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문서(張文瑞)
원세개 일생의 영욕훼예(榮辱毁譽)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죽은지 백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정설이 없다. 원세개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의 도덕이나 문장은 제외하고라고 한 일은 적지 않다. 일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쓰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보아야 한다. 원세개는 만난 사람이 무수히 많다고 할 수 있고, 쓴 사람도 적지 않다. 민국초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대총통은 누구를 가장 신임하고, 누가 가장 능력이 있습니까?" 원세개가 답했다: "내가 가장 믿는 자는 구재인(九才人), 십책사(十策士), 십오대장(十五大將)이 있다."
사람들이 상세히 묻자, 원세개는 답한다:
구재인: 서국인(徐菊人) 웅재(雄才), 양행성(楊杏城) 일재(逸才), 엄범손(嚴範孫) 양재(良才), 조지암(趙智庵) 기재(奇才), 장계직(張季直) 반재(槃才), 손모한(孫慕韓) 준재(雋才), 완두첨(阮斗瞻) 청재(淸才), 주집지(周緝之) 장재(長才), 양연손(梁燕孫) 민재(敏才).
십책사: 양석자(楊晳子) 선사(善辭), 왕일당(王一堂) 선모(善謀), 장종인(張鍾仁) 선단(善斷), 조윤전(曹潤田) 선계(善計), 육윤생(陸潤生) 선책(善策), 장중화(章仲和) 선치(善治), 왕곤보(汪袞甫), 김백병(金伯屛) 선문(善文), 고거육(顧巨六) 선도(善道), 시학추(施鶴雛) 선사(善事).
십오대장: 복장(福將) 왕빙경(王聘卿), 주장(主將) 풍화보(馮華甫), 중장(重將) 단지천(段芝泉), 유장(儒將) 장금파(張金波), 노장(老將) 장자지(張子志), 맹장(猛將) 장소헌(張紹軒), 수장(守將) 전환정(田煥庭), 용장(勇將) 조중삼(曹仲三), 대장(大將) 예단침(倪丹忱), 전장(戰將) 단향암(段香巖), 건장(健將) 뇌조언(雷朝彦), 승장(勝將) 육랑재(陸朗齋), 강장(强將) 강우징(江宇澄), 효장(驍將) 전온산(田韞山), 무장(武將) 진이암(陳二庵)
이상은 진공일(陳灨一)이 쓴 기록이다. 진공일(1882-?). 강서(江西) 신성인(新城人). 관료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원세개의 막부에서 일한 바 있고, 양사기(楊士琦, 자는 杏城)과 사촌관계이다. 나중에 장학량의 막부에서 기요를 맡는다. 민국17년(1928년) 정계를 떠나 경성,천진에서 교육과 저작활동을 한다. 진공일의 출신이력을 보면, 그가 쓴 원세개의 "구재인, 십책사, 십오대장"이라는 설은 믿을만 한 것을 보인다. 진공일은 이 설을 기록했을 뿐아니라, 원세개가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고, 안목이 비범하다고 여겼다.
'구재인'에 관하여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웅재 서국인. 즉 서세창(徐世昌)이다. 천진사람으로, 광서제때 진사이며 한림원 편수의 직을 받는다. 병부상서, 민정부상서, 동삼성총독, 우전부상서, 군기대신 겸 정무대신, 헌정편수관대신, 협판대학사, 체인각대학사를 지내고, 태보(太保)의 직을 받는다. 민국3년에 국무경(國務卿)이 되고, 민국7년에 대총통(大總統)에 오른다. 서국인은 일찌기 부친을 따라 하남에서 타향살이를 한 적이 있으며 원세개와 알게 된다. 서세창은 강유상제(剛柔相濟)하고, 침온연달(沉穩練達)하다. 원세개가 임종전에 오열하며 서세창에게 말한다: "내가 어찌 황제를 칭하길 원했겠는가? 오로지 누군가 총통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부득이 강력한 힘으로 그런 생각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일패도지할 줄은.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1,2년후에는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덕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고, 재능이 부족하여 임기응변할 수 없다. 그런 때가 되면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과연 2년후, 서세창은 대총통에 오른다.
