婚)을 해버리기까지 한다. 임충은 본래 이혼을 한 후 부인이 처갓집으로 가서 안전(安全)히 살길 바라는 것이었지만 고구의 아들이 끈질기게 장씨를 괴롭히는 바람에 장씨는 결국 자살(自殺)을 한다. 

억울한 누명(陋名)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부인은 죽어버리고 그 모든 계략(計略)에는 심지어 죽마고우(竹馬故友)였던 친구 육겸(陸謙)까지 연관(聯關)되어 있었다. 게다가 귀양길에 동행하게 된 포졸(捕卒)은 여관에서 그의 발에 화상을 입히고 이튿날 숲 속에서 그를 죽이려 든다. 혹시 이러다가 양산박으로 가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거 아니야?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그를 구한 것은 노지심(魯智深)이였다. 임충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기 전에 노지심과 만나 이미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상태였다. 

노지심(魯智深)은 임충을 구해준 후 임충(林冲)이 귀양을 가게 되는 곳까지 무사히 그를 호위(護衛)해주고 홀연히 떠난다. 그런데 창주(滄洲)에 도착한 임충에 대해 후환이 두려웠던 고구의 모략(高俅)은 여기서 끝나질 않았다. 반드시 임충을 죽여야 속이 시원했던 걸까? 하지만 천운(天運)으로 목숨을 건진 임충은 자신을 배반했던 육겸을 죽이고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의 주선으로 양산박(梁山泊)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양산박(梁山泊)은 왕륜(王倫), 송만(宋萬), 두천(杜遷), 주귀(朱貴) 이렇게 4명이 두령으로 있었다. 송만과 두천, 주귀는 팔십만 금군(禁軍)의 무예사범이기까지 했던 임충이 산채로 오는 걸 환영(歡迎)했지만 오직 수령(首領)이였던 왕륜만은 달랐다. 자신들 중 그 누구도 임충의 적수(敵手)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임충이 자신들을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소인배(小人輩)적인 걱정을 했던 것이다. 

왕륜(王倫)은 결국 임충(林冲)이 양산박에 있지 못하게 하려고 조건을 내걸었지만 사흘내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 목을 가져오라고 했다. 임충은 결국 양산박에 합류(合流)를 하게 된다. 여기서 정확히 말하자면 임충은 사람의 목을 가져오진 못했다. 3일간은 사람이 지나가질 않았고 4일째에는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를 만나 수십 합을 싸우지만 양지도 꽤나 실력이 있었던지라 결국 서로 비기고 만다. 왕륜은 임충을 견제(牽制)하기 위해 양지도 양산박에 머물 것을 청하지만 양지는 거절(拒絶)한다. 양지가 어쩌다가 양산박을 지나가게 된 건 지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후 조개(晁蓋)가 사고를 친 후 송강(宋江)의 도움으로 도망쳐서 양산박으로 왔을 때 또 다시 왕륜(王倫)이 조개 일행을 받지 않으려고 하자 왕륜을 죽여 버리고 조개를 수령으로 추대(推戴)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양산박(梁山泊)의 총 두령은 조개. 두 번째가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 세 번째가 입운룡(入雲龍) 공손승(公孫勝), 그리고 네 번째로 임충(林冲)이 앉게 되니 가히 경력으로는 108호걸 중 으뜸이라 하겠다. 물론 송만(宋萬), 두천(杜遷), 주귀(朱貴)가 실질적으론 가장 연륜이 많다고 해야겠지만 사실 이 3명은 임충에 비해 여러모로 많이 떨어진다. 요는 연륜이 있긴 있되 그걸 내세울만한 능력(能力)이 부족했다는 거 사실이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임충(林冲)은 무력으로도 108호걸 중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08호걸이 모두 모였을 때 서열(序列)이 6위였다. 굳이 서열이 몇 위였네 하지 않아도 양산박(梁山泊)이 벌이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그의 활약은 언제나 돋보였다.  '표자두(豹子頭)'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표자두란 표범얼굴이나 머리 정도로 해석이 된다. 전장(戰場)에서 그는 언제나 매섭고 날랜 장수였을 것이다. 

또 재미있는 건 그의 무기가 '장팔사모(丈八蛇矛)'였다는 점이다. 대도(大刀) 관승(關勝)이 "관우의 후예"라는 소개로 나오며 독자들에게 관우(關羽)를 떠올리게 한다면 장비(張飛)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바로 임충(林冲)인 것이다. 여담인데 임충은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서열 6위의 두령(頭領)이었다. 즉 그의 의형인 노지심(魯智深)보다 서열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의형제(義兄弟)를 맺었으니 그는 동생이다. 과연 산채에서 노지심과 임충은 서로를 어떻게 불렀을지 자못 궁금하다. 뭐 임충이 그래도 노지심을 형님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의문(疑問)이 남는 수수께끼다. 

108호걸이 거의 다 모일 때 즈음에 임충의 철천지원수인 고구(高俅)가 직접 양산박을 공격(攻擊)해온 적이 있다. 하지만 입운룡(入雲龍) 공손승(公孫勝)의 도술(道術)로 고구는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구는 양산박에서 극진히 대접(待接)을 받다가 "양산박(梁山泊)의 두령들이 나라에 귀순(歸順)할 수 있도록 황제(皇帝)에게 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나온다. 물론 약속(約束)을 지키진 않았다. 

