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중국역사상 모두 4개의 천부(天府)가 나타났다: 응천부(應天府), 순천부(順天府), 승천부(承天府), 봉천부(奉天府). "천"은 "천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부"는 제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거나, 혹은 칭제이전에 출생하거나, 칭제이전의 봉지이거나 칭제이전에 발상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군왕의 용흥지지(龍興之地)라는 뜻이다. 이 사대천부는 왕조에 따라 각각 설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대응하는 곳이 한 곳이 아니다. 응천부(상구/남경), 순천부(북경), 승천부(종상/대만/월남), 봉천부(무강/심양)이다. 왜 이렇게 같은 이름의 천부가 여러 곳에 나타났을까? 이는 그 도시와 관련있는 군왕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1. 응천부 송나라와 명나라때 응천부를 두었다. 송나라의 응천부는 하남성 상구(商丘)이고, 명나라의 응천부는 강소성 남경(南京)이다.
송응천부(지금의 하남성 상구) 조광윤이 진교병변으로 황포가신하기 전에, 후주의 전전도점검, 겸 송주귀덕군절도사를 지낸다. 송주(宋州)는 바로 현재의 풍하 남쪽 상구의 수양구(睢陽區)에 위치한 '상구고성(商丘古城)'이다. 조광윤은 '송주'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국호를 '송'으로 정했다. 그리고 송태조 조광윤이 등극한 후, 송주를 송나라의 사대경성중 하나인 남경으로 정한다. 나중에 송진종은 제업의 기초가 된 곳이 송주를 다시 응천부로 승격시킨다. 이때부터 응천부는 송나라의 또 하나의 정치중심, 경제중심, 군사중진이 된다. 송나라때 남경응천부에 위치한 남경국자감은 나중에 역사상 유명한 4대서원중 하나인 응천서원(應天書院)이 된다. 응천서원은 북송때 최강의 학부였고, 역대이래 인재를 많이 배출한다: 안수(晏殊), 범중엄(范仲淹), 손복(孫復), 석개상(石介相), 송상(宋庠), 장방평(張方平), 부필(富弼), 범순인(范純仁)등이 모두 응천서원출신이다. 정강2년(1127년) 오월, 조구는 남경응천부에서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송나라의 황통과 법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국호를 여전히 '송'으로 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한다. 역사에서는 '남송'이라 부른다. 소흥2년(1132년) 구월, 남경응천부가 금나라에 함락된다. 금나라에서 세운 제(齊)의 황제 유예(劉豫)는 남경응천부를 귀덕부(歸德府)로 격하시킨다.
명응천부(지금이 강소 남경) 주원장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원나라 지정16년(1356년) 집경로(集慶路, 지금의 남경)를 함락시킨 전투이다. 이때부터 그의 군림천하는 시작된다. 입성하자마자, 주원장은 집경로를 응천부로 개명한다. 응천부는 경사(京師)라고도 불렀고, 남경의 명나라시기의 명칭이다. 홍무11년(1378년) 정월부터 영락원년(1403년) 정월까지 25년간 명나라 초기의 수도였고, 영락제가 순천부로 천도한 이후에는 응천부가 유도(留都)로 남는다. 청나라초기 순치2년(1645년) 청나라가 응천부를 함락시킨 후 강녕부(江寧府)로 개칭한다.
2. 순천부 명,청 두 왕조때 순천부를 두었다. 장소는 모두 지금의 북경이다. 명성조 주체가 번왕으로 있을 대, 연지(燕地)를 봉지로 받아, 연왕(燕王)이었다. 봉지는 바로 현재의 북경이다. 주체는 야심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부친이 살아있을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부친 주원장이 죽자, 그는 거병하여 조카 건문제 주윤문과 천하를 놓고 다툰다. 그 결과 그가 이겨서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된다. 그가 즉위한 후 한 첫번째 일은 북평부(북경)으로 천도하는 것이었다. 영락 원년 정월, 북평부는 북경으로 승격되고 순천부가 된다. 그의 강선은 천의(天意)에 순응(順應)하여 얻었다는 뜻이다. 정권을 빼앗은 것은 정리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순치제가 입관한 후, 북평은 여전히 명나라의 체계를 유지하여 순천부를 둔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순천부는 경조(京兆)로 개칭된다. 1928년, 경조를 취소하고, 북평으로 개칭한다. 1949년이후 북경으로 다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른다. 북경은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찬란하다. 제1차 국가역사문화도시이며, 중국사대고도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고궁, 천단, 팔달령장성, 이화원등 여러 명승고적이 있다.
