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진생(陶晋生)
북송의 멸망에 관하여 역대이래로 반성하는 글이 아주 많았다. 본문에서는 주로 북송이 요,금관계를 처리할 때의 여러가지 실수를 정리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1. 연금멸요(聯金滅遼)의 성공은 아주 요행이었다.
송휘종 정화원년(1111년) 구월, 정윤중(鄭允中), 환관 동관(童貫)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연(燕)의 땅에 사는 마식(馬植)이라는 사람이 동관을 만나, 요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진과 연합하면, 연의 땅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관은 그의 의견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정화5년(1115년) 마식은 요나라에서 송나라로 넘어오고 이름을 이양사(李良嗣)로 바꾸고, '연금멸요'의 계책을 올린다. 송휘종은 그를 접견한 후 이양사에게 조(趙)씨성을 하사한다.
당시의 태재(太宰) 정거중(鄭居中)은 여진과 연합하는 책략에 반대하고, 태사(太師) 채경(蔡京)이 송과 요의 양국이 맺은 화약(和約)을 준수하지 않는 것을 질책한다. 채경은 책임을 송휘종에게 떠밀었다: "황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정거중은 분노하여 소리친다: "백만의 생령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공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중에 그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정화7년(1117년) 가을, 요나라사람 고약사(高藥師)가 바닷길로 등주(登州)에 이른다. 그리고 여진이 이미 요의 땅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알려준다. 다음 해 오월, 동관은 '평연책(平燕策)'을 올린다. 팔월, 송나라조정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십이월,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사람을 보내 송나라조정에 국서(國書)와 선물을 보낸다. 선화2년(1120년) 삼월, 송나라조정은 사람을 보내 아골타와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약속한다. 아골타는 송나라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란은 무도하고, 내가 이미 격패시켰다. 마땅히 거란의 영토는 모두 우리의 땅이 되어야 한다. 남조황제의 호의를 생각하고, 연경이 원래 한의 땅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특별히 연운(燕雲)은 남조에 주겠다."
아골타는 세폐(歲幣)로 50만을 요구한다.
그외에 쌍방은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약정한다. 송군은 연경을 공격하고, 금군은 평주, 송림에서 고북구로 향한다. 만일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약정은 집행되지 않는다. 동시에 쌍방이 출병하며 고북 송정 및 평주동쪽의 유관을 경계로 하여, 양군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로 한다. 칠월, 아골타는 다시 사신에게 국서를 가지고 송나라조정으로 가게 한다. "연의 땅을 송나라에 넘겨주는 것을 허락하며, 송나라조정이 요나라에 보내던 세폐를 금나라에 보내야 하며, 요나라와 화의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약속대로 협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의 약정은 집행할 수 없다"
선화4년(1122년) 연초, 금군이 중경(中京)을 점령했다.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는 서경(西京)으로 도망친다. 야율순(耶律淳)은 연경에서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사월 금군이 서경을 점령하고 천조제는 서하(西夏)로 도망친다. 동관은 사람을 연경에 보내어 투항을 권하나 실패한다. 야율순은 사람을 시켜 송진종(宋眞宗), 송인종(宋仁宗)의 화상을 꺼내오게 하며 송나라사람들이 약속을 어겼음을 질책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번속국(藩屬國)이 될 생각은 있다고 말한다. 동관은 여진과의 약속이 있기 대문에 요나라와 화의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송군에 연경을 공격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요나라군대에 격패당한다. 조금 후 요나라의 탁주수비장수 곽약사(郭藥師)가 상승군 정예병력 8천을 이끌고 송나라에 투항한다. 송군은 탁주, 역주 두 주를 점령한다. 이때 송나라조정의 정책은 만일 송군이 승리하여 연경을 차지하면, 금군이 장성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만일 연을 취하지 못하면 금군을 장성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여러번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마확(馬擴)은 절대로 금나라군대를 장성안으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양사는 송군은 연을 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세폐로 유혹하여 금군이 송군을 대신하여 연경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십월하순, 동관은 송군에 다시 연경을 공격하도록 명했으나 역시 실패한다.
십이월, 금나라의 완안아골타가 연을 공격한다. 연경의 요나라군신은 도망치고 수비장수들은 문을 열고 투항한다.
선화5년(1123년) 송,금 양국은 조약을 체결한다. 금나라는 연경과 육주의 땅을 양보하고, 송나라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요나라에 보내던 세폐를 금나라에 바치기로 한다. 그외에 연경에서 거둔 세금도 보내주기로 한다. 나머지 조문은 송나라와 요나라의 조약과 대체로 같았다. 여기에는 "간첩과 밀약하거나 변방사람을 유인하여 교란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같은 해 사월, 동관, 채유(蔡攸)는 군대를 이끌고 연경으로 들어간다. 변경의 조야는 크게 경축하며 송태조, 송태종이 달성하지 못했던 목표를 지금 달성했다고 좋아했다.
