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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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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충현(魏忠賢): 양심전에서 업무를 본 최초의 인물

阉党之党首 作者:南宫月下影 

글: 양국선(楊國選)
1772년, 옹정제는 침궁과 집무실을 양심전(養心殿)으로 옮긴 후, 그는 양심전에서 정무를 본 첫번째 황제가 된다. 이때부터 양심전은 유명해지고,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양심전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삼척동자도 다 아는 곳이 되었다. 많은 관광객들은 고궁에 가면 처음에 금난전 즉 태화전을 보고, 두번째로 보는 곳이 양심전이다. 그러나, 옹정제는 양심전에 신성한 사명을 부여한 첫번째 인물은 아니다. 그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기 100년전에 황제가 아닌 사람이 이미 양심전을 제국통치의 중심으로 삼은 바 있다. <<명관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양심전....전의 문안에는 북쪽으로 사례감장인병필(司禮監掌印秉筆)의 치방(値房)이다. 그 뒤층으로 큰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융도각의 뒤이다. 조상대대로 궁중의 선방(膳房)이었다. 위충현은 선방을 이신전(怡神殿)으로 옮기고 이 곳을 병필치방으로 삼았다." 양심전에서 집무를 한 첫번째 사람은 바로 중국역사상 그 이름도 유명한 환관 위충현(魏忠賢)이었다.
만력17년(1589년), 하북 숙녕(肅寧)에 사는 위(魏)씨성의 청년이 처와 딸과 작별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마련해준 은량을 짊어지고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자금성이었다. 이때 그의 꿈은 그곳에서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가는 길이 하늘에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미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22세에 환관이 되는 것은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씨청년은 키도 크고 잘생겼다는 점이 작용했다. 명나라때 사람 담천(談遷)의 <<조림잡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객(客)모는 용모가 특이했고, 동궁에서 일했다" 이 신비의 중간인물은 위충현이 후일 득세한 후, 조용히 숨어지냈고, 성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위씨청연은 입궁한 후에 주인에 의하여 아무렇게나 이름이 붙여진다. 이진충(李進忠).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몸매가 튼튼하고 멋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문맹이었다. 전체 환관의 권력체제에서 그는 가장 하층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태감'이 되는 것만도 그에게는 머나먼 꿈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태감(太監)'이라고 하면 거세를 하고 황실에서 일하는 모든 남자노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명나라때에는 최고등급의 환관만을 '태감'이라고 불렀다.즉, 자금성 이십사아문수령이 되어야 비로소 '태감'이라고 불리웠다. 태감의 아래에는 소감(少監)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각 아문에서 태감의 조수를 맡았다. 어떤 때에는 각 지방으로 나가서 지키기도 했다. 제3등급은 감승(監丞)이라고 불렀다. 이상은 모두 고급환관이다. 문화수준이 있고, 어느 정도 경력(일반적으로 입궁한지 30년이상)이 있는 환관이 비로소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경력이 일천한 자들은 그저 전부(典簿), 장수(長隨), 봉어(奉御), 당차(當差), 청사(聽事)등등을 맡았다. 가장 하층은 오목패(烏木牌), 수건(手巾), 소화자(小火者)라고 불리우는 류인데, 잡일을 하는 노비와 같았다.
최하층에 있던 이진충이 31년후에 위충현이 된데에는 확실히 운도 따랐다: 그는 동궁(東宮)에서 일했고, 태자 주상락(朱常洛) 일가를 돌왔다. 그가 모신 사람은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은 왕재인(王才人)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여주인이 황장손 주유교(朱由校)를 낳을 줄. 그리고 만련48년(1620년)에 황제할아버지, 황제아버지가 1달내에 차례로 죽으면서, 그의 손으로 키운 주유교가 황제가 될 줄을. 그가 성공하지 않기도 힘들게 되었다. 운 이외에 그는 확실히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다. 노황제 만력제가 죽기 전에, 주인일가는 계속 냉대를 받아왔다. <<조림잡저>>의 기록에 따르면, "만력때, 궁에서 녹봉도 내려주지 않아서, 황손(주유교)이 아주 힘들게 살았다" 이때, 안목이 없는 환관들은 심지어 이 어린 주인을 조소하기까지 했다: "폐하(만력)도 만세이고, 전하(태자 주상락)도 만세이니, 우리들이 소관자(小官子, 주유교)가 등극하기를 바라는 것은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저 위충현만이 어린 주인을 잘 모셨다. "혼자서 공손하고 받들어 모시며, 수시로 그가 먹을 거리를 올렸다. 주유교가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과연 '황하의 물이 맑아졌다' 고생을 겪은 소관자가 등극을 한 것이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이진충에게 원래의 성 위(魏)씨로 회복하도록 하고, "충현(忠賢)"이라는 이름도 하사했다. 그리고 그를 사례감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이미 53세가 된 늙은 문맹에게 이것은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좋은 운은 막을래야 막을 수도 없었다. 관운(官運)과 동시에 도화운(桃花運)도 따라왔다. 위충현을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어린황제 주유교의 유모인 객씨(客氏)였다. 자금성내에 수천의 궁녀가 있는데, 황제의 은총을 바라고 있지만, 마음이 가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환관에게 마음을 준다. 환관은 이미 '거세'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인에 대한 갈망이 있다. 두 사람의 결합을 당시 사람들은 "대식(對食)" 혹은 "채호(菜戶)"라고 부렀다. 주유교의 유모인 객씨는 원래 또 다른 환관 위조(魏朝)와 '대식'으로 맺어졌다. 위조는 위충현보다 문화수준도 있고, 권세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매력은 위충현만 못했다. 위조와 위충현이 객씨를 놓고 다투게 된다. 어느날 밤, 건청궁 밖에서 두 사람이 서로 주먹질까지 한다. 황제 주유교까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다. 주유교는 유모 객씨를 아주 좋아했다. 친모인 왕씨가 죽은 후에 객씨를 거의 모친으로 모셨다. 그는 잠에서 깬 후에 화를 내지도 않고, 그냥 객씨에게 물었다: "객유모가 마음 속으로 누가 일을 맡았으면 좋을지 말해주면, 내가 대신하여 결정하겠다" 객씨는 위조가 경박한 것이 싫었다. 그리하여 위충현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위충현은 자금성내에서 가장 권세있는 여인을 얻었을 뿐아니라, 꿈에도 그리던 사례감병필태감의 직위까지 얻어낸다.
53세의 일자무식의 문맹이 사례감병필태감이라는 고위직에 앉게 된 것이다. 명나라제국의 가장 중요한 관방문건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서 내려갔으니, 정말 괴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황제 본인도 전통적인 기준에 따르면 준문맹이다. 주유교가 출생했을 때, 마침 부친 주상락의 태자자리가 위험한 때였다. 만력제는 태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손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련48년(1620년)에 이미 16세가 된 주유교는 아직도 황태손의 봉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시종 책을 읽지도 못했다. 이해 칠월 이십일일, 만력제가 죽는다. 죽기 직전에야 이 자격도 없는 할아버니는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황장손을 책립하고 학문을 익히게 하라'고 지시한다. 40일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때, 주유교는 양친도 없을 뿐아니라, 궁안에 상징적인 황태후마저도 없었다. 완전히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아이와 같았다. 이 아이는 공부를 싫어했고, 인형처럼 봉천문앞에 앉아있는 것도 싫어했다. 조정대신들이 하는 말은 그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외에, 주씨집안의 여러 조상들과도 달리 그는 호색하지도 않았다. 궁사(宮詞)에 "육궁심쇄만요요, 다반소화원리소(六宮深鎖萬妖嬈, 多半韶華怨裏消)" 그러나, 이를 가지고 주유교가 청심과욕(淸心寡慾)의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이다. 전혀 반대이다. 그는 생활을 즐기고, 정력이 넘치고, 마음씀씀이와 손재주가 뛰어나며 놀기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명나라때 건청궁의 단계(丹階) 아래에는 일찌기 노호동(老虎洞)이라는 석동(石洞)이 하나 있었다. 석동 안에는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고, 석동을 끝까지 걸어가면, 바로 후궁에 이어진다. 노호동의 구체적인 위치는 청나라때 이미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야 더더욱 알기 힘들다. 아마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갈 때 막아버린 것같다. 가장 먼저 이 비밀통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황제의 시종이나 후궁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오가기 편하게 만들었던 것같다. 아니면 일단 건청궁이 습격등을 받으면 황제가 몸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것일까? 어쨌든 천계황제가 건청궁에 살기 시작한 후, 노호동을 완전히 새로운 기능으로 개발했다. 술래잡기. 