3. 승천부 역사상의 승천부는 명(明)의 승천부, 대만(臺灣) 정씨(鄭氏)의 승천부 및 월남 승천부가 있다.
명승천부(호북성 종상시) 승천부는 명나라 가정제때 설치되었다. 지금의 호북성 종상시(鍾祥市)이다. 가정제 주후총이 즉위한 것은 아주 특수했다. 그의 당형(堂兄)인 명무종 주후조가 돌연 사망했고, 자식을 두지 못했으므로, 주후총이 운좋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주후총의 출생지는 호광포정사 안륙주(安陸州, 지금의 호북성 종상시)이다. 그래서 주후총이 등극한 후, 가정10년(1531년) 안륙주를 승천부로 승격시켜 종상현의 치소가 된다. 승천부와 종상현이라는 명칭은 모두 가정제가 직접 고른 것이다. 나중에 청나라가 건립된 후, 순치3년(1646년( 승천부는 안륙부로 개칭된다.
대만승천부 남명 영력15년 십이월(1662년 1월), 연평군왕 정성공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격패시키고, 타이완의 행정을 통할하기 위하여 승천부를 적감성(赤嵌城)에 설치하면서 천주(泉州)의 절이름인 승천(承天)으로 명명한다. 승천부는 산하에 두 개의 현을 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팽호, 남로와 북로의 삼개사(司)를 추가로 설치한다. 영력37년(청나라 강희22년, 1683년) 시랑(施琅)이 대만을 점령하고 청나라조정은 승천부를 폐지하고 대만부로 개칭한다.
월남승천부 1802년(청나라 가경7년, 월남 완조 가륭원년) 완복영(阮福映)이 완조(阮朝)를 건립한다. 부춘(富春)을 수도로 정하고 동도(東都)라 한다. 1806년, 즉위후 5년째 되는 해 가륭제 완복영은 등극의식을 진행한다. 백관은 조복을 입고 황궁에 모인다. 완복영은 태화전에서 신하들의 조배를 받는다. 이때의 부춘은 이미 경사승천부(京師承天府)로 승격되었다. 오늘날에도 후에(順化) 승천부황성은 여전히 흐엉강(香江) 북안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그리고 완전한 고건축물군이고, 세계문화및자연유산에 들어갔다.
4. 봉천부 명나라와 청나라때 모두 봉천부가 있었다. 다만 장소는 달랐다. 명나라때는 호남성 무강(武岡)에 있었고, 청나라때는 요녕성 심양에 있었다.
명나라 봉천부(호남성 무강) 호남성 무강에 위치한 남명 봉천부는 존재기간이 가장 짧은 천부이다. 전후로 겨우 5개월이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역사상 최후의 한족황제인 주유랑(朱由榔)이 설립했다. 주유랑이 무강을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방군벌 유승윤(劉承胤)에게 통제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승윤의 관할지에 머물러야 했다. 다만 청군이 금방 쳐들어오면서 주유랑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이후 힘든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청군이 성에 들어온 후, 봉천부를 무강주로 개칭하고, 무강고성은 겨우 반년의 '수도'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청나라 봉천부(요녕성 심양) 봉천부는 청나라의 부명으로 성경(盛京)에 위치했다. 1644년 청군이 입관한 후, 연경(북경)으로 천도한다. 성경(지금의 요녕성 심양)은 유도가 되고 성경오부(盛京五部)가 설치된다. 부에는 부윤을 두고 그 아래 치중, 통판등의 관직을 두었다. 1657년, 청나라는 '봉천승운(奉天承運)'의 뜻에 따라 심영에 봉천부를 설치한다. 심양은 다시 '봉천'이라고 불리게 된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봉천부를 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