연금멸요의 외교는 이렇게 끝이 난다. 송나라와 금나라가 힘을 합쳐서 요나라를 협공했다. 이 과정에서 송나라는 아무런 공로가 없었다. 그래도 연경과 육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송나라가 개국이래 한번도 획득하지 못했던 거대한 성취였다. 그러나, 아무런 공도 없이 이익을 얻는 것은 상당히 요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사람들은 금나라사람들의 군사력을 봤으면 당연히 반성하고 이때부터 군사를 강화하고, 국방설비를 완비해야 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금나라와의 평등조약은 쉽지 않게 얻어낸 것이다. 송나라는 마땅히 역대선조들이 요나라와의 조약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나라에 대하여 조약을 지켰어야 했고, 양국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존중했어야 했다.
그러나, 송휘종은 그 점을 보지 못했다.
2. 송휘종은 멍청하게 조약을 위반한다.
송금간에 조약을 체결한 해의 팔월, 완안아골타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오걸매(吳乞買)가 즉위한다.
십일월, 금나라장수 완안알리불(完顔斡離不, 일명 完顔宗望)는 평주를 포위공격한다. 원인은 이러했다: 전 요나라 흥평(평주)절도사인 장각(張覺)은 금에 투항한 후, 금나라조정은 그를 임해군절도사, 평주지주로 임명한다. 금나라가 연경을 송에 넘겨준 후, 장각은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금나라의 연경재상 좌기궁(左企弓)등을 죽이고, 평주를 송나라에 귀부시킨다. 성공에 취한 송휘종은 조약을 위반하고, 장각을 받아들이는 엄중한 잘못을 저지른다. 조양사는 조약상의 '반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하면서 반란자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지만, 조정은 장각이 절도사를 세습하도록 윤허한다.
그리하여, 완안알리불은 송나라조정에 장각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송나라조정은 부득이 장각과 용모가 비슷한 죄수를 죽이고 그 수급을 금나라에 보낸다. 그러나 금나라사람이 이를 알아차린다. 결국 송나라조정은 장각을 처형하고 그 수급을 금에 보내야만 했다. 송나라조정은 반란자를 받아들였다. 이는 확실히 화약을 위반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나라에 출병의 핑계를 주었다. 송나라에 귀부한 곽약사는 이렇게 선언한다: "금나라사람들이 장각을 내놓으라고 하면 송나라조정은 장각을 내준다. 만일 금나라사람들이 곽약사를 내놓으라고 하면 송나라조정은 나를 내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곽약사의 상승군도 해체되어 버린다.
선화7년(1125년) 십월, 금태종 완안오걸매는 조서를 내려 송을 공격한다. 금나라의 원수부는 중원에 격문을 보낸다: 송나라가 맹약을 위반한 것을 질책하고(장각을 몰래 받아들인 것은 맹약을 위반한 행위이다) 금나라변방의 관민을 유인하여 받아들이며, 세폐를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죄를 벌하고자 한다. 십일월 하순, 완안알리불은 계주(薊州)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십이월초, 완안알리불은 연경을 공격하고, 곽약사가 투항한다. 송군의 방어선은 와해된다. 십이월중순, 송나라조정은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하고자 한다. 송휘종은 죄기조(罪己詔, 황제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는 반성문)를 내리고 화석강(花石綱)을 없애고, 황위를 태자 조환(趙桓)에게 넘겨준다. 즉 송흠종(宋欽宗)이다. 그리고 송휘종은 변경을 떠나 강남으로 간다.
정강원년(1126년) 정월, 완안알리불은 황하를 건너 변경을 공격한다. 송나라조정은 사신을 보내어 금군과 담판한다. 완안알리불은 송나라조정에 통첩을 보내어, 송나라가 맹약을 위반하고 장각을 받아들인 것을 질책하며, 송군이 "병력이 많으면서도 나의 숙련된 강한 정예병사를 막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송나라조정은 다시 사신 이절(李棁)을 완안알리불에게 보낸다. 그가 떠나기 전에 송흠종은 이렇게 말한다. 세폐로 350만을 지급하겠다고. 이절은 완안알리불과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는다. 태원, 중산, 하간의 3개 진(鎭)을 금에 넘겨준다. 금나라황제를 백부(伯父)로 삼고 배상금으로 금 5백만냥, 은 오천만냥, 소말 각 만필, 견단(絹緞)각 백만필을 지급한다. 금나라의 사신은 맹약서를 가지고 송나라조정으로 가서 화약을 체결한다.
3. 송흠종은 성하지맹을 체결하고서도 여전히 이리저리 흔들린다.
송흠종이 금나라와 성하지맹을 체결하여, 하북, 하동의 3진을 할양하고, 세폐를 증가시켰다. 이런 굴욕적인 조약으로 그는 완안오걸매와 백부와 조카의 관계가 도었다. 송나라는 여전히 대송이라 자처하지만, 대등한 지위는 잃어버렸다. 그외에 송나라조정은 강왕(康王) 조구(趙構)와 태재(太宰) 장방창(張邦昌)을 인질로 보낸다. 정월 십일, 장방창과 강왕 조구는 사신으로 간다.
