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성은
지난여름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라는 이름으로 10편의 릴레이 인터뷰를 했다.(☞모아보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진행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누구도 차별당하면 안 된다." 이 당연한 명제를 실현하는 법안에 시민 대부분도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 관한 이야기는 '성소수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연재는 15년째 반복되는 이 물음에서 더 나아가고자 한 시도였다. "성소수자는 어떤 차별을 당해요?"라는 질문을 넘어, 우리가 '사회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을 '차별'로 설명하고자 했다. 디지털 성범죄, 죽음과 장례, 직장 내 괴롭힘, 높은 부동산 가격과 주거권. 우리가 겪는 일들, 혹은 너무나 평범해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일들. 그러나 각각 별개로 보이는 영역의 활동가, 당사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차별구조에 관해 사회가 고민할 것이고, 이 문제 해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지난해 6월, 차별금지법이 국회 법사위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오늘날까지, 우리는 '차별금지법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국회는 여전히 "성소수자를 차별금지 사유에 넣을 것이냐"에 묶여있다. 이걸 '사회적 합의'라고 했다. 선거를 앞둔 지금은 '민감한 이슈'라고 한다.
<프레시안>이 다시 차별의 평범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번엔 누군가의 삶, 우리 모두의 삶을 이야기한다. 매 순간의 긴장, 중요한 순간에 주어지는 선택권의 제약. "누가 어떤 차별을 당하는가" 이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시대. 반듯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초고층 빌딩이 번쩍거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평범한 일상. 흙먼지 날리는 판자촌과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했던 보릿고개는 할머니 세대에나 있었던 일일 게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곁에 있다는 것> 등의 김중미 작가는 2022년 오늘날에도 오래된 가난을 말한다. 그는 '가난은 감춰졌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가난을 마주하는 공간은 35년째 운영 중인 '기찻길 옆 공부방'이다. 가난으로 몰리는 사람들과, 가난하기 때문에 내몰리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의 굴레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번듯하고 깨끗한 도시는 이들을 밀어내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요즘도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느냐'고 되묻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다. 가난을 마주하는 게 왠지 불편하고 때론 죄책감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김중미 작가는 가난을 모른 척 감추는, 그러면서 가난하지 않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아야 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더 봐야한다."
프레시안 : '기찻길 옆 공부방'을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어요. 이전에도 빈민운동을 오래 했는데 빈민운동을 하다 공부방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중미 : "그 이전엔 대학병원 행정직으로 일했어요. 그 병원이 영등포와 구로동 사이, 지금의 대림역 근처에 있었습니다. 구로공단이 가까웠죠. 병원을 찾는 환자는 노동자, 도시 빈민이 많았습니다. 주로 밤에 오는 환자분들이었죠. 낮에는 달랐어요. 대학병원이니까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왔죠. 80년대 초중반, 이렇게 극명하게 갈라진 한국 사회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병원 앞에 '원풍모방'이 있었어요. 원풍모방의 투쟁도 바로 옆에서 지켜봤죠. 그 시기, 85년 즈음에는 목동 재개발이 있었고 그 후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재개발이 시작됐어요. 그러면서 그 지역에 살던 세입자, 영세한 가옥주의 투쟁도 시작됐고요. 자연스럽게 빈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본격적으로 빈민운동에 뛰어들 땐 제 본가가 있던 인천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1987년에 직장을 그만두면서 빈민운동을 지역을 찾았습니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 중 하나가 지금 공부방이 있는 동구 지역이었습니다. 동구에서 다섯 곳 정도를 알아보다 가장 마음에 든 곳이 만석동이었어요. 제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동네예요. 만석동은 일제강점기에 병참기지였던 곳입니다. 이후에 동일방직, 동아제분 같은 회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죠.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만석동에 이주해 자리 잡았고요. 그런 위치, 역사성 같은 것들에 마음이 끌렸죠. 그래서 1987년도에 만석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단 무작정 동네에 들어가고서 동네를 알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했어요.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 같은 것도 했고요. 그런데 골목을 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는 거예요. 우리 동네 골목이, 일제강점기에 '조선 기계 제작소'에서 만든 한국인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을 마주 보고 작은 부엌과 방이 기차처럼 연결돼있어요. 그런 골목이죠. 일제강점기 후엔 한국전쟁 때의 피난민, 개발독재 시대에는 이농민들이 들어와 이 동네에 자리를 잡았고요. 그 다닥다닥 붙은 골목마다 아이들이 있었죠. 아이들이 머물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마침 유아교육을 전공한 친구가 만석동에 '아가방', 지금은 어린이집이라고 하죠, 아가방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기찻길 옆 아가방'. 처음부터 공부방을 한 건 아니었죠. 그때 아기들을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던 언니, 오빠들이 있었어요. 골목에 있던 아이들이죠. 그 아이들도 그런 공간이 부러웠던 거예요. 아이들이 종종 '우리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끝나고 저녁때 여기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그러다 아가방을 더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이제 여기서 무엇을 할까 하다가 그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 공부방 만들어달라던 아이가 지금 이곳에서 공부방 선생님을 하고 있어요. (웃음) 그리고 이곳에서 터를 잡고 동네 분들,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들과 관계가 계속 이어지니 공부방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거고요."
※한국모방(나중에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투쟁
일당 320원의 저임금, 상여금 미지급, 10분 지각에 특근 1시간 공제, 3년 미만 근무시 퇴직금에서 중식대 공제 등 회사 측의 온갖 횡포에 맞서는 한편, 무능노조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한국모방 노동자들은 1972년 7월 8일 <한국모방노동조합 정상화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8월 17일 우여곡절 끝에 열린 노조대의원대회에서 지동진이 지부장에 당선되자, 회사 측은 이튿날부터 해고 14명, 부서이동 25명 등 열성적 노조원을 무더기 징계하는가 하면, 지동진을 구타,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히는 등 노조를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나왔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 5백여 명은 8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돌입, 6개항 요구사항 수락 합의하에 귀사했으나 회사 측은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노조간부들을 고발, 9월 4일 노조간부 14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에 조합원들이 또다시 농성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교선부장 방용석과 총무부장 정상범 2명만 구속하고 지부장 등 나머지 12명은 석방했다. 이후 조합원들은 태업을 계속하는 등 끈질긴 투쟁 끝에 임금인상을 쟁취하고 단체협약을 체결,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후에 원풍모방노조로 바뀐 한국모방노조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 종교계의 지원을 받으면서 70년대 민주노조의 가장 강력한 보루로서 위치를 굳혔으나, 80년 5·17 이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 속에서 노조를 지키려는 조합원들의 2년여에 걸친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82년 9월 30일 해체됨으로써 70년대 최후의 민주노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원풍노조의 해고자들은 84년 이후 노동자복지협의회 건설에 중심축이 되었다.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2005. 09.10.)