일재 양행성. 즉 양사기(楊士琦)이다. 안휘 사현 사람이다. 거인 출신이다. 원세개가 북양대신으로 있을 때 양사기는 막료장을 지낸다. 나중에 상부우참의, 회판전정대신, 독판윤선초상대신, 남양공학감독, 농공상부우시랑, 우전부대신, 민국정사당좌승을 지낸다. 양사기는 상부(商部)에서 오래 동안 일을 했고 규정대로라면 보수로 십여만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이를 국가에 기부한다. 사람들이 왜 받지 않느냐고 물으니, 양사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지면 부자가 되겠지만, 버려도 가난하지 않다. 돈을 마땅히 유익한 사업에 써야 한다." 경자년, 양사기는 진유철로(津楡鐵路)를 관리한다. 팔국연합군이 천진을 공격할 때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이 날아왔다. 그러나 양사기는 태연자약하게 서탁에 업드려 이해득실을 써서는 문충공 이홍장(李鴻章)에게 보낸다. 이홍장은 양사기의 글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행성의 이 글은 일자일주(一字一珠)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양사기의 형제가 8명인데, 양사섭(楊士燮), 양사보(楊士普), 양사성(楊士晟), 양사양(楊士驤), 양사기, 양사균(楊士鈞), 양사전(楊士銓), 양사총(楊士驄). 이들은 혹은 지방관이거나 능신이거나 준재이거나 명사였다. 누구 하나 평범한 자는 없었따. 부친 양전방(楊殿邦)은 조운총독을 역임했다. 양사섭등의 자식대에에는 양육장(楊毓璋), 양육감(楊毓瑊), 양육전(楊毓瑔), 양육수(楊毓秀), 양육영(楊毓瑩), 양육영(楊毓瑛)등이 있는데 모두 업적을 남긴다. 조손15명은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 청말민초의 일대기사라 할 수 있다.
양재 엄범손. 즉 엄수(嚴修)이다. 천진사람으로 광서제때의 진사이고, 한림원편수의 직을 받는다. 학부좌시랑, 탁지부대신, 민국교육총장, 참정원 참정을 지낸다. 과거제도를 고쳐 중국현대교육을 만든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장백령을 이끌고 남개학교 및 남개대학을 설립한다.
기재 조지암. 즉 조병균(趙秉鈞)이다. 하남 여현 사람이다. 현위보(縣尉保)에서 도원(道員)까지 오르고, 천진보정순경총판, 민정부(전 순경부) 우시랑, 민국 내무총장, 국무총리, 직예도독을 지낸다. 중국현대경찰제도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원세개가 대총통에 오른 후, 조병균은 사망한다. 어떤 사람은 원세개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지암이 아직 살아있다면, 핵심요직에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자 원세개는 탄식하며 말한다: "지암의 풍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마치 새에게서 날개를 떼어낸 것같다."
반재 장계직. 즉 장건(張謇)이다. 강소 남통 사람이다. 광서제때 장원을 하고, 한림원 수찬의 직을 받는다. 농공상부대신, 민국농상총장, 수리국총재등의 직을 지낸다. 거액을 모아서 실업을 창업한다. 장건은 글을 써서 판 수입으로 지방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이야 어딜 가든 재물을 모을 수 있지 않으냐. 하필 팔힘을 들여서 돈을 모으느냐?" 그러자 장건이 대답하다: "내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다만 먼저 내가 최선을 다 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지 않겠는가?" (槃, 물을 가득 담은 목반이다.)
준재 손모한. 즉 손보기(孫寶琦)이다. 절강 항현 사람이다. 음사로 관직이 4품에 이른다. 독일대신, 간서산동순무, 민국외교총장, 국무총리대리, 심계원원장, 재정총장, 새무처독판, 초상국총동을 지낸다. 손보기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공은 관직이 높은데 왜 교만해하지 않는가?" 손보기가 대답한다: "다른 사람을 모함할 수 있는 사람이 교만하다. 나는 모함할 줄 모른다. 그런데 어찌 교만하겠는가?"
청재 완두첨. 즉 완충추(阮忠樞)이다. 안휘 합비 사람이다. 도원으로 북양정부 원세개의 막부에 들어온다. 순천부 부승, 민국 총통부 비서장, 내사감을 지낸다. 장태염(章太炎)이 경사 용천사에 연금되어 있을 때, 원세개는 그가 문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할까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완충추는 원세개에게 간언한다: "당나라의 무조(무측천)이 낙빈왕의 격문을 읽고도 그가 인재라고 여겼으며, 명나라때의 연왕도 방효유의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으려 생각했다. 장태염의 학술은 얻기 힘들 정도이다. 죄없이 죽인다면 공의 지혜가 연왕 무조보다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원세개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포기한다.