금군이 철수한 후, 종사도(種師道)와 요평중(姚平仲)의 원군이 경사에 도착한다. 주전파인 이강(李綱)은 의화에 반대하고 영토할양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월 일일 밤, 요평중은 보병,기병 만명을 이끌고 금나라군영을 습격하나 실패로 끝난다. 그는 처형될 것이 두려워 도주한다. 완안알리불은 서신을 보내어 송흠종에게 주전파인 이강과 종사도를 파직시키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주전파의 신료들은 여전히 이강을 조정에 남겨두도록 요구한다. 이월 오일, 태학생 진동(陳東)등이 상소를 올리고, 군민이 미리 약속하지 않았지만 집결하여 항의하는데, 수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재집(宰執) 이방언(李邦彦)등을 욕하고, 내시 20여명을 살해한다. 송흠종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이강을 상서우승(尙書右丞), 경성사벽수어사(京城四壁守御使)로 임명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국서를 보내 완안알리불과 결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삼진을 할양한다. 그러자 금군은 군대를 되돌린다. 이월 십칠일, 금나라군대가 황하를 건너 북으로 간다.
다만 조야에서는 여전히 삼진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그리하여 며칠만에 정책은 뒤집힌다. 삼월 십육일, 송흠종은 삼진을 고수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사월, 태상황 송휘종이 경사로 돌아온다. 이때 여러 곳의 군대도 속속 변경에 도착한다. 대신들은 금나라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영토를 할양하지 않으려 한다. 완안점한(完顔粘罕)의 사절중에서 연인(燕人) 조륜(趙倫)은 송나라사신에게 말해준다. 요나라에서 금나라에 항복해온 장수 야율여도(耶律餘睹)가 금나라에 불만이 많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송나라의 재상 서처인(徐處仁)과 오민(吳敏)은 그의 말을 믿고, 납서(蠟書)를 조륜에게 가져가게 한다. 그러나 조륜은 그 납서를 완안점한에게 바친다. 완안점한은 대노하여 사라믈 보내 송나라조정을 질책한다.
칠월, 송흠종은 다시 사신을 보내어 금나라의 원수에게 삼진을 할양하지 않고, 삼진의 세수를 세폐로 바치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완안점한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삼진의 토지와 인민을 할양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화의는 없다." 같은 달, 채경이 병사한다. 송나라조정은 사람을 보내 동관, 조양사를 살해한다. 팔월, 이강은 사직을 청한다. 구월, 금군이 다시 침입한다. 완안점한은 태원을 점령한다. 명을 받아 삼진을 지키던 송나라장수들은 모조리 패배당한다.
십일월, 완안알리불과 완안점한은 나뉘어 황하를 건넌다. 십사일, 송흠종은 백관을 모아 삼진을 할양하는 것의 이폐(利弊)를 논한다. 범종윤(范宗尹)은 앞장서서 할양을 주장한다. 이미 할양하기로 약속했다면 실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률(何㮚), 매집례(梅執禮), 손부(孫傅), 여호문(呂好問), 홍추(洪芻), 진회(秦檜), 진국재(陳國材)등 36명이 반대한다. 하북은 천하의 사지(四肢)이며, 천하는 조종의 천하이다. 흠종의 천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송흠종은 할양을 결정한다. 그리고 사신을 완안점한에게 보내어 삼진을 할양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완안점한은 사신에게 말한다: 삼진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황하를 경계로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제 이미 사신을 변경으로 보냈고, 황하를 경계로 하겠다고 했다. 삼진의 일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후 금나라의 양로대군은 변경을 포위한다. 윤십일월초에 공성을 시작한다. 이십오일, 금군이 성을 넘고 변경은 함락된다. 윤십일월 삼십일 송흠종은 성밖으로 나온다.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점한은 사람을 보내어 송흠종에게 투항서를 올도록 요구한다. 송흠종은 어쩔 수 없이 투항서를 올린다. 내용은 금나라사람에 의해 여러번 수정되고 그 안에는 "관군재퇴(官軍才退), 신서우투(信誓又渝)"라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송흠종은 금나라사람에게 조씨(趙氏)를 보전해달라고 애걸한다. 송흠종은 두 금나라장수와 의화(議和)하고 완안점한은 황하를 경계로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송흠종을 궁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때 금나라사람들은 아직 조씨의 북송정권을 없앨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 송나라정부에 문적(文籍), 군기(軍器)를 내놓으라고 하고, 개봉성내의 금은보화, 각종 서적과 장인을 수색한다. 재물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동북으로 가져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송흠종이 성으로 되돌아오자, 봄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사람들은 환호작약했다고 한다.
4. 금나라는 송나라황제가 약속을 어긴 것을 질책하고, 장방창을 황제에 앉힌다.
다만 조금 후 금나라사람들은 생각을 바꾸게 된다. 나중에 건염원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부방(傅雱)의 보고에 따르면, 금나라의 장수 완안알리불의 태도는 비교적 온화했다. 조씨조정을 보존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완안점한은 완안올실(完顔兀室)의 이견을 들은 후 전략을 바꾸어 조씨를 폐지하고 다른 성씨를 세우기로 한다.
