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1만2000원, 월 250만 원"
노동계가 2024년도 최저임금 요구안으로 시간당 1만2000원을 제시했다. 올해 최저임금인 9만620원보다 2380원(24.7%) 인상된 금액이다. 가스·전기·택시비 등 물가가 폭등한 상황에서 실질임금은 저하 되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노동계 최저임금 요구안 발표회견'을 열고 "최악의 물가폭등 시기에 실질임금 하락을 극복하고 심화되는 양극화와 불평등체재 완화를 위해 대폭적인 최저임금 인상을 강력히 요구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들은 "물가상승률도 못 미치는 임금인상으로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있으며, 최저임금이 곧 자신의 임금이 되는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다"며 "평등과 양극화 해소, 물가 폭등 속 저임금 저소득노동자의 생계비 확보와 위축된 경기의 활성화를 위하여 2024년 적용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저임금법에 따라 지난달 31일 최저임금위에 심의를 요청했다. 최저임금위는 최저임금 수준을 의결해 심의 요청을 받은 날부터 90일 이내에 노동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장관은 매년 8월 5일까지 최저임금을 결정해 고시해야 한다.
노동계가 최저임금 최초요구안을 4월에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해 최저임금논의가 있을 당시에도 노동계는 6월에 최초요구안을 발표한 바 있다. 박희은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올해는 최저임금 요구안을 빠르게 발표하고 사회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에 대해 더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 저임금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찍 발표 했다"고 밝혔다.
영세소상공인들을 향해서는 '을들의 싸움'대신 다양한 구조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강조했다. 유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영세소상공인과 저임금노동자가 대결하는) '을들의 싸움'으로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다양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상공인들과 함께 해결할 구조적 문제로 '프랜차이즈 갑질', '임대료 폭등' 등을 들었다. 유 사무총장은 "골목상권에 대한 대기업 프랜차이즈 갑질, 임대료 등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데 그런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 소상공인들이 고용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 논쟁 대상이 된다"며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도 "자영업자들도 어려운 조건이고, 프랜차이즈 갑질과 임대료 비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나마 마른 수건처럼 쥐어짤 수 있는 부분이 저임금 노동자의 최저임금"이라며 "건물주나 프랜차이즈 가맹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계와 함께 힘을 모아서 프랜차이즈 갑질과 임대료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자영업자들이 실질적으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정부 지원의 확대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가 시급 인상을 주장한 4가지 이유
노동계는 4가지 이유를 들어 시급 1만2000원 월 환산액 250만8000원(290시간 기준)을 요구했다.
①물가 폭등 시기 최저임금 인상 현실화 반영 요구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인 5.1%를 기록했다. 유동희 한국노총 최임위 연구위원은 "실제 노동자 가구의 실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상승 폭이 커 실제 서민노동자 가구가 체감하는 물가는 이보다 훨씬 높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 상황이후 전개되는 고물가·고금리 상황에 더해 각종 공공요금까지 줄인상이 예고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달 31일 정부·여당은 당초 예정됐던 올해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보류했다. 당분간 1분기 요금이 적용될 예정이지만 향후 인상이 기정 사실화 돼있는 상황이다.
노조는 물가 폭등시기 공공요금과 식비가 '폭탄'을 맞았다고 표현하며 요금이 인상된 내역을 적시했다. 특히 "외식 품목인 갈비탕이 1만2000원을 넘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 2022년 도시가스 (38.4% 인상) (서울시 주택용 난방요금 기준)
- 전기요금 2026년까지 매년 (20% 이상 인상)
- 대중교통(지하철) 일반요금 1,250원 → 1,650 (32%인상)
- 택시비 기본요금 3,800 → 4,800원 (26%인상)
- 서울지역 갈비탕 한 그릇 12,000원
②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동자 실질임금 저하
노동계는 물가폭등현상이 지속하면서 물가인상률이 임금인상률을 뛰어넘어 노동자 실질임금 저하현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30일 노동부에서 발표한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물가상승을 고려한 올해 1월 실질임금은 전년동월대비 5.5% 하락했다. (명목임금 –0.6% , 물가상승률 5.2%)
유 연구위원은 "실질임금 저하현상은 지난해 4월부터 무려 10개월 동안 지속하며 노동자 가구 생활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며 "이마저도 비정규직보다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상용직의 임금 인상분이 견인한 효과가 반영돼 더 큰 하락 폭을 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간한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의 지난 2년간 최저임금 인상률과 물가상승률 비교결과 물가상승률이(7.7%) 최저임금 인상률(6.6%)을 앞지르며 노동자 실질임금이 저하되었다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③최저임금 노동자가구 생계비 반영
최저임금 4조 1항에 따르면 최저임금은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하여 정한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결정 기준으로 '근로자의 생계비'를 이유로 들며 가구생계비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5월 최저임금위원회가 발표한 '최저임금적용효과에 관한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평균가구원수는 2.94인이고, 소득을 목적으로 일하는 평균 가구원수는 1.94인이었다.