그는 자주 달밝은 밤이면, 그 속에 숨고서 환관들에게 찾아보라고 시켰다. 그러나 이런 놀이는 너무나 싱거웠다. 환관들은 황제의 소매에 든 향낭(香囊)의 향기를 쫓아가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황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곳을 떠들썩하게 둘러보다가 나중에서야 노호동내로 들어오곤 했다. 주유교는 운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주마지희(走馬之戱)를 즐겼는데, 이것은 당시에 명나라 상류사회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오늘날의 폴로와 비슷하다. 매번 겨울이 되면, 서원의 호수에 얼음이 언다. 그는 홍목나무판으로 자리를 만들고, 사방에 낮은 난간을 설치한 다음 주유교가 그 가운데 앉는다. 태감들은 양쪽에서 밧줄이나 막대를 이용하여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민다. 빠르기가 번개와 같았다. 주유교는 동물도 좋아했다. 특히 고양이를 좋아했다. 궁중에 묘아방(猫兒房)을 두고, 많은 좋은 고양이를 길렀다. 고양이에게 "모소(某小)", "모아두(某丫頭, 아두는 여자시녀를 가리킴)"라고 불렀다. 심지어 고양이에게 관직이나 작위를 내려서 "모노야(某老爺, 노야는 어르신이라는 뜻임)"라고 부르기도 했고, 환관의 예에 따라 상을 내리고 돈을 하사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서원(西苑)에서 놀고 있는데, 나무 위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서, 바로 나무위로 올라가서 새집에서 새끼를 잡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실족하여 땅에 떨어졌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이 장난꾸러기황제에 대하여 위충현은 부친처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가 준마(駿馬)를 좋아하니, 위충현은 변강에서 바친 말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가 산수(山水)를 좋아하니, 위충현은 어용감(御用監)에 오채색의 병풍을 만들게 해서, 서호(西湖), 호구(虎丘)등 강남의 풍경을 그리게 해서 어탑의 좌우에 두게 했다. 주유교에 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목수일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 그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친히 칠기, 연상(硯床), 소갑(梳匣)등을 만들기도 했는데, 모두 오채색의 장식을 하고, 예쁘고 교묘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이들 공예품을 팔기도 했다. 한번은 호등소병(護燈小屛) 8폭을 만들었는데, 그 위에 한작쟁매희(寒鵲爭梅戱)를 조각했다. 그는 어린 환관에게 자금성 밖의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팔아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지물(御製之物, 황제가 만든 물건)"이라고 하면서, '1만전'의 가격을 매겼다. 다음날 환관이 그 가격을 받아와서 바치자, 아주 기뻐했다. 주유교는 자신의 공예세계에 탐닉했다. 그는 친히 아주 멋있는 문을 만들었다: 그 문안에서는 예술적인 창의가 번득였고, 문밖에서는 재미없고 무서운 황권정치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문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위충현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명통감>>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황상(주유교)는 성격이 집을 짓는 것을 좋아했다. 스스로 도끼와 톱을 가지고 자르고 깎았다. 날로 도문포, 갈구사등의 무리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들었다. 다 만들면 기뻐하고, 오래지 않아 버렸다; 버리고는 다시 만들었는데, 싫증도 내지 않았다. 그가 도끼로 내려치고, 칼로 깍을 때면, 옷을 벗고 일을 했다. 가까운 자들이 아니면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왕체건(사례감태감, 위충현의 충실한 조수)등이 매번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면, 곁에서 문서를 들고 아뢰었다. 다 아뢰고 나면, (황제는) 바로 말했다: 너희들이 생각해서 처리해라. 알겠다'. 그리하여 태아검(太阿劍)이 아래로 내려가고, 위충현등이 마음대로 조종하게 되었다."
위충현은 충실한 개와 같았다. 대문을 지키면서 주인을 귀찮지 않도록 아무도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은 대문의 뒤에 있는 신비한 주인은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문을 지키는 개를 주인을 대하듯이 모시게 된다. 오문(午門)을 들어가서, 동쪽으로 가면, 동화문(東華門)에 가까워졌을 때, 고궁의 남쪽 성벽을 따라 장방형의 집들이 한줄로 늘어서 있다. 이곳이 바로 명나라 청나라 두 왕조에 걸쳐 조정대신들이 자금성내에서 집무를 보던 기구인 내각(內閣)이다. 500여년동안, 대학사와 그들의 조수들은 매일 이곳에서 많은 상소문을 처리했고, 황제의 뜻에 따라 신하들의 상소에 대한 회신을 초안하고, 대랑의 정무서류를 처리했다.
여기서 서북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황제의 침궁인 건청궁이다. 건청궁의 대문인 건청궁의 안쪽 서편에, 한줄의 방들이 늘어서 있는데, 명나라때 이곳은 궁내환관의 당직방이었다. 서쪽으로 양심문을 지나 양심전으로 들어가면, 환관의 본부인 사례감이다. 내각과 사례감은 실제로 모두 황제의 비서역할이다. 단지 한 쪽은 업무를 담당하고 한쪽은 생활을 담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다보니 지위의 고하는 분명해진다. 환관은 내각의 앞에서는 원래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로는 자금성이 만들어진 후, 한번은 영락제의 어가가 내각으로 간 적이 있다. 내각에 서서 그를 따라오던 환관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세 선생(내각대학사 양사기, 양영, 양박 세 사람을 가리킴)이 있는 곳이니, 너희같은 자들은 여기를 지나다녀서는 안된다" 당시 황제가 환관을 육부에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할 때는, 반드시 관리들로부터 1장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읍례(揖禮)를 하도록 했다. 영락제의 중손인 명영종 주기진의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권력을 농단하는 환관 왕진(王振)이 나타난다. 처음에 왕진은 그저 심부름을 하는 노비였다. <<명통감>>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정통2년, 주기진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가 왕진을 내각에 파견하여 일을 물어보게 했다. 대학사 양사기는 아직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왕진은 마음이 급해져서 '기다릴 수 없으니, 직접 가서 하면 안되겠는지' 물어보았다. 양사기는 크게 노했다. 그 일이 태황태후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녀는 즉시 왕진을 채찍으로 때린 다음, 그로 하여금 양사기에게 사죄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왕진을 훈계했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왕진은 태황태후와 내각의 삼양(양사기, 양영, 양박)이 죽은 후에 비로소 주기진이 나이가 어려서 잘 알지 못함을 이용하여 점차 득세하게 된다. 이후 각신(閣臣)과 환관(宦官)의 지위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가정연간에, 한 환관이 얘기한 각신과 환관이 만났을 때 상호간의 예의를 주제로 논한 것은 의미가 깊다: "우리는 문을 지킨지 오래 되었고, 사정이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옛날에 장선생이 조정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허리를 숙였다. 나중에 하선생이 들어올 때는 우리는 그저 서로 눈으로 보기만 했다. 지금 엄선생은 우리에게 공수(拱手)를 하고서야 들어간다." 이 세 사람은 차례대로 장총(張璁), 하언(夏言), 엄숭(嚴嵩)을 말한다. 가정연간에 내각수보를 지낸 세 사람이다. 짧은 수십년만에, 내각대신의 체면이 환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하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위충현시대에 그 상황은 최고조에 달한다. <<명조소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감 위충현은 온 조정이 아부했다. 그의 뜻에 따르는 자들은 그를 의부로 보시고, 오배삼고(五拜三叩)의 예를 올렸으며,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라고 불렀다." 위충현이 환관이 되기 전에 딸이 하나 있었다. 누가 알았으랴. 쉰이 넘어서 졸지에 무수한 자식을 가지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자식들은 모조리 조정에서 대단한 지위에 있는 문무관리였다. 조정의 문무관리는 거의 모두 위씨의 문하에 들어왔다.
먼저 내각부터 얘기해보자. 천계4년, 내각수보 고병겸(顧秉謙)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위충현에게 고두(叩頭)하며 말했다: "원래 슬하에 의탁하고 싶었지만, 백발 늙은이를 좋아하지 않을 것같으니, 저의 어린 아들을 손자로 삼아주셨으면 합니다"
