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금(王友琴)
1976년 10월 6일 저녁, 모택동의 처 강청과 장춘교등 4명은 돌연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그들은 "4인방"으로 불린다. 그 전에 그들은 이미 중국권력서열 6위내에 들어가는 4명이었다. 장춘교는 당시 중국 권력서열4위의 권력자였다. "4인방"이 체포된 것은 27일전에 발생한 모택동사망과 더불어 '문혁'의 종결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었다.
4년후인 1980년말, '특별법정'은 임표와 4인방 두 반혁명집단에 대한 재판에서, 장춘교에게 '사형집행유예' 판결을 내린다. 2년후에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98년 "병보석"으로 풀려나며, 2005년 사망한다. 향년 88세이다.
40년이 지났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이미 '4인방'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2016년 문혁발동50주년기념활동에서 '4인방'의 주요인물인 장춘교의 이름을 사람들이 찬양했다. 그의 유령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1. 장춘교가 1976년 캄보디아를 비밀방문한 다큐멘터리
2014년 캄보디아인이 제작한 <The Missing Picture>가 오스카상 최우수외국영화상 후보작 4편중 하나에 포함되었다. 이 영화는 크메르루즈 즉 캄보디아공산당의 통치시기(1975-1979) 인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그렸다. 캄보디아인민들이 도시의 집에서 쫓겨나, 어떻게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는지, 어떻게 굶주렸는지, 어떻게 처벌받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그렸다. 크메르루즈가 만들어낸 거대한 재난은 실로 사람들을 비통과 분개에 빠지게 만든다. 2014년 헤이그국제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170만 내지 200만의 캄보디아인이 크메르루즈의 잔혹한 통치와 기아, 대규모처결과 과도한 노동으로 사망했다. 이는 총인구의 1/5 내지 1/4에 상당하는 수치이다.
이 영화는 상당히 독특했다. 영화의 인물은 점토로 만들었다. 영화 중간에 크메르루즈시기의 흑백영상의 다큐멘터리가 들어가 있다. 이들 다큐멘터리는 당시의 선전물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질감을 효과적으로 증가시켰고, 영화이야기의 유래와 원인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들 다큐멘터리중에 나는 여러해동안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 장춘교를 보았다. 장춘교가 1976년 캄보디아를 방문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에서 그는 기운이 넘친다. 그와 동시대의 중국남자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어보인다(이런 권력이 가져다준 외관의 변화는 또 다른 연구주제가 될 수 있을 것같다). 거대한 전용기가 착륙한다. 장춘교는 앞장서서 비행기에서 계단을 내려온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크메르루즈의 지도자인 폴포트(Pol Pot, 1925-1998)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여성은 그에게 생화를 바친다. 그와 폴포트는 환영하는 군중과 전사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는 폴포트에게 모택동과 폴포트의 회견장면 사진을 담은 대경광(大鏡框)을 선물했다(폴포트는 1975년 북경에서 모택동을 만난다). 그는 연회때 술잔을 높이 들고 폴포트와 건배를 했고, 그는 폴포트와 쇼파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장춘교는 영화에서 이렇게 칭찬한다: "캄보디아의 '대약진'은 정말 아름답다. 매일매일이 경축일같다." 그는 폴포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캄보디아는 중국이 하지 못한 순화(純化)와 청세(淸洗)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캄보디아는 대단한 이데올로기의 시험장이고, 이 곳을 방문한 것은 수업을 든는 것이다."
당시 장춘교가 캄보디아를 방문한 소식은 중국의 신문에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매체는 한번도 장춘교가 1976년 캄보디아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와 폴포트의 담화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 장춘교의 이번 방문은 중국백성들에게 있어서 '비밀방문'이었다. 실제로 여러 해동안 일반중국인들은 캄보디아혁명에 대하여 알지도 못했고, 중국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기 위하여 많은 인력물력을 쏟아부었다는 것도 몰랐다. 인민들에게 기밀을 유지하는 것은 당시의 "상태(常態)"였다. 나중에 캄보디아정부의 '국가역사기록'에 따르면, 장춘교는 1976년 2월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2. 크메르루즈는 캄보디아를 3년 8개월간 포학하게 통치했다.
크메르루즈가 캄보디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A History of Democratic Kampuchea>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1975년 정권을 취득한 후, 크메르루즈는 200만의 프놈펜과 다른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을 농촌으로 쫓아내어 농업노동에 강제로 종사하게 만든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있던 기간동안 죽음을 맞이한다.
크메르루즈는 이 시기에 급진적인 모택동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개조를 진행한다. 그들은 캄보디아를 농촌성격의 무산계급의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그 사회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뱅이도 없으며, 착취도 없다. 이런 전환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화폐와 자유시장, 정상적인 학교교육, 사유재산, 외래복장, 종교활동과 캄보디아의 전통문화를 모두 없앴다. 공립학교, 불탑, 사묘, 교회, 대학, 상점과 정부건축물은 모두 폐쇄되거나, 감옥, 축사, 재교육노동교화소와 창고로 개조했다. 공공이나 사립교통은 없었고, 사유재산도 없었다. 비혁명적인 오락도 없었다. 레크레이션활동도 엄격히 통제된다. 전국인민은 크메르루즈의 지도자를 포함하여 모두 반드시 검은색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혁명복장이었다.
