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에 대하여는 그녀가 실제인물인지조차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시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서시는 그저 고대에 미인을 가리키는 통칭이었지, 어느 한 여인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나라이전의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이런 의미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그 근거로 월왕 구천보다 2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쓰여진 <<관자(管子)>>에 이미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을 든다. <<관자>>에는 "모장(毛嬙), 서시(西施)는 천하의 미인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녀가 어떻게 200년이 지난 이후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터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둘째, 서시와 관련된 진나라이전의 모든 기록에서는 "미인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충의절개와 관련된 행적은 아주 중시해서 이러한 내용을 소개하는데 빠뜨리는 법이 없었던 사마천도 <<사기>>에 서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서시를 이용해서 미인계를 썼다는 것은 후세인들이 조작한 것이다.
셋째, 국가의 흥망은 정치, 경제, 군사, 외교등 측면의 심각한 원인때문이지 절대 한두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봉건시대에 정치무대에서 배제되었던 여인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일단 국가가 패망하면, 여자 하나를 찾아서 속죄양으로 삼는 것이 중국 고대의 전통이었다. 하(夏)나라 걸왕때 말희가 그랬고, 상(商)나라 주왕의 달기가 그러했고, 주(周)나라 유왕의 포사가 그러했다. 그러므로, 오월간의 싸움에서의 서시를 통한 미인계라는 것도 결국은 '여화망국론(女禍亡國論)'의 변종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는 봉건시대의 소설가나 사학가들이 즐겨쓰던 수법일 뿐, 진실한 역사는 아니다. 서시도 없었고, 미인계도 없었다.
이에 반하여 서시는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일파도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자>>라는 책은 한꺼번에 완성되거나, 한사람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 후세에 계속 보완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가지고 서시의 존재여부를 단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없다. 전국시대가 되면 믿을만한 서적들인 <<묵자>>, <<맹자>>, <<장자>>등에서 모두 서시의 아름다움을 언급하고 있고, 서한초기에 만들어진 가의의 <<신서>>, 유향의 <<설원>>, 유안의 <<회남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서시는 확실히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미인계'를 쓰거나, '미인계'에 빠지는 것은 그다지 광명정대하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시의 일은 오, 월의 두 나라 사가들이 언급을 꺼렸던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취사선택에 엄정했던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오월지역에는 널리 퍼져 있었고, 이 일을 처음 기록한 사람들이 오월에 살던 작가인 원강, 조엽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셋째, 절강 소흥에서 출토된 한나라때 제작된 오월인물화상 동경(銅鏡)을 보면, 그림의 내용에 오왕, 오자서, 월왕, 범려와 두 여인이 있다. 그림에 오왕은 화가나서 오자서를 바라보고 있고, 오자서는 비분강개하여 칼을 뽑아 자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월왕과 범려는 몰래 속삭이고 있는데, 득의만면한 표정이다. 넓은 소매에 긴 치마를 입고 있는 정정옥립(亭亭玉立), 풍자작약(風姿綽約)의 두 여인은 바로 서시와 정단(鄭旦)이다. 서시에게 가무를 가르쳤던 토성산유적지도 남아 있고, 서시의 거처였던 고소대, 관와궁, 서시동, 완월지등의 유적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서시는 확실히 존재했었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