또 다른 내각대학사 위광징(魏廣徵)은 고병겸처럼 우회적이지 않았다. 위충현과 같은 성이라는 것을 기화로 스스로 조카가 되었다. 내각과 위충현간에 문서가 오갈때는 "모두 행서로 쓰고 바깥에 제목은 '내각가보(內閣家報)'라고 적었다" 당시의 내각대학사들은 통칭하여 "위가각로(魏家閣老)"라고 불리웠다. 내각이 이러하니, 육부, 구경, 사방의 총독 순무는 말할 것도 없다. 자칭 의자, 의손자가 수두룩했다. 그중 유명한 것은 오호(五虎), 오표(五彪), 십구(十狗), 십해아(十孩兒), 사십손(四十孫)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광경을 <<백자도연의(百子圖演義)>>로 썼으니, 얼마나 성황이었겠는가? 자금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내각과 건청궁의 한켠에 있는 양심전, 두 건물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역전되었다. 내각은 고무도장에서 진흙으로 만든 보살로 바뀌었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위충현이 모 대신의 곤장을 치고자 했다. 일부 조정대신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수백명의 어린 환관들이 내각의 내당으로 밀고 들어와서, 팔을 휘두르며 마구 욕을 해대었다. 여러 내각의 신하들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심전 사례감집무실은 기세가 당당했다. 가장 대단한 때는 매년 정월이었다. 왜냐하면 위충현의 생일이 정월삼십일이기 때문이다. 십오일만 지나면 각 아문과 환관들이 생일축하를 하느라고 주변에 사람이 가득찼다. 그에게 축하할 때는 "천세천세, 구천세"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아부하는 자들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천계황제에게 들릴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왜 조정의 글을 읽은 문관들이 자신을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모시려 하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 국자감의 감생들이 자신을 공자와 나란히 놓고 모시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백화(白話)로 번역해주어야만 이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천하의 권력을 쥐어잡을 줄 몰랐다. 이 권력은 원래 그가 충심으로 모시던 어린 주인의 것이었다. 자신은 원래 약간의 콩고물을 얻어먹는 태감의 직무에 만족했다. 위충현은 원래 위충현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왕진의 학식도 없고, 왕직(汪直)의 심기도 없었으며, 심지어 유근(劉瑾)의 야심도 없었다. 그저 호방하고 후덕했기 때문에, 환관들이 바보라고 여겼던 위충현이 천계원년이후에 7년동안 움켜쥐게 된 모든 것들은, 사실 그 자신이 애를 써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못이기는 척 받아온 것일 뿐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그에게 가져다 준 사람들은 양심전의 앞에서 '아버지, 할아버지 구천세'를 외치는 제국의 문신들이었다. 천계초기에 막 주인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위충현은 조심스럽게 사례감의 대문을 드나들었다. 이때 대명제국의 문신들은 전례없는 분열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문관들의 당쟁은 자고이래로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계연간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다. 사실상, 일찌기 만력초기에 장거정이 사망한 후 청산당한 때로부터 제국문관들의 당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만력은 나중에 30여년간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쟁의 격화를 종용했다. 소위 당쟁은 처음에는 그저 조정신하들이 고향사람들끼리 모이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느슨한 결맹에 불과했다. 먼저 제당(齊黨), 초당(楚黨), 절당(浙黨)이 있었다. 세 당이 다툰 것은 제도측면은 적었고, 인사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시비와 이해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만일 정상적으로 변론하는 무대가 마련되었고, 각측이 승복할만한 권위자가 중재를 하였더라면, 이런 당쟁은 정치를 깨끗하고 밝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력제때부터,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쟁이 이리떼가 서로 물어뜯는 것처럼 되면서 당화(黨禍)로 발전하였다. 나중에 소위 "동림당(東林黨)"이 전투에 뛰어든다. 이들은 도덕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선생들이었다. 원래의 제도다툼, 인사다툼이 정사(正邪)의 다툼, 의기(義氣)의 다툼으로 변모했다. 당쟁의 피비린내는 갈수록 짙어졌다.
원래의 삼당과 유사하게 동림당도 그다지 엄밀한 조직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고헌성(顧憲成)이라는 이부낭중이 만력22년 삭탈관직되어 무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동림서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여러 조정신하들에게 영향을 주고 명성을 얻는다. 동림당의 핵심가치관은 학술, 정치와 윤리가 불가분이라는 것이다. 고헌성은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 중앙정부에 있으면서 뜻을 군주에 두지 않고, 관직이 지방관리로 있으면서 뜻을 민생에 두지 않고, 물가 숲아래에 거주하면서 뜻을 세상의 도리에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자가 취할 것이 아니다" 동림당 사람들은 스스로를 군자라고 자부했다. 자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모조리 소인, 사당(邪黨)으로 치부했다.  정상적인 의견교환마저도 도덕적인 판단으로 끌어올리니, 동림당의 빙청옥결(氷淸玉潔)의 정치이상은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 만력이 죽은 후, 동림당인은 조정에서 득세한다. 일시에 그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사악한 소인으로 몰린다. 심지어 웅정필, 원숭환과 같은 사람들까지도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동림당에 의하여 도덕적인 방망이에 얻어맞아 몰리게 된 사람들은 원래 황제를 찾아가서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유교는 목수일로 바빴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황제의 문을 지키는 위충현에게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동림당인들의 가치판단으로는 위충현은 유근의 잔당이다. 그리하여 위충현과 '사당(邪黨)"은 연합하여 동림당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절대적인 고상(高尙)과 절대적인 타락은 모두 정치에서는 암세포이다. 전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치명성에 있어서는 후자와 다를 바가 없다. 타락자는 고상자의 명단을 만들어 위충현에게 바친다. 그리고 이 문맹인 자가 쉽게 읽고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동림점장록>>이라는 블랙리스트를 <<수호전>>의 조개, 송강등 109명의 천강지살의 명칭을 당시의 조정신하들에게 붙여준다. 시작부분은 이렇다: "동림개산원수 -- 탁탁천왕 남호부상서 이삼재 (조개); 총병도두령 2명 - 천괴성 호보의 대학사 섭향고(송강); 천강성 옥기린 이부상서 조남성 (노준의) ...위충현은 비록 문자를 몰랐지만, 궁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꾼으로부터 <<수호전>>은 들어보았다. 그는 이 기뻐하며 이 블랙리스트를 천계제 주유교에게 보여준다. 생각지도 못하게 문맹황제는 <<수호전>>이 뭔지도 몰랐다. 위충현은 자신이 기억하는 수호전의 이야기에서 대목들을 얘기해준다. 주유교는 아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박수를 치면서 "좋다"고 외친다. "원래 동림당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호한(好漢, 사나이)들이구나!"
위충현은 할 수 없이 이 블랙리스트를 감추고 다시는 황제에게 올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명단에 있는 조정신하들의 살륙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명사>>에는 "위충현이 권세를 부릴 때, 모두 선량한 자들을 모함함으로써 그에게 아부했다. 공격받기 시작한 것은 모두 동림당이었다" 나중에 정치박해의 그물망이 갈수록 커진다. "제거하고 싶은 자는 모조리 동림으로 몰아서 쫓아냈다. 천계4년 10월부터 희종이 붕어할 때까지(천계7년), 죽임을 당한 자가 10여명, 하옥되어 유배간 자가 수십명, 삭탈관직당한 사람이 200여명이었다. 관직을 잃거나 좌천당한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제국문관집단의 당쟁은 결국 환관을 의부로 모시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위충현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돌연 아들 손자를 자처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권력의 정점까지 밀려올라간다. 순간적으로 과다한 헤로인을 흡입한 것처럼 그는 눈빛이 흐려졌고, 자금성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게 되었다.
1627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시기에, 7년동안 재미있게 목수일을 하고나서 23살의 주유교는 병석에 눕는다. 어린 주인이 하루하루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충복 위충현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았다. 1달후, 천재목수 주유교가 병사한다. 후비들은 모두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모조리 요절했다. 그리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는 법도에 따라, 주유검(朱由檢)이 황위를 승계한다. 연호는 숭정(崇禎)이다. 1627년 한겨울, 어린 주인이 죽은지 겨우 3개월만에, 위충현은 자금성의 새주인에게 좇겨난다. 중도봉양조릉사향(中都鳳陽祖陵司香)으로 쫓겨난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위충현은 조용히 경성을 지나, 하북 부성(阜城)에 이른다. 그때 황제가 금의위를 파견하여 그를 추살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음력십일월초육일, 위충현은 혼자서 역참에 앉아 있었다. 벽의 건너편에서는 <<계지아(桂枝兒)>>가 들려왔다: "세거시쇠(勢去時衰), 영락여표초(零落如飄草)...사저반황량야(似這般荒凉也), 진개불여사(眞個不如死)"(세력을 잃고 시기가 지나니, 바람에 흩날리는 풀과 같은 신세이다. 이렇게 황량하다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위충현이 인간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는 도박에 걸었고,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따냈다; 그리고 다시 모조리 잃었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을 맴으로써 일생을 마감했다.


