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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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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강에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의 본적은 하북인가 산동인가

图片信息 武松打虎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무송(武松)의 고향으로 직예광부(直隸廣府) 청하현(淸河縣)으로 공송장인데 무송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무송가(武松家) 무송공원(武松公園) 등인데 무송문화지향(武松文化之鄕)이라 한다.

무송(武松)은 하북과 산동의 경계인 경양강(景陽岡)에서 호랑이를 잡은 전설이 있는데 형 무대를 찾아간다. 청하현(淸河縣) 교외에는 무대랑(武大郞)의 명대고묘가 있는데 무씨는 청하현의 대가족으로 고묘(古墓)가 보존되고 있다.

무대랑(武大郞)은 본명이 무식으로 후손들이 수묘(守廟)하고 있는데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1996년 다시 복원되었다. 무대랑(武大郞)은 명대 진사출신으로 청하현(淸河縣)에 이거한 무씨 시조로 산서에서 이주했다 한다. 무대랑(武大郞) 집안에서는 무대랑(武大郞)은 키가 크고 난장이가 아니어서 만두장수에 반금련(潘金蓮)의 외도 악랄함으로 묘사되어 치욕으로 여긴다.

무대랑(武大郞)과 무송(武松)은 친형제가 아니고 나이는 270세차이로 북송말년의 무송과는 관련이 없다고 항변한다. ‘선화유사(宣和遺事)’ 중 36인중 무송(武松)은 산서에서 오는데 무대랑(武大郞)도 영락연간 산서에서 이주하여 설정이 공교로워 모두 진실로 확정하여 불만이다. 이러한 소설이 출현한 것은 어린 시절 의형제가 무대랑(武大郞)을 찾아가는데 정무에 바빠 푸대접하여 비난하고 소문이 나쁘게 된 데에서 시작했다 한다.

좋은 일은 문밖을 넘지 않고 나쁜 일은 천리에 전해진다는 속담처럼 무대랑(武大郞)의 모습을 날조하고 나쁘게 전해져 시내암(施耐庵)이 이를 듣고 천고전송의 수호전(水滸傳)에 이를 활용한다.

무대랑(武大郞)은 삼척의 난장이로 반금련(潘金蓮)은 악녀로 천하에 알려지고 희극성 내용으로 변한다. 홍행출장(紅杏出牆)의 악녀로 탕수양화의 부도덕한 부녀로 매도되어 반씨가문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는 희극이 연출된다.

소설중의 예술형상과 예술진실은 생활상의 진실과 착각하게 한다. 예술형상의 진실은 생활의 기초가 되는데 무대랑(武大郞)의 분묘에 부속지객인 시승진이 오는데 하북성의 명인이자 화가로 수호전(水滸傳)의 저자 시내암(施耐庵)의 직계후손으로 청하현의 두 집안에 사과하러 오는데 시를 지어 사당에 바쳤다

시내암의 杜撰(두찬)으로 두 가족에 침원을 안겨 포폄과 수백 년간 문장으로 폄하하여 수백 년 후 후손들이 사과한다.

많은 산동(山東) 친구들은 모두 무송(武松)이 그들과 동향이라고 얘기하고 산동사람들은 산동에서 무송과 같은 영웅호걸(英雄豪傑)이 나온 것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무송(武松)은 당연히 산동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마디만 물어보자. 무송은 산동의 어느 현(縣) 사람인가? 아마도 산동친구들은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수호전(水滸傳)' 제22회에서 이미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송강(宋江)이 염파석(閻婆惜)을 죽이고 형제 송청(宋淸)과 두 사람이 창주 시진(柴進)의 장(莊)으로 도망치다가 무송을 만난다.