유 연구위원은 "최저임금을 받는 가구의 상당수는 비혼 단신 가구가 아니라 다인‧복수의 가구원이 있는 가구"라며 "최저임금제도의 근본 취지, 최저임금노동자의 가구원 수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구생계비가 최저임금 핵심 결정이 기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④해외주요국의 적극적인 임금인상 정책
유 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으로 고물가·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며, 저성장의 경기침체 현상과 소득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해외 주요국 중심으로 이러한 경기침체 현상을 극복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인 임금인상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일본의 사례를 강조하며 "총리가 직접 나서 국가의 최우선 정책 목표로 물가상승률을 뛰어넘는 임금인상을 독려하고, 일본기업들도 30년만에 4%대의 이례적인 임금인상 단행했다"고 밝혔다.
내년도 최저임금 '만원'은 넘을까?
내년도 최저임금 최초 요구안은 노·사가 생각하는 적정 최저임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최저임금 심의는 노사가 각각 제시하는 최초안의 격차를 좁혀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최저임금 심의를 진행하는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자·사용자위원과 정부가 추천하는 공익위원이 각각 9명씩 총 27명이 참여해 심의를 진행한다.
노사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면 공익위원들이 심의 촉진 구간을 제시해 그 범위 내에서 수정안 제출을 요청한다. 수정안을 놓고도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공익위원들의 단일안(최저임금 금액)을 표결에 부쳐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하게 된다.
공익위원들은 정부가 임명한다. 본래 최저임금위원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기구지만 공익위원들은 정부와 유사한 입장을 취해온 이유다. 이때문에 최저임금위원회의 제도개선 요구가 계속되어 왔다.
이날 노동계가 최저임금 최초요구안을 발표했고 경영계는 아직 최저임금 요구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사례로 볼 때 노동계가 요구한 1만 2천원 만큼의 인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초 노동자위원은 올해 최저임금 최초요구안으로 1만890원을, 사용자위원은 '동결'을 요구했다. 이에 세 차례의 수정 요구안 끝에 양자는 1만80원(노동자위원 안), 9330원(사용자위원 안)으로 간극을 줄였으나 협상에 더는 진전이 없었다.(관련기사 : 내년 최저 연봉은 2412만원…물가 오른 만큼 못 따라갔다)
결국 공익위원들은 노사 양쪽의 제시안 조정을 위해 심의촉진구간을 9410원~9860원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노동자 위원 4명은 "물가폭등 시기에 동결도 아닌 실질임금 삭감안"이라고 비판한 뒤 표결을 거부했다. 사용자 위원도 "소상공인·자영업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비판하며 기권을 던졌다.
이에 따라 올해 최저임금도 '캐스팅보트'를 쥔 공익위원의 손에 결정됐다. 심의촉진 구간 제시 후에도 노·사간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자 공익위원들은 단일안인 5.0% 인상안을 제시한 뒤 표결 절차에 들어가며 9620원으로 결정했다.
또한 올해 최저임금위원회 논의 과정에서는 '업종별 차등적용' 관련해서 격론이 일어날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부터 강조해왔던 '차등적용'은 경영계와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경영계의 최저임금 차등적용 주장은 업종과 지역에 따라 법에서 정한 최저임금보다 '더 낮게' 업종별로 임금을 차등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사용자의 지불능력에 따라 업종별로 기준보다 낮게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2017년 '차등적용' 주장을 검토했던 '최저임금 제도개선 TF'에서는 주장에 '불가' 의견을 내며 "낙인 효과 우려로 불가하다"는 다수 의견을 도출한 바 있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저임금노동자의 생활안정이라는 최저임금 제도의 취지에 비춰볼 때 사업의 종류별로 최저임금을 달리하는 것은 위헌·위법"이라며 "구분 적용이 되면 해당 업종에 대한 낙인 효과가 우려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