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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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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전의 최초 원 작가가 누구이며 소설의 원 제목은 무엇인가

图片信息 水浒传

‘수호전(水滸傳)’의 명확한 저자는 알 수 없으며 수많은 작가(作家)들의 손을 거쳐서 발전되어 왔다. 저자(著者)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시내암(施耐庵)으로 그 밖에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로 잘 알려진 나관중(羅貫中), 시혜((施惠), 곽훈(郭勛) 등이 있다.

시내암(施耐庵) :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로 가장 잘 알려진 시내암(施耐庵)이 ‘수호전’의 최초의 판본인 100회 본을 완성하였다고 전하며 시내암(施耐庵) 혼자의 창작이라는 설과 나관중(羅貫中)과의 공동창작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이설도 있는 데 명나라의 고유(高儒)가 집필한 ‘백천서지(百川書志)’에 의하면 ‘수호전’은 시내암이 집필하고 후에 나관중이 편집하여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나관중(羅貫中) : 나관중이 ‘수호전’의 유일한 저자라는 설도 존재하며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통치기 때 사람인 왕도곤(汪道昆)은 자신의 저서 ‘수호전서(水滸傳敘)’에서 나씨 일족의 가내 기록을 인용하여 나관중이 오(吳) 지방에 거주하며 ‘수호전’ 100회분을 완성했다고 기록하며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는 나관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중국의 제정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 루쉰(鲁迅), 류핑보(俞平伯) 등의 문학자들은 시내암이 창작한 ‘수호전’과는 별개 혹은 이를 기반으로 나관중(羅貫中)이 새로 ‘수호전’을 집필했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혜강야수(惠康野叟)의 ‘식여(識餘)’에서는 나관중이 ‘수호전(水滸傳)’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출간 시기를 비교하며 두 소설을 동시에 집필(執筆)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두 소설은 같은 사람의 창작(創作)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 외에 후스(胡適)는 ‘수호전’은 나관중의 창작이 맞다고 하였으며 전호(田虎), 왕경(王慶), 방랍(方臘) 토벌은 나관중의 창작이라고 했으나 요나라 토벌은 나관중(羅貫中)의 창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설에는 아예 나관중(羅貫中)이 명나라 사람이 아닌 남송 시기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정목형(程穆衡)이 집필한 ‘수호전주략(水滸傳注略)’에서는 나관중이 남송 시기부터 원나라 초기의 인물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으며 또 다른 설로 황림근(黃霖根)은 나관중이 시내암(施耐庵)이 쓴 ‘정강패사(靖康稗史)’을 토대로 ‘수호전’을 집필했다고 주장했다.

시혜(施惠) : 또 다른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로 알려진 시혜(施惠)는 송나라 시대부터 출현한 연극인 남희(南戯) 각본가로 원말명초 사람이다. 명나라의 희곡 작가인 서복조(徐復祚)는 자신의 저서 ‘삼가촌로위담(三家村老委談)’에 "군미(君美, 시혜의 자)가 ‘수호전(水滸傳)’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시혜(施惠)와 시내암(施耐庵)이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책인 ‘전기회고표목(傳奇會考標目)’에는 시내암(施耐庵)은 항주 사람이며 본명은 '혜'이고 자는 군승(君承)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 중국 문학자인 쑨카이디(孫楷第)는 자신의 저서 ‘중국통속소설제요(中國通俗小說提要)’에 시혜는 시내암(施耐庵)의 필명이라고 기록하였다. 후대의 연구에서는 ‘수호전’에 드러나는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의 방언이 드러나는 특징과 시혜의 대표작인 ‘유규기(幽閨記)’와 ‘수호전’의 유사성을 근거로 시혜가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라는 설이 대두하였다.

곽훈(郭勛) : 시내암(施耐庵), 나관중(羅貫中), 시혜(施惠) 이외에 ‘수호전’의 저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명나라의 정치가인 곽훈(郭勛)이 있다. 심덕부(沈德符)의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에는 ‘수호전’의 저자는 곽훈(郭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국원(沈國元)은 자신의 저서 ‘황명종신록(皇明從信錄)’에 곽훈이 ‘수호전’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문체를 흉내 내어 ‘국조영렬기(國朝英烈記)’을 집필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의 학자 전희언(錢希言) 또한 곽훈이 ‘수호전(水滸傳)’을 편집하여 ‘희하(戲嘏)’를 썼다고 주장했다.

후스(胡適)는 ‘수호전신고(水滸傳新考)’에서 ‘수호전’의 저자가 곽훈(郭勛)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을 제기하였고 다이부판(戴不凡)은 오히려 곽훈(郭勛)이 시내암(施耐庵)이라는 명의를 빌려 ‘수호전(水滸傳)’을 집필했다고 주장하였다.

수호전(水滸傳)"의 최초 이름은 강호호협전(江湖豪俠傳), 나관중(羅貫中), 송강(宋江), 수호전(水滸傳), 시내암(施耐庵), 충의전(忠義傳) 등 수호전의 최초의 서명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첫째, '송강(宋江)'설. '칠수류고(七修類稿)'에 "'삼국', '송강'의 두 책은 항주사람 나관중(羅貫中)이 편찬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예전에 반드시 그 본(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편찬(編纂)했다고 한 것이다. '송강(宋江)'은 "전당시내암의 책"이라고도 한다"고 기재하고 있다.