고구(高俅)가 잡혀왔을 당시의 이야기에 임충(林冲)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때 임충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철천지원수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드디어 양산박의 포로(捕虜)로 잡혀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을지 또 그리고 당연히 그를 죽이고 이미 하늘로 떠난 자신의 부인의 원혼(冤魂)을 달래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기대가 배신(背信)되고 고구를 다시 돌려보내야 했을 때는 얼마나 참담(慘憺)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임충 하면 늘 '한(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고구를 살려보 낼 당시 그는 필사적(必死的)으로 반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경력도 있고, 서열도 높으니 못할 이유(理由)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쨌든 고구가 살아간걸 보면 그의 의견은 기각(棄却)되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양산박의 명분(名分) 같은 것을 위해선 고구를 살려 보냈어야 하긴 했다. 늘 전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장팔사모(丈八蛇矛)를 휘두르며 적을 유린(蹂躪)했던 표자두(豹子頭) 임충은  어쩌면 고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게 그 '무력'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양산박(梁山泊)의 호걸들이 조정에 귀순하여 방납(方臘)을 토벌한 후 중풍(中風)에 걸리고 만다. 그런 임충(林冲)을 무송(武松)이 남아 절에서 극진히 간호(看護)했지만 결국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장에서 화려(華麗)하게 살아갔지만 누구보다 큰 슬픔을 평생 안고 살아갔던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낭자(浪子) 연청(燕靑), 입운룡(入雲龍) 공손승(公孫勝)과 함께 '산적나부랭이'와 가장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천웅성(天雄星)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이다. 

금군교두(禁軍敎頭)이며 고구(高俅)의 양자인 고아내(高衙內)가 임충(林冲)의 부인을 연모(戀慕)하고 있어서 희롱하려 했지만 임충에게 저지당했다. 이후 임충의 친구인 육겸(陸謙)을 이용해 임충을 꾀어낸 뒤 임충의 부인을 다시 희롱(戲弄)하려 했지만 이를 임충이 간파(看破)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아내가 이를 고구(高俅)에게 일러바쳤고 고구의 계략으로 인해 임충은 창주(滄州)로 유배되었다. 호송 도중 단공(端公)이 임충을 죽이려 하였지만 임충과 의형제를 맺었던 노지심(魯智深)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 유배지에서 시진(柴進)의 도움을 받아 성실히 복역(服役)했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유배지로 온 육겸을 죽인 것으로 인해 유배지(流配地)에서 도망쳤다. 

그 뒤 시진(柴進)의 소개로 양산박(梁山泊)에 몸을 의지하려 했으나 두령인 왕륜(王倫)은 임충의 능력을 두려워해 임충(林冲)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하인 송만(宋萬) 등의 중재로 3일 이내에 지나가는 나그네 한 명을 죽이고 금품(金品)을 빼앗아오면 임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침 3일이 되는 날 임충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양지(楊志)와 일대일 대결(對決)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왕륜은 임충을 양지와 경쟁(競爭)시키면 자신의 지위를 지키면서 동시에 양산박의 전력(戰力)이 강화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임충과 양지에게 동시에 양산박(梁山泊)에 들어올 것을 권했지만 자신의 죄를 사면(赦免) 받고자 고구(高俅)에게 가려는 양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失敗)해 임충만이 양산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양산박에 조개(晁蓋)가 몸을 의지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왕륜(王倫)이 자신의 지위 보전(地位保全)을 위해 조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임충은 왕륜을 설득(說得)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약간의 노자 돈을 주어 조개를 보내려는 왕륜을 살해(殺害)한 뒤 조개를 새로운 두령으로 삼았다. 그 뒤 임충은 자신의 부인을 양산박(梁山泊)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부인은 이미 고아내(高衙內)에게 희롱당한 뒤 그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 뒤였다. 

이후 양산박 군의 주력(主力)으로 활약하였고 축가장(祝家莊)과의 전투에서 호삼랑(扈三娘)과 싸워 붙잡는 전공을 세웠다. 그 뒤 고당주(高唐州)에서의 전투 당시에는 적의 선봉에 선 우직(于直)을 죽였으나 호연작(呼延灼)과의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부상당해 당분간 치료(治療)에 임했다. 그 뒤 조개(晁蓋) 사후 양산박이 치른 모든 전투(戰鬪)에 참가했으며 뛰어난 활약(活躍)을 선보였다. 

108성 집결(集結) 이후에는 기병군(騎兵軍) 오호장(五虎將)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관군과의 계속된 전투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후 조정(朝廷)에서 양산박의 귀순을 권하자 고구(高俅)를 죽이기 위해 반대했지만 결국 양산박은 조정에 귀순(歸順)하였다. 하지만 그 뒤에도 임충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방랍(方臘)의 난을 평정한 뒤 중풍에 걸려 육화사(六和寺)에서 무송(武松)의 간호를 받다 병사(病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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