魏忠賢:在良心戰上工作的最初人物


文章:楊國選
1772年,雍正帝將寢宮和辦公室遷至養心殿後,他成爲第一個在養心殿看到政務的皇帝。 從此,良心殿開始出名,以清朝爲背景的電視劇中出現了很多良心殿,因此這裏成了連三尺童子都知道的地方。 許多遊客一去故宮,首先看金蘭殿即太和殿,第二看的是良心殿。 但是,雍正帝並不是在良心戰上賦予神聖使命的第一人。 他在這裏執務的100年前,不是皇帝的人已經把良心戰當作了帝國統治的中心。 <名官司>中這樣寫道:"良心戰......在之前的文案中,北側是司禮監掌印秉筆的"牙房"。 那後層連着一個大房間,是隆角的後面。 祖祖輩輩都是宮廷的膳房。 魏忠賢把禪房搬到了怡神殿,把這裏當作兵筆致坊。" 在良心戰中執勤的第一人就是中國歷史上著名的桓官魏忠賢。
萬曆十七年(1589年),居住在河北淑寧的魏姓青年與妻子和女兒告別。 揹負着全家人準備的銀樑,向着北京出發了。 他的目的地是紫禁城。 這時,他的夢想就是在那裏成爲一名"宦官"。 一路禱告,求天幫忙。 因爲他已經沒有退路了。 22歲時成爲一名"患官"可以說是年紀太大了。 但魏氏青年個子高,長得帥這一點起到了作用。 明朝時人談遷的《造林雜著》中這樣記載:"客母相貌奇特,在東宮工作過",這位神祕的中間人物在魏忠賢后來得勢後悄悄躲藏起來,聲明不傳。 魏氏青緣入宮後,被主人隨便取名。 李進忠。 他性格豪放,身材結實帥氣,贏得了別人的好感。 可是,他簡直是個文盲 在整個宦官的權力體制下,他只能處於最下層。 他似乎不太可能成功. 成爲"太監"對他來說是一個遙遠的夢想。 如今,人們一提到"太監",就認爲指所有在皇室工作的男奴。 但事實上,明朝時期只有最高等級的宦官被稱爲"太監"。也就是說,紫禁城二十四衙門首領才被稱爲"太監"。 太監下面有少監。 一般在各衙門擔任太監的副手。 有時還到各地去守護。 第三等級被稱爲監僧。 以上均爲高級幻觀。 這是具有文化水平、有一定經歷(一般入宮30年以上)的宦官才能擔任的職位。 經歷淺薄的人只是負責典簿、隨隨隨、奉御、當差、聽事等等。 最下層是被稱爲烏木牌、手巾、小火者的類型,和從事雜活的奴婢一樣。
在最底層的李振忠31年後成爲魏忠賢確實很有運氣:他曾在東宮工作過,並走過太子朱常洛一家。 他侍奉的是容貌不出衆的王才人。 但誰知道呢。 沒想到這位女主人會生下黃長孫朱由校。 萬聯48年(1620年)皇帝爺爺、皇帝父親在1個月內依次去世,沒想到他親手培養的儒儒教會成爲皇帝。 他連不成功都很難了。 除了運氣以外,他確實忠於主人。 老皇帝萬曆帝臨死前,主人一家一直受到冷遇 根據《造林雜著》的記錄,"萬曆時,宮裏連綠峯都不給,皇孫(周幼教)活得很辛苦"時,沒有眼光的宦官們甚至嘲笑這位小主人:"陛下(萬曆)萬歲,殿下(太子朱相洛)萬歲,希望我們成爲小官子(周幼教) "他一個人恭敬敬敬敬奉,隨時爲他提供食物。 於是有一天,經歷"黃河的水清澈了"苦難的管轄者登極了。 於是,他立即讓李鎮忠恢復原來的姓魏,並賜給他"忠賢"的名字。 並讓他進入了酬謝感中。 對於已經53歲的老文盲來說,這是最好的場合。 可是好運連攔都攔不住。 在官運的同時,桃花運也跟着來了。 愛上魏忠賢的正是小皇帝朱幼教的母子客氏。 紫禁城內有成千上萬的宮女,盼着皇帝的恩寵,但必有心所向 無奈之下,會把心交給桓官。 宦官雖已"去勢",但仍對女人有渴望。 當時人們把兩人的結合稱爲"對食"或"菜戶"。 周瑜教的奶媽客某原本是和另一位宦官魏朝結爲"大餐"。 僞造比魏忠賢更有文化水平,更有權勢。 但是,個人魅力不如魏忠賢。 假冒僞劣和魏忠賢將爭奪客源。 一天晚上,在乾清宮外兩個人還互相拳打腳踢。 連皇帝加油橋都驚醒了。 周瑜巧非常喜歡劉小姐。 親生母親王某死後,幾乎把客某奉爲母親。 他醒來後不生氣, 只是問客家人:"客奶媽心裏說誰來管事, 我替他決定", 客家人不喜歡僞造的浮躁。 於是指魏忠賢。 魏忠賢不僅獲得了紫禁城內最有權勢的女人,還獲得了夢寐以求的事例減兵必泰鑑的職位。
53歲的"一字無識的文盲"成爲了"事例減兵必泰鑑"的高層職位。 明朝帝國的重頭戲都經過他手下去了,真是怪事。 其實這並不奇怪。 因爲皇帝本人按照傳統的標準也是準文盲。 朱幼教出生時,恰好父親朱相洛的太子位置處於危險時期。 萬曆帝不喜歡太子,對孫子也不感興趣。 萬聯48年(1620年)已經16歲的朱幼教至今仍未得到皇太孫的封號。 甚至始終沒有讀書。 七月二十一日,萬曆祭將死。 直到臨死前,連這個資格都沒有的爺爺纔想起來,指示"冊立黃長孫,讓他們掌握學問" 40天后,連父親也離開了人世。 這時,朱瑜教不僅沒有雙親,宮內也沒有象徵性的皇太后。 完全像個不受任何束縛的孩子。 這孩子不喜歡學習,也不喜歡像娃娃一樣坐在奉天門前。 朝廷大臣們說的話他完全聽不懂。 除此之外,與朱氏家族的許多祖先不同,他並不好色。 宮詞中有"六宮心碎,六宮深鎖萬里疏,多半韶華怨",但如果認爲儒儒教是清心寡慾的無趣的人,那也是錯誤的。 完全相反。 他是一個喜歡生活、精力充沛、心手巧、愛玩的人。 明朝時期,乾清宮的丹階下曾有一座名爲"老虎洞"的石洞。 石洞內砌石牆,石洞走到盡頭,就是後宮 盧湖洞的具體位置在清朝時已不詳。 直到今天才更難了解。 恐怕是從明朝到清朝的時候堵上的。 最先建立這條祕密通道的人是誰不得而知。 也許皇帝的侍從和後宮是不會被別人發現而變得容易來往的。 還是先讓乾清宮受到襲擊,皇帝躲開身體而製作的呢? 不管怎樣,天啓皇帝開始住在乾清宮後,將蘆湖洞開發成了全新的功能。 捉迷藏。