송강(宋江)은 그 사나이를 부축하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이신지 존성대명은?" 시진(柴進)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 이 사람은 청하현(淸河縣) 사람이며 성은 무(武)이고 이름은 송(松)이다. 이미 여기에 온지 1년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다시 나온다. 청하현(淸河縣)이 산동성에 속하는가? 지도를 뒤적여보면 산동과 하북의 경계선은 덕주(德州)에서 임청(臨淸)까지의 구간은 대운하를 경계로 하고 있다. 청하현은 대운하의 서쪽에 있는데 청하현은 분명히 하북성에 속한다. 산동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산동사나이 무송이 산동사람이 아니라면, 이게 무슨 웃음거리인가? 만일 무송이 산동 양곡현(陽穀県)에서 호랑이를 때려잡았고 양곡현 지현이 그를 도두(都頭)에 임명하였으며 무대랑도 이미 청하현에서 양곡현(陽穀県)으로 이사 와서 자리 잡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산동 양곡현(陽穀県)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약간은 억지가 아닌가?

역사를 살펴보면 청하현(淸河縣)은 수문제(양견)의 개황초년에 설치된다. 한고조시대에 이곳에는 먼저 청하군을 두고 나중에 여러 번 바뀌어 청하국(淸河國)이 된다. 한원제 이후에는 군(郡)으로 정해진다.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하북성 청하현의 주변지역이며 오늘날의 산동인근의 몇 개 현, 시까지 포함된다. 동한이후에는 다시 청하군(淸河郡)으로 개칭된다. 북위 때는 여전히 청하군(淸河郡)이라고 칭해진다. 수나라초기에 군이라는 행정구역(行政區域)을 없앴다가 수나라 대업이후 다시 청하군으로 회복시킨다. 당나라초기에는 군을 없애고 주를 설치했는데 현은 주의 관할에 속했다. 당나라초의 청하현은 패주(貝州)에 속했고 하북동로의 관할을 받았으며 하북동로의 치소는 대명부(大名府)에 두었다.

