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승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병자호란을 이야기하지만 인조의,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명길과 김상현이 대립하던 남한산성 이야기가 아니라 성 밖의 평범한 백성들의 이야기다.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들의 서사요, 그중에서도 가장 절박했던 조선 여인들의 서사다. 낮은 자들의 처절한 삶에도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이 남의 땅에서 치욕을 견딜 용기를 주었고, 가족으로부터 내쫓길 때도 버틸 힘이 되어 주었다. 비틀어 보고 다르게 보는 게 서사의 힘이라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병자호란을 이야기해 깊은 감동을 주었다. MBC 드라마 <연인>으로 시청자를 ‘연인앓이’에 빠지게 한, 황진영 작가를 만났다.
전부터 ‘전쟁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꼭 다루고 싶었던 와중에 병자호란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최소한으로 추산해도 수만여 명이 끌려갔고, 몇몇은 목숨 걸고 탈출하여 조선에 왔으나 조선 조정에선 청나라의 압박에 돌아온 포로를 다시 잡아 보내고, 돌아온 여인들이 이혼을 당하는···참으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음에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에 마음이 갔습니다. 병자호란과 포로, 그리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 이야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죠.
우리 제작진을 만나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 참 즐거웠어요. 작은 지문 하나 놓치지 않고 살리려 애써주시는 것이 매 순간 큰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15부 이후로 촬영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최종고 대로 방송되지 못했어요. 엔딩이 계속해서 밀렸고, 예정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방송사의 책임자분들과 대화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가 되었습니다. 결국 18부 이후 이야기들을 대대적으로 축약한 수정고를 다시 냈는데요. 하지만 이나마도 모두 찍지 못해 듬성듬성 이가 빠진 채로 방송이 되어 속앓이를 심하게 했습니다. 마무리가 아쉬웠지만 방송이 끝난 후 좋은 평을 많이 들어서 얼떨떨한 기분이고요, 그럴수록 뒷부분의 이야기가 제대로 방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병자호란과 포로, 특히 힘없는 여성 포로의 속환에 대한 조선 사회의 그릇된 시선이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여인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기다려왔던 것도 같다. 드라마 <연인>은 이 문제에 비켜서지 않고 제대로 정면 승부한다.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에 대해 조정에서 이혼 여부를 놓고 논쟁하지만 ‘이런 나라도 괜찮냐’는 여주인공 길채(안은진 분)의 질문에 대한 장현(남궁민 분)의 대답은 그 모든 논쟁을 무위로 만든다.
이장현에게 중요한 것은 길채가 곤욕을 치러 몸도 마음도 괴로웠다는 현상이지,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니었어요. 이장현은 사랑한 여인에게 슬픈 일, 힘든 일이 있었다면 그저 안아주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경지였죠. 그런 감정을 받아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라는 대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장현과 길채의 대사들은 내가 길채라면, 혹은 장현이라면, 하는 식으로 감정이입을 한 후 썼고, 여러 번 고민하거나 퇴고하진 않았어요.
제가 가장 공들여 고민한 대사는 인조, 장철, 연준의 대사들이에요. 저는 인조, 장철, 연준이 장현과 길채를 둘러싼 조선의 현실이라고 설정했기에 그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철의 ‘겁에 질린 자는 잔인해진다’, 인조의 ‘너는··· 너의 치부를 절개라는 명분 뒤에 숨겼어. 아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정치는 그리하는 게야. 진짜 속내를··· 명분 뒤로 숨기는 것, 그게 정치다. 나도 그리해서 광해를 몰아냈어. 너도 그렇게 너의 집안을 지켜냈지’ 등의 대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대사로 이 대사를 꼽고 싶은데요. 양천과 한석의 대사입니다. 양천, ‘니도 저네?’ 한석, (절룩이면서도 신이 나서) ‘예, 난 오른쪽!’ 이 대사를 쓰고 나서 ‘아, 나한테 이런 대사가 나오다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칫하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남주인공이 소현세자와 밀접하게 연관되는가 하면, 여주인공이 포로로 잡혀가고 원손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그 모든 과정에서 황진영 작가는 가상의 이야기에 진짜 같은 옷을 입혔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심에 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었다.