他經常在明媚的夜晚躲在裏面,讓宦官們找找看。 但是這種遊戲太淡了。 宦官們驅趕皇帝衣袖裏的香囊香氣,很容易就能找到。 但還是爲了讓皇帝開心,他們經常到別的地方逛逛,最後才進老湖洞。 儒儒教有運動天賦。 喜歡走馬之戲,這在當時明朝上流社會很流行,與今天的polo相似。 每到冬天,書院湖面都結冰 他用紅木木板搭建位置,四周設置低欄杆,然後由加油橋坐中間。 太監們在兩邊用繩子或棍子在前面拉,在後面推。 速度像閃電一樣。 周瑜喬還喜歡動物。 他特別喜歡貓。 宮裏有貓兒房,養了很多好貓 對貓叫"某小"、"某丫頭(阿頭指女侍女)"。 甚至對貓下達官職或爵位,稱其爲"某老爺(意爲老爺是老人)",還根據宦官的例子頒獎並賞賜金錢。 有一次,他在西苑玩耍時,聽到了樹上鳥鳴的聲音。 一時間,我情緒激動,就爬上樹,在新房裏捉到小傢伙。 但是,胡薩達馬失足掉在地上,臉部受了傷。 對於這個淘氣鬼皇帝,魏忠賢像父親一樣慷慨解囊。皇帝喜歡駿馬,魏忠賢在邊疆獻給他的馬中挑選出來獻給皇帝;皇帝喜歡山水,魏忠賢讓御用監製作五彩屏風,畫西湖、虎丘等江南風景,放在御塔左右。 對加油橋最廣爲人知的是他喜歡做木工。 在這方面他算得上是天才。 他還親自制作了漆器、硯牀、梭甲等,都裝飾着五彩色的裝飾,漂亮而巧妙。 心情好的時候還賣這些工藝品。 一次製作了8幅護燈小屏,上面雕刻了寒雀爭梅戲。 他吩咐小桓官到紫禁城外的市場去賣。 而且這是"御製之物",並定價"1萬錢"。 第二天,宦官把那個價錢拿來獻上,高興極了 加油橋沉溺於自己的工藝世界。 他親手做了一扇很酷的門:那句門裏閃現着藝術的創意,門外有乏味而可怕的皇權政治。 可惜這扇門不太堅固。 因此他需要有人來守護這扇門,魏忠賢是最合適的人。
《明通鑑》中這樣寫道:"黃尚(周幼嬌)性格喜歡蓋房子。 自己拿斧頭鋸了。 與桃文鋪、渴求寺等一羣人朝夕相處。 做完了就高興,沒多久就扔了。扔了又做,沒厭倦。 他用斧頭砍,刀削,就脫衣幹活 如果不是親近的人,連看都不敢看清。 每當王體健(謝禮感泰鑑,魏忠賢忠實的助手)等人想幹壞事的時候,他都會在旁邊拿着文件進行稟告。 都告完以後,皇帝馬上說:你們想想辦吧。 知道了。於是,太阿劍向下,魏忠賢等隨心所欲地操縱。"
魏忠賢就像一隻忠實的狗。 守着大門,誰也不進門,以免麻煩主人。 但是,更多人很難看到大門後面的神祕主人。 因此,把守門的狗當作對待主人一樣侍奉。 從午門進去,往東走,接近東華門時,沿着故宮的南城牆排成一排長方形的房屋。 這裏就是明朝清朝兩個王朝朝廷大臣在紫禁城內辦公的機構——內閣。 500多年來,大學校舍和他們的助手們每天在這裏處理許多上疏文,按照皇帝的意願起草了大臣們上疏的回信,處理了大浪的政務文件。
從這裏往西北走半天,就是皇帝的寢宮乾清宮 在乾清宮大門乾清宮內側西側,排着一排房間,明朝時期這裏是宮內環館的值班室。 從西邊經過良心門進入良心殿,就是環館的總部——謝禮監。 內閣和謝禮監實際上都是皇帝的祕書。 只有一方負責業務,一方負責生活。 這樣一來,地位之高就變得明確了。 宦官在內閣面前本來擡不起頭來。 據悉,紫禁城建成後,有一次永樂帝的御宅曾到過內閣。 他站在內閣裏對跟隨他的宦官們說:"這裏是三位先生(指內閣大學士楊思琪、楊英、楊樸三人)所在的地方,你們這樣的人不能走過這裏",當時皇帝派宦官到陸府傳話時,一定要在距離官員一章左右的距離上行邑禮。 到了永樂祭的重孫明永宗朱基鎮的時代,首次出現了壟斷權力的宦官王振。 一開始,王震只是個跑腿的奴婢。 <明通鑑>中有這樣的故事。 正統2年,朱基鎮的祖母太皇太后張氏派王鎮到內閣詢問事情。 大學史楊思琪說還沒有充分討論。 王震心急如焚地問:"等不及了,能不能親自去辦?" 樑士基大發雷霆。 那件事傳到了太皇太后。 她立刻鞭打王震,然後讓他向楊士淇賠禮道歉 然後訓誡出診:"如果再發生這樣的事情,一定會被殺",出診是在太皇太后和內閣三養(樑士基、樑英、樑樸)死後,朱基鎮才因年紀小而不知情而逐漸得勢。 此後閣臣和官吏的地位發生了本質性的變化。
在家庭年中,一位桓官所說的覺身和桓官見面時,以相互間的禮儀爲主題進行討論,意義深遠:"我們守門很久了,看到了事情的變化。 從前張先生進朝廷的時候我們彎腰。 後來何先生進來時,我們只是互相用眼睛看。 現在嚴先生向我們拱手後才進去。" 三人是家庭年中擔任內閣首腦的人。 短短的幾十年間,可以看到內閣大臣的面子相對較之優厚。 在衛忠現時代,其狀況達到最高潮。 《明朝素砂》中有這樣的記錄:"太監魏忠賢是全朝廷阿諛奉承的。 遵從他旨意的人把他視爲義父,敬了五拜三叩的禮,並稱呼他爲九千九百歲。"魏忠賢成爲宦官之前,有一個女兒。 誰知道呢。 沒想到過了50歲突然有了無數個孩子。 而且這些子女都是在朝廷中具有很大地位的文武官吏。 朝廷的文武官吏幾乎全部進入魏氏的門下。
首先談談內閣吧。 天啓四年,內閣首府顧秉謙帶着兒子向魏忠賢叩頭說:"本來想靠膝下,但可能不喜歡白髮老人,希望把我年幼的兒子當作孫子。"