프레시안 : 아이들은 골목마다 있었고, 그 아이들이 아가방에 어린 동생을 맡겼네요. 부모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김중미 : "부모님들은 인근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엄마들 대부분은 소녀 시절에 농촌에서 올라와 동일방직에 다녔고, 인근의 크고 작은 봉제공장, 제분 회사 같은 곳에 다녔죠. 아빠 중에는 부둣가 노동자도 있었어요. 이쪽 지역에서는 '뺑끼칠'이라고 하는데요, 어선에 페인트칠하는 작업을 하던 노동자였죠. 다 오래 일하고 임금은 적고 고된 노동들. 그분들이 공부방에 아이들을 보냈어요. 공부방은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었어요.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 언제나 올 수 있는 곳. 저희는 지금도 '선생님'이 아니라 '이모', '삼촌'이라는 호칭을 쓰는데요, 아가방 때부터 쓰던 호칭이에요. 엄마들에게 '저희를 동생처럼 편하게 생각해 달라'는 의미에서였죠. 그 호칭이 계속 이어진 것도 있고, 동네 아이들과 여러 활동을 함께 하려면 '선생님' 보다는 '이모', '삼촌'이라는 호칭이 편할 것 같아 굳이 바꾸지 않고 있어요.
공부방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부모님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무료로 운영하고 있어요. 대신 부모님들의 참여를 독려하죠. 부모님들이 '부모회'를 만들어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회비를 내는 대신 이모, 삼촌들이 자녀들 문제에 대해 상의할 때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고 약속을 받아요. 그러다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를 만나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요. 아이들에 대해서도 부모님들에게 귀찮을 정도로 연락합니다. 저희는 아이의 환경, 지금의 정서적인 상태, 혹은 지적인 상태를 꼼꼼히 살필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의 문제도 부모님들보다 빨리 발견할 수 있죠. 얼마 전 한 고등학생 아이의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공부방 없었으면 전 못 버텼을 거예요.' 부모님들에게도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죠."
프레시안 : 공부방이 정말 다양한 역할을 하네요.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는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아닌가요?
김중미 : "공부방이 올해부터 비영리기관이 됐어요. 그전까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30년 넘게 유지됐습니다. 비영리기관이라고 해서 어떤 혜택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래도 저희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공모사업에 응모할 때 좀 유리할 것 같아서요. (웃음) 다시 말하면 저희는 공적인 권리나 의무가 없는 기관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런 점에서 자유로워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사회적 안전망을 포기한 거라고 볼 수 있죠. 공부방 안에도 사실 체계적인 시스템은 없어요. 겉으로는 '원장님'이라고 소개하지만, 저희 안에서 역할분담이 돼 있는 건 아니에요. 다 똑같은 이모 삼촌이죠.
그렇지만 때때로 '이모', '삼촌'이라는 게, 교사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기 때문에 역할이나 책임이 애매하긴 해요. 종종 저희가 만나는 아이 중엔 많은 부분에서 개입할 필요가 있는 아이도 있어요. 그런데 저희는 법적 관계나 지위가 없어요. 아이들의 부모도 아니고, 학교 같은 기관에서 공적인 관계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죠. 아이들을 책임지고 함께하기에는 어떨 때는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프레시안 : 아이들과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고, 또 공적인 기관도 아니니 개입을 할 수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공적인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이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왔나요? 또 '대안학교'가 되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김중미 : "저희는 '관계의 힘으로 간다'고 해요. (웃음) 처음엔 그런 사회적 기반도 없었어요. 가령 저희가 만나는 아이 중엔 여러 문제에 처한 아이도 있어요. 아이들의 문제 뒤에는 항상 가정이 있습니다.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죠. 가정의 문제는 일자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정서적인 문제일 수도 있어요. 이주 배경 아이들에겐 의사소통의 문제도 있을 수 있죠. 그런 가정을 위한 공적 시스템이 있어요. 다문화가족센터라든가, 심리·정서적인 문제가 있다면 청소년 상담센터, 위센터가 있고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가정엔 드림스타트 등의 제도가 있죠. 우리는 이런 걸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는 건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왔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기관은 아니어도 지역의 다양한 센터들이 저희를 믿죠. 그래서 서로 협력할 수 있고요. 저희는 또 가까운 초등학교의 선생님들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돼 있어요. 선생님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벌어진 문제를 저희와 의논할 수 있고, 저희도 공부방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을 학교 선생님과 이야기할 수 있죠. 드림스타트 선생님도 아이들을 관리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저희에게 도움을 청해요. 제도적인 면에서는 어떤 결합도 없어요. 그만한 신뢰가 쌓이는 데 30년이 넘게 걸린 셈입니다.
35년 동안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차라리 대안학교를 하라고요. 그런데 저희는 공교육을 보완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유일한 교육의 기회가 되는 한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 거죠. 아이들이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요."
프레시안 : 아이들에게 공부방은 어떤 의미인가요? 공부방에 오기 전후가 많이 달라지나요?
김중미 : "정말 많이요. 저희가 볼 때 한두 달쯤 지나면 웃는 게 달라져요. 사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빛납니다. 근데 아이가 처한 환경이 그 빛을 가리죠. 가정이 그럴 수 있고, 학교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학교는 사회의 거울이죠. 물론 공부방에 온다 한들 아이들의 환경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도돌이표일 수 있죠. 그래도 최소한 여기에 오면 아이들이 편안한 것 같아요.
공부방은 학교나 학원만큼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은 아니에요. 그런데 아이들은 이곳에서 안전함을 느낍니다. 도움을 청하기도 쉽고요. 가령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뭐가 잘 안된다면,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공부방 이모, 삼촌이 더 편한 거죠. 저희가 직접 가서 일일이 알려주기도 하고요. 또 저희 공부방의 아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죠. 장애 가정, 한 부모 가정, 조손가정 등이 많죠. 최근엔 이주 배경 아이들이 많아졌어요. 이곳에선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베트남에서 왔어', '우리 부모님은 캄보디아 사람이야', '나는 어디서 왔어' 이렇게 편히 말할 수 있죠. 서로의 취약한 점으로 차별하지 않거든요."
프레시안 : 30년 넘게 운영했는데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나요? 또 그동안 공부방을 거쳐 어른이 된 아이들은 어떤가요?