장재 주집지. 즉 주학희(周學熙)이다. 안휘 추포 사람이다. 양광총독 주복의 아들이다. 거인으로 공명을 얻어 절강후보지부가 된다. 장호염운사, 직예안찰사, 민국 재정총장을 지낸다. 실업으로 성공한다. 주학희는 재정총장을 지내면서 힘들었다. 일찌기 이런 말을 한다: "국고가 텅비었고 외채를 계속 일으킨다. 한푼을 아끼면 한푼만큼 더 쓸 수 있다." 누군가 그가 너무 절약한다고 하였으나, 주학희는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집이 가난한데 입고 쓰는데 사치한다면, 한때는 기분이 좋겠지만 조만간 거지로 전락할 것이다."
민지 양연손. 즉 양사이(梁士詒)이다. 광동 순덕 사람이다. 진사출신으로 한림원 서길사의 직을 받는다. 우전부우참의 겸 경한철로국총판, 우전부부대신겸대신, 민국총통부비서장, 재정차장겸교통은행총리, 국무총리를 지낸다.
현재의 표준으로 보자면 위의 9명은 모두 장관급 이상의 고관이다. 백년전의 장관급간부는 아직 넘쳐나지 않았다. 이런 직위까지 오를 수 있다면 인재중의 인재이다. '현(賢)'이라는 말을 붙이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어도, '능(能)'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있는 사람들이다. 청말민초는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때이다. 각지의 호걸등이 다 모여들었다. 무능하고 평범한 자라면 허명을 얻기 어렵다. 하물며 원세개는 인재를 잘 알아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공정하게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역사에 대하여, 학계의 태두인 진인각 선생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심사보고서에서 이런 단어를 쓴다. "이해의 동정". 필자의 생각으로 소위 이해라는 것은 전면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어느 일면을 보거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위 동정이라는 것은 역사사건을 존중하고 인물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심리상태와 언행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는 공부의 문제이고, 학술의 범주이니 그래도 쉽게 할 수 있다. '동정'은 개인가치판단 및 수양의 경지이다.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 아마도 동일한 역사사건 혹은 동일한 역사인물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난무하는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来源:人民网 作者:吕峥
核心提示:甲申政变以中国大胜,日本惨败而告终。袁世凯一战成名,应国王之邀,居于偏殿楼下,朝夕接触会晤,成为清廷在朝鲜的实权人物。