크메르루즈의 통치하에 모든 사람은 기본권이 박탈당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소재하는 합작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정권은 누구도 집회를 열거나 토론을 하도록 허가하지 않았다. 만일 3명이 모여서 얘리를 나누면 그들은 '적'으로 규정하고 체포되거나 처결당했다.
가족관계도 엄중한 비판을 받는다. 사람들은 심지어 가벼운 애정이나 유며, 연민도 표현할 수 없었다. 크메르루즈는 모든 캄보디아인들이 '혁명조직'을 믿고, 복종하고 존경하도록 요구했다. 이 '혁명조직'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라고 불렸다.
크메르루즈는 순결한 사람만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선전했다. 정권을 빼앗자 마자, 그들은 수천명의 론놀장군이 이그는 '크메르공화국'의 병사, 장교와 정부관료를 살해했다. 이들은 '불순분자'로 불렸다. 이후 3년동안, 그들은 수천수만의 지식인, 도시주민, 소수민족(예를 들어 참족, 베트남족, 중국인)을 처형했고, 그들 자신의 전사와 당원들도 대거 처형당한다. 이들은 '반도'로 규정되었다.
캄보디아공산당의 1976년의 '4년계획'에는 캄보디아인은 전국의 1헥타르의 토이에서 3톤의 쌀을 생산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는 사람들이 반드시 1년 12개월동안 계속하여 쌀을 심고 수확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지역에서 크메르루즈는 사람들에게 하루에 12시간이상씩 일하도록 강요했고, 휴식도 허가되지 않고, 충분한 양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더욱 구체적인 사례로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 크메르루즈는 수천명으로 구성되는 대형합작사를 만든다. 사유재산과 자본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합작사는 최대한 자급자족하도록 설계된다.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함게 공용식당에서 식사한다. 그리하여 기아는 더욱 심해진다. 크메르루즈는 상점을 폐쇄했다. 수도 프놈펜은 원래 100만인구의 대도시였는데, 강제주민이주로 4만명의 인구와 1개의 상점만 남는다. 그 상점은 외국대사관의 사람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크메르루즈의 통치하에, 완전한 정규교육은 사라진다. 아이들은 나무아래에서 혹은 집안에서 공부했다. 교사는 학식이 낮은 빈농이었다. 그외에 아이들은 통상 그들의 부모와 따로 살았다. 가정생활의 즐거움은 느낄 수가 없었다. 크메르루즈의 지도자들중 일부는 아주 양호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다른 교육받은 사람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지식분자는 외국의 괴뢰라고 취급된다. 그들은 대부분 살륙목표가 되었고, 수천명의 학교교사와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살해된다. 캄보디아의 화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자산계급'으로 규정되어 살해당한다.
크메르루즈는 도처에서 그들의 적을 찾아냈다. 억울하게 미국CIA, 소련KGB 혹은 베트남인을 위해 일한다고 고발당했다. 캄보디아는 방대한 안전계통을 갖추고 200개에 가까운 감옥을 가지고 5개등급으로 나누었다. 최고등급은 S-21로 편제되었다. 죄수들은 혁명을 배신한 크메르루즈의 간부와 병사들이었다. 1만4천명이 이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3. 장춘교는 크메르루즈가 중국을 앞서는 일을 했다고 칭찬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대규모의 집단적인 박해와 살륙은 모두 사회개조와 전환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베트남군대가 쳐들어와 크메르루즈가 밀림으로 도망치고나서야 끝이 난다. 중국인들은 크메르루즈가 한 일에 대하여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폴포트가 캄보디아에서 한 일은 상당부분 장춘교가 중국에서 대거 제창하고 실행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정도와 속도에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춘교가 대거 캄보디아에서 한 일들을 '중국이 하지 못한 일'이라고 칭찬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폐 즉 돈이다. 크메르루즈는 통치시기에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이 국가를 3년 8개월 20일이나 통치하였지만.
<The Missing Picture>에서 크메르루즈정부의 화폐가 나온다. 그것은 인쇄된 화폐이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많은 지폐를 길거리에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새로 찍어낸 화폐가 쓰레기가 된 것이다. 그중 일부를 나중에 사람들이 주워서 역사소장품으로 삼은 것이다.
돈은 화폐이다. 우리 사회생활에서의 작용과 가치는 동방이건 서방이건 모두 알고 있다. 비록 돈을 어떤 사람은 더럽다고 하지만, 정부가 철저하게 화폐사용을 취소한 '혁명'행동을 한 적이 없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비록 격렬하고 폭력적이었지만, 화폐사용을 금지시킬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현대역사상, 크메르루즈처럼 화폐를 사용하지 않은 정부와 사회형태는 유일무이할 것이다. 8백만인구를 지닌 국가가 3년8개월간이나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다. 화폐를 폐지한 것은 크메르루즈의 가장 급진적인 국가행위였다.