김중미 : "다 기억나죠. 한 명만 꼽을 수 없어요. 공부방을 거쳐 어른이 된 뒤에도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저희는 아동·청소년을 돌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아이들이 대학에 가거나 사회에 진출할 때 함께 진로를 고민하기도 하고요. 개중엔 40대 중반에 접어든 아이도 있죠. 얼마 전엔 한 아이가 갑자기 연락해서는 '이모 나 가도 돼?' 이러더니,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왔어요.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들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평범한 노동자로 사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누군가를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죠. 직장 상사 욕을 하는가 하면, '계약직인데 정규직보다 일 더 많이 한다'고 불평하는 아이도 있고요. (웃음) 저희 아이들에게 공통적인 건 어디서나 소외된 약자를 챙기고, 인간관계에 성실하다는 거. 저희 아이들 말로는 어딜 가나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인대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모르는 척하자. 간섭하지 말자' 싶다가도 어느 순간 말 걸고 있다고요. (웃음) 그게 어쩌면 저희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하려고 했던 전부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약하고 약한 이들에게 코로나가 덮쳤다
프레시안 : 코로나로 학교가 2년 동안 문을 닫았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김중미 : "처음엔 아이들도 학교 안 가니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었어요. 뻔히 보이잖아요. 홀로 방치된 아이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돌봄 공백이 심각했습니다. 긴급돌봄이 서둘러 만들어졌는데 중학교 애들은 긴급돌봄 대상이 아니었고요. 저희가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찾았는데, 심각했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않고 있었죠. 며칠 안 씻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방치'. 공교육이 멈추니 그런 방치가 생겼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해고됐거나 코로나 시국에도 나가서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였고요. 공교육은 단순히 교육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곳만이 아니에요. 그중 하나가 급식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그나마 하루 중 먹는 가장 건강한 한 끼죠. 학교를 안 나갔을 때 저희에게는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불러 가장 먼저 한 것도 밥 먹인 거예요. 팬데믹이 길어지자 나중엔 저희가 공부방 운영 시간을 쪼개고 줄이면서까지 아이들이 나오게끔 했어요."
프레시안 :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어른들에게도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증이 하나의 현상으로 생겼습니다. 심리·정서적으로는 어땠나요?
김중미 :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이 아이들에게도 굉장히 심한 상태입니다. 무기력해진 아이들도 많아요. 어린아이일수록 그 상처가 더 깊고요. 드림스타트 선생님이 원래는 정기적으로 가정에 방문했는데,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비대면으로 만나왔죠. 분명 한계가 있어요. 아이들의 생활을 자세히 볼 수 없고요. 코로나가 잠깐 주춤하다가 다시 거리두기가 강화되었잖아요. 저희도 그때 다시 긴급돌봄으로 전환한다고 공지를 했죠. 그렇다고 아이들이 공부방에 안 오는 게 아닌데, 그걸 잘 모르는 아이가 긴급돌봄으로 복귀한다니까 다시 공부방에도 못 오는가 보다 하고 우는 아이도 있었죠. 종일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니까요. 할머니·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는 코로나를 매일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어요. 뉴스에서 매일 같이 '고령층 사망' 이러니까.
저희가 몇몇 아이들을 지역 청소년 상담센터로 몇 번 연결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사람들은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잘 모르죠. 복잡한 서류나 절차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또 가정폭력의 문제도 있습니다. 부모님도 힘드니까 나중엔 폭력이라는 자각 없이 손이 나가요.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하죠. 동시에 부모님도 너무나 지치고 위태로운 상태예요. 부모님부터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죠. 그럴 기회도 잘 없고요. 코로나의 위기가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그 가정 내에서도 약한 아이에게 향하는 겁니다. 코로나의 후유증을 회복하는 과정은 매우 어려울 겁니다. 아이들 마음에 새겨진 외로움, 우울, 불안, 이런 걸 회복하는 과정은 분명 쉽지 않을 거예요."
프레시안 : 공부방도 운영을 못 했을 텐데, 공부방은 어땠나요?
김중미 : "학교가 문 닫을 동안 저희도 똑같았어요. 아무것도 못 했죠. 공부방에서 매년 4월마다 연극, 밴드공연 등을 해요. 2020년에는 30회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못했어요. 처음엔 2~3주 후에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갑작스러웠죠. 저희도 긴급돌봄을 2020년 4월에야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전화로 아이들 상태를 파악하고 밖에서 잠깐 만나는 식으로만 돌봤죠. 원래 저희 공부방은 달마다 뭔가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있거든요. 어린이날에는 여기 강화 집으로 1박 2일 놀러 오고, 6월에는 모내기를 하고, 7월에는 캠핑을 하러 가고, 8월에는 춘천아마추어 인형극제에 참여하고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2년 동안 그 일상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어요. 지금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은 한 번도 못 한 셈입니다. 한 번은 4학년 애들이 '이모, 3학년부터는 캠핑도 못 가봤어요. 우리 공연하는 것도 몰라요. 3학년 애들은 함께하는 놀이도 몰라요'라면서 걱정했어요. 그동안 함께 캠핑가서 언니, 오빠들과 '아이 엠 그라운드', '딸기 게임' 같은 걸 해왔는데 못했으니까요. 함께 모이는 자리가 계속 없으니 아이들 사이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한 중학생 아이는 동생들이 보고 싶다면서 방학 하는 동안 봉사를 왔어요. 이런 아이들은 어릴 때 언니, 오빠들이 같이 놀아주고 돌봐준 걸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초등학교 3학년 밑으로는 그런 걸 몰라요.
아이들 간의 관계도 변했죠. 이전까지 서로를 돌봐주던 관계가 끊겼어요. 예전에 한 번은 공부방에 발달 장애가 있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있었어요. 학교에서 괴롭힘, 따돌림을 당했죠.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우는 거예요. 그날따라 심하게 괴롭힘을 당해서. 그러니까 5, 6학년 아이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아이들 결론이 '그 아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였습니다. 형, 누나들이 매일 점심시간마다 그 아이의 교실에 가서 이름을 불렀대요. 아이들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죠. (웃음)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었어요. 전처럼 끝나고 남아서까지 때리고 괴롭히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한 번은 '형·누나들이 와서 좋았어요. 애들이 안 괴롭혔어요'라면서 고맙다 했어요. 이럴 수 있는 관계가 코로나로 끊어진 거죠. 지금 2학년 아이들은 1학년 동생들을 대하는 법도 잘 몰라요. 질투하기도 하고요. 그 아이들이 1학년 때 위의 언니, 오빠들이 돌봐주지 못했으니까요. 일종의 퇴행이죠."
프레시안 : 2년 사이에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함께 놀지는 못해도 화상 회의나 소셜미디어로 계속 소통할 수는 있을 텐데, 실제로 만나는 것보다 많이 부족하겠죠.