在中国近代史上,袁世凯似乎已是盖棺论定的人物。一个世纪以来,史学界众口一词,对他均持否定的评价,“窃国大盗,一世奸雄”即足以涵盖袁世凯的一生。然而,人性是复杂的,一百年前的社会环境也是复杂的,北洋集团影响和左右了清末民初三十多年的政局,对其核心人物袁世凯的评价并不是简单的肯定或否定便能概括的。
长期以来,历史教科书告诉我们,戊戌六君子的血染红了袁世凯的顶戴;小站练兵使他获得慈禧和荣禄的青睐;山东巡抚任上剿杀义和团更使他飞黄腾达。然而,性格决定命运,袁世凯的锋芒早在二十三岁时便已锐不可当,他发迹的地点不在中国,而在朝鲜。
壬午兵变给了日本染指朝鲜的借口
历史上的朝鲜长期是中国的属国。在制度上它效仿中国,实行闭关锁国的国策,一直自给自足,风平浪静。到了19世纪末,危机开始出现。同当时的中国一样,朝鲜面临着列强的巨大压力,尤其是日本和俄国,对朝鲜的觊觎已非一日。在外部压力的催化下,朝鲜内部宫廷的倾轧和斗争愈演愈烈,终于在1882年爆发了“壬午兵变”。
当时统治朝鲜的是建立于明朝洪武年间,持续了近六百年的李朝。李朝与明清两朝相始终,一直同中国维持着良好的属国关系。
1864年,朝鲜国王李昇去世,由于没有子嗣,便以他弟弟之子李熙入承大统。李熙年方十二,不谙世事,由他的父亲以大院君(相当于摄政王)的身份摄政。大院君思想极端守旧,他屡次杀害传教士,坚决不与外人通商。
十年后,李熙长大亲政,权力逐渐转移到其妻闵妃(明成皇后)手中。闵妃较为开明,主张仿效日本的明治维新,进行自上而下的改革。而大院君贪恋权位、刚愎自用,反对削弱他权力的政治改革,于是,大院君集团和闵妃集团之间的矛盾逐渐深化,兵变一触即发。
1876年,日本以朝鲜拒绝邦交,蔑视日本为借口,出动兵舰,胁迫朝鲜签订了不平等的《江华条约》。清政府在此次事件中懦弱无能,姑息绥靖,完全没有尽到宗主国的保护责任。而日本国势蒸蒸日上,朝鲜王室和大臣中一些人在失望之余,开始把目光从大清转向日本。
清政府的矛盾心态是:既不愿出面维护朝鲜的权益而得罪日俄,又怕日俄并吞朝鲜对其龙兴之地的东北构成威胁。时任直隶总督的李鸿章重施“以夷制夷”的故伎,致函朝鲜国王李熙,传授机宜:“用以毒攻毒、以敌制敌之策,乘机次第与泰西(欧洲)各国立约,借以牵制日本。”
固步自封的大院君起初不愿,但最终还是接受了李鸿章的“劝导”,在1880年10月的御前会议上通过了“开化自强”的方针,并在清政府的帮助下,相继同美、英、德、法等西方列强签订了通商条约。朝鲜的大门从此洞开,成为列强角逐的舞台。
1880年,闵妃集团开始借军制改革之机削弱大院君集团的实力,裁汰由大院君亲手创办的“亲军营”,组建了以日本人为教官的新军“别技营”。新军在装备和待遇上都高于旧军,激起了旧军极大的不满。1882年,为防止旧军哗变,当局向欠饷已达13个月的汉城驻军发放饷米。由于饷米中掺了砂石和糠皮,不堪食用,愤怒的士兵殴打了管理粮库的官员。闵妃的心腹、兵曹判书(相当于兵部尚书)闵谦镐下令逮捕带头闹事的士兵,成为激起汉城驻军兵变的导火索。激愤的士兵冲进军械库,夺取武器,释放被捕士兵,并跑到大院君府上诉说冤情。
大院君趁机煽风点火,暗示此事是闵妃勾结日本人所为。变兵头脑发热,不辨真假,立即去攻打日本使馆。他们杀死了日本教官,处决了闵谦镐等后党高官,并打进宫里搜捕闵妃。闵妃装扮成宫女,逃出王宫,一时间,政局陷入瘫痪,汉城大乱。
壬午兵变爆发后,日本驻朝公使花房义质逃回国报告了事变经过。日本政府决定借机大举入侵朝鲜,胁迫其割地赔款,签订新的不平等条约。清廷驻日公使黎庶昌得知后,急电直隶总督署,建议“中国宜派兵船前往观变”。与此同时,还在逃亡途中的闵妃惊魂甫定,指示后党成员、正在天津的朝鲜使臣金允植向清廷求救,一场“抗日援朝”的大戏正式拉开帷幕。