그러나, 장춘교는 폴포트정권이 화폐를 폐지한 행위를 찬양한다. '중국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고 찬양한다. 이건 겸손하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가 예의상 듣기좋은 말을 해준 것도 아니다.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점령하깆 ㅓㄴ인 1975년 4월 1일, 장춘교는 <홍기(紅旗)> 잡지와 <인민일보>에 장편의 글을 발표하는데 제목은 <자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독재(專政)을 논한다>이다. 이 글에서, 장춘교의 목소리를 '화폐교환' 및 '상품생산'과 '노동에 따른 분배'에서 무산계급독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춘교의 칭찬은 맨입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장춘교는 폴포트를 칭찬하는 동시에 무기와 식량 그리고 각종 설비를 지속적으로 캄보디아에 보낸다. 예일대학 교수인 Ben Kiernan의 <폴포트정권>이라는 책에서 중국이 크메르루즈에 지원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1975년에만 중국은 20억달러의 무이자대출과 4천만달러의 '선물'을 주었다. 이들 지원은 크메르루즈의 피비린내나는 통치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
<The Missing Picture>에서 장춘교의 캄보디아방문장면이 길지는 않다. 영화는 주로 캄보디아인민의 크메르루즈통치하의 비참한 생활을 그렸다. 그리고 생존자의 진술이 담겼다. 다만 그들은 장춘교를 빼놓지 않았다. 이는 캄보디아비극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문혁역사의 작자로서 필자가 보기에, 이 장춘교의 다큐멘터리는 중국문혁과 크메르루즈혁명의 직접적인 관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문혁에 대하여 더욱 깊이있게 인식하게 해준다. 장춘교의 크메르루즈에 대한 열정적인 지도는 그가 중국에서 하려는 사회개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비록 황당하고 잔혹한 '순화'조치를 중국이 아직 해내지는 못했지만. 다만 만일 4인방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여, 장춘교가 총리를 맡아, 문혁이 10년간 지속되었다면 중국의 오늘이 있었겠는가?
4. <옥중가서>: 장춘교의 이론이 오늘날보다 좋다고 찬미하는 자들이 있다.
캄보디아영화와 비교하면, 장춘교의 중문세계에서의 대우는 전혀 다르다.
2015년, 홍콩중문대학출판사는 <장춘교옥중가서>를 출판한다. 책은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문자내용은 같다. 하나는 인쇄체로 인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춘교가 직접 쓴 글자이다. 두 권은 모두 자홍색의 고급스러운 표지에 금색으로 책제목을 적은 호화판이다. 중문서적에서 책을 이렇게 고급스럽게 꾸미는 것은 실로 보기 드문 경우이다. 본인이 쓴 글씨체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서예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혹은 모택동, 노신같은 신격화된 인물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들의 시사작품에 한정된다. 전체 저작을 본인이 직접 쓴 글씨로 출판한 경우는 없었다.
이를 보면, <장춘교옥중가서>의 출판자는 장춘교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출판내막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홍콩은 출판자유가 있는 곳이니까. 누가 돈을 내든지, 누가 어떤 색채의 책을 내든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 참고할만한 것은 출판하가 이 책에 대한 장편의 소개글에서 3명의 평론을 인용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스웨덴의 중국연구교수 Michael Schoenhals로 중문이름은 심맥극(沈麦克)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춘교의 책은 1920년대 이탈리아공산당서기 그람시의 <옥중찰기>에 비견할 만하다.
장춘교의 책이 출판된지 1년여가 지났는데, Schoenhals교수가 이렇게 평론했을 뿐, 더 이상 논증, 설명 혹은 수정하지 않았다. 그람시의 그 책이 '좋은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장춘교의 책이 '좋은가?' 그건 우리가 논의해볼 수 있다.
먼저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비록 이탈리아공산당의 영수를 지낸 바 있고, 그의 책이 중국에서 번역출판된 적이 있고, 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사상가로 칭해지고 있지만, 그는 정권을 장악한 적이 없다. 그가 쓴 이론을 직접 실행해볼 기회는 없었다. 다만 이 방면에서, 장춘교와 그람시는 전혀 다르다. 그는 문혁의 시작때부터 권력이 온나라를 뒤흔드는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이었다. 그는 문혁의 '516통지'와 "십개조'라는 두 개의 강령적문건의 초안자중 하나이다. 그뿐아니라, 문혁의 최초부터 최후까지 중요한 지도적 문건은 장춘교가 모두 참여했고 작성, 심의했다.