另一位內閣大學師魏廣徵並不像高秉謙那樣委婉。 以魏忠賢同姓爲由,自己成了侄子。 內閣和魏忠賢之間有文件往來時,"大家都寫成行書,外面的題目寫成《內閣家譜》",當時的內閣大學師們統稱爲"魏家閣老"。 內閣如此,更不用說六部、九景、四方的總督巡撫了。 自稱椅子,義孫比比皆是。 其中有名的是五虎、五豹、十狗、十海兒、四十孫。 當時人們把這個情景寫成<百子圖演義>, 該有多盛況啊? 紫禁城東南角的內閣和建清宮一側的良心殿,兩座建築的命運已經完全逆轉。 內閣由橡皮圖章改爲泥菩薩。 根據<名詞>的記錄,有一次魏忠賢想打某大臣的棍子。 雖然部分朝廷大臣提出異議,但數百名年幼的桓官被推入內閣內部,揮舞着胳膊亂罵。 許多內閣大臣低着頭什麼話也說不出來了。 良心戰事例監務室氣勢磅礴。 最了不起的時候是每年的正月。 因爲魏忠賢的生日是正月三十日。 再過十五天,各衙門和宦官們爲了慶祝生日,周圍就坐滿了人。 向他祝賀時大喊"千歲千歲,九千歲"。 這樣拍馬屁的人連對面天溪皇帝聽到的東西都不在乎。 他不知道爲什麼讀過朝廷文章的文官們要把自己奉爲父親或爺爺。 甚至國子監的監生們也不理解把自己和孔子並排供奉。 只有把自己翻譯成白話,才能與他們進行溝通。
他沒想到自己竟會這樣掌握天下權力。 這個權力本來是他真心侍奉的小主人的。 自己本來對吃一點豆漿的太監的職務很滿意。 渭忠縣本來不應該成爲渭忠縣。 他既沒有出診的學識,也沒有汪直之心,甚至沒有劉瑾的野心。 只是因爲豪放厚道, 被宦官們認爲是傻子的魏忠賢在天啓元年後7年間所掌握的一切, 其實他自己並不是費盡心思搶來的。 只是裝着沒出息的樣子。 把這麼多東西帶給他的人是在良心殿前高呼"父親,爺爺九天世"的帝國的紋身。 天啓初期剛從主人那裏得到新名字的魏忠賢小心翼翼地出入了謝禮監的大門。 當時大明帝國的紋身正經歷着史無前例的分裂和內訌。 文官們的黨爭自古以來從未停止過。 但是,從來沒有像天啓年那樣嚴重過。 事實上,早在萬曆初期張巨正去世後,帝國文官的黨爭就愈來愈嚴重了。 萬曆在以後的30多年裏沒有照顧政務。 於是慫恿了黨爭激化。 所謂的黨爭起初只是朝廷大臣們鄉親們聚在一起、合乎心意的人們聚在一起的鬆散的結盟而已。 首先是齊黨、楚黨、浙黨。 三黨爭鬥的制度方面少,人事方面多。 但是,是非和理解不得不相互交織在一起。 如果正常辯論的舞臺已經準備就緒,各方都願意接受的權威人士進行斡旋,這種黨爭將成爲使政治變得乾淨明亮的動力。 但是,從萬曆祭起,這一切就不存在了。 因此,黨爭就像狼羣互相撕咬一樣,發展成黨禍。 後來所謂的"東林黨"投身戰鬥。 他們是講道德權威的老師。 原來的制度鬥爭、人事鬥爭變成了正邪之爭、義氣之爭。 黨爭的血腥味越來越濃了。與原來的三黨類似,東林黨也不是很嚴密的組織。 最初名爲顧憲成的二部囊中在萬曆22年被削去官職,重新回到無錫。 然後在東林書院講課。 同時,對諸位朝廷大臣產生影響,獲得名聲。 同林黨的核心價值觀是學術、政治和倫理不可分割的。 高憲成這樣說:"官職在中央政府,志不爲君主,官職在地方管理,志不爲民,居住在水邊林下,志不爲世,君子不爲所取。" 如果與自己意見不一致,就全部視爲小人、邪黨。 連正常的意見交換也提升爲道德判斷,因此東林黨的冰清玉潔的政治理念確實存在很多問題。 萬曆死後,東林唐人在朝廷得勢。 一時間他們鄙視的人都被誣陷爲邪惡的小人。 甚至像熊正弼、元崇煥這樣的人也會被誣陷爲異端。 被同林黨打成道德棒的人本來可以找皇帝訴苦的。 但是加油橋忙於木工活。 他們只好去找守着皇帝大門的魏忠賢。 從同林黨人的價值判斷來看,魏忠賢是留根的殘餘勢力。 因此,魏忠賢和"邪黨"聯合起來攻擊東林黨。
絕對的高尚和絕對墮落在政治上都是癌細胞。 前者表面上美不勝收,但在致命性上卻與後者無異 墮落者製作高尚者名單獻給魏忠賢。 爲了讓文盲人容易閱讀和理解,將《東林點長錄》黑名單命名爲《守護殿》的貝殼、松江等109名天江之箭的命名貼在了當時的朝廷大臣身上。 開頭部分如下:"東林開山元帥 -- 卓卓卓天王南湖富商李三載(貝殼);總兵都頭領2名 - 天槐城胡甫的大學史攝香膏(松江); 天江城玉麒麟李富商趙南成(盧俊的)...魏忠賢雖然不識字,但進宮前聽過講故事的人說《水滸傳》。 他高興地把這份黑名單給天啓帝加油教看。 沒想到文盲皇帝連《水滸傳》是什麼都不知道。 魏忠賢講述了自己記憶中的守護殿的故事。 加油橋很開心。 他一邊鼓掌一邊高喊"很好"。 "原來東林堂人都這麼好漢啊!"
魏忠賢不得不隱瞞這個黑名單,不再上呈皇帝。 但是名單上的朝廷大臣們殺戮是從這時開始的。 <<名詞>中寫道:"魏忠賢耍權勢時,都是誣陷善良的人,向他獻殷勤。 後來政治迫害的網子越來越大,開始受到攻擊的都是同林黨。" "想把想清除的人全部趕到東林趕走。 從天溪4年10月開始到熙宗鯽魚(天溪7年),被殺的人有10多人,被下獄後流放的人有數十人,被削去官職的人有200多人。 失去官職或被降職的情況是無法估量的。" 帝國文官集團的黨爭最終達到了把桓官奉爲義父的地步。 魏忠賢在沒有做好任何心理準備的情況下,突然被以兒子孫子自居的一羣人擠到了權力的頂點。 他瞬間就像吸食了過多的海洛因一樣,眼神變得模糊,在紫禁城內找不到自己的位置。
1627年夏天過去,秋天來臨的時候,在7年時間裏愉快地做了木匠活,23歲的朱瑜教躺在病牀上。 看着小主人一天天干涸,忠僕魏忠賢心碎了 1個月後,天災牧首朱瑜教病逝。 後備們一共生了3個兒子和2個女兒。 但是全部夭折了。 因此,根據哥哥死後弟弟繼承的法律,朱由檢繼承了皇位。 年號爲崇禎。 1627年嚴冬,小主人去世僅3個月,魏忠賢被紫禁城的新主人追趕。 被趕到中都鳳陽祖陵司香。 迎着寒風,魏忠賢靜靜地經過京城,到達河北阜城。 這時傳來皇帝要派金衣委追殺他的消息。 農曆正月初六,魏忠賢一個人坐在驛站。 牆對面傳來《桂枝兒》:"勢去時衰,零落如漂草……如同沙底般荒涼,真個不如死。" 這麼荒涼,不像是死了一樣)
這是魏忠賢在人間聽到的最後一個聲音。 他賭上了賭注,等着。 然後獲得了所有,然後又全部失去了。 魏忠賢通過自縊結束了自己的一生。