둘째, '충의전(忠義傳)'설. 이 설도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한 가지는 충의전(忠義傳)은 영렬전(英烈傳)의 자매편이라고 한다. 영렬전은 곽훈이 그의 조상의 공덕을 기린 것이고 수호전 즉 충의전은 그가 공신을 함부로 죽인 것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한 가지는 남송이래로 충의(忠義)는 붐을 이루었고, 당시에 충의군(忠義軍)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국사, 금사에도 충의전(忠義傳)에 대하여 기재하고 있다. 충의전(忠義傳)에 언급된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모두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화본이다. 수호전은 최초에 충의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수호전내에서도 여러 가지 흔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완자성의 가운데 호표를 숨기다"와 "홍건의 성씨가 천고에 전해지다"는 것 등이다. "충의"를 주제로 한 것은 더욱 예가 많다. 구천낭랑의 법지는 '전충장의, 보국안민'이었다. 이것은 당시 충의군의 구호였다. 제71회의 천문석게에 있는 글도 '체천행도"와 "충의쌍전"이었다. 특히 구본 수호전 제81회의 입회 시에는 '사업집성충의전, 용자담병강호중'이라고 하여 수호전의 원래 이름이 충의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충의전(忠義傳)이라는 설에는 증거도 있다. 상해도서관이 1970년대에 두 장의 수호전의 잔여페이지를 발견하였는데 가운데 '경본충의전(京本忠義傳)'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두 장의 수호전(水滸傳) 잔결페이지는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그 판각본이 현재 발견되는 많은 수호전보다 훨씬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이로써 볼 때 '수호전'은 원래 '충의전(忠義傳)'이었고 나중에 수호를 붙여서 '충의수호전'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강호호객전(江湖豪客傳)'설. 이 설은 강소성 흥화현의 시씨족보에서 '시내암묘지'와 '흥화현속지'의 '내암소사'에 근거한다. '내암소사'에서는 장사성이 "시내암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장사성은 그 집을 방문했고 시내암이 '강호호협전'을 쓰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수호전'설. 이 설은 수호전은 처음부터 수호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나라 때의 잡극에 "채명수호, 박호양상(寨名水滸, 泊號梁山, 산채의 이름은 수호이고 호수의 이름은 양산박이다)"라는데서 근거한다.

이상의 여러 학설 중에서는 '송강(宋江)'설이 가장 믿을만하다. 수호전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화본에서 출발해서 변화발전한 것이므로 처음에는 설화를 기록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무행자, 석두손립등 모두 사람이름으로 이야기의 제목을 붙였다. 그러므로 수호전도 사람이름으로 제목을 붙였을 가능성이 많다. 낭영(칠수유고의 저자)의 시대에는 이미 '송강'이라고 이름이 붙었고, 나관중이 편찬한 것과 시내암이 편찬한 것이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다. 낭영은 이것에 대하여 이전에 이미 책이 있었으므로 나관중과 시내암에 대하여 편찬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충의전(忠義傳)을 곽훈의 영렬전과 자매편이라고 보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 황명종신록 권30에 따르면 "무정후 곽훈은 그의 조상인 곽영이 태묘에 모셔진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삼국지, 수호전을 모방하여 '국조영렬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영렬전은 이미 존재하던 수호전을 모방한 것이고, 두 서적이 자매편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충의전(忠義傳)에 관한 두 번 째 학설(學說)은 근거가 있다. 그러나 경본충의전은 아마도 낭영이 보았던 '송강(宋江)'보다는 뒤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

강호호협전은 믿기가 어렵다. 시내암묘지와 내암소사는 후인들의 조작으로 보인다. 장사성이 직접 시내암을 찾아갔다는 것도 전설(傳說)에 불과하고 증거는 전혀 없다.

수호전(水滸傳)의 처음 시작은 설화기록(說話記錄)이다. 이후 문인들의 가공을 거쳐서 수호전으로 집대성(集大成)된 것이므로 처음부터 수호전이라는 이름을 달았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수호전’의 저자는 시내암(施耐庵)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저자는 나관중(羅貫中)으로 알려져 있으나 ‘수호전(水滸傳)’은 시내암이 기초로 한 내용을 나관중(羅貫中)이 문장을 다듬고 재정리하여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關係)는 어떠했는가?

시내암(施耐庵)은 1296년 강소성 출신으로서 원나라 말기 19세에 수재에 합격하고 36세에 유백온(劉伯溫)과 함께 진사에 합격하여 잠시 관직에 몸담았으나 혼란한 시기에 소주를 근거로 한 반란군 수장 장사성(張士誠) 휘하에 합류하여 막료로서 역할을 하다가 장사성에 실망하여 관직(官職)을 고사하고 소주(蘇州)에서 은거하며 ‘수호전(水滸傳)’을 집필하였다.

나관중(羅貫中)은 1330년생으로서 14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소주(蘇州), 항주지역(杭州地域)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다가 타고난 문학적(文學的)인 재능으로 인근 지역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작품을 썼다. 나관중(羅貫中)이 30세를 넘었을 즈음에 당시의 명사였던 시내암을 존경(尊敬)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했으며 시내암(施耐庵)이 장사성(張士誠)의 막료(幕僚)로 활동할 때 나관중을 추천하여 합류하고 같이 근무했다고 했으며 장사성의 몰락(沒落)으로 고향으로 귀향하여 ‘삼국연의(三國演義)’, ‘수당연의(隋唐演義)’,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등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시내암(施耐庵)은 70여 세에 자신의 작품 ‘수호전(水滸傳)’을 집필할 당시  34살 아래인 나관중(羅貫中)은 스승의  원고 집필(執筆)을 도왔으며 76세에 사망한 시내암의 뒤를 이어서 ‘수호전(水滸傳)’에 대해 재가공 및 자신의 생각을 추가 보충(補充)하여 ‘수호전’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최종 ‘수호전’은 나관중(羅貫中)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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