김중미 : "3학년 아래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들이 모두 점점 변해가는 걸 느낍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규칙, 예의. 이주 배경 아이들은 더 걱정이에요. 부모님이 한국어가 서툴러서 가정 내에서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이요. 학교에 가면 소통하는 법도 배우고 한글도 배우는데 그런 공백이 생기는 거죠. 대학생 아이들도요. 대면 수업 한 번도 못 하고 군대 간 애들이 적지 않아요. 한 아이는 밴드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그동안 연습은 줌으로 모여 했다더라고요.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고요. 동기끼리도 마찬가지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다 온라인으로 했고요. 단톡방에서는 반말하다가도 막상 시험 보러 학교 갔을 땐 서로 존대한대요. 마스크 쓰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이런 결핍이 생겼죠. 저는 코로나 2년 겪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요. 이런 결핍이 쌓여 언젠간 큰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프레시안 : 걱정이 많겠어요. 그동안 이런 공백과 결핍을 메꾸기 위해 어떻게 했나요? 또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김중미 :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저희는 그래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발표회를 3번 했고 친구네 동네 다녀와서 모형으로 만들어보고 그 과정을 시도 쓰고요. 바닷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바다 풍경을 그 그림을 바탕으로 폐목재로 오토마타를 만들기도 했어요. 몸 부딪히고 그러는 연극 이런 건 못하고요. 연극 대신에 중학생 아이들은 카메라 한 대 들고 나가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단편영화 3~4편을 만들더니 청소년영화제도 나갔어요. 그거 나가려고 만든 건 아닌데 만들고 나니 괜찮아서. (웃음) 팬데믹 속에서도 모두 최선을 다했죠. 이제 4월이면 정점을 지난다고 하니, 그 후엔 다 같이 만나서 그동안 못한 걸 할 계획입니다. 그 공백과 결핍을 메워나갈 거예요."
'가난'은 언제나 있었다
프레시안 : 공부방은 제도의 공백을 채우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근 이주 배경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했는데, 80년대와 지금 공부방 아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김중미 : "공부방이 있는 곳은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인근의 북성동, 송현동 등은 인천의 대표적인 오래된 서민 주거지역이죠. 도시 빈민이 사는 곳. 주거비가 적게 드는 곳이죠. 물론 지금은 처음 왔을 때보다 아파트, 공동주택이 많이 들어섰고 재개발을 앞두고 있지만요. 주거비도 싸니 당연히 가난한 사람이 모입니다. 그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어요. 다만 '가난한 사람'이 누구냐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죠. 저임금에 노동 강도가 높으면서 고용 형태가 불안한 노동자. 지금 우리 사회에선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죠. 30년 전에는 방직공장,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그랬던 것이고요.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 대부분은 누구인가요? 그런 노동조건 외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여성, 노인, 장애인, 이주 배경의 노동자 등이죠. 공부방 아이들의 배경이 그렇게 변한 거고요. '구성원이 많이 변했네요'라는 말은 많이 들어요.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이곳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변두리, 가난한 노동자들의 상징적인 곳입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요."
프레시안 : 가난은 같다 해도 최근엔 가난 혐오가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임대아파트 아이들과 같은 학교는 싫다'면서 다른 학교에 배정받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고요.
김중미 : "인천에서도 이주 배경 학생이 한국인 학생보다 많은 학교가 있습니다. 한국인 부모님이 나서서 자기 아이들을 먼저 다른 학교로 빼거든요.
아이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편견과 차별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다양한 아이들이 한 공동체에 섞여 있다면 그런 차별이 도드라지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희 공부방 안에서도 그렇고요. 내가 전혀 몰랐고, 이런 친구도 있고 이런 친구도 있다는 걸 모른다면, 자신들과 조금 다른 이질적인 배경의 아이가 온다면 낯설어하죠. 차별, 편견은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걸 완화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게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하고, 어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죠. 어른들부터 다양성을 수용하려 노력해야 하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죠."
프레시안 : 어른들 사이의 그런 혐오와 차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적 있나요?
김중미 : "얼마 전에 그런 걸 봤어요. 대형마트 안에서 초등학교 5~6학년 정도로 보이는 발달장애 아동이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그 부모는 아이를 진정시키기만으로도 힘들 텐데, 그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웠어요. 우리 사회가 장애를 대하는 태도는 그래요. 그런 상황에 부닥친 부모를 돕거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일단 짜증 내고 화내죠. '왜 저런 애를 데리고 이런 데를 와' 이렇게요.
아이들에 대해서도요. 제가 지금 사는 강화에는 최근 카페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20대 애들 말로는 '인스타에서 핫한 곳'. 그런데 다 '노키즈존'이에요.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점점 줄고 있는 셈이죠. 아이들은 당연히 활동적이고 부산해요. 움직이다 사고를 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죠. 출생률 올리려고 몇십조 예산을 쏟아붓는데, 동시에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는 어떤가요? 일례로 제가 ktx를 자주 타는데 그런 장면을 봐요. ktx는 유아칸이라고, 영유아동반자를 위한 칸이 있어요. 유아칸은 하나다 보니, 명절 전후론 자리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일반칸에 탈 수밖에 없어요. 말 못 하는 아기가 울기라도 하면 도끼눈을 뜨고 보죠. '왜 애를 데리고 여기를 타?', '왜 애를 데리고 먼 데를 가?' 이러면서요.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가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누구나 아기였던 시절이 있었는데도요. 저는 이런 차별과 혐오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런 게 없어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이해할 기회도 없고요. 사회는 타자의 존재를 계속 가리면서 혐오를 방치합니다."
프레시안 : 혐오와 차별이 일상적인 사회입니다. 차별이라는 의식조차 없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그대로 답습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중미 : "최근에 장애인단체가 출근길에 이동권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장애인이 이 시간에 지하철에서 피해를 주냐'고 말하죠. 그 존재가 '피해를 준다'라고요. 학교에서도 그러죠. 비장애 학교에서는 장애아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그런 모습이 일상적이니 아이들도 장애아동을 배척하고 차별해요. 장애아동의 부모도 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많이 당하니 결국 장애 학교를 찾고요. 이런 식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끊임없이 분리됩니다. 밀어내고 배제하고 눈에 안 보이게 하죠.
노키즈존도 그런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이들이 올 수 있는 공간과 아닌 공간을 지나치게 많이 구분합니다. 공공공간에서조차 아이들의 존재를 밀어내죠. 불편함을 자신의 피해, 손해라 생각하고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요. 삶이 너무 지쳐서 그런 것일 수 있어요. 하지만 분명 차별입니다. 타자의 존재를 계속 밀어내니 일상에서 더욱 만날 기회가 없어지고 더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거고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어른들의 차별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거고요. 사회가, 그리고 학교가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밀어내려는 걸 끊임없이 보며 내면화하니까요. 타자를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불편해지는 것에 민감해하죠. 다수가 소수를 밀어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 테고요. 그게 편하고,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것이라고요. 나이 든 사람의 생각이겠지만 저는 이런 걸 내면화한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괜찮을지 걱정돼요. 세상은 다양한 사람이 함께 섞여서 살아가니까요."