송나라 때에는 비록 산동성, 하북성의 건제를 두지 않았지만 이미 "로(路)" 건제(로는 성보다 적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호전'에서 "산동호보의, 하북옥기린"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의 산동과 하북은 성(省)이 아니라 로(路)를 말한다. 나중에 원나라 때 성을 만들어 요, 송시대의 "로"의 기초위에서 나누어 구분한 것이다. 대운하는 수나라 때 만들었다. 대운하를 산동과 하북의 경계선으로 삼은 것은 당연히 수나라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청하현의 역사상 계속 하북성에 속했고 산동성에 속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수호전(水滸傳)'은 원나라 때 쓰여져서 명나라 때 출판되었다. 산동인들이 무송을 동향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명나라이후의 일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기로예(산동,하북,하남)지방의 경계선은 자주 바뀌어서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穀県)도 이전에는 하남성에 속한 적이 있었고 청하현도 한번은 산동성에 속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청하현지'를 뒤적여보지는 않아서 아무렇게나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연혁으로 보면, 청하현은 주로 하북에 속했지 산동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사실 바로 당대에 방송되는 산동쾌서(快書)나 평화(評話)에서도 무송이 산동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원균의 산동쾌서 '무송전'의 제1회에서 "그 무송은 집이 직예광부(直隸廣府) 청하현"이라고 한다. "직예(直隸)"는 경사(京師)에 직속된 지역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경사주위지역을 의미한다. 광부(廣府)는 광평부(廣平府)를 의미하며 부의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영년현(永寧縣)이다. 송나라 때 이미 직예라는 부현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부(廣平府)와 청하현은 모두 직예에 속하지는 않았다. 하북성은 청나라 때 "직예성(直隸城)"이라고 칭해졌다. 이로써 볼 때 고원균의 말은 바로 그의 청나라 때 조사로부터 전해내려 온 '당시'의 칭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려당(王丽堂)의 양주평화(扬州评话) '무송'의 제1회에서도 "무송(武松)이 어떤 사람인가? 바로 북직 광평부 청하현 사람이다" "북직(北直)"은 "북직예(北直隸)"를 말한다. 명나라 때는 남경과 북경의 두 경사를 두었으므로, 오늘날의 강소성은 당시 "남직예(南直隸)"로 불리고 지금의 하북성은 당시 "북직예(北直隸)"로 불리웠다. 이렇게 보면 왕려당(王丽堂)의 말도 아마도 그녀의 조사의 조사로부터 전해내려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금병매(金甁梅)'의 제1회에서는 "대송 휘종 황제정화연간 산동성 동평부(東平府) 청하현(淸河縣)에는 한 풍류자제가 있는데...복성으로 서문이며 이름은 외자로 경이다."라고 하여, 청하현(淸河縣)을 산동성 동평부(東平府)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산동인들이 무송을 동향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이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금병매(金甁梅)'는 명나라 숭정연간에 출판되었고 작자는 명나라 때 사람이다. 이미 "성"의 건제가 있었다. 동평부(東平府)는 송나라 때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는 "로(魯)"로 개칭되고 명나라 때는 "주"로 개칭되었다. 아래에는 지금의 산동문상, 동음, 동평, 양산, 비성, 양곡, 동아의 7개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하현(淸河縣)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로써 보면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도 줄줄이 말은 잘 했지만 고증을 거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청하현(淸河縣)을 산동에 속하는 것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무송의 원적을 양곡현(陽穀県)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호랑이를 때려잡은 장소를 청하현(淸河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양강(景陽岡)도 청하현(淸河縣)으로 옮겨놓았다. 그는 창주에서 회고견으로 돌아오면서 형에게 들르는데 길가는 도중에 청하현(淸河縣)을 지나고 그래서 우연히 호랑이를 때려죽인다. 난릉소소생(금병매의 작가)는 무송(武松)이 창주(滄洲)에서 청하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에 양곡을 지나간 노선에서의 착오를 시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하현(淸河縣)을 산동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청하현(淸河縣)은 하북(河北)에 속하고 산동(山東)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무송(武松)은 청하현(淸河縣) 출신으로 둘째로 태어나 '무이랑(武二郞)'이라 불린다. 고향에서 기밀(하급관리의 하나)과 말다툼을 벌이던 중 주먹으로 쳐 기절하자 죽은 줄 착각하여 도주(逃走)했다.

방랑생활을 계속하던 중 고향으로 가기 위해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의 장원에서 묵던 중 학질에 걸린다. 학질(虐疾)을 낫게 하기 위해 화로를 들고 움직이던 무송(武松)은 그만 술 취한 송강과 부딪히게 된다. 화로가 엎어져 불꽃이 얼굴에 튀자 무송(武松)은 송강(宋江)의 멱살을 잡았고 당황한 시진은 송강을 소개하며 상황을 수습한다. 이로써 송강과 무송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송강(宋江)과 이별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경양강(景陽岡) 고개 근처에서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이란 술을 파는 주막을 들른다. 세 잔만 마시면 고개를 넘지 못할 정도로 독한 술이란 뜻이다. 때문에 투병향(향기가 술병을 뚫는다), 또는 출문도(문 밖을 나가자 쓰러진다)라 한다. 그러나 무송(武松)은 그 술을 열두 잔이나 마시고 어두워지는 경양강(景陽岡) 고개를 유유히 올라간다. 취기(醉氣)가 오른 무송(武松)이 산 길 바위에 누워 쉬던 중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마을 관청의 골치를 썩이는 식인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무송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며 싸우던 중 호랑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수 없이 강타(强打)하여 죽일 수 있었다. 때마침 몰이사냥을 하던 사냥꾼들을 만나 이 소식이 알려지고 무송(武松)은 옆 고을인 양곡현(陽谷縣)의 보병도두가 되어 형인 무대를 만나게 된다.