가상의 이야기가 진짜처럼 보이도록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디테일’을 쌓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이나 청나라 오랑캐를 묘사하며 ‘무조건 나쁜 놈들이겠지’하고 두루뭉술하게 다루면 클리셰의 반복일 뿐이겠죠. 이제껏 다른 콘텐츠에서 다루지 않은 날카로운 면을 잡아내려면, 공부는 필수고 조금 다른 측면에서 사색도 해야 해요. 유길채나 이장현 같은 가상 인물이 실제처럼 보이려면 이들을 둘러싼 실존 인물들의 디테일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이들의 여정도 진짜처럼 보일 수 있죠. 이를 위해 2차 저작물이나 논문도 참고했지만, ≪조선왕조실록≫, ≪심양장계≫, ≪승정원일기≫, ≪사행일기≫ 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 결과 소현이 처음부터 애민의 마음을 가진 준비된 성군이 아니었다는 것, 인조가 불의했으나 뜻밖에 명철한 지성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 돌아온 포로 문제가 당시 조선 조정에 지대한 압박이었다는 것 등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원 사료를 보지 않고 2차 저작물만 접했다면 이런 구체적인 디테일은 찾지 못했을 거예요.
사극을 쓰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날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저 혼자 속으로 생각하던 말이라 거칠긴 하지만 ‘날리면 안 된다’는 말의 뜻은 사극은 땅에 발을 붙인 이야기와 인물로 만들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연인>에서도 ‘비혼’ 같은 요즘 단어를 사용하거나 대중가요 ‘잘못된 만남’의 가사 따위를 비틀어 사용하기도 했지만, 장현과 길채 여정의 중요한 변곡점들은 무조건 실제 조선사회의 사건과 맞물리도록 설정했어요. 길채가 심양으로 끌려가는 개연성이 무척 중요했기에 실록과 자료를 참조하여, 실제 인조가 유시문을 반포했던 상황으로 길채를 휘말려 들어가게 했고, 속환 과정 역시 실제 조선 포로의 속환 과정 자료를 참고하여 재구성했죠. 장현 신 역시 실제 조선 역관들이 심양에서 했던 일들을 조사하여 경중명을 통해 군량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 용골대에게 포로를 넘겨받으며 뇌물을 주는 모습, 포로들을 몰래 탈출시키는 모습 등 최대한 당시 사회의 모습에 근접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연인>은 ‘재미와 감동을 같이 잡았다’는 호평을 받으며 종영했다. 초반 연기논란이 일었다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배우의 연기는 날로 깊어졌고, 기획부터 온에어까지 5년간 고치고 새로 쓰며 다져온 대사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혼연일체 되어 수많은 시청자들을 ‘연인앓이’에 빠지게 했다.
처음 ‘전쟁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쓰기로 했을 때, 마지막까지 완성도 있게 꾸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는데요. 마지막 방송, 특히 확장판을 보신 후에 완성도가 있다고 평가해주셨을 때 큰 안도감이 몰려왔습니다. 한편으로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드라마를 보여드렸다는 사실이 정말 미안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선을 뜨고 싶었습니다(웃음). 아쉬운 대로 <연인> 대본집에는 촬영하지 못한 장면들을 담은 최종고를 실었고요. 재미와 감동으로 포근해졌다면 <연인>의 목적은 넘치게 달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황진영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즉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영화 비디오를 여러 개 빌려, 보고 또 보길 반복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자연스럽게 영상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후 학원에서, 영화잡지에서 일하다가 MBC에서 드라마 기획 일을 했다. 시나리오 공모전에 <정조愛사 : 경모궁의 봄노래>가 당선되면서 작품을 좋게 본 감독님의 권유로 영화 <쌍화점>에 합류했고, 첫 작품 <절정>을 쓰게 되었다.
그 이전의 삶은 많이 권태로웠고, 때때로 무기력했어요. 내 인생이 앞으로도 권태롭고 무기력할까봐 불안했고요.이야기꾼으로 생계를 꾸리게 되었을 때 이전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충만감도 함께 했습니다.내가 마음을 주고 열정을 주고, 그야말로 내걸 다 쏟아도 아깝지 않은 일이니까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거죠.
드라마 <절정>, <수백향>, <역적>, 여러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제대로 이야기꾼으로 사는 것 같았다. 그 길이 매번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고생을 한 건 이번 작품인 <연인>을 온에어 하기까지 과정이었다.