프레시안 : 아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나요?
김중미 : "저희 공부방 안에서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이 가진 기질,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로 인한 갈등이 있어요. 다만 배제하고 차별하지 않으려고 하죠. 아이들이 차별이 뭔지 알고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알고, 나와 다른 낯선 아이가 나보다 못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요. 지금 공부방에는 원인은 아직 모르지만, 말을 잘 안 하는 아이가 있어요. 목소리도 아주 작고요. 그 아이가 얼마 전에 쓴 글이 '난 목소리가 작아. 그런데 작아도 나야. 그리고 공부방에서는 목소리가 작아도 괜찮아. 내가 말을 하면 다른 친구들이 다 조용히 해줘'예요. 그 아이가 내성적이고 말을 잘 안 하려는 친구인데, 다른 아이들이 그걸 놀리는 게 아니라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죠. 이 아이를 통해서 목소리가 작아도 표정과 행동으로 알아채고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요. 그런 게 사람과 사람 간에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구나 감추는 것
프레시안 : 혐오와 차별이 결국 타자를 분리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공간에서 밀어내고 분리하는 게 결국은 가난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가난의 모습은 같아도 30년 전과는 분명 다를 것 같아요.
김중미 : "과거의 가난은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 반면 오늘날의 가난은 '가려진 것'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그런 적도 있죠. 1987년에 상계동 철거민 중 일부가 부천으로 집단이주를 했어요. 그런데 그곳이 경인고속도로변이었는데 88올림픽 때 외국 선수단이 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안 된다고 가건물을 철거하라고 압박했죠. 가난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요. 가난은 감춰야 하는 것, 잘못되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죠. 가난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요.
가령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동네는 오늘날 대부분 재개발이 돼 신도시가 들어섰어요. 초고층 아파트가 생겼고요. 그럼 원래 그 지역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새 아파트에서 살까요?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사람 중 입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10%에서 20% 미만이라고 해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주택, 세 들어 살던 돈으로는 그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요. 제가 추측하는 게 아니라 재개발할 때 실제로 적용하는 수치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요? 도시의 더 변두리, 낙후된 지역의 더 낡고 안전하지 않은 주택. 가난은 없어지지 않아요. 단지 안 보이는 것뿐이죠.
제가 지난해 <곁에 있다는 것>을 출간하고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지금도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각색, 윤색한 거거든요. 사실은 더 해요. 가난은 감춰지고 때론 미화되기도 합니다. 모순적인 이야기죠."
프레시안 : 가난이 미화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김중미 : "우선 가난의 상품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소설에도 썼던 '쪽방 체험' 같은 게 전국적으로 유행했죠. 몇몇 성공사례도 있었고요. 한 2~3년 전에 그러다가 요즘엔 한물간 것 같아요. (웃음) 돈이 안 되죠. 그 안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요. 대부분 다시 전면 재개발로 가요. 이게 어떻게 보면 결국은 가난이든 뭐든, 집이든 사람들의 삶이든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만 따지는 겁니다.
'가난은 어때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있습니다. 좀 더 오래된 문제죠. 예를 들어 보육 시설에는 후원인과 아동을 1:1로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있어요. 그런데 후원인이 원하는 건 '정말 어려운 아이들'이죠. '부모가 진짜 없는 애들' 진짜 이렇게 말해요. 아이들을 이해한다거나 개개인에게 맞는 어떤 걸 해주기보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따른 '입지전적인 인물'을 원한달까요. '부모가 없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 대학까지 지원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사실은 대학이 아니라 직업훈련을 원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직업훈련비도 없는 아이들이죠. 가난의 모습은 매우 다양해요. 그 뒤에는 여러 차별, 불평등이 있고요. 그런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정형화된 모습을 보려 하죠."
프레시안 : 우리 사회엔 가난한 고아가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고시에 합격하는, 그런 신화가 있네요. 가난을 멸시하면서도 동시에 숭배하고,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혜택을 누린다'는 비난도 하고요.
김중미 : "그런 일도 종종 있어요. 이를테면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보육 시설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좋은 분들이죠. 아이들에게 '뭐 갖고 싶냐'라고 물어보시죠. 아이들은 당연히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데 자기는 없는 걸 원합니다. 몇 년 전까진 롱패딩이 갖고 싶은 목록 1위였죠. 보육 시설에선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피복비 같은 게 나와요. 그 액수에 맞춰서 옷을 사죠. 그 돈으로 좋은 롱패딩을 살 수 없어요. 아이들이 패딩이 갖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피복비를 모아 사지만, 그래도 좋은 건 살 수 없죠. 그래서 인터넷으로 솜 패딩을 사면 한 번 빨면 솜이 가라앉잖아요. 그럼 학교에선 또 놀림거리가 되고요. 그런 상황에 후원자가 갖고 싶은 게 있냐고 하니 뭐라 하겠나요? 당연히 브랜드 롱패딩이 갖고 싶다고 합니다. 근데 어떤 후원자들은 그런 생각을 하죠. '나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선의를 가지고 아이를 도우려 했는데, 어떻게 내 아이에게도 잘 못 사주는 브랜드 패딩을 원하지?'라고요.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분명 차별적인 시선이 깔린 거죠. 물론 후원자는 선의를 가지고, 좋은 마음으로 돕는 거예요. 다만 '부모 없는 아이는 이럴 거야', '가난한 아이는 이럴 거야',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도움이 필요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거죠. 저는 이게 대상화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가난을 대하는 태도가 이중적이란 의미입니다.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경험을 하고 성장한 아이들에게도 상처가 남을 것 같습니다.
김중미 : "눈치를 보며 자라고, 두려움 같은 게 자리 잡습니다. 가령 제 딸들은 성인이 돼 독립했어요. 사회초년생들은 독립하면서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를 많이 이용하죠. 저렴하고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제 딸들도 그랬어요. 그런데 성인이 돼 보육 시설에서 나온 아이들, '보호 종료 아동'이라고 하는데요, 이 아이들은 중고거래부터 쉽지 않아요. 보호자가 없어 사기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요. 실제로 사기당하는 아이들도 많고요. 시설에서도 중고거래를 하지 않게 교육합니다. 중고거래를 하려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 배운 것도, 물어볼 사람도 없죠.