1976년초 장춘교가 캄보디아로 갔을 때, 다른 몇몇 문혁의 중요한 '붓자루'인 왕력(王力), 관봉(關鋒), 척본우(戚本禹), 진백달(陳伯達)은 모두 이미 감옥에 갇혔다(이는 문혁의 특징중 하나이다. 문혁때 뜬 인물이 금방 감옥에 갇힌다. 이들은 글을 써서 많은 사람을 해쳤으나 인신입명할 자리는 없었다. 문혁때 피해자들도 다쳤지만, 가해자들도 안전하지 못했다), 다만 장춘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혁의 이론과 실천에서 중요인물이었다. 그는 심지어 크메르루즈의 혁명에서도 중요한역할을 담당한다. <The Missing Picture>영화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원래 겨우 46살까지 살았던 그람시는 그저 사상가일 뿐이다. 장춘교의 이론은 8억인구의 중국문혁때 실행된 바 있다. 그리고 크메르루즈에서 상당히 철저하게 집행되었다. 그 결과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는다. 인민은 빈곤에 빠진다. 이는 많은 중국인들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러나 상당한 사람들이 오늘날 장춘교는 '좋았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장춘교는 모택동이 시종 중요하게 여긴 문혁주요이론가중 한 명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모택동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다. 그는 법정에서 입을 꽉 다물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옥중가서>는 그가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법률에 따르면 사형집행유예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고 이 찬양받는 유저도 남긴다. 그가 좋다는 상당한 정도로 문혁의 이론과 실천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춘교옥중가서>에는 장춘교가 감옥에서 쓴 서신외에 장춘교의 딸인 장유유(張維維, 1966년 문혁이 시작될 때 이미 성년이었다)와 '개제(愷薺)'와의 장편인터뷰대담도 실려 있다. '개제'는 스스로 장유유의 복단대학부속중학때의 동기동창이며 현재 런던에 거주하고 있고, 그녀의 부친은 몇년이 시간을 들여 <장춘교대전>을 썼다고 밝혔다. 개제는 분명히 문혁을 상당히 잘 알고 겪은 중국인이다. 문혁에 대하여 아무런 문화적인 장벽이 없다. 이 책의 302페이지를 보자.
개제가 묻는다:
많은 사람들은 알고 싶어한다. 만일 너의 부친이 당시에 성공했다면, 중국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너의 부친은 현재 백성들의 생활이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장유유가 대답한다:
부친은 당연히 현재 백성의 생활이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만일 그들이 당시 계획한 길로 계속 나아갔으면, 백성의 생활도 더욱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항상 진보한다. 그들도 생산을 발전시켰고, 혁명을 제대로 하는 것은 생산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등소평만이 생산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의 부친과 그들이 계획한 것은 공동부유의 길이다.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더더욱 장춘교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의 이론을 긍정할 뿐아니라, 장춘교의 이론이 현재 중공당국의 정책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빈부차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등소평의 선부론을 비판한다. 장유유의 말이 놀라운 점은 중국의 현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장춘교의 계획/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문혁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혁이 좋은 일이었는가 아니면 재난이었는가? 홍기를 높이 들고 계속 혁명해야 하는가? 이는 장춘교의 유령이 문혁50년이 지난 지금 제출하는 문제이다.
책을 평론한 Schoenhals와 책을 쓴 장유유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최소한 두드러진 논점이나 논거를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자는 교수로서 당연히 이론을 세우는 방식으로 말해야 했다. 그들은 이것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진리라고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원래 논거를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일까?
여러 해동안,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문혁진상'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문혁5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진상을 요구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는 정말 부끄러운 국민들의 인식수준이다. 2년전에 필자는 글을 쓴 바 있다. '부인파'는 문혁의 폭력박해를 부인한다. 그러나 더욱 철저한 부인방식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것은 바로 직접 문혁은 찬미하는 것이다. 오만한 학술의 전당에서 먼저 카페트를 깔아주고, 사인방의 귀신이 내려오게 해서, 사람들을 속인다. 중국문혁의 진상을 언제 잃어버리게 될까?
5. 문혁은 사회개조의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가?
문혁피해자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은 필자의 중요한 업무였다. 사실상 대규모의 박해가 문혁의 가장 주요한 장면이다. 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문혁의 가장 주요한 죄악이다. 필자는 피해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내려갔고, 페이지마다 남겼다. 그리고 500여페이지의 <문혁피해자>라는 책을 인쇄했다. 이는 박해, 감금과 살륙에 대한 조사적인 서술이다.
박해와 사망외에 필자는 문혁이 실행한 사회혁명내용을 분석해보았다. 필자는 <문혁피해자>라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문혁은 그 이상이 있었다. 간단히 개괄하면, 일종의 '일원화'된 권력균형과 견제가 없는 고도로 집중된 권력구조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시장도 없고 상품생산도 없고 심지어 화폐도 없는 경제를 건립하려는 것이었다. 그저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의 의견을 표시하는 매체를 건립하여 전체인민을 나사못처럼 '사(私)'라는 관념은 순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외에 혁명의 목적을 위해 혁명지도자들이 '적'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때리고, 가두고, 죽이는 것이다.