<연인>을 2019년에 시작했거든요. 편성과 캐스팅에 난항을 겪으면서 부침이 컸어요. 병자호란은 실패한 전쟁인데 이를 메인으로 가져가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있었고, 그럼에도 장현과 길채의 로맨스는 재미있으니까 로맨스를 위주로 가는 건 어떠냐 등에 이래저래 부딪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이런 스트레스를 받나’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가장 우울감이 심했을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 입에서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말이 독백처럼 나왔어요. 우울증 초기 증상이었죠. 아마 그때가 드라마 작가를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마음이 괴로울 때 제일 먼저 청소를 하고, 씻고, 산책을 다녔어요. 합정역 쪽 성당 근처 산책길인데 그 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나하고 이 산책길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고요.내가 이 길을 걸을 체력만 된다면, 이 길을 걸으면서 ‘괜찮아’하고 나를 격려해 줄 수 있다면 나는 극복할 수 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일주일에 네 번 하는 운동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연인>을 포기하지 않은 저를 칭찬해 주고 싶고, 성실하게 운동한 저 자신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드라마는 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와 연출진에 의해 드라마로 플랫폼에 온에어 되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열과 성을 다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혼자 노트북 앞에 앉아 외로운 싸움이 이뤄질 때도 그렇지만, 대본을 들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힘겹다. 편성이 힘들고, 제작이 힘들고, 2차 저작물 활동까지 수많은 고민과 선택이 뒤따른다. 결과는 좋을 때보다 좋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작가로 산다는 건 그럼에도 쓰고 싶기 때문이다. 황진영 작가에게 드라마를 쓰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가끔 스스로 묻던 화두예요.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에 ‘인간’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깊은 감정에 닿고 싶어요. 제 일상은 무척 반복적이고 단순하지만, 제가 만드는 이야기 속에서 끈끈한 우정, 애절한 사랑 같은 깊은 감정을 쓰면서 어쩌면 세상에 이런 우정과 사랑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쓰며 대리만족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속내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쑥스러워서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이야기나 대사로 푸는 듯합니다. 슬럼프가 와도 꾸준히 일상의 루틴을 반복하며 글을 씁니다. 잘 안 써질 때는 그냥 안 씁니다. 억지로 써봤자 좋은 글이 안 나오더라고요. 안 써지면 그냥 뒀다가 다음날 씁니다. 제게 두 명의 리뷰어가 있는데요, 그분들에게 리뷰를 받았는데 평이 안 좋을 때가 있어요. 괴로워서 막 따지기도 하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좀 씩씩거리다가 다시 씁니다.
드라마 <연인>을 끝내고 생에 처음 한 대학 특강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작가 지망생을 만났다는 황진영 작가. 전국에서 한파를 뚫고 특강을 들으러 온 작가 지망생들의 맑은 열정과 귀여움에 반해버렸다고. 그들이 황진영 작가에게 건넨 질문은 어쩌면 드라마를 지망하고, 간절히 바라는 많은 작가들을 가장 불안케 하고, 가장 힘들게 하는 바로 그 점이 아닐까.
드라마 작가로 입봉하기까지, 또 자리를 잡기까지 어떻게 견뎠느냐, 어떻게 버티느냐 하는 문제였어요. 제가 생계형 작가인 것도 한몫했습니다. 다른 기술이 없으니 이 일을 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죠(웃음).그리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재능을 느끼면서 내가 나태하고 게을러서 내 작은 쓸모가 빛을 발하지 못하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특히 <연인>이 여러 곡절을 겪을 때, 이걸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내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지난 수년간은 수도승처럼 일상의 루틴을 반복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상도 나름 소소한 성취감과 잔재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연인>이 끝난 후 빨리 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더라고요. 결국 재미없게 사는 데 익숙한 사람이면 작가 일에는 유리할 것 같네요. 하하.
잘 아는 분야와 잘 쓰는 분야, 그리고 쓰고 싶은 분야 중 어떤 분야를 우선해야 할지 물었을 때 황진영 작가는 ‘모두 매력적’이라 했다. 잘 아는 분야를 잘 쓰게 되겠지만, 잘 쓰고 싶은 분야를 택했을 때 글을 쓰며 만나는 문제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잘 아는 분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말도 오래 남았다. 좋아하는 걸 파고들고 집중하는 것, 그것이 돌아가지 않는 길이라는 것, 어쩌면 그런 생각이 그녀가 이제까지 좋은 드라마를 쓰기 위해 택한 삶의 태도가 아니었을까.