'가난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중고물품을 안 쓰려고 하기도 해요. 사회에서 가난함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아니까요. 물건을 가급적 새로 사려고 하죠. 그러니 가난한 청년들이 독립할 때 더 큰 비용이 들게 되죠. 가난한 아이들이 받는 편견, 중압감, 사회적 차별, 그런 것들이 한 개인의 삶에 그렇게 영향을 줘요. 사회에 내딛는 출발선부터 다른데,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더 어렵죠. 보육 시설 아이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청년 대부분이 가난하죠. 그런데 가난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가난을 드러내지 못하니까요."
프레시안 : 가난한 아동은 어떤 청년이 되나요?
김중미 : "가난한 아동은 성인이 되어서는 더 큰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선 가족 부양의 책임을 주고요. 부모님이 젊어서부터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해왔다면 건강이 더 쉽게 나빠지겠죠. 아프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하고요. 부모님이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인데 아이가 청년이 돼서 노동력이 생기면 부양의무자가 되어 자격이 박탈되는 일이 일어나죠. 거꾸로 보호 종료 아동이 퇴소해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유지해야 기초생활수급비를 보장받으면서 국가장학금을 받는데, 퇴소하면서 10년, 20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부모가 사회복지 통합전산망에 잡히면 수급 자격이 박탈되거나 수급비가 제한이 생기죠. 더러는 수급비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해요. 가난을 유지해야 지원을 받으니까요. 만약 청년이 일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발생하면 부모님이 수급자 자격이 박탈돼요. 부모님의 생계까지 완전히 책임질 수 있을 만한 형편은 안 되는데도요. 아픈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면 일자리를 선택할 때에도 제약이 생기죠. 가난, 학력, 아픈 사람, 비정규직 차별 등. 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가요. 차별은 한순간에 발생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삶을 숨기죠.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배제합니다. 이런 삶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각자도생을 강요해요. 우린 모두 이걸 알고 있죠. 가난, 빈곤은 분명 선택이 아닙니다. 사회적 보호망이 없는 사회에서는 한번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선택권이 사라진다는 것도요. 아마 이 불평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도요. 그래서 사람들이 내면에서 더 예민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고, 나만이 나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내 것을 뺏기고 추월당하지 않게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다 한들 불안이 사라지지 않겠죠."
프레시안 : 한번 빈곤에 놓인 사람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빈곤이 오늘날 사라졌다고 여기기도 하는데요. 그저 안 보이는 거였다면 '감춰진 삶'은 어떤가요?
김중미 : "아이들을 보며 체감하는 게 있어요. 우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할 때입니다. 이를테면 대학 갈 형편은 안 되고 특성화고를 가고 싶은데 그만한 성적은 안 되는 아이가 있어요. 좀 더 공부해서 성적을 올릴지, 아니면 그냥 인문계를 갈지 성적 기준이 더 낮은 전문계고등학교를 갈지 고민하죠. 만약 이 아이가 '느린 학습자'라면 학업에 도움이 필요하죠. 그런데 특성화 고등학교에는 느린 학습자를 위한 특수학습이 없어요. 가정은 이 공백을 보완할 형편이 안 되고요. 어쩔 수 없이 인문계고를 선택해야 하죠. 그때마다 이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제한적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 그런 식으로 선택의 순간마다 아이들은 좌절해요. 자신의 현실로 인한 한계를 인정해야 하니까요.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을 때, 혹은 전문대에 갈지 4년제 대학에 갈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도 있어요. 그럴 때 '너희는 만 18세가 넘은 성인이니까 이제 알아서 해' 이렇게 내몰 순 없어요. 옆에서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가족에게 그 역할을 맡겼어요. 가족이 와해했거나, 있어도 그럴 여유가 안 되는 경우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허허벌판으로 내몰리는 거죠.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 잘 모르고요. 만약 그 아이들이 갓 성인이 됐을 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그런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많이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프레시안 : 선택권이 제한된다는 건 기회가 그만큼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중미 : "오늘날의 가난은 경제적 빈곤 이상으로 '기회의 박탈'이라는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기회가 공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그걸 잘 알고 있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 격차가 터져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고요.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이 있고 아닌 직업의 차이도 있죠. 사람들을 대면해야 하는 직업, 또는 내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직업은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위험을 감수하고 일터로 가야 해요.
거리두기할 때 대부분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좁은 집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아이들의 경우엔 더 하죠. 가난한 가정이 그렇죠. 그보다 여유 있는 가정은 다르죠.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선 집 평수가 넓으니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상대적으로 많죠. 텔레비전만 보던 때와는 달리 다양한 콘텐츠가 있잖아요. 그런데 OTT를 이용하려고 해도 그게 다 돈이니까 집에서도 접할 수 있는 문화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요. 중산층 자녀들은 학교에 못 가도 인터넷 강의, 비대면 과외를 받아 성적이 오르기도 하고요. 통계로도 나왔죠. 또 팬데믹 기간에 캠핑 붐이 일었어요. 강화에 살다 보니 주말에 많은 캠핑카를 보곤 해요. 캠핑카가 아니어도 주말이면 펜션에 사람들이 들어차더라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가정도 많죠. 우리 공부방 아이들도 공부방이 아니었으면 팬데믹 내내 동네에만 갇혀 있었을 거예요.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의 차이가 극명합니다."
프레시안 :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빈곤을 매 순간 느끼며 살아야 하는군요.
김중미 : "아이들이 위축된 채로 성장해요. 좌절을 내면화한 채 어른이 되죠.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 소수자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제도가 없는 사회.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죠. 무엇보다 아이가 성장하며 발달단계에 맞는 경험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차별은 또 중첩돼있어요. 하나의 차별이 여러 형태의 차별로 이어집니다. 이주 배경 가정은 많은 경우 경제적으로 취약합니다. 취약한 위치에 내몰릴 위험부터 크고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은 일상에서도 제약이 있죠. 돌봄 공백이 발생하고 사교육의 기회도 없고요. 연령대에 맞는 영양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요.
2022년에 영양을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하지만 분명 일어나는 현상이죠. 이를테면 부모님이 맞벌이에 늦게까지 일한다면 인스턴트 음식을 더 먹게 됩니다. 요즘엔 편의점 도시락도 잘 나온다지만 괜찮은 도시락은 비싸죠.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컵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것들. 그것만 먹는 거예요. 이 아이들의 온전한 식사는 학교에서 먹는 한 끼의 급식이죠. 가난한 아이일수록 비만이 많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학습에 있어서도요. 이 결핍이 쌓이면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수록 격차는 더 벌어져요."
프레시안 : 삶 전체에 격차가 누적되는 것 같습니다. 가난이 개인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이 격차를 개인이 메울 수는 없나요?