兵贵神速,清军抢占控制朝鲜的先机
袁世凯是跟随吴长庆到的朝鲜。
安徽庐江人吴长庆和袁世凯的嗣父袁保庆(袁保庆无子,便将其弟袁保中的第四子袁世凯过继给自己)是生死之交。他自办团练对抗太平军,日积月累,成为淮军的一支劲旅,号称庆军。吴长庆本人也官至提督,功震四方。在叔伯父们相继离世,失去荫蔽后,袁世凯投奔吴长庆是自然而然的选择。
在进军朝鲜的过程中,袁世凯办事干练,雷厉风行,表现出了突出的才干。
清军从得知日本出兵的情报到登船赴朝,前后不过十余天。而吴长庆出征的准备时间只有七天。压力转嫁到了在吴长庆帐下当幕僚的张謇头上,他被全权委托处理一切有关出兵的筹备事宜。
当时恰逢乡试,吴长庆责成袁世凯去考试。而袁世凯并不喜欢舞文弄墨,只想奔赴沙场建功立业,如此苦衷,却不便明言。正好张謇一个人要应付内外事务,实在忙不过来,便对吴长庆说:“大帅不要叫慰廷去考试了,就让他帮我办办出发的军事吧。”吴长庆一向尊从张謇的意见,便答应了。
于是,张謇立刻委派袁世凯赶办行军应用的各种物件,他欣喜地发现,原本自己需要五六天才能办好的事,袁世凯不到三天就办得妥妥当当。
清军抵达朝鲜的仁川后,吴长庆指派一个营为先遣部队,下令立即登陆。但该营指挥官却表示士兵不习惯航海,大多晕船,请求暂缓登陆。吴长庆大怒,立即将营官撤职,改派袁世凯代理。袁受命后,督率该营在两个小时内便完成了登陆,令人不得不对这个年仅23岁的青年刮目相看。
其实,早在这一年的春节,袁世凯初入庆军时,就已经表现出了随机应变,处事果断的特点。春节循例放假三天,很多士兵在营中聚赌,一言不合,由争吵发展为殴斗,直至彼此开枪。由于各营营官多已回家过年,无人主持,营中秩序大乱。袁世凯当时正好在营里,他灵机一动,假传统领的命令,带领一些士兵赶到出事现场。查明事情原委后,立即将为首肇事之人就地正法,这场纠纷才得以平息。
事后,袁世凯向吴长庆报告了事情的经过,并就自己“专擅杀人”一事向吴请罪。吴长庆不但不责怪他,反而嘉奖他的临机应变之才,任命他为营务处帮办。
在出兵前,金允植曾建议吴长庆诱捕大院君,归政国王李熙,吴长庆心领神会,命袁世凯“密为布置”。到了朝鲜,大院君赴清军军营回访,袁设计将其众多卫士阻于军营之外。大院君入营与吴长庆寒暄后,觉察气氛有异,在同吴笔谈时问:“将军将作云梦之游耶?”(汉高祖曾借巡游云梦泽之机,消灭地方诸侯韩信、彭越。大院君以此暗示清军名为平乱,实则想对他不利)。吴长庆闪烁其词,不忍发动。而袁世凯则持刀在侧说:“事情已经泄露,迟则生变!”随即督促手下将大院君强行扶入轿子,星夜登上兵舰,押送天津。
由于庆军抢先于日本登陆,迅速平定了朝鲜境内的叛乱,又扶持李熙掌权,朝鲜王室对中国的向心力大大增强,请求中国帮助善后,而清政府也借机对朝鲜实行了全面控制:首先,平乱的庆军六营全部留驻朝鲜,帮助朝鲜训练新军,在军事上加强了介入。其次,与朝鲜签订通商条约,以此重申中国的宗主国地位。最后,通过代管,全面掌控了朝鲜的海关以及外交事务。
甲申政变突然爆发
壬午事变日本被清军抢占了先机,没能达到预想的目的,但日本人在其后和朝鲜签订的《济物浦条约》中获得了五十万元的赔款和在汉城驻军的权利,当然,这是清政府为了息事宁人而指示朝鲜作出的让步,以免日本心怀怨恨,再来滋事。
然而,日本绝不会接受这样的好意,他们把侵占朝鲜看作实现其大陆政策的跳板,是必争之地,因此极为反对和仇视清政府对朝鲜的控制。拥有了在汉城的驻军权后,日本开始紧锣密鼓地实施插手朝鲜内政、扶持“开化派”的策略,试图推翻亲华的后党政权,为将来铺路。
由于吴长庆帮助闵妃平息了壬午兵变,成为她坚强的军事后盾。因此,当闵妃掌权后,亲华成了必然的选择,那些由她提拔上来的亲华派官员聚集在一起,形成了一股牢不可破的势力。