문혁의 박해와 문혁사회혁명은 필자의 생각에 문혁역사저작에서 가장 주목하는 두 개의 층면이다. 당연히 상당한 정도로 피해자, 박해문제도 사회혁명의 일부분이다; 생각해보라. 홍위병이 교장과 선생을 때려죽이고(내가 조사한 베이징의 10개 여자중학에서 1966년 '홍팔월'에 3명의 교장과 3명의 교사가 홍위병에게 맞아죽었다. 자세한 점은 <안개속의 문혁역사>2014를 보라). 스승을 존중하고 도를 잇는다는 중국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가? 국가주석 유소기가 비밀장소에 감금되어 학대받아 죽었다. 스탈린식의 '보여주기식의 공개재판'도 없었고, 진2세시대에 감옥에서 이사에게 죄를 인정하게 하던 계책도 없었다. 그런 것들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중국사회의 사법제도의 근본적인 혁신인가. 그러나 필자는 양자의 구분과 관련을 설명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박해를 통해서만 대규모의 상리에 위배되는 사회개조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춘교는 '상해시혁명위원회' 주임을 9년간 맡았다. 상해에서 사람들의 모호한 인상 속에 비교적 온화하고 비교적 질서있다고 남아 있지만, 기실 상해의 잔인함은 아주 심각했다. 1966년 봄, 북경의 홍위병이 주먹과 곤봉 및 혁대로 1,772명을 때려죽였다. 상해에서는 같은 기간에 11명이 맞아죽었다. 다만 그때 장춘교는 상해에서 아직 최고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나중에 장춘교가 앞장서서 상해의 전 지도자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후, 상해의 박해와 잔인함은 전국에서 가장 심했다.
필자는 <문혁투쟁회>에서 '투쟁회'는 중국특색의 박해방식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문혁은 위에서 언급한 스탈린식의 '공연식의 공개재판'을 거치지 않았다. 즉 거짓재판도차도 하지 않았다. 문혁은 대량의 '투쟁회' 형식을 취한다. 상해는 중국최대의 공업도시이다. 이런 장점을 이용하여, 상해는 TV'투쟁회'를 만들어 낸다. 1967년 상해는 51번의 TV'투쟁회'를 개최했다. 각 단위조직이 집단적으로 보았다. 보고난 후에는 집단적으로 따라 했다. 시청자가 1억을 넘었다
문혁의 또 다른 '특색있는 박해'는 '우붕(牛棚)'이다. 즉 각 공작단위와 학교안에 사설감옥을 두고, 그 단위의 '우귀사신(牛鬼蛇神)'을 가두었다. 필자는 <문혁우붕>을 썼는데, '우붕'에서 갇힌 사람은 각종 괴롭힘과 구타, 모욕을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했다. 관방문건에서 최초로 '우붕'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상해이다. '우붕'이라는 박해방식이 정식화 사회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시범효과가 있었다. 상해당국은 수백명을 가두어둘 수 있는 '대우붕'까지 만들었다.
1968년 4월, 상해당국은 상해교향악단의 지휘자 육홍은(陸洪恩)을 총살한다(27일), 그리고 북경대학 1957년 '우파학생 임소(林昭)를 총살한다(29일). 이는 상해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한 사형이다. 최고법원은 당시 사형에 대한 심사허가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전국에서 최초로 아무런 형사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문화인'을 총살하는 선례가 된다. 임소가 총살당한 후, 당국은 그녀의 모친에게 5푼의 총알비를 받아낸다. 이런 잔인한 방식은 나중에 다른 지방에서도 본받았다. 관방통계에 따르면, 상해문혁때 '비정상사망'한 사람의 수는 11,510명에 이른다. 비투를 당한 17만명은 9개 유형의 '계급적인(階級敵人)'으로 나눈다. 노동자들 속에서도 그 비율이 적지 않았다.
문혁을 변호하는 사람은 문혁에서 대규모사망과 박해가 일어난 것은 '통제상실'로 인한 것이거나 '필요한 댓가'라고 한다. 이런 변호가 얼마나 황당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그런 '댓가'를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장춘교가 폴포트에게 말한 '순화'와 '청세'로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어냈는가?
정치적으로 문혁은 '일원화'영도의 집행을 제출한다. 실제로는 개별권력자가 사상유례없이 하고싶은대로 형벌을 가하는 것이었다. 5년동안 모택동 자신이 두 명의 후계자를 세운다. 유소기와 임표. 그리고 전후로 모두 '계급적인'으로 만든다. 한명은 비밀리에 구금되고, 한명은 미스테리한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한다. 스탈린은 그의 정적인 부카린등에 대하여 그럴 듯한 재판은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유소기와 임표에게 아무런 법률적인 재판을 거치지 않았다. 전중국의 모든 대학, 중학, 소학교의 교장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홍위병학생들에게 폭력과 모욕을 당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는 '비판'과 '투쟁'을 당한다. 거의 모든 과장급이상의 간부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심사를 받고 반성을 해야 비로소 '해방'되었다.(이런 '간부해방'의 방식은 문혁의 가장 황당한 모습중 하나이다. 가해자가 박해를 잠시 멈추는 것을 해방이라고 불렀다).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을 무너뜨리고, 전국을 군대가 접수한다. 마치 계엄같은 체제로, 무정부상태를 대체했다.