경성의 군신들은 마지막 노력을 했다. 두번이나 금나라원수부로 글을 보내어 동관, 조양사, 왕보(王黼)등이 망녕되이 사간을 일으켜 모조리 참했다고 해명하면서, 송휘종이 간신의 말을 들었고, 어린황제(송흠종)은 대신들이 잘못 이끌어서 일어난 일이니, 금나라에서는 새임금을 보전시켜주거나 혹은 조씨자제중 현명한 자를 골라서 황제로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금나라장수는 사신으로 하여금 송나라신하들에게 이성의 새로운 황제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여러 신하들은 부득이 장방창을 추천한다.
삼월 칠일, 금나라 원수부는 장방창을 대초(大楚) 황제로 앉힌다. 수도는 금릉(金陵)으로 한다. 금나라에서 화북을 침입할 때, 여러번 격서로 그들이 한 행위는 송휘종, 송흠종이 맹약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장방창을 황제로 세우는 문서에서도 다시 한번 송나라를 견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친의 무도함이 이전에 있었음에도 자식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래서 병사와 장수를 보내어 그 죄를 물은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군사행동이 합법적이고 합리적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금나라 원수부가 장방창을 황제로 세운 것은 중원의 백성들에 대한 금나라의 은덕이라고 말한다. 송나라와는 맹약을 체결했고, 원래는 서로 잘 통할 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송나라에서 맹약을 위반하여, 송나라에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 황제는 황위를 물려주면서 애걸복걸하면서 삼진을 할양하겠다고 하고 새로운 맹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먹이 마르기도 전에 맹세를 어겼다. 그리하여 금나라는 조씨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고, 계속 이 영토를 차지하게 할 수 없다. 그리하여 황하이남에 또 다른 정권을 세워 금나라의 병번(屛藩)으로 삼는다.
장방창정권은 실제로 후진의 석경당보다 못한 괴뢰정권이었다. 금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사후수습을 하고, 뒤의 한걸음 더 나아간 대계를 도모하고자 했다.
사월 일일, 금군이 되돌아간다. 송휘종, 송흠종의 두 황제를 끌고가고, 백관, 학자, 후궁, 궁녀, 태감, 장인, 그리고 궁중과 정부의 예기와 서적을 압송한다. 또한 긁어모은 대량의 금은재화도 북으로 가져간다. 금나라사람들은 또한 백성들도 끌고간다. 남녀중 북으로 끌려간 사람이 십여만에 이른다. 그리고 변경성이 포위되었을 때 식량이 없어, 도로에 시신이 놓여 있으면 가져가서 먹었다. 그중 아직 못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역시 잘라갔다. 금군이 철수하면서 도처에서 약탈을 벌인다. 마구잡이로 죽여서 시신의 썩은냄새가 수백리에 났다. 괴뢰 장방창을 남겨 겁난이 지나간 후의 화북을 다스리게 했다.
5. 외교관계의 관점에서 북송멸망에 대한 반성
북송의 멸망에 대하여 평론한 사람들은 아주 많다.
남송때의 사람 섭적(葉適)은 다른 나라와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연금멸요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남송사람 진덕수(眞德秀)는 북송의 멸망에는 10가지 잘못이 있었다고 말했다: 조정이 크게 나쁘고, 군정이 크게 나쁘고, 천계(天戒, 재난변고)를 겁내지 않고,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충신을 죽이고 현인을 멀리했고, 소인을 함부로 쓰고, 황상을 가리고 속였으며, 가렴주구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능력없는 자에게 임무를 맡기고(동관이 사신으로 간 것), 연금멸요했다는 것이다. 진덕수는 장각과 야율여도를 받아들인 것이 근본원인이라 보지 않았다. 설사 장각사건이 없더라도, 맹약은 지켜지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송나라에 충성하는 대신으로서, 진덕수는 당연히 황제의 과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명말에 이르러, 왕부지(王夫之)는 송나라때의 여러 황제들에 대하여 엄중하게 비판한다. 북송의 멸망에 관하여, 왕부지는 특히 송휘종이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 중책이 있다고 보았다.
현대의 김육불(金毓黻)은 정강지화를 논하면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화전부정(和戰不定), 화의할지 싸울지를 정하지 못했다. 둘째, 휘종은 천하의 대임을 맡을 능력이 없었다. 셋째, 군비가 피폐했다. 그리고 원인(遠因)으로는 신구당의 당파싸움으로 국사를 돌보지 않았음을 들었다.
북송말기으 대세를 보면, 송나라조정이 연운을 회수한 후, 만일 한편으로 새로 얻은 토지와 인민을 잘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로 국방에 충실하며 군대를 정비하여 무력을 강화했다면 최소한 잠시 송요간의 평화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혼용한 송휘종과 군신은 연경을 차지한 것에 눈이 어두워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이를 경축하는 외에 수복한 강토를 어떻게 유지관리할지는 고민하지 않았고,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여 질서를 되찾을 것이며, 연경지역 백성들을 어떻게 안정시킬지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북송멸망의 원인은 주로 군신이 무능하고, 채경, 동관등은 그저 공을 세우기만 좋아하여 서로는 서하국을 평정하고자 하고, 북으로는 요나라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인력물력으로는 이런 소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 군사적으로 요나라의 연경을 공격하여 실패함으로써, 금나라에 송군의 약점이 노출되었다.