壬午之后,朝鲜一批激进青年流亡日本。明治后期的日本发展令他们大开眼界,钦羡不已。相形之下,朝鲜却泥古不化,死气沉沉,因此顿生亲日背华之心。这帮青年组织了“开化党”,主张“外结日本,内行改革,联日排清,脱离中国,宣布朝鲜独立,实行君主立宪”。亲日力量自然形成,朴泳孝和洪英植等人皆为“开化”中坚。
开化党一回国,朝鲜新旧两派立即泾渭分明。一方亲日,一方亲华,明争暗斗,势同水火。新旧两派的斗争远远超出了朝鲜内政的范围,成为中日两国外交争端的前台戏。
起初,开化党的实力远逊于守旧派,只能在有限的职权范围内通过渐进改良的方式推动一些小的改革。
转机出现在李熙身上。李熙喜欢听外国新闻,朴泳孝经常借此进宫,向国王讲述国际形势和各国的政治制度,力陈改革与自立的刻不容缓,获得了李熙的信任和支持。开化派在现行的权力框架中长袖善舞,实施了许多改革措施。守旧派出于自身利益,不断阻挠并破坏开化派的改革运动。他们将朴泳孝调离汉城,想以此架空开化派,使其改革运动受挫。
1884年,中法战争爆发,中国南方形势危急。5月,吴长庆奉调率领三营庆军回国驻防,力量对比开始向开化党倾斜。由于清军在战争中节节败退,清廷在朝鲜的威望大大降低,原想托庇于清廷保护的王室和亲华派也开始动摇。开化党和日本认为清廷在战争期间无暇北顾,是发动政变的绝好时机,遂决意起事。
政变发生之前,袁世凯已经察觉到情况有异,他将朝鲜山雨欲来的紧张局势函告给了李鸿章并提醒他,日本公使竹添进一郎将在八九日内返回汉城,届时可能会有事发生。
1884年12月4日,甲申政变在没有任何预兆的前提下突然爆发。当晚,开化派重要成员,时任邮局总办的洪英植以庆祝邮政大厅落成的名义邀请守旧派大臣和外国使节赴宴。日使竹添托病不出,袁世凯察觉气氛有异,也推托不去,只有中方总办朝鲜商务委员陈树棠、守旧派大臣闵泳翊等出席。
席间,开化派党徒在厅外放火,宾客以为有人在燃放烟花,纷纷外出观看。
这时,埋伏在厅外的开化派党徒一拥而上,将闵泳翊乱刀砍倒,一时间宾主皆做鸟兽散,各自逃命。
党徒们趁乱入宫,谎称清军作乱,恐吓威逼国王李熙写下了“日本公使来卫朕”的敕书,由朴泳孝按预定计划持敕书引日使竹添带兵入宫,并将国王和闵妃迁往景佑宫。
控制了王宫的日军和开化党新军矫诏召守旧派重臣入宫,以逸待劳,来一个便处死一个。翌日,开化党组成新政府,以国王谕旨的形式函告各国使节,那些早已同他们达成默契的使节纷纷配合演戏,晋谒国王,恭祝新政,政变似乎大功告成。
袁世凯崭露头角
由于事出突然,袁世凯等人起初并不知道发生了政变。在接到陈树棠的报告后,袁世凯当即带兵二百人赶赴邮局,但早已空无一人,日本使馆也大门紧锁。
袁世凯带兵沿宫墙巡视,遇到疾行的韩军,问其所往,回答是奉命入宫禁卫。巡视至宫门时,发现宫门已闭。直至拂晓收队,还是不知发生了什么事情。到了次日下午,才探明政变真相,当得知相熟的大臣们都已经遇害身亡时,袁世凯的心情极为沉重。
当时,中朝间的公文都要靠北洋的兵船送到天津的北洋衙门,往来一次需要好几天时间。如果按常规请示,重大事变的应对决策必由北京的清廷最高层来拍板,时间的延误也就无可避免,而挽回大局的机会就可能失去了。在这个重要的历史关头,袁世凯表现出了勇于任事、处事果断的心理素质。
在开化党公布新政府的成员名单时,驻朝的清军将领们也在磋商对策。吴兆有和张光前两个将领均表示“没有北洋的命令,不敢轻举妄动”。袁世凯强调情况紧急,已不可能待命而行。陈树棠则向众人转达了美、英、德三国使节要求清军暂缓行动的劝告,并表示自己意见相同,认为这样可以避免师出无名,衅自我开。金允植也来函请清军按兵不动,以免伤及被日人挟持的国王。
会商的结果是,清军暂不出动,由陈树棠、吴兆有紧急函告李鸿章朝鲜发生政变,请求增兵并指示应对策略。袁世凯则负责联络争取由他编练的朝鲜新军。当晚,袁世凯向新军发放上等成色的黄金六百两,与左右营指挥官金钟吕、申泰照秘密约定次日入宫,共同护卫国王。