김중미 : "불가능하죠. 가난한 가정에서는 여러 면에서 돌봄 공백이 발생합니다. 정서발달, 학습발달에도 영향을 미치죠. 이주 배경 아이라면 부모님 한국어가 서툴러서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언어발달, 사회발달에 영향을 미쳐요. 부모님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죠. 학교에서는 학습에 뒤처지는 문제가 생기고요. 거기에 '쟤는 엄마가 베트남이야', '쟤는 중국에서 왔대' 하면서 받는 차별이 이 아이를 더 위축되게 하고 심리적인 압박을 줍니다. 소통의 문제가 이혼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고요. 물론 이주 배경 가정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가난에 내몰리고, 가난이라는 문제가 기회를 박탈하고 아이의 성장에도 발목을 잡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반복돼요. 어른이 돼도 많은 차별과 편견과 싸워야만 하죠.
개인이 혼자 열심히 노력해서 옛날처럼 주경야독으로, 가난한 농촌의 아들이 서울대 법대 가고 이런 게 불가능한 사회입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있고 제도적 지원이 된다면 이주 배경이든 장애아동이든 기회가 더 주어지겠죠. 가능성이 더 열릴 테고요. 저는 사회가 좀 더 촘촘하게 이런 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들,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그런 사업을 여성가족부에서 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표 공약 중 하나는 '여성가족부 폐지'입니다. '여성가족부의 수명이 다했다'면서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라고 하죠. 저희에게 그 공약은 안티페미니즘(反여성주의) 이상의 큰일이에요. 여가부는 청소년 상담, 이주 배경 가정을 대상으로 한 여러 지원 등. 주로 가족 정책을 추진하는 부처입니다. 성폭력 등 '여성 인권'에 대한 부분은 오히려 적어요. 가족 지원이라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 보건복지부에서 하는 영유아 보호나 아이 돌봄 같은 부분이 여가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여성 문제, 가족 문제, 청소년 문제, 아동 문제가 하나로 보이고 생애 주기별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가부가 사라진다면 그나마 있는 제도도, 아이의 미래도 없어지는 거죠."
프레시안 : 아이뿐 아니라 부모 등 '가정' 공동체를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네요.
김중미 : "그럼요.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문화가족센터가 하는 역할이 정말 커요. 결혼 이주가정, 중도입국 아동의 경우에 저희가 다문화가족센터와 연결합니다. 사례관리 안에 들어가면 센터에서 아동 언어교육을 위해 가정으로 선생님을 보내요. 부모님 상담도 하고요. 경제적 문제가 있을 땐 제한적이지만 지원도 해주고요. 아이는 물론이고 이주한 부모님도 한국어가 빨리 늘고 빨리 적응할 수 있어요. 한국어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여러 자격증이나 재봉 기술 같은 것도 가르쳐주고요. 제도가 이런 가정, 이런 아이들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여러 지원이 가능해요. 또 이주여성들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에 취약하기 때문에 여성 인권에 관해 여가부가 가족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룰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개인들은 그런 정보를 얻기가 힘든 거죠. 좀 더 촘촘한 그물망이 필요합니다. 저희처럼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양한 지역의 센터들이 그 공백을 메꾸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레시안 : '공정'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어요. 가난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제도가 오히려 역차별을 유발한다는 목소리도 큽니다. 김중미 작가가 생각하는 '공정'은 무엇인가요?
김중미 : "그 질문을 보며 오래 고민했어요. 저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게 공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다양해야 하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으로 인해 정시확대로 돌아선 것도요. 전 정시야말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제도를, 결국 너무 왜곡하고 나쁘게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도적으로 보완할 부분이라 생각해요. 정시는 되레 경제적 지위가 있는 계층에 유리하죠. 정시라면 더 쉬울 거예요. 좋은 사교육의 기회가 더 많으니까요. 실력이 비슷한 두 아이가 있다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아이가 유리하지 않겠나요? 수시는 좀 더 다양한 면을 본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부는 못해도 봉사를 많이 해왔다 하면 사회복지 전공을 갈 때 유리해지죠. 좋은 대학을 가려고 제도를 악용하는 문제가 있지만, 이를 보완하고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더 다양한 기회가 만들어지겠죠. 다양한 시각으로 능력과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고요.
저희 공부방은 대학 입시 합격률 100%에요. (웃음) 수시 제도가 있어서 가능했어요. 저희는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보니, 아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보여요. 어떤 아이는 느린 학습자예요. 성적은 좋지 못해도 매우 성실하고, 학교에서는 약한 존재였지만, 자신의 그런 경험 덕분에 어린 동생들을 잘 돌봤어요. 그래서 어린이집 선생님이 잘 맞을 것 같았고, 아동보육과를 진학하기로 했죠. 공부방 이모, 삼촌들이 함께 방법을 찾았어요. 인문계고등학교를 갈지 특성화고등학교를 갈지. 성적이 모자란다면 인근의 지역아동센터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든지요. 또 어떤 아이는 미술 실력이 뛰어났어요. 이 아이도 이쪽을 전공해서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고요. 그런데 스펙도 없고 학원에 다니지도 못해요. 이 아이가 갈 수 있는 대학, 활용할 수 있는 입시 제도를 함께 알아봤죠. 실기 대신 포트폴리오를 보는 대학을 알아보고, 최소한 유지해야 하는 성적이 있다면 공부를 도와주고요. 그나마 수시니까 이런 아이들이 대학에 갈 기회가 생긴 거예요. 물론 수시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분명 실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데도 기회가 없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기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주어지는 게 공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그동안 소설에서 '가난 속에 성장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이야기 나눈 것도 개인에게의 공정함.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소외,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회 전체에 가지는 의미가 있나요?
김중미 :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나의 가난, 나의 취약한 점을 들키지 않으려 해요. 또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가난을 보고 싶지 않죠. 이를테면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없다고 우기잖아요. 차별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면 나의 기회가 박탈될까 봐 겁이 나고, 내가 누리던 안전한 사회가 무너질까 봐요. 그러니 기를 쓰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거죠.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긴다 생각하고요. 불평등, 불공정하다는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하는 이유겠지요. 저는 그걸 깨고 싶어요. 보면 다르니까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기 불편하겠죠. 그런데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태도가 달라지고, 움직일 수 있겠죠. 편을 들 수 있고요, 함께 요구할 수도 있겠죠. 제가 책에서 가난의 모습을 계속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개인은 각자 모두 불안해요. 홀로 고립돼있으면 더 힘들죠. 저는 그런 개인들이 작게 모이고, 연대한다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면 자신이 처한 문제를 느낄 수 있고, 제도의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그런 힘이 모이면 바꿔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당사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곁에 있다는 것>에는 보호 종료 아동이 등장해요. 공부방을 거쳐 간 아이 중 올해 서른이 된 유치원 교사가 있어요.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이모,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보육 시설 나와서 살아온 그 10년간 사회에서 매 순간 느꼈던 것들이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알았어.' 홀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때 느낀 두려움, 불안함, 사람들의 시선. 이런 게 뭔지 잘 몰랐대요. 직면하기 힘들어 피했고요. 책을 읽으면서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대요. 한 명이라도 그 책을 읽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그게 제 책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가난을 숨기고 싶고, 아픔을 피하고 싶던 아이들이 그 책을 보면서 그 순간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거요. 그럼 다음 걸음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 책이 좀 불편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나 몰랐어'라고 말하더라도요. 그 순간에라도 알게 되잖아요. 알아야 보이니까요. 그래야 움직이고요. 그래서 가난을 계속 이야기해요.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프레시안 :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공감하고 연대해야 차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대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테고요.