외교방면에서, 연금멸요는 반드시 잘못된 전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 전략을 집행하려면 여러 방면에서 협조가 되어야 했다. 특히 당시 금나라사람들이 중원으로 병력을 진격시킬 의향이 없었으므로 맹약을 체결했으면 송나라는 이전에 요나라와의 맹약을 지켰던 것처럼 금나라와 체결한 맹약도 지켜주어야 했다. 다만 당시 집권자들은 막 체결한 맹약도 어기고, 도망온 반란자를 받아들여서 금나라로 하여금 공격할 명분을 주었던 것이다.
이때의 송나라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도 새로 흥기하는 여진과 연합하여 일거에 거란을 소멸시키고 연운십육주를 차지하고자 했다. 결국 국력이 부족한 상황하에서 경솔하게 군사적 모험을 한 결과 비극적인 실패를 맞이한 것이다.
西汉时期的“文景之治”是盛世的代名词之一!
北宋王朝和西汉王朝建立之初的情况很相似。昔日汉高帝刘邦所开创的西汉帝国虽然幅员辽阔、人口众多,但其政治环境却并不安稳,当时内有诸侯蠢蠢欲动,外有匈奴屡屡入侵。但其统治者却始终奉行“黄老之道”,奉行无为而治的治世理念,不断地减轻刑罚,注重勤俭,稳定社会经济,尤其是汉文帝和汉景帝父子更是休养生息、积蓄国力的代表性人物,“文景之治”也逐渐成为太平盛世的代名词。
北宋王朝建立之初也是尚未实现大一统,当时虽然灭亡了南唐、后蜀等南方小国,但燕云十六州却仍属辽朝势力范围,因此北伐一度是北宋王朝的主流统治理念。但随着宋太宗屡次北伐却相继失败,再加之宋辽双方的势力确实旗鼓相当,所以北宋王朝的统一计划也不得不暂时搁浅,并将统治重心逐渐转向内部。
宋太宗北伐失败,不得不将统治重心逐渐转向内政!
内政的侧重点在维稳,统一无望的北宋王朝要想稳住赵氏江山,就必须恢复自身实力。那么该如何恢复王朝实力呢?北宋朝臣注意到,汉文帝、汉景帝前承汉高祖、吕后之基业,经过长时期的体养生息,为汉武帝霸业的实现奠定了重要基础。因此文景时期是典型的维稳阶段,其指导思想“黄老之道”也是典型的维稳思想。
北宋君臣敏锐地嗅到了汉文帝、汉景帝故事对王朝的重要意义。尤其是当北伐失利,宋太宗逐渐将统治重心转向内政后,“黄老之道”、“休养生息”也逐渐成为核心治世理念,而奉行“黄老之道”的大臣吕端也在此时颇受重用,后来更成为托孤大臣。很显然,宋太宗就是要奉行黄老思想的吕端继续贯彻“黄老之道”,继续稳定政局。
宋太宗晚年以吕端为托孤大臣,就是想让奉行黄老思想的吕端继续贯彻“黄老之道”!
此后的北宋君臣谨遵祖宗之法,适时调整统治策略,严守内政。从这点来说,汉文帝、汉景帝时期的黄老思想为北宋王朝统治策略的调整提供了实际借鉴经验。
例如汉文帝、汉景帝注重农业生产,恢复社会经济的故事也深刻影响了宋人;汉文帝劝课农事、重视水利,恢复社会生产之事,不仅仅只是援引案例,而是被宋人视作典范,逐渐落实到农业生产中;宋人生活质量相对较高,与北宋君臣以文景之治为效仿楷模有重大关系。
北宋王朝并未实现大一统,外部强敌环伺!
一、以汉文帝早立太子故事来劝告皇帝尽早确立皇储
皇储关乎王朝未来,如果皇储未定,则朝堂势必党派林立,彼此倾轧。北宋时期多位皇储的确立过程就久经波折。
诸如北宋仁宗身体欠佳又子嗣较少,群臣就建议仁宗应该及时选取贤德之人立为皇储。欧阳修就曾援引汉文帝故事道:“昔汉文帝初即位,以群臣之言,即立太子,而享国长久,为汉太宗。唐明宗恶人言储嗣事,不肯早定,致秦王之乱,宗社遂覆。”
汉文帝早立太子,所以皇位传承很顺利,为国柞长久奠定了基础,而后世的唐明宗不愿意早立皇储,所以才爆发了秦王之乱,进而导致国破家亡。此两相之强烈对比,很显然,欧阳修希望宋仁宗能以史为鉴,以朝廷为重,早立皇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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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独有偶,后来的宋英宗身体不适时,敢于直言进谏的刘庠也援引汉文帝故事,建议道:“太子,天下本。汉文帝于初元即为无穷计。颖王长且贤,宜亟立,使日侍禁中,阅四方章奏。”
刘庠此时再次以汉文帝早立太子而朝政安稳的事迹来劝谏宋英宗,而宋英宗亦深知自己的建康状况,所以最终接受了群臣建议,及时确立了皇位继承人,确保权力交接的顺利进行。
大臣刘庠援引汉文帝故事,劝谏宋英宗要早立太子!