경제적으로, 도시주민은 길가에서 1잔에 2푼짜리 끓인 물을 파는 것도 금지되었다. 노동자들의 상여금은 취소되고, 여러 해동안 급여가 오르지 않았다. 물질은 극도로 결핍된다.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농촌 대약진때 공공대식당을 연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사한 후에야 비로소 겨우 해산된다. 문혁때, 농민에 대한 양보정책은 다시 '주자파'의 죄행이 된다.
크메르루즈가 학교를 폐쇄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혁때 대학, 중학, 소학교는 모두 장기간 수업이 중단된다. 대학은 5년간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 나중에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겨우 신입생을 채워야 했다. 1969년 8월, '1호통령'이 나온다. 많은 대학들은 단기간내에 도시에서 나가야 했다. 예를 들어, 나중에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비운 리허설인 셈이다. 북경의 대학 중에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만이 남도록 허가받는다. 문혁전에 북경에는 55개의 대학이 있었는데, 문혁이 끝났을 때는 겨우 18개만 남았다. 일부대학의 강의건물은 군인주택으로 바뀌었다. 북경대학을 8년간 접수했던 것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왕부정위(王副政委)'였다.
문혁의 새로운 사물이 나타난다. 적각의생(赤脚醫生), 양판희(樣板戱), 혁명위원회, 농공병대학생, 지식청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그중 사회에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은 '지식청년의 하향'이었다. 통계숫자를 보면, 모두 1600만명의 지식청년, 도시인구의 약 1/6이 농촌으로 보내어진다. 상해는 중국최대의 공업도시이다. 1969년 초중을 졸업한 사람은 모조리 머나먼 농촌으로 보내어진다. 이 운동은 일석삼조였다. 학교를 약화시키고, 도시를 약화시키고, 가정을 약화시켰다. 완전히 무책임하게 최소한의 사회생태를 파괴시키는 무식한 의사결정이었다. 후환이 무궁했다. 문혁을 변호하는 사람은 '상산하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취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6. 모택동의 사망은 장춘교가 잔혹한 유토피아로 개조하려는 것을 중단시키게 된다.
문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긍정하고 미화하는 '신사물'은 진상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을 미혹시켰다. 지금까지도 문혁이 개혁개방을 위한 사전준비시험작업이라고 왜곡해서 인식한다. 우리는 앞에 언급한 장춘교가 1975년 4월에 쓴 장편의 글 <자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독재를 논한다>의 깊은 의미를 보도록 하자. 이는 장춘교가 쓴 가장 중요한 문혁이론문장이다. 또한 문혁최후의 중요한 문장이다. 모택동 당시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장춘교는 '상품생산, 화폐교환, 노동에 따른 분배'는 왜 '자산계급법권'에 속하는지를 논하고 '무산계급독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단기간내에 전민소유제와 집체소유제 이 두 가지 소유제가 병존하는 국면하에서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소유제가 존재하는 한, 상품생산, 화폐교환, 노동에 따른 분배는 불가피하다. '이는 무산계급독제하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농자본주의요소의 발전, 신자산계급분자의 출현도 불가피하다. 만일 제한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와 자산계급이 금방 발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했다. 계속 상품생산, 화폐교환, 노동에 따른 분배를 해야 한다고. 그것이 가져올 위해에 대하여 우리는 이미 계속 적절한 방법을 써서 제한해 왔다. 무산계급독재는 군중의 독재이다. 우리는 믿는다. 광대군중이 당의 영도하에 역량과 실력을 가지고 자산계급과 투쟁을 진행할 수 있다고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장춘교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아주 분명했다. 경제발전의 시기가 성숙되면, 그들은 크메르루즈가 실행한 순화된 사회주의공유제를 실시할 것이라는 것이다. 무산계급독재의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상품생산, 화폐교환을 소멸시킬 것이다. 이를 통해 영원히 자산계급을 없애버린다. 이런 잔혹한 반인류적인 유토피아계획은 모택동시대의 '가난'하에서 실현시킬 수 없었을 뿐아니라, 설사 물질생산이 풍부해지더라도 강대한 제지에 부닥칠 것이다. 더욱 긴박한 현실은 그들이 이미 되돌아갈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질병은 의사도 2년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알았다. 모택동의 사망은 장춘교의 이 계획을 중국에서 실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혁의 종결은 기실 잔인하고 황당한 사회개조계획에 대항한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우연한 사건인 폭군의 사망이 문혁을 중단시켰다. 이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장춘교의 사회개조계획을 취소시켜버렸다는 것은. 그리하여 인민은 더욱 큰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장춘교는 모택동의 장레위원회에 서열4위로 올라간다. 그해에 장춘교는 61세였다.
