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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로 입양된 사람들 "한국에 정의와 진실을 요구합니다"

▲지난 9일 해외입양인 단체들이 입양 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를 밝혀달라는 조사 요청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글 : 노르웨이 한국인 권리 그룹
[369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⑦ 입양 과정에서의 불법·인권 침해를 고발합니다

노르웨이 한국인 권리 그룹(The Norwegian Korean Rights Group, 이하 NKRG)는 성인 한국인 입양인들로 구성된 임시위원회로, 입양 전과 입양되는 과정, 그리고 입양 후 입양인들의 인권이 어느 정도 보호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NKRG는 우리 모두가 피터 뭴러 변호사가 이끄는 DKRG(덴마크 한국인 권리 그룹)를 통해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사건을 접수하면서 자발적으로 결성됐습니다. NKRG는 DKRG와 함께 세계 어디에 있든 모든 한국 출신의 입양인 연대 그룹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인종, 성별, 사회적 계급에 기반한 국가적, 정치적 차원의 정화 운동인 입양 산업 전반에 만연해 있는 인간 가치에 대한 경멸과 광범위한 배제에 반대해 싸웁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일과 같은 이들을 미래의 아이들이 겪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입양 산업이 지속되는 것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수천명의 한국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저지른 부당함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온 입양인들이 다양한 경험과 시대를 대표하는 작은 임시 위원회입니다. 우리 중 최연장자는 1960년대 초에 노르웨이에 왔고, 가장 어린 입양인은 80년대 초에 왔습니다. 

Vår Benum(임숙희)는 서울 요양원과 병원 고아원을 거쳐 개인적으로 입양돼 생후 13개월인 1964년 9월 14일 노르웨이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혼혈이고 한국 생모가 나를 길에 두고 갔다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20살 때 입양을 주선해준 의사를 찾아가 제가 9개월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냈고, 제가 아파서 굶어죽기 직전이라 어머니가 직접 병원에서 약을 타오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2016년 마침내 어머니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만 수정된 제 고아원 서류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가 건강했고 이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혼혈아를 데려오는"이라고만 설명되어 있는 남자에 의해 제 어머니로부터 "데려왔다"고 써있었습니다. DKRG의 다른 입양인들의 사례를 통해 체계적인 인종청소, 서류위조, 아동유괴 등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저는 입양인들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모든 입양인들과 특히 그들의 친생부모들을 위해 해외입양과 관련한 광범위한 조사를 원합니다. 

Pål Nikolai Hagen (한성호)는 홀트아동복지회와 베르덴스 반(노르웨이의 파트너 입양기관)을 거쳐 1973년 12월 노르웨이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첫해에 북극권 바로 남쪽에 있는 '모 이 라나(Mo i Rana)'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요즘 나는 내 두 아들에게서 매일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여하게 된 동기는 한국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을 수출함으로써 수십년동안 우리의 친부모들에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Elin Netland(김미령)은 홀트와 베르덴스 반을 통해 입양되어 1974년 3월 노르웨이로 왔습니다.

저는 52세이고, 두 명의 아이가 있으며, 노르웨이 서해안에 있는 마을인 하우게순(Haugesund)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저 자신과 개인들을 넘어선 더 큰 문제이기 때문에 가담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한 사회, 지역, 국가, 국제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공정, 불법, 인권 침해는 책임자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입양인들에게 행해진 잘못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야합니다.

Sølvi Helen Haugen (고정아)는 홀트와 베르덴 반을 통해 입양되어 1978년 10월 10일 노르웨이에 왔습니다.

저는 2005년 7월에 홀트를 찾아 제가 갖고 있는 노르웨이 입양 서류가 "다른 문서"라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홀트가 그랬습니다. 무엇보다도 홀트는 내 친부모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제가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이 문서에 접근하고 싶고, 이것이 제가 진실화해위에 제 사건을 제출한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입양 되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것이 나와 내 정체성 이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입양가정내 관계에 대한 학사학위를 이 문제에 대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논문을 통해 모든 피험자들이 입양가정 내에서 심리적, 신체적 폭력에 노출돼 있음을 밝혔고, 석사 논문을 통해 더 나아가 초국적 입양을 인권과 연결시켜 다뤘습니다. 

Tone U. Shin(김정아)는 13세 때인 1978년에 노르웨이로 입양되었습니다. 

저는 두살 때부터 안양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에 새 엄마와 아빠가 생긴다는 말을 들었고, 노르웨이 부부가 저를 데리러 왔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교복까지 받았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상태로 어떤 언어로도 소통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상태로 노르웨이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지방 관료에게 제 입양 사건에 대한 접근을 신청하고, 다른 입양 부모를 요청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양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해서, 진정한 부모를 가진 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저는 사실 입양된 것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양부모님은 입양을 두번 신청했었지만 두 번 모두 거절당했고, 그후 노르웨이 한인회(베르덴스반의 전신)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저를 노르웨이로 데려왔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입양되기까지 6년이나 걸렸습니다. 저는 저를 돈을 주고 사실상 샀다는 증거를 발견했고, 저와 비슷한 부당함을 당한 다른 입양인들이 정의와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이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Uma Feed (엄설영)은 생후 6개월이 되던 1983년에 노르웨이로 입양되었습니다. 

저는 학제간 예술가이며 초국가적 입양을 제 예술의 주제로 일해왔습니다. 제게 이것은 실존주의, 소속감,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제게 이 일은 진실을 찾는 것이며 막대한 개인적 비용이 초래되는 정부가 저지른 잘못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관행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고, 대중, 사회, 국가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69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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