再例如南宋光宗时,宰相留正曾上奏道:“太子,天下本。传曰:‘豫建太子,所以重宗庙社稷’汉文帝即位,即建太子。本朝皇子居冢嫡,有未出閤而正储位者。皇子嘉王既居冢嫡,出閤已久,宜早正储位,以定天下本。”
宰相留正从国家基业、宗庙社稷、嫡长子等角度,援引汉文帝早立皇储的事迹,并极力阐述早立皇储的重要性。可见,在早立皇储问题上,汉文帝故事已经成为宋臣劝谏的重要依据。
宰相留正也曾以汉文帝故事劝谏宋光宗尽早册立太子以安定朝局!
二、以文景故事来劝谏皇帝注重对朝廷官员的任免问题
人才为国之本,古人云:“天下安,注意相;天下危,注意将。”太平治世侧重于内政的自我修护。昔日宋英宗尚且只是王爷时,王广渊便受其青睐,宋英宗即位后,便提拔其入集贤院任职。
但是,司马光却认为王广渊善于逢迎,品行有失,建议对其罢黜。史载司马光进谏曰:“汉卫绾不从太子饮,故景帝待之厚。周张美私以公钱给世宗,故世宗薄之。广渊交结奔竞,世无与比,当仁宗之世,私自托于陛下,岂忠臣哉?”
在这里,司马光援引西汉时期卫绾不与太子对饮,而汉景帝也因此赏识卫绾的故事来劝谏宋英宗不可重用王广渊,此举便是太平时期官员选拔标准的细化案例。这是因为太平时期,治国安邦的重点是稳中求进,维护王朝长远发展,因此应该主要看重官员的参政能力和个人品德修养。
司马光曾以汉景帝时期卫绾不与太子对饮的故事来劝谏宋英宗应该罢黜王广渊!
相比之下,乱世用人的主观能动性更大。两宋之交政局动荡,大臣李纲虽有报国之心,却屡被谗言所扰。他曾借汉文帝与季布事坦言上书道:“昔汉文帝闻季布贤,召之,既而罢归,布曰:‘陛下以一人之誉召臣,一人之毁去臣,臣恐天下有以窥陛下之浅深。’顾臣区区进退,何足少多。然数年之间,亟奋亟阙,上累陛下知人任使之明,实有系于国体。”
在这里,李纲援引汉文帝与季布的故事,指出即便圣明如汉文帝,也难免会因疑虑而与贤人失之交臂。这无疑是在从反面劝谏当朝君主宋高宗应该知人善任,重用良才。汉文帝尚且如此,更何况两宋之交风云变幻的局势呢,李纲宦海沉浮多年,对此深为了解,虽有一番报国之心,奈何君王无意。
大臣李纲曾以汉文帝和季布故事来劝谏宋高宗应该知人善任,重用人才!
与此相反,南宋孝宗却是难遇良才。南宋孝宗常常将自身处境喻为艰难的创业期,并时时表达锐意进取之意,而大臣王十朋每次觐见宋孝宗时,也常常奏陈恢复大计。隆兴北伐之时,王十朋就曾上奏道:“天子之孝莫大于光祖宗、安社稷,因前王盈成而守者,周成康、汉文景是也。”
在这里,王十朋欲借周成王、汉文帝、汉景帝发扬祖业的事迹,来向宋孝宗传达开拓进取、克勤克俭、固守祖业的思想。借前代故事,言当代之事,汉文帝、汉景帝事迹充分应用到孝道盛行的宋朝,宋人更希望文景故事能真正深入帝王心,付诸实用。
王十朋曾高中状元,当年曾以文景时期励精图治,发扬祖业的事迹来勉励宋孝宗!
三、以汉景帝时期“七国之乱”故事来劝谏皇帝既要约束宗室,也要团结宗室
北宋王朝以兵变夺取政权,而后又提出“与士大夫共治天下”的统治理念,所以北宋王朝借鉴前朝治乱兴衰经验最为充足,常常采取各种措施来防患于未然。所谓“事为之制,曲为之防”就是其防范理念。
但尽管如此,北宋神宗时期却依然发生了赵世居谋反案。赵世居为宋太祖之后裔,赵宋皇族宗室成员。昔日宋神宗时前余姚县主簿李逢被人告发谋反,经调查其与宗室赵世居交往甚密,且皆有谋反倾向。最后赵世居被逼自杀,其家属虽免死罪,但皆从皇室中除名。
宋神宗时期曾发生了赵世居谋反案,最终赵世居自杀,其家属被剥夺皇籍!
汉景帝时期,同为刘姓宗室的“七国之乱”爆发,汉景帝平定叛乱后,下令将叛乱七国的宗室名册皆焚毁消除。但待至元光二年(公元前133年),汉武帝却下令选定七国后人继任诸侯王爵位,以此来延续宗室血脉,后世史学家常常以汉武帝此举为仁义之举。史载“至武帝元光二年,复七国宗室前绝属者,历代以为汉武之美。”
北宋大臣王岩叟将赵世居案与七国之乱作对比,将宋哲宗与汉武帝作对比,强调若无七国之乱,汉武帝的仁义之名便不能与哲宗相提并论。这其实是从侧面进谏,希望宋哲宗能够宽待与赵世居案相关联的人员。
大臣王岩叟以汉武帝恢复七国宗室子弟身份的事迹来劝谏宋哲宗应该宽待赵世居的家人!