第二天上午,开化派政府发布改革政纲,汉城居民得知政变是开化党勾结日本人所为,一时人心思乱,举国惶恐。幸免于难的守旧派成员纷纷跑到清军大营,“痛哭乞师”,要求出兵勤王,众人仍是犹豫不决。
在两次致函国王,要求晋谒并带兵入卫王宫的请求被拒后,袁世凯认为事态紧急,间不容发,力主入宫戡乱。为了打消众人的疑虑,袁世凯承诺“如果因为挑起争端而获罪,由我一人承当,决不牵连诸位”。
见众人首肯,袁世凯立刻率一营官兵及朝鲜新军左右营赶赴王宫。
一入宫,便遭到守军的猛烈射击。清军果断还击,双方展开了激战,宫内顷刻大乱,闵妃携王子趁乱逃出宫门,投奔清军大营。袁世凯攻至景佑宫,发现国王已被转移,遂与退守楼台的敌军展开新一轮的激战。
袁世凯身先士卒,即使尸体满路也毫无惧色,奋勇当前。正胶着间,守军中数百个之前蒙袁世凯督导训练的士兵临阵倒戈,加入了清军一方,战局立刻急转。
竹添首先动摇,率领日军退回了使馆。朴泳孝等政变骨干亦随之逃跑,一路上受到聚集在宫外的市民的追打,洪英植等人护卫国王出宫赴北庙避难。整个战斗持续了两个小时,清军大获全胜,但遗憾的是仍不见国王的踪迹。
袁世凯重金悬赏打探国王去向,夜间才得知其下落,立刻派兵前去抢夺,洪英植试图阻拦被杀。
次日,国王移居袁世凯所部军营,召集原政府成员金弘集、金允植等,商议善后,组成新政府,并召见各国使节,告知政变平息。竹添因使馆连日遭到愤怒的汉城民众的围攻,惊惧交加下,自焚使馆,逃往仁川的日本领事馆躲避。
甲申政变以中国大胜,日本惨败而告终。袁世凯一战成名,应国王之邀,居于偏殿楼下,朝夕接触会晤,成为清廷在朝鲜的实权人物。
其实,此役双方兵力相差并不悬殊,各有一千余人。而竹添挟制了国王,控制了王宫,作战有险可据,以逸待劳。为何一败涂地?
首先,这与双方领军人物的意志有关。一切战斗都是心战,心理素质的强弱决定了战局的走向。政变一方的核心是日本驻朝公使竹添进一郎,竹添是个狂热的帝国主义分子,到任后积极扶持开化党。中法战争爆发后又怂恿开化党发动政变,建立亲日政权。
政变前夕,竹添曾将政变计划报告给日本政府。同时摆到日本外相陆奥宗光办公桌上的还有一份关于中国将割让台湾给法国的密报。日本政府大为恐慌,认为台湾重于朝鲜,要倾尽全力阻止法国夺台。为了缓解清政府的压力,使其不至于在谈判桌上向法人屈服,日本政府决定禁止竹添发动朝鲜政变。
然而竹添狠就狠在敢于先斩后奏,他不待政府批准,便擅自发动了政变。
反政变一方的核心人物是袁世凯。他为了维护清廷在朝鲜的利益不遗余力,而且勇于担当,坚毅果敢。在政变突发,众人犹豫彷徨之际,袁世凯慨然自任,断然出兵,可以说走的也是一步孤注一掷的险棋。
由此可见,无论是日方还是中方,其军事行动都是未经政府批准的。成功则罢,一旦失败,将会承担严重的责任。因此,这种铤而走险的行为一旦发动,就必须一气呵成干到底。在这场对双方领军人物个人意志的考验中,袁世凯胜,竹添败。
这一战促成了袁世凯的崛起,此后十年,他成为清政府驻朝鲜的头号人物。在李鸿章的遥控下,袁世凯恩威并施,全面控制了朝鲜的内政外交。同时,经此风波,朝鲜加快了改革的步伐,要求独立自主的呼声日渐高涨,对清廷的向心力逐渐减弱,对朝鲜官民而言,历史已经揭开了新的一页。而日本方面,一次小的失败并未阻挡其扩张称霸的野心,日本人痛定思痛、枕戈待旦,十年之后,借朝鲜的另一次内乱——东学党起义,挑起了中日甲午战争。
这一次,清廷一败涂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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