 

【历史】清流也会失败?从明末党争看士大夫集团

 

 

    在明朝末期,出现了这样一个士大夫团体——他们有着相似的政治抱负,却无法在官场得志。于是在野组建书院,高谈阔论,讲学议政。当一展宏图的机会来临之时,他们面对贪污成风、利益至上的官场政治,仍然坚持着廉洁公正与传统儒家伦理道德。然而,这样一个在建立之初堪称“清流”的政治团体,却在朝廷政治斗争之中落败。这似乎是令人意外的,但也似乎是必然的。

    这个政治团体,便是“东林党”。对于不太熟悉历史的读者,“东林党”这个名字可能不太有所听闻。但是,有一副对联那是一定听说过的:

风声雨声读书声,声声入耳

家事国事天下事,事事关心

——这便是东林书院领袖顾宪成所撰。

“东林先生”顾宪成

    与现代的政党并不同,东林党并没有严格的组织形式和章程等严密文件,而是一些人由于地缘、学识、政见等相似关系,而自发的组织在一起的集团,其中大部分人起初是由于官场的失意而被革职,志同道合,书院则一拍即成。书院讨论的内容也不限于学术,也包括日常性、平民性的内容,当然,对于当朝时政也多有所涉及。

一人之见闻有限,众人之见闻无限。

他们怀着这样的的观念,在大庭广众之下公开讨论各种问题。他们重视学问运用于实践,也十分看重朋友关系,而这种友谊高于利益的亲密关系,也是日后东林党对抗阉党和其他派系的凝聚性力量。

 

但是,如此之清流为何最终会在政治斗争中落败?