모택동(83세에 죽음)이 등소평(93세까지 살았음)처럼 장수했더라면, 장춘교는 그의 크메르루즈식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8급급여제는 일찌감치 실행이 중단되었고, 상해에서는 문혁전의 노동자의 상여금(노동에 따른 분배가 남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도 급여에 통합된다. 즉, '상여금'과 다른 노동에 따른 보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모택동이 말한 '구사회와 별 차이가 없다'는 3가지(8급급여제, 노동에 따른 분배, 화폐교환)중에서 오직 화폐교환만이 남았을 뿐이다.
폭력적인 박해수단으로 사유제 및 그와 관련된 문화를 파괴했다. 이는 실제로 숭고한 구호하에 잔혹한 현실만 남게 했다. 이런 사정은 러시아에서도 발생했고 ,중국에서도 발생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발생했다. 장춘교는 유일하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인식과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7. 장춘교를 '요마화'하는 것인가? 누가 주수견(周瘦鵑)을 해쳤는가?
오늘날 장춘교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장춘교가 '요마화'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절대 아니다. 필자는 글을 써서 지적한 바 있다. '특별법정'은 임표와 '사인방'에 대한 판결에서 문혁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북경대학에서의 피해자수(63명)와 비슷하다. 만일 상해 복단대학과 화동사범대학의 피해자합계(80명)와 비교하면 십여명이 적다. 오랫동안 상해를 장악했던 장춘교의 죄악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2007년, 필자는 프랑스의 한 간행물 '관방역사와 평행역사"에 글을 쓴 바 있다. 이 글의 중문본은 2012년에 이르러 발표되었다. 제목은 <피해자에 이름을 넣어야 하는가: 문혁역사기록중의 주요 의견불일치>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혁적극분자들이 쓰는 책에서도 피해자를 언급하지 않는다. 2004년, 두 권의 서경현(徐景賢)과 섭원재(聶元梓)의 문혁회고록이 홍콩에서 출판된다(서경현의 <십년일몽>과 섭원재의 <섭원재회고록>). 서경현과 섭원재는 문혁기간동안 아주 유명했다. 아주 높은 권세와 직위를 가졌다. 서경현은 상해시혁명위원회의 3인자였다(장춘교, 요문원 바로 다음이었다). 문혁후에 18년유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섭원재는 북경대학혁명위원회 주임이다. '내부통계'에 따르면 상해문혁대 11,150명이 박해로 죽었다. 서경현은 그의 432페이지에 이르는 글에서 사망자의 이름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섭원재도 책에서 그녀가 17년유기징역을 받은 점에 억울하다고 하였지만, 북경대학에서 피해를 받아 죽은 63명에 대하여는 전혀 미안함을 표시하지 않았다. 서경현과 섭원재는 충분히 총명한 자들이다. 그들이 피해자를 언급하면 사람들에게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아예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장춘교의 책에서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장춘교의 책에 여하한 피해자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더더구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없다. 마찬가지로 문혁의 가해자이면서, 그들의 피해자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 일치한다. 그들은 잊었는가? 아니면 그들은 한번도 피해자들에게 측은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일까? 맹자는 측은지심은 모든 사람이 가졌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문혁지도자들에게는 측은지심이 없다. 연민의 마음도 없고, 동정심도 없고, 더더구나 죄를 회개하는 마음도 없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요마'인가?
나는 여러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세익스피어의 멕베드에 나오는 멕베드부부가 국왕을 암살하여 왕위를 얻은 후의 내심의 불안과 공포를. 2012년 신경극 <적벽>의 마지막에 적벽대전을 승리한 제갈량은 혼자 강변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과 사병이 죽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술픔에 잠긴다. 만일 장춘교와 서경현이 이 두 극을 보았다면, 그들의 내심에 무슨 반응이 있었을까? 그들은 마음 속으로 멕베드와 제갈량을 조롱하지 않았을까?
<문혁피해자>에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주수견'이 있다. 1968년 8월 11일, 주수견은 우물에서 "자살"한다. 자살에 ""를 넣은 이유는 이게 보통 의미에서의 자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구타당하고, 모욕당하고 갇혀 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자살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아예 자살로 위장한 경우도 있었다. 문혁때 중국역사상 그리고 아마도 세계역사상 최대규모로 '자살'이 일어난다. 주수견의 작은딸인 주전(周全)은 이런 말을 했다. 1968년 3월, 장춘교는 소주에서 서로 '무투'를 벌이던 조반파의 두 파인 "척파(踢派)"와 "지파(支派)"를 접견한다. 그들에게 연합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자본주의복벽을 추구하는 주수견을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주전은 1968년때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녀는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주수견이 <신보>의 편집인으로 있을 때, 장춘교가 투고한 글을 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주전은 집안에서 열번째 아이이다. 부친은 '십전십미'에서 단어를 따와서 주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녀는 청수하고 문아하며 성의가 있었다. 필자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주수견은 1966년 '투쟁'을 당한다. 그리고 세번이나 책을 불살라야 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문혁때 모든 작가들은 곽말약과 모순을 제외하고 투쟁과 비판을 당했다. 다만 주수견은 1968년 장춘교의 특별지시로 소주조반파들이 투쟁하도록 요구한 것이 그의 사망을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다.