무대의 아내는 소설 ‘금병매(金甁梅)’의 주인공인 반금련(潘金蓮)이다. 반금련은 평소 못생긴 무대를 혐오(嫌惡)하고 있었다. 반금련(潘金蓮)은 시동생인 무송에게 추파를 던지고 마을에서 생약방을 하는 호색한인 서문경(西門慶)과의 밀회를 즐긴다. 결국 반금련(潘金蓮)은 서문경과 옆집 왕씨 할멈의 계략으로 무대(武大)를 독살(毒殺)하고 만다. 

일 때문에 두어 달 동안 동경에 갔다 온 무송(武松)은 형의 부고를 믿지 못했다. 그는 시체검시관 하구숙(何九淑)과 과일장수꼬마 운가(鄆哥)의 도움으로 서문경(西門慶)과 반금련(潘金蓮)의 불륜을 알게 된다. 무송은 여러 이웃과 왕씨 할멈을 집에 초대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반금련(潘金蓮)을 죽인다. 이웃을 부른 이유는 그녀의 악행을 자백 받은 뒤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자백을 받고 반금련(潘金蓮)을 죽인 무송은 술집에서 계집을 끼고 있는 서문경(西門慶)에게 간다. 서문경(西門慶)은 무송과 대결했으나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2층 건물에서 떨어져 뒤쫓아 온 무송에게 죽임을 당한다. 무송은 반금련(潘金蓮)과 서문경의 머리를 무대의 영전에 두고 곧바로 자수하여 맹주(孟州)로 유배된다. 왕씨 할멈은 간통(姦通)을 도운 죄로 사지가 잘렸다.

맹주로 가던 중 십자파(十字坡) 고개의 주막에서 쉬던 중 그곳이 몽한약(蒙汗藥)으로 사람을 취하게 한 뒤 도륙해 만두를 만드는 곳임을 알아차린다. 주막 여주인을 속이고 역으로 반격해 주먹을 내지를 찰나 여주인의 남편이 돌아와 사정하며 말린다. 그들은 채원자(菜園子) 장청(張靑)과 모야차(母夜叉) 손이랑(孫二娘)으로 한때 노지심도 죽었다 살아났음을 알려준다. 

이들과 헤어지고 맹주(孟州)로 유배 온 무송은 금안표(金眼彪) 시은(施恩)의 도움으로 호의호식을 누리던 중 시은이 장문신(蔣門神)에 의해 술집을 빼앗긴 사연을 듣게 된다. 무송은 시은의 복수를 위해 술집이 있는 쾌활림(快活林)으로 장문신을 찾아가는데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주점에서 술을 마신다. 쾌활림에 도착한 무송은 취한 상태로 장문신과 싸워 박살을 내버렸다. 시은의 복수를 한 무송은 그러나 장문신의 친척인 병마도감(兵馬都監) 장몽방(張蒙方)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물어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를 가던 중 비운포(飛雲浦) 다리에서 모든 것이 장몽방의 계략임을 알게 되고 호송 중인 두 공인을 죽인 뒤 장몽방(張蒙方)의 집을 찾아가 장문신은 물론 장몽방의 일가까지 모두 몰살한다. 무송은 피로 자신의 이름을 벽에 쓰고 십자파(十字坡)로 도망을 오게 된다.

무송의 사정을 들은 손이랑(孫二娘)은 일전에 죽인 행자(行者)의 옷가지와 도구들을 무송에게 입히고 두 자루의 계도(戒刀)를 사용하게 한 뒤 노지심(魯智深)이 있는 이룡산(二龍山)을 추천한다. 훗날 호연작(呼延灼)의 도화산(桃花山) 토벌에 출전하여 싸운 뒤 양산박에 합류하여 보병군 두령이 된다.

방납(方臘) 토벌 때 목주(睦州)에서 영응천사 포도을에게 왼 팔이 잘리고 종군하여 노지심(魯智深)과 함께 육화사(六和寺)에 머문다. 송강(宋江)에게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육화사에 출가하여 여든 살까지 살다 세상을 떠난다. 황제는 무송(武松에게 청충조사(淸忠祖師)란 칭호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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