赵世居案件本就扑朔迷离,冤枉的可能性极大,杀一儆百已起到震慑作用,不必再对相关宗室人员赶尽杀绝。王岩叟此举是为保全赵姓宗室、维护家国同构统治秩序而进谏,由此可见宋人对待朝政的现实功用态度。
事实上,纵观史料,皇族宗室斗争屡见不鲜,傲视诸国的王朝背后满是血腥残酷,唐宋王朝也不例外,在遇到重大宗室谋反案件时,宁可错杀一百,不可漏掉一人的做法如出一辙。待时局稳定,又会便宜从事,一方面意在维护宗室团结,另一方面也有为当朝统治者树立仁义形象的目的。
自古以来,封建王朝内部的宗室斗争屡见不鲜,皇帝对宗室的态度是又爱又恨!
四、以文景故事来讨论是否应该恢复肉刑
汉文帝、汉景帝的重要功绩之一是减轻刑罚,“文景之治”的赞誉很大程度上也是来源于此。只不过,如此深入人心的德政却在宋朝出现了争议。
自北宋王朝建立以后,关于恢复肉刑的争议就一直持续,待至宋神宗时期更加白热化。主张恢复肉刑的官员认为汉文帝当年废除肉刑,主要是考虑德政为先,保存民力,但如今普通刑罚早已不适应现实需求,刑罚松懈导致犯罪成本变低,经济发展使人口流动加快,普通刑罚渐失惩治之效。
汉文帝废除了肉刑,但是北宋时期的大臣却多有恢复肉刑的提议!
事实上,如果往前追溯的话,其实自东汉时期开始,恢复肉刑的声音就一直存在。但从人性及社会发展的角度来说,废除肉刑确实是仁政的重要表现,这与儒家思想十分契合。历朝历代也在极力营造善行德政、爱护民力的形象。宋神宗倾向变法,变法派则主张恢复肉刑。因此,保守派常常从人性上极力攻击“刻人肌肤,深害仁政,汉文帝所不忍,陛下忍之乎?”
时人将汉文帝废除肉刑的仁政与眼前恢复肉刑的讨论做对比,质疑统治者执政的人道主义。宋神宗虽力主变革,但在此事上,还是慎之又慎,最后恢复肉刑之议也不了了之。
宋神宗虽然比较支持改革派,但对于改革派所提出的恢复肉刑的提议,却最终不了了之!
宋人对于汉文帝、汉景帝,并不是无条件地一味赞扬,而是针对具体事宜不断讨论。大臣王安国刚回京述职时,宋神宗因其为王安石之弟,便主动召见他,问其如何评价汉文帝。王安国回答说“三代以后未有也”。这将汉文帝提到了无以复加的程度。但宋神宗却说“但恨其才不能立法更制尔”。即送神宗认为汉文帝缺乏改革进取的勇气,这种认识与神宗时期所处的大环境—王安石变法有关。
但是,王安国却冒着触怒皇帝的危险回答道:“文帝自代来,入未央宫,定变故俄顷呼吸间,恐无才者不能。至用贾谊言,待群臣有节,专务以德化民,海内兴于礼义,几致刑措,则文帝加有才一等矣。”即王安国以文帝继位后稳定政局、礼待大臣、教化百姓、减轻刑罚等功绩坚持认为汉文帝的才能实属一等。
宋神宗特意接见王安国,但王安国却与宋神宗颇有意见不和之处!
五、以文景故事来劝告皇帝御敌必先安内
虽然收复燕云十六州一直为宋臣君臣的核心目标,但在北伐失利后,宋廷也不得不暂时放弃收复计划,并将统治重心放在内政上,这使得北宋王朝逐渐形成崇文抑武理念,奉行内修政理、外患渐弥的方针。而整个宋朝虽然对外战事频繁,但却能维持相对稳定,这与宋人的现实功用态度有莫大联系。
西汉王朝当年也曾面临北部强敌的威胁,大臣王禹偁(称)就曾进言道:“然而文、景之世,军臣单于最为强盛,肆行侵掠,候骑至雍,火照甘泉;哀、平之时,呼韩邪单于每岁来朝,委质称臣,边烽罢警。”
王禹偁以文景时期匈奴肆虐,而哀平时期匈奴称臣的对比,进而提出自己的御敌理念,即“且汉文当军臣强盛之时,而外能任人,内能修德,使不为深患者,是由乎德也。”也就是说,王禹偁希望陛下能够外任其人,内修其德。外患不足忧,只有强大自身,实行德政,才会抓住机遇对抗外敌。这种思想对宋代御边之策影响深远。
王禹偁以文景时期和哀平时期故事来表达自己的御敌思想,即先强大自身,再图外敌!
西汉王朝当年面对不同的外部威胁时,曾分别采取针对性策略。大臣朱台符说:“夫汉文帝,天子之尊也,尉佗,小国之君也,其所以然者,为中国劳苦,且以息战伐也。今契丹之劲过于南粤,陛下之圣出于汉文,迹而行之,事岂相远哉?”