김중미 : "그런 적이 있어요. 공부방에 20살 대학생 된 애들이 3명 있어요. 최근 페미니즘 백래시가 심하다 하잖아요.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런 논쟁이 붙어요. 남자 1명 여자 2명인데, 고3 때 각자 남고, 여고에서 기숙사에 있으니 주말에만 만났어요. 남자아이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도 역차별을 이야기합니다. 일전에 고교학점제 시범사업을 하면서 남고와 여고가 함께 수업했었는데, 여자애들이 성적이 더 좋았어요. 남자애들은 '여자가 왜 약자냐'라는 거죠. 그런데 여자애들은 일상적으로 자신이 약자라는 걸 느끼며 살아요. 버스를 타고 공부방에 오는 길에서도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도 다른 경험을 하죠. 그러니 남자아이의 말에 화가 나서 '어떻게 그걸 모르고 함부로 말하느냐'고 싸우죠.
그때 결론이, 남자애가 '너희들 말을 듣고서야 뭔가를 알게 됐다'고 하면서 '우리는 남자애들만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잘 없어. 우리 함께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라고요. 그래서 수능 끝나고 독서 모임을 만든다 했는데, 결국은 뭐 술 먹고 놀죠. (웃음) 중요한 건 아이들이 서로 소통하려고 노력한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나려 하고 이야기하려 하고, 들으려 노력하는 거요. 이번 선거가 저는 막막하고 절망스럽고 많이 아팠지만 동시에 희망을 봤어요."
프레시안 : 소통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통하다 보면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 자체를 '갈등을 조장한다'고 하잖아요. 갈등 없이 소통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김중미 : "당연히 갈등이 있죠. 저희 안에서도 아이들이 모여있으면 분란이 일어나요. 그런데 갈등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보이지 않으면 매듭이 엉킨 걸 모르죠. 풀 생각을 못 하고 풀 의지도 없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아이들일수록 갈등을 해결할 가능성이 크다고 믿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미성숙하고 모자란 존재로 봐요. 많은 어른이 '애들이 뭘 아느냐'고 하죠. 투표권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요.
이번 선거 앞두고, 공부방 아이들만 해도 대선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1학년 올라가는 애가 선거 전에 '누구누구가 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네가 그런 걸 알아서 뭐 해?', '너희들 일 아니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해' 이러죠. 그게 아니거든요. 저희 작은 애가 지금 27살인데, 얘가 중학교 때 교육감 선거가 있었어요. 투표권이 없는데도 밤 12시 넘어서까지 결과를 지켜봤어요. 그때 후보 중에 자기 또래끼리 절대 되면 안 된다는 후보가 있었거든요. 비리도 많고, 인권 감수성도 없는. 결국 그 교육감이 되었는데 울더라고요. 그러면서 왜 우리가 당사자인데 우리한테는 투표권을 안 주느냐고 억울하다고요. 다음날 학교에서는 애들이 다 교육감 얘기를 하더래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는 뭘 몰라'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도 그 또래에게 맞는 생각, 판단이 있어요. 어른들이 방향을 잡아주고 깊이를 더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죠. 저는 초등학교 5~6학년도 토론을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키워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공부방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아이들이 스스로 의논해서 결정하게 했어요. 그렇게 시킨 게 아니라, 공부방의 어른들이 회의하는 걸 보고 아이들도 따라 한 거예요. 어느 날 '저희 2학년들끼리 회의를 했는데요'라고 하는데 깜짝 놀랐죠. 저희도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게 노력하고 있어요. 캠핑을 하러 간다면 아이들끼리 어디에 가고 뭘 할지 회의하고요. 저는 그런 것들이, 어릴 때부터 논의하고 토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청년이 되어서도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건 위에서 '청년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서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공부방의 아이들, 사회에서 가난을 대하는 태도에서요.
김중미 : "우선 저희 아이들이 처한 환경이 바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주 배경 가정의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가 노동 현장에서 임금 차별을 받지 않게 된다면 가정의 소득이 늘어나면 가정이 좀 더 안정되겠죠. 이주민을 향한 차별과 폭력이 문제가 된다면 법으로 이들을 보호할 방법을 만들 것이고, 이주민의 삶이 훨씬 안전할 거예요. 이런 게 아이들에게도 분명 좋은 영향을 줄 테고요. 또 우리나라는 연령차별도 심하잖아요. 최저임금도 간신히 받는 청소년 노동, 청년 노동과도 연관이 있죠. 노인 노동도요. 조손가정은 좀 더 경제적으로 안정될 거예요. 주로 서비스직의 비정규직에 있는 엄마들의 노동도 보호받을 수 있겠죠. 그럼 삶의 질이 달라지고요. 최저임금이 조금만 올라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시락 하나를 먹더라도 조금 더 나은 걸 먹을 수 있죠. OTT에 하나쯤 가입해 다른 아이들이 다 본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도 있겠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도 기회를 보장받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각자는 알 것 같아요. 각 처해있는 상황이 각자도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걸요. 그런데 소리를 내지 못해왔어요. 저는 법으로 약자들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이 조금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목소리가 나와야 알려져야 같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이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잖아요. 어쩌면 각자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것처럼 여성이 겪는 문제들이 반대편들이 원하는 대로 여성의 목소리가 묻히고 침묵하고 있었더라면 이만큼 겉으로 드러나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런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가 시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저기서 소리가 막 들려야 하고요. 장애인, 여성 모두가요. 이주민들이 사실 지금 목소리를 못 내요. 낼 수가 없어요. 생계도 어렵고 언어도 어렵고요. 가정 안에서 가부장제의 억압이 있고요. 목소리가 가장 지워진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미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으로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데. 그분들의 목소리도 커져야 해요. 저는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나오고 싸우고 논쟁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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