필자는 1968년 3월 15일의 <소주농공보>의 제1면 헤드라인으로 "소주시혁명파가 단결일치하여 공동으로 적을 상대하자" "본시의 앙대파 대표는 상해에서 소주시위원회를 조정하여 충실하게 획대하는 방안을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장춘교가 양파와 얘기한 내용에 주수견에 대한 것이 있다. 상해사회과학원 김대륙(金大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춘교는 이렇게 말했다: "이 도시의 일부 반도, 특무, 한간(漢奸), 그리고 한 무리가 있다. 그들은 절대 무산계급이 이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사회주의개혁을 진행하고 사회주의건설을 진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적은 절대로 기꺼이 원치 않을 것이고, 그들은 항상 복벽하고자 한다. 그들은 해방을 본 이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보아 온 그 자본주의복벽, 봉건주의복벽세력이다. 내가 보기에 소주는 적지 않다. 내가 보기에 무슨 주수견같은 무료한 자들은 사람들에게 전문적으로 분재를 보여주며 이런 짓을 벌인고 있다. 그가 완전히 취미로 하는 것같은가? 그게 복벽을 꾀하는게 아닌가? 그런 것들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투쟁의지를 와해시키는 것이다. 내가 소주에 몇번을 갔는데, 주수견의 집에는 간 적이 없다. 내가 거기를 가서 뭘한단 말인가. 그것들을 보라고. 한번 가기만 하면 아마도 그는 반나절은 허풍을 떨 것이다. 나는 그저 이런 예를 들었다. 이런 자들 복벽하려는 자들 수구적인 세력은 이 소주를 차지하려고 하며, 반봉건반식민지의 색채를 남기려고 한다. 항상 이 도시를 뒤로 밀리게 만들고 모택동사상의 학교로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이 붉은 대학교는 그들이 절대로 하기를 원치 않는다."
분재를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복벽인가, 봉건주의복벽인가? '반도, 특무, 한간'인가? 죽어야할 죄인가? 중국문학을 연구하는 한 외국교수는 장춘교의 이 말을 보고는 나에게 말했다: 이런 말은 그저 중학생이 싸울 때 하는 말같다. 책임있는 정치인이 할 말은 아니다. 나는 말했다: 그들은 한번도 책임있는 정치인인 적이 없었다. 다만 사람들을 박해하는 면에서는 그들이 절대로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효율도 아주 좋았다. 이 교수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제자중에 셜록홈즈소설의 중국번역본을 연구하는 학생이 있는데, 주수견이 바로 셜록홈즈의 초기 번역자중 한명이라고.
나는 섭영렬(葉永烈)이 편찬한 "장춘교저작연표"를 살펴보았다. 장춘교가 1930년대 <신보>에 3편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세의 투고자의 글을 편집자가 실어주지 않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장춘교는 30년후인 1968년까지도 그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권력으로 보복하고 주수견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다시 30년이 지나서 그는 <옥중가서>를 썼다. 그때 그는 정말 그가 해친 사람들을 잊었단 말인가? 장춘교가 피해자를 말살시킨 방식은 고의적이다. 계획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그가 요마는 아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이고 범죄자이다.
문혁때의 박해와 살륙은 '집단적'인 박해와 살륙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전중국의 교장이 구타, 모욕과 투쟁을 당했다고 적었다. '교장'도 집단이다. 어떤 사람은 가해자를 위해 변호한다. 이들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위는 혁명에 필요했다고. 무슨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왜냐하면 서로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당연히 이치에 닿지 않는 변호이다.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혁명'은 일종의 범죄이다. 아무런 합리성이랄 것도 없다.
사실을 살펴보면, 필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장춘교는 문혁을 일으키고 발전시킨 주요설계자이면 고취자중 하나이다. 또한 인민을 박해하고 급진적인 사회개조를 실행한 집행자와 지도자중 하나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잔인하고 냉혹한 자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빈곤과 결핍을 조성했고, 인권적으로도 잔혹과 폭력을 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 황무지와 빈척을 불러온다. 그는 누구와 비견할만한 좋은 사람이 아니다.
2016년, 문혁을 일으킨 50주년이다. 이 해는 금방 지나갔다. 다음 해에도 문혁때 박해하고 살륙했던 '부인파'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 다만, 목격자들이 계속하여 역사를 증언한다. 역사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미리를 계획하는 기초이다. 비록 장춘교라는 유령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지만, 문혁에 관한 거짓말이 아직도 돌아다니지만 링컨이 얘기한 것처럼, 너는 모든 사람을 일시 속일 수 있고, 일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사십년전에 들은 링컨의 이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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