在这里,朱台符认为汉文帝时期,南粤国的威胁根本不足为惧,之所以对其首领尉佗多加安抚,那是因为汉文帝想要化干戈为玉帛,促成南粤转投大汉,这是最大的仁政。现今,契丹势力与宋朝旗鼓相当。对宋而言战事只会两败俱伤,而和平之策不仅免除战乱之苦,还可传播仁政,这是互利互惠之事。
可见在宋臣看来,宋辽双方的胜负虽重,但他们更想达成的目标是不战而屈人之兵,这其实是势均力敌的结果。而宋人理性判断,审时度势,保守祖业,这点与文景时期的形势如出一辙。
大臣朱台符以汉文帝优待尉佗故事来表达不战而屈人之兵的御敌思想!
因相似境遇,宋朝君臣在具体对外政策上参考了文景故事。苏轼说:“晁错与汉文帝画备边策,不过二事:其一曰徙远方以实空虚,其二曰制边县以备敌国。”苏轼所言正是汉景帝时期大臣晁错的“徙民实边”政策。
昔日晁错之策不仅增强了汉廷对抗匈奴的力量,而且还开发了边境,有效稳固了汉匈边境局势。宋仁宗时期西夏李元昊反叛,朝廷在宋夏边境屯兵四十余万以应对战事,但都没有成功。之后范仲淹等人建议迁徙部分人口以充边境,要求家家熟习弓箭,组建抗夏武装社团,取得了意想不到的效果,苏轼欲借此传达御夏之策。
苏轼以晁错的“徙民实边”政策来表达自己对西夏局势的看法,希望徙民以抵御西夏的袭扰!
即使到南宋时期,汉文帝御边之策还被视为典范。“御敌今日先务,敌强则犯边,弱则请盟。今勿计敌人之强弱,必先自治,择将帅,蒐(搜)战士,实边储,备器械,国势富强,将良士勇,请盟则为汉文帝,犯边则为唐太宗。”南宋面临更为严峻的边境威胁,但时人仍奉守祖训,御外必先安内。和战与否视敌方情况而定,对方若望和平,则用汉文帝之策,若取武力进犯,则效唐太宗故事。
宋朝治国理念也并不是完全依照文景故事而定。随着局势发展,属于中原王朝故有的独尊体系被打破,在一统山河难以实现的情况下,只能强化自身,自保为上。而如何维持国人自信,稳固宋室江山,无疑是当时宋朝君臣急需解决的问题。
南宋时期的疆域范围,南宋王朝基本只能自保了!
文景时期的体养生息,为汉武帝反击匈奴奠定基础。宋廷意在稳固自身统治,韬光养晦,并在有利时机实现一统。只不过擅渊之盟后长时期的和平状态,渐成为定势,宋太祖、宋太宗时代的锐意统一难以实现,祖宗之法也被一直贯彻。而当靖康之难来临时,宋廷收拾残兵,奋力一搏,也只能维持住半壁江山,偏居一隅。
因此宋真宗之后的帝王虽稳固内政有效,但却因外患失去故土。收复北方失地,实现大一统就只是遥不可及的梦想。“文景之治”之所以名垂青史,是因为文景时期的积淀恢复了社会经济秩序,并为汉武帝开疆拓土奠定了重要基础,因此这种积淀是必要的、有价值的。宋廷效仿文景故事,仔细研读借鉴,侧重内政治理,确实促进了社会秩序的稳定,但却忽略了外患,也就难以达到大汉的辉煌成就。因此对宋而言,文景故事难以像唐人般歌功颂德,只能存在于大量的谏言中。
“文景之治”之所以名垂青史,那是它所积累的财富为汉武帝开疆拓土奠定了坚实的基础!
结语
总而言之,宋朝对“文景之治”的施政策略、治国理念做了更加深刻而全面的讨论,紧贴现实,经世致用,资治、劝诫的务实性突出。“文景之治”主张黄老之道,体养生息。而宋廷面对难以取胜的现实,希望效仿汉文帝、汉景帝故事,积攒实力,恢复社会秩序,逐渐形成“事为之制,曲为之防”的治国理念与守内虚外的政策。
另外,汉朝以孝治国,文景之孝广为传扬。宋廷严守祖宗之法,正是孝道理念的实际体现。宋人多次引用文景故事,是遵行孝道、维护家国同构的统治秩序的必要手段。但对比唐朝可知,唐人意识中的“文景之治”是用来比附本朝统治者的。唐朝不仅实现了大一统,而且获得了“天可汗”的美誉。武力征服的胜利是必要的,但仁德之誉更为统治者所向往。虽然统治者并未完全做到仁德,但唐朝史料中多出现节俭、夸赞之词,这确实为统治所需,但更多的是比附自身。所以,唐朝与宋朝在不同的时代背景下,对“文景之治”的理解存异。
自信的唐人在借鉴文景故事时,更多的是想为自身增光添彩,现实功用稍弱。而宋人虽也有比附之嫌,但却是要将历朝经验应用到现实统治中,真正解决困境“文景之治”在宋朝的应用,反映了时人探索统治秩序的热情。后世随着统治方法的成熟,诸如“文景之治”、“贞观之治”类的盛世符号,终成为治世楷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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