归根结底,原因只有一个:他们过于理想化。

    这是一帮正义凛然的人,他们想要通过自己的力量改变政治格局,重振大明。这一过程听起来是名垂千古的,更是受传统儒家思想引导下的优良学子们终身追求的。然而实际上,政策的推行可不仅仅依靠大臣们一次次的上书和一篇篇文章。文采再动人,观点再合理,最终传达不到拥有最高决策权的皇帝的耳朵里,一切都付之东流。里应,再加上外合,政策才能得以推行,就如当年张居正改革时期,也有冯保在内廷的大力支持,推行政策的阻力才得以大大降低。然而,进士出身、家庭背景较为富裕的各位士大夫们,大多看不上宦官们,尤其是那些没有学问、利益为先的人。因此他们倾向于走“正规渠道”,而这就给了他人有机可乘的机会。

 

明朝内阁,此时已经成为行政中枢

    对于百年帝国的晚期而言,一切都潜移默化地形成了自己的“游戏规则”,这些规则或明或暗,但协调起来,就能让大国凭借着历史的惯性再多活一会,即便是苟延残喘。

    但对于东林党来说,他们对于这种人情关系的灰色官场政治,是不屑一顾的。张居正红极一时的时候,他们不趋炎附势,反而上书皇帝要整肃政风、躬行节俭。这些观点在价值观上是错误的吗?必然是否定的。但是有时正确的东西是不得人心的,也无法讨皇帝的喜。

    反观东林党最大的敌人阉党之首魏忠贤,通过勾结王安(万历、光宗年间最大的太监)、客氏(天启皇帝乳母)渐渐爬上高位,并通过与皇帝儿时的深厚感情,与多年摸爬滚打修炼出来的沟通技术麻痹天启皇帝,渐渐独揽政权。再加上魏忠贤手下有着“五虎五彪十狗十孩儿四十孙”,这群以利益为驱使、无恶不作的团伙们,从文、武、狱多方面掌握了国家的核心权力,给东林党带来了巨大的压力。

阉党之党首

    然而当朝之人不屑于投靠阉党的,其实不少。东林党为何不汇集这些人增强自己的力量呢?实际上,与阉党相反,东林党进入的门槛非常高,心中稍有一丝世俗利益的贪念,则会被拒之门外。其次,东林党一向看不起阉党,并不认为他们能够掌控政权,他们认为清流最终一定能够战胜邪恶。因此在力量的壮大方面,只在于“精”而不在于“广”。在这种观念的驱使下,东林党和阉党力量的差距逐渐扩大,造成在朝廷中寡不敌众、又远离皇帝这一靠山的局面。在此情况之下,东林党的下场也在意料之中了。

 

    此外,东林党的理想化,还体现在对皇帝的幻想上。

喜爱木工的天启皇帝

    自始至终,他们上书痛骂的对象都是阉党、小人,而希望皇帝能内心觉醒,除掉小人而重用贤人。在东林党人的眼里,魏忠贤就像一颗毒瘤,只有打到魏忠贤,大权才能回落到皇帝大人手中。一旦由皇帝亲政,大国的治理就有了合法性的保障,在这种情况下,就一定比宦官专政要好。然而,并不是每一任皇帝都是明君,也无法做到生来便是尧舜。

    就以天启皇帝为例,受万历朝立太子的政治斗争的影响,这位皇帝在儿时,就误了学习,而长大之后痴迷木工,少问政事。然而,国家的政事的确需要有人来处理,这就给宦官专政带来了机会。同时,一个人的学问和执政水平也并不是完全的正相关关系,若真正让天启亲政,治理国家的效果一定比魏忠贤好吗?这也是不能够确定的。

万历至崇祯

    东林党的政治主张建立在一个理想的条件之下:皇帝是明君,以农为本的稳定经济,内外无患,国家安定。然而事实并不一定与理想条件相一致,但东林党仍坚持儒家所提倡的治国方略,一味的追求“和”

    他们的确贯彻了自己的信念,然而却可能有疏于变通、刻板迂腐之嫌。万历年间立太子时,以程朱理学为核心的东林党坚决反对皇帝废长立幼、破坏祖训,让“争国本”事件持续了长达十五年,万历皇帝疲于“应战”大臣,多年不愿上朝。在明朝中后期,江南地区的资本主义萌芽已经产生,商品经济发展;而后期(尤其是崇祯时期)受天灾影响,西北旱情严重。以农为本的小农经济已经遭到了一些动摇,然而东林党主张废除工商税,相当于加重了农业税,使百姓苦不堪言,成为了西北民变的导火索。

明朝后期地图

    而面对北方少数民族迫在眉睫的进攻时,东林党人刘宗周向皇帝提出“慎独”之学,反对运用大炮等先进武器,泛泛空谈而不能解决实际问题。

    类似这样的例子在东林党人身上并不少见,也是大儒经常会犯的错误——刻板而不知变通,空谈而不切实际。

    由于明朝后期心学有向禅、佛的倾向,因此以程朱理学为指导思想的士大夫们复兴心切。然而,程朱理学其本身,就已经成为了一个禁锢的思想牢笼。它传统、复古,只能做到“维系”而做不到“新兴”。东林党人纯粹的信仰和理想缺少了实现的条件和手段,在现实面前,他们无法成功也无法妥协,等来的就只剩败局。

占据官方思想统治地位的程朱理学

    在历史的长河中,东林党的这些士大夫们如星般一闪而过;历经百年风霜的庞大帝国,最终也化为灰烬,覆灭在时光之中。然而,笔者认为,东林党的六、七君子铁骨铮铮、坚持信仰不惜献出生命的崇高精神仍然是值得后世尊敬的。试问现世几人,能够进大狱而信念不改,负重刑而操守不变?

大笑,大笑,还大笑。刀砍春风,于我何有哉!

 

后记:

想写很久也鸽了很久了,终于写完发出来了。非历史专业,欢迎大家批评指正!如果喜欢的话不要忘记点赞收藏和分享呀! 这样排版是不是有点没有条